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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신앙 안에서 이것은 무정의 용어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만약 교인들을 모아 놓고서 예수님이 왜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이야기 해 보라고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 있게 이야기 하며, 또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과연 일치할지 그것은 잘 모르는 일이 아닐까 의혹을 재기해 보고 싶다.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개념에 있어서, 육신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개념을 확고한 기반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영이신 하나님과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라는 그 관계와, 또한 삼위일체라는 개념으로 들어갔을 때 육신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개념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부자관계(?)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관계는 머리로나 지식적으로 특히나 신학적인 이해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예수님이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는 곧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표준이기 때문이다. 즉 영이신 하나님과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것이 이해가 된다는 것은 육신을 가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알았다는 것이 된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아버지와 아들임을 이해해야 하는 유일한 이유라는 것이다.


이 블로그에서 수 없이 이야기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것. 아들은 아버지가 가진 의와 본성이 보이는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이다. 그러니까 아버지 안에 있는 본성은 눈에 보이지 않고, 아버지의 의는 보이지 않는데, 그것이 아들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버지라는 개념도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데, 아들이 태어남으로 한 남자가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와 계획을 뜻하는 로고스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계획이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가 예수님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아들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이다. 하나님의 뜻과 육신으로 나타나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성령은 모두 하나라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말로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아니 내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들은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과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언뜻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바타인가?’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말씀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행동이나 일을 따라 하신다는 것을 표현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은 어떤 관계인지를 설명하시는 말씀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보지 않고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버지의 일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아들은 그 아버지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보았다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 보는 것이 자신의 일과 의미가 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아바타>에서 주인공 ‘제이크 셀리’는 나바족의 여전사 ‘네이티리’와의 갈등 이후에 이런 말을 서로 주고받는다. “I see you.” ‘네가 보인다.’라는 말이다. 바로 여기서 말하는 것과 같은 보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보는 것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너의 속마음, 너의 종심, 너의 의도, 너의 본질이 보인다는 의미의 “본다”라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아야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가지신 의를 볼 수 있고, 그것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야 아들로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아버지의 의가 자기 안에서 의미가 있을 때 비로소 아들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들이라는 것은 죽어도 그 아버지와의 관계를 델 수 없고, 그 아버지의 본성이 자기 삶의 자국마다 묻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일을 보아야 아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버지의 본성, 아버지가 아들로서 나타내고자 하는 의가 자기 안에 있고, 그것이 보일 때 비로소 아들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들은 그 존재 자체가 아버지가 나타내고자 한 의의 본질이기에 그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일, 곧 아버지를 나타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들이 태어나기만 해도 그 아들로 인하여 누구나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아들이 살아가는 모습만 봐도 아버지가 어떤 혈통이고, 어떤 성품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아버지가 자기 육신의 혈통의 근원인 것과 같이 자기 존재의 근원이자 본질이라는 것을 아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모든 삶은 다 아버지의 일, 곧 아버지를 나타내는 것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도 그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 육신을 가진 이 인생의 의미와 삶의 본질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순종으로 받아들임)을 가진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이고, 또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유가 우리와 상관이 있는 유일한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 곧 존재의 이유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나의 육신을 가진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독생자이신 것은 바로 이 유일한 법으로 오신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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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19-29) 아들의 권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1. 2. 14:03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당시에 예수님이 계시던 이스라엘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현대사회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예전에는 종교와 정치는 하나의 개념 혹은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시대에 종교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을 공공연히 말씀하신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예수님은 어쨌든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결국 빌라도의 뜰에서 심문 받으시는 자리에서까지 그것을 말씀하심으로 죽음의 절대적인 빌미와 죄목이 되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을 주저하시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모든 이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이 맞다.


신학(신학이라는 학문의 존재 정체성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적으로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분이라고 정의들 한다. 그것은 일면 맞는 말일 수 있지만, 기본적인 생각의 안목에는 문제가 있다. 신성과 인성, 이렇게 이분법적 안목으로 본다는 것이 그것이다. 인성과 신성은 물과 기름처럼 다른 존재로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신의 의도가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난 존재, 즉 신이신 하나님의 말씀(계획과 의)이 사람의 육신이 되신 분이시다.(육신의 삶으로 표현된 분이시다.) 그것은 신학자들이 무식하게 학문적으로 표현한답시고 한 것이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몰라서 하는 소리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의 신학자, 목회자들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데칼코마니 같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이 사람(여자)을 통해서 아이를 낳은 것과 같은 개념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럴 리 없다고 믿었기에 예수님을 죽여야 했던 것이다. 몇 년 전에 나왔던 다빈치코드라는 소설도 같은 개념이고, 지금의 신학에서 주장하는 신성 + 인성이라는 예수님의 정체성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데칼코마니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방식에 관한 것, 육신에 관한 것이나, 예수님께서 보이신 능력과 기적에 관한 것으로 인함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행여 하나님께서 이 땅의 어떤 여자와의 육체적 관계로 낳은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보통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신비한 능력을 행하여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거나, 아니면 십자가에 직접 못 박혀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거나, 또 1월 한 장 어김없이 십일조를 평생 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거나, 살면서 한 번도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거나 손해를 끼친 일이 없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면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겠는가?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를 말한다. 이것은 육신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아들이 자기 평생의 사업을 이어가는 것을 바라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아들로 삼으신다는 것 역시 그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 그리고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역시 그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하셨는데, 이 형상은 image다. 즉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연상할 수 있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듯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다. 영광은 ‘나타나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인하여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인데, 그 목적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신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육신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성품 곧 이미지를 나타내시기 위함이라는 말씀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그 목적대로 사람이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요, 독생자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 아버지의 의가 아들로 나타나는 관계가 바로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관계(요 5:19)인 것이다. 아들이라는 존재가 아버지의 의를 나타낼 때 아들이 되는 것인데, 아버지의 일과 의를 알지 못하는데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들이라는 개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자기의 안목, 곧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안목으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생물학적인 아들도 아니고, 어떤 능력을 기준으로 커트라인을 정하고 그것 이상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나타내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서 육으로 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난 것이라고 하는 것이고, 혈통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아들에 관한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를 믿는 이는 영생을 얻은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듣고서 자신도 그 법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으면 영생이 이미 자신의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우리나라에는 없는 완료형 시제를 사용했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예수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예수님을 보내신 이를 믿는 이는 영생을 얻은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지금도 예수님이 보내신 이를 통하여 예수님이 계신 것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은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셨고, 그 말씀이 오늘에 이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전해진 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그리스도의 정체성이요 성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나타냄으로 그것을 보는 사람이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 보내신 이를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이기에 오늘 날 우리가 누군가에게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직임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a christ)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의 본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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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라고 하면 얍삽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야곱은 세상적인 안목으로 볼 때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혀 보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할 것은 야곱의 본성이 어떠하든 그런 본성을 야곱이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비단 야곱 뿐 아니라 모든 인생의 본성이 그렇다. 그 누구도 자신의 생김새나 본성을 선택한 사람은 없다.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야곱은 자신이 ‘무엇을 의로운 것으로 여길 것인가?’에 있어 하나님의 의, 자신의 조부로부터 자신에게까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의와 의미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는 그의 그런 의지와 생각을 표현하려고 하니 자신이 가진 본성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야곱을 볼 때 중요한 것은 야곱이 보여준 모습이 아니라, “왜 그랬는가?”하는 것 그것이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쫓겨나듯 도망가고, 그 길에 광야에서 돌베개 베고 자고, 또 아내를 얻으려다 외삼촌에게 속임을 당하고, 그렇게 14년을 고생하는 그런 삶을 왜 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야곱이 그 조부 아브라함과 아비 이삭의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명분이 되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생각했고, 그 하나님의 의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자기 본성, 곧 일반적으로 얍삽하게 느껴지는 그 본성으로 그것이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고자한 야곱의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가는 것도 야곱이 잘못해서라는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목적으로 삼은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삶이 야곱은 야곱스럽게 나타난 것이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야곱의 일을 보고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고자 하는 사람의 삶은 또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본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야곱이든 누구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 모든 일과 심지어 사물까지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을 보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 그것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정체성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 야곱의 이야기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야곱의 이야기를 읽고 듣는 사람 역시 야곱의 여정을 갈 것이고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야곱의 여정을 야곱이 육신의 일에 대한 잘못으로 도망을 가는 것으로 보는 사람은 성경이 육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 손으로 만져지는 이 세상이 본질이라는 안목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야곱의 일은 오늘 나의 이야기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는 것이나 라반의 집에서 고생하는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지, 사람이 잘못하면 고생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안목 없이 성경을 보는 것은 예수님이 받으신 세 번째 시험을 이기지 못한 사람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야곱은 앞으로도 많은 일들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마지막은 애굽이라는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나왔다. 마치 예수님께서 애굽과 같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데,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 땅위의 하나님의 나라인 하나님의 교회가 나온 것과 같다. 아니 그것은 같은 이야기다.


그러면 야곱이 지금 라반의 집으로 가는 것은 예수님의 삶과는 어떤 연관이 있느냐? 예수님의 어떤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고,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지금 야곱의 여정은 어떻게 보면 돌아가는 여정이다. 왔던 곳으로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신앙 안에서 보면 신앙이 떠나온 자리로 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예수님께서 결국은 모든 사람의 신앙이 이르려야 하는 하늘에서 신앙의 출발점이고 여정인 이 땅으로 오신 것과 비슷하다. 왜 그렇고 있는가? 그것은 야곱이 하나님의 의를 사모했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여기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의 좌표가 앞으로만 가는 것이 능사라고 생각한다. 더 좋은 신앙, 더 놀랍고 신비한 능력을 가지는 것과 같은 것을 신앙의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이 있다. <“왜 좋은 신앙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신앙이 점점 좋아진다는 그 현상이 하나님께서 한 개인의 신앙에서 바라시는 최종적인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안식하실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백번 물려서 그것이 사실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치자, 그럼 얼마나 자라고,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나로 인하여는 더 이상 일하시지 않고 안식하시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 기준이나 등급이나 좌표가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이다. 그 답은 누구도 모른다. 항상 옥상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쯤 되면 그런 가지관이 바로 피라미드의 가치관이고,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것을 눈치 채야 한다. 즉 신앙이 세상의 법과 결탁한 것이 그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안 되면 안타깝지만 신앙이 어려워진다. 바로 그렇게 성경을 보고 신앙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외식하는 것이다. 심청전을 읽고 바다에 빠져야 효도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형식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좀 전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이 좋아지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 신앙으로 사람을 얻는 것에 있다. 그러니까 좋은 신앙은 신앙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신앙을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야곱이 아내를 얻기 위해 수고하여 아들을 얻고 나라가 되는 것과 같이 사람을 얻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 공동체가 이루고 그 일원이 되고, 또 그 공동체의 모습이 또 사람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많은 교회들이 착각을 하고, 나름 신앙에 대하여 자신감(?) 아니 계시가 열렸다고 스스로 여기며, 다른 사람의 신앙적 견해에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의를 제기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허점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 좋은 안목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 이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을 것이 아니면 내어 놓지도 말아야 할 것이 어쩌면 신앙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또 어떻게 얻는가? 서울역에서 전도하는 사람을 보고서 교회에 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없지는 않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모습을 보고 교회를 멀리하고, 다니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보다는 적을 것이다. 그것은 삼척동자도 공감하는 일이다. 왜 그럴까? 도둑질 하라는 것도 아니고, 예수 믿어서 천국에 가라는데, 그 간절함이 왜 사람을 얻지 못하느냐 그것이다.


그것은 바로 야곱과 같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야곱이 이 죽을 생고생을 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모했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형을 분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야곱은 하나님의 의에 있어 외삼촌 라반보다, 형 에서보다, 또 자신이 얻은 아내들 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고,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선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그 의를 자랑한 것이 아니라, 그 의로 인하여 종 같은 삶을 살았다. 


왜? 아내를 얻기 위해서, 아들을 얻기 위해서. 그러니까 자신을 보고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사람을 얻기 위하여 자신이 가진 하나님의 의를 섬기는 것에 쓴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야곱의 의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 생명의 본성이 그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피할 수 있다면 잔을 물려달라고 기도하셨지만 그것이 자기 생명의 본성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야곱도 그렇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고 생명이다.


그런데 서울역에서 전도한다고 시끄럽게 하는 사람은 자기 편한 방식으로 한다. 물론 그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한 가지 분명하나 것은 사람을 섬기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섬기려면 섬기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 그렇게 했을 뿐인데 그 사람이 자신을 섬기는 이의 삶을 보고, 오히려 자기를 섬기는 이와 같이 살고 싶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이 땅에 오심을 섬기러 오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신앙으로 군림하는 것이다. 신앙으로 계급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의 신앙 없음을 심판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교회와 이단들의 모습인 것이다. 장로는 남을 섬기는 것을 늙도록 한 사람이 장로지 돈이라는 사회적 역량이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고서 강단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도적질이고, 강도다. 신앙의 계시가 밝다고 신앙 없는 이들에게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느냐?’. ‘그래서 교회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잘~~하는 도다!”라고 책망 받을 일이 바로 그것이다. 신앙이 없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이건 생명이 다른 것이다.


야곱의 모습은 그것과 반대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더 장성하고 더 밝아지면 더 섬기는 것이 그것이다. 목사라고 대우 받고 밥상을 따로 받고 있는가? 그럼 당신은 이미 글렀다. 교회에서 다른 사람의 신앙 없음을 지적질 하고 있는가? 이미 당신은 세상의 것을 신앙에 접목한 사마리아인일 뿐이다. 


진정한 신앙, 장성한 신앙은 야곱이 아내를 얻기 위하여 수고한 것 같이, 예수님께서 그 모든 기적을 행하는 능력도 하늘의 영광도 버리고 사람을 얻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수고하는 삶을 살아서, 그 모습을 보는 이가 스스로 자신의 신앙 없음을 고백하고, 또 가서 그것을 보여준 사람과 같이, 예수님과 같이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살게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야곱이 지금 그 하나님의 나라의 조상이 되는 여정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야곱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는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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