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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예수 그리스도와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사람들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은 무엇을 본질로 보느냐의 문제와 같다. 예수님을 보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을 그렇게 물고 늘어졌다. 천한 동네에서 어떻게 그리스도가 나오겠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눈에 예수님의 출신은 어디까지나 나사렛이었다. 반면에 예수님의 끊임없는 말씀은 그리스도(the Christ)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전하셨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도 죽이고 싶을 지경인데, 더욱이 그것이 예수님 스스로 말씀을 하시니 한마디로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고 하는 것도 죽을 죄지만, 그것을 스스로 말하고 증거하는 것은 가관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이 보낸 그리스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유대인들은 “스스로 증거하니 그 증거는 효력이 없다.”라는 다툼에 이어서 갑자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가 넘쳐 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은 난데없기 짝이 없는 말씀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러셨을까? (성경은 어쩌면 이런 것이 궁금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속에서 생수가 넘쳐 난다는 것은 앞에서 포스팅 한 것과 같이 자기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표현되면 자신이 그 생명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런 생명과 삶은 자기 안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그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뿐 아니라, 그것이 늘 안에서 넘쳐나며, 그 생명이 자기 것이 되기를 노력하지 않는다. 미운 오리 새끼가 하늘을 나는 백조를 보고는 자신도 날아가는 그 순간 백조의 생명이 자기 안에서 넘쳐 난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으면 생수가 그 안에서 넘쳐 난다는 것은 생수라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 정체성을 말씀하심이고, 믿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것이기에 예수님의 그 정체성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임을 성령의 능력을 알게 되어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 사람을 말한다. 즉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과 말씀이 바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요,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생수와 같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 본성이 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아는 것, 그것이 생명이니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곧 하나님께서 보실 때 창조의 목적 안에서 살아 있다고 하실 수 있는 생명에 순종된 사람, 곧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라는 것이 넘쳐나야 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 말씀은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는 것이라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믿음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예수님께서 인정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쳐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증거가 거짓이겠는가? 그것은 그럴 수 없다. 사람이 어디 가서 사람의 자리와 동물의 공간이 있으면 당연히 사람의 자리에 앉는다.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다. 남자는 남탕에 가고, 자신의 근육을 드러내기를 즐기며, 여자는 그 몸매를 과시하고 아름다움을 늘 표현한다. 스스로 남자이고 여자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생명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 참되지 않는 세계는 생명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세상의 법정에서 자신의 변론이 아니라 증거나 증인이 있어야 하는 것은 그 세계가 생명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듯,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스스로 그 생명을 증거하고, 예수님께서 어디서 왔는지 스스로 말씀하시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가치관과 안목이 생명의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표현한다. 오히려 생명이 자기 생명을 증거함은 다른 이의 증거가 해가 되면 되었지 도움조차 되지도 않는다. 이것이 생명의 세계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 적어도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다 생명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 안에 생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고 넘쳐나게 말할 수 없다면 그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자신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될게 아니라면 뭐한다고 예수 믿느라 남들 하는 것 하지 못하며 사는가? 그건 바보일 뿐이다.


이것은 사람이 “내가 예수(a christ)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럴 수 없다면 왜 예수 믿는가? 그게 아니면 그냥 오늘 성경을 덮어야 한다. “내가 예수다.” 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내가 가졌다는 의미다. 우리가 먹는 사과 한 알은 the Apple이라는 생명이 표현된 것이고, 그 중의 하나며, 사과의 DNA를 가졌기에 사과이듯, 예수님 the Christ께서 보이신 그리스도(the Christ)의 생명이 내 삶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생명이 되었다면 당연히 나도 예수(a christ)인 것인데, 이것에 대하여 확신할 수 없다면 성경 덮어야 한다. (여기서 the와 a를 구분하지 못하면 이단이 되거나,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된다.)


모든 생명은 자신의 근원(어디서 왔는지)과 정체성을 스스로 증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스럽다는 말을 생각해 보라. 당연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생명이 생명을 표현하는 세계를 자연이라 말하기에 뭔가 당연하고 걸림이 없는 것을 자연스럽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 참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표현하시고 드러내심이 참되지 않다고 하는 것이나, 오늘날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나 다 생명을 모르는 세계, 곧 하나님 앞에서 죽은 존재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안목일 뿐이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실 때 참 생명이시기에 그 생명을 스스로 증거하심과 같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생수가 우리 안에서 넘치는 것이다. 적어도 예수를 믿는다면,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보고 느끼기에, 자신이 어떻게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이론과 방법으로 그것을 흠집 내려 해도 안 되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즉 자기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부인하려 해도 도무지 부인할 방법이 없는 정도는 되어야 예수 믿는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생수가 속에서 넘쳐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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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또 유대인들과 변론하신 초막적이라는 명절 끝 날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리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은 어쩌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자기 믿음이 진정한 것인지를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아주 분명한 기준일 수 있다. 스스로에게 물어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는가?’에 확신을 가지고 답을 할 수 없다면, 미안하지만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히 <믿으면> 그렇게 된다고 하셨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말씀에 토를 단다. 자기의 형편, 자기가 가진 기준으로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 방안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타협을 한다. 예를 들면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게 되어 간다.’는 식이나, 아니면 ‘그러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런 말은 주로 목사들이 한다.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자신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교회 사람들에게 되지도 않는 일을 설교하느냐?’는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런 말씀은 분명한 것이다. 자기 심령 안에서 생수 곧 자신의 생명을 먹여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예수 믿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 말씀에 어디 조건이 있는가? 조건은 단 하나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것뿐이다.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치듯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서 자신이 그것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빨리 인정해야 한다. 인정이라도 빨라야 다음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다른 말씀들은 그렇게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악을 쓰면서 본질을 망각하고 지키려 하면서, 이런 말씀은 거꾸로 왜 의역을 하고 말씀 그대로 보지 않는지 그것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 말씀도 성경 그대로 사람이 뱃속에서 어떤 물을 토하여 내듯 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내려 한다면 그래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이 말씀은 생수, 곧 생명을 살리는 물, 곧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심령 안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씀이다. 누군가의 말씀을 들으면 생수를 마신 것 같아 지는 것도 좋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자기 안에서 그런 말씀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 밖의 어떤 사람의 말씀이 생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사람이 나의 말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는 생명이 살 수 있는 물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의 삶을 볼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것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여인에게도 비슷하나 말씀을 하셨다. 그곳에서는 ‘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누군지 아는 것,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누구라도 그 심령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는 생명이 마실 수 있는 것이 나온다는 것, 즉 하나님의 생명이 표현되는 자기 삶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자신도 살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는 것이다.


신앙은 분명히 간절한 것이지만, 죽을 때까지 간절한 것이 아니다. 간절함이란,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 간절한 것이고, 있어야 할 것이 있으면 절대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생명이 되지 않은 시절에는 그것이 자기 생명이 되기를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간절함으로 구하여야 하나, 그 생명이 자신의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이 아니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절대적인 것이 되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그러므로 삶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는데도 아직도 하나님께 간절함으로 매달리고 있다면, 어쩌면 안타까운 일일 수 있다. 물론 그 사람의 분량이 그럴 수 있기에 그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교회에 다녔는데, 한 번도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치는 그런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고,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체 그것을 바라는 간절함으로만 다녔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지 암울하다.


신앙이라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의 종점이 아니라 그것이 시작인 것이다. 구원이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 구원은 신앙의 시작인 것이다. 속에서 생수가 넘치는 것 역시 신앙의 시작이다. 이것이 끝이나 경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수는 생명이 마시는 물이니 당연히 먼저 생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생명도 없는데 생수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냥 공업용수나 있으면 되지.


사람이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생수가 넘쳐나는 것이다. 그 넘쳐남의 분량은 믿음의 분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그저 울고 자기만 한다고 짐승이라 하는 이가 없듯이, 그리스도의 생명 역시 같다. 생명으로 났다면 그 생명은 언제나 생명이니 것이다. 그 생명이 자라면서 그 자람에 따라 그 생명의 본연의 능력과 삶을 보이듯, 신앙도 그런 것이다. 생명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생명이 되는 것, 그 구원이 바로 신앙적인 삶의 시작인 것이다.


그 시작이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자기 안에서 생수를 마실 생명이 없거나, 스스로 생명이라 여기긴 하나 밖에서 생수를 듣지 않으면 살 수 없다면 미안하지만 스스로 생명이라 여기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결국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자신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이 표현해내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도 자신도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삶이 되는 것이 바로 생수가 넘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지 않다면,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아직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지 않았다는 것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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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처럼 되려는 것.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2. 3. 11:37 Writer : 김홍덕

성경이 말하는 사람의 타락은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을 가지고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 명제만 놓고 본다면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과 같다는 것이다. 먹었다는 것은 자기 몸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고, 또 반대로 생각하면 몸이 원하는 것을 먹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은 선악과를 먹고 싶게 하고, 선악과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명제,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죄인이라는 이 명제는 성경의 근간이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기본 골격이다. 이 타락과 죄가 없었다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신앙이라는 것이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하나님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벌거벗고 놀기만 하면 되었을 테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인류의 시작인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었고, 모든 인류가 그 그늘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에 나오는 사람의 첫 사건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그렇다 치고, 오늘 나는 선악과가 복숭아인지, 사과인지, 아니면 이제껏 먹어보지 못한 신비한 열매인지도 모를뿐더러, 도무지 누가 선악과라고 하는 나무의 열매를 소개시켜 준적도 없기에 먹어본 적이 없는 나는 왜 아담과 함께 도매 급으로 죄인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억울함이다.


성경을 오늘 우리가 읽는다는 것은 분명히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상관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다른 말씀을 주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안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의 마음과 같은 것이 있고, 또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모습과 같은 것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말씀을 읽고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또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과 사투를 벌이듯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모습 중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인지, 우리의 어떤 모습이 선악과를 먹은 모습과 같은 것이지를 안다면, 선악과는 아담이 먹은 것이 아니라 내가 먹은 것이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 역시 내 마음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나님은 신이시다. 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신이시다. 창조는 분명 무(無)에서 유(有)로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은 단순히 산과 바다, 또 태양과 지구를 만들고, 안드로메다가 되었든 무엇이든 우주와 같은 물리학적, 형이하학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생각과 철학, 그리고 법칙과 의, 이 모든 것도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 보다 중요할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지배한다는 것은 신앙을 떠나 사람들도 다 아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므로 사람이 생각하는 것, 사람들의 관념 속에 있는 의(義)라는 개념과 같은 것도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 ‘의’를 가지고 있고, 또한 어떤 의를 자기 삶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빈 그릇과 같다고 하고, 때로 ‘사람 안에 든 것이 많아야 한다.’, ‘가슴을 적신다.’와 같은 말들을 공감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의, 자신이 어디선가 자기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 ‘의(義)’가 구현되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늘 어떤 일에 있어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가 한 명은 삶은 감자를 두고 설탕에 찍어 먹어야 한다고 하고 한 명은 소금에 찍어 먹어야 한다고 다투다가 이혼했다고도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감자를 뭐에 찍어 먹는 것이 뭐라고 그러나 싶겠지만, 그 상황은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 앞에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하고 관철시키는 하나의 모습일 뿐, 모든 사람은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모습은 작게는 문서를 타이핑할 때 왼쪽에서 간격을 얼마를 띄어야 하는지를 주장하는 것에서부터 나라와 나라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결국은 단 하나 ‘나의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는 그 하나일 뿐이다. 하나의 사안에 생각이 같은 이들이 모여 세력이 되면 세력의 일이 될 뿐. 


사람이 가진 이 하나의 생각,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라는 것, ‘이렇게 되어야 세상이 바로 된 것이다.’는 그 생각을 관철시키려는 시도, 이것이 결국 세상의 모든 갈등의 원인이고 뿌리다. 여기에 선악과가 있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한다는 것은, 작은 일 하나에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세상이 되어야 하듯 자신이 주관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고, 그 자기의 생각을 기준에 부합하면 선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모습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람의 뜻대로 되어야 할 것이 하나도 없다. 사람이 만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사람이 창조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이미 창조된 것의 응용에 불과한 것이다. 진정한 창조라면, 우주 공간에 어떤 것을 만들어 와야 하는 것이다. input 없는 output이라 할까?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존재고 능력도 없으면서 세상의 일이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인데, 이 세상의 일을 자기 맘대로 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신앙은 순종이 제일이라고 한다.)


이렇듯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관철시키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기의 이익>이다. ‘내가 유익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표현되면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빨래를 걷어온 아내를 돕지 않고 누워있는 남편의 모습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이래도 된다.’는 생각이 없으면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에게 가장 유익하고, 자신에게 가장 편하게 되는 것을 바라고 그렇게 관철 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고, 자기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다.


많은 열심 있는 신앙인들이 외국에 가서, 험한 곳에 가서 주님의 일을 하겠노라 외치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어야 하는 곳은 바로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작아 보이는 그 세상, 하지만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자신이 접하고 있는 그 접점에서 자신의 의, 자기가 유익되고 편하게 되는 것을 관철 시키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일이고, 순종이며, 그리스도의 본성인 것이다.


이 블로그에 그렇게 반복적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있으면 성경의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아니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때로는 어떤 사람들이 ‘정말로 그렇게 생명만 있으면 되냐?’고 궁금해서, 또는 부인하듯 질문도 해 온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데 사람의 유전자, 곧 사람의 생명이 있으면 되지 뭐가 필요하단 말인가? 이 단순한 것 하나를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위하여 죽을 것이며, 세상을 구할 것인가? 자기 앞에 펼쳐진 작은 세상의 일에도 순종 못하는데.


신앙인들이 신앙이 좋아지면 망각하는 것이 있는데, 신앙이 얼마든지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가진 신앙대로 세상이 되어야, 또 교회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것이 정말로 신앙이고 선이라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게 하려는 유대인들을 다 잡아다가 족쳤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믿음대로 되어야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실제로 베드로가 그랬지 않는가?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이러면 하나님의 일이 되겠느냐?”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 특히나 열심 있고, 계시가 밝다는 사람들이 이 오류에 매몰되어 있다. 자기가 생각하는 신앙의 방향대로 하지 않으면 죄라고 강요하는 것, 그 왜곡된 신앙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심화되면 이단이 되는데, 그렇다고 기성교회가 자유로운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이 강요하는 신앙은 사회적인 관념과 적당히 타협한 사마리아요, 세상의 법과 결탁한 이방 신앙일 뿐이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교회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강요를 견디지 못해서 가나안 교인이 되는지 우리는 보고 있다. 돈을 많이 내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면 가난한 이들이 견딜 수 없고, 교회에 봉사를 신앙이라 강조하면 바쁜 사람이 견딜 수 없으며, 노방 전도를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 한다면 숫기 없는 사람에게 힘들고, 금식과 철야가 좋은 신앙이라 하면 허약한 사람에게 넘사벽이 되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자기가 가진 육신의 역량에 따라 표현되고 감당하는 것이지, 그것이 신앙의 기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육신과 삶의 한계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부인한다면 또 모르지만.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은 아주 작은 것이다. 눈앞에 마주친 어떤 일과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대로 하자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눈앞에 그 일을 펼치시고, 사람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달리 자기가 그 일의 주관자가 되고, 그 사람을 주관하려는 하나님이 되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순종하여 지신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다. 즉 삶의 순간순간 사람은 하나님과 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 그것이 신앙이다. 삶의 현장에서 내 앞에 조성된 일들을 볼 때, ‘이래서야 되겠는가?’하는 순간 자신이 의로워지는 것 같지만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잘못하시는 것이고, 저 인간이 왜 저러냐고 하는 것 역시 하나님이 잘못하셨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잘못된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사람이 그러고 있다는 것,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딱 그 하나의 생각이 세상의 모든 죄와 분쟁과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서로가 옳다 주장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참 신앙은 세상의 일에 자신이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법을 좇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아내가 빨래를 걷어 왔을 때, ‘나는 피곤하니 쉬어야겠다.’가 아니라,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신앙이다. 행여 아내가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신앙이 없다고 생각하기를 ‘신앙이 없으면 몸이라도 굴려야지!’한다면 단언컨대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다.(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딴 것이 아니라. 그때 그냥 빨래를 개는 것, 그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다면 목숨은커녕 자기 자신을 구원도 못할 것이다.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데 어떻게 구원이 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삶,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이들이 어느 사회에서 비난을 받고, 어떤 나라에서 문제를 일으키며, 어떤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겠는가? 그리고 이쯤 되면 생각해 보라. 그렇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 자기 앞에 펼쳐진 일과 만나는 사람에게 자기 생각이 아니라, 펼쳐진 일에 순종하고 그 사람의 의에 따르는 그 사람이 셀 수 없는 신앙인들이 목이 터져야 부르짖기도 하면서 다짐하는 성경대로 사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사 그러려 해도 그럴 수 없다. 그것이 생명이다. 그것이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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