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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축복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2. 25. 13:14 Writer : 김홍덕

‘야곱의 축복’이라는 CCM이 있다. 내용은 아주 긍정적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야곱이 축복을 받는 과정은 한마디로 야비함 그 자체이다. 형을 속이는 것도 모자라서 아버지까지 속여서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은 일면 에서가 그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탓이기도 하니 공과를 따지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을 한 마디로 줄인다면, 그것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또 다른 신을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청렴을 신앙의 절대적인 요소로 삼는다는 것은 고상하게 보이지만 결국 육신의 형편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처한 위치가 반대이긴 하지만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돈을 가지지 않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 하는 것이나, 부자가 되는 것이 복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나 돈이 척도인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또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는 목회자(도무지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모르겠지만)도 마찬가지다. 그 가르침이 세상의 돈이나 명예와 같은 것에 관한 것이라면 같은 궤도에 있는 것이다. 더욱이 수도하는 것에 있어서 돈이나 욕심을 절제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치는 것도 역시 같은 것이다. 모든 기준이 다 보이는 것을 본질로 하는 안목과 가치관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지 않는 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하는 이와, 그것이 많아지면 축복이라 여기는 이들 간의 어리석은 의견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삭이 야곱에게 한 축복의 요지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기 원한다.>는 것과 <만민이 너를 섬기며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잘 보면 보는 관점에 따라 부자가 되게 하시고, 또 큰 명예를 얻는 것이라고 보일 수도 있다. 당시는 농경 및 유목 시대니 곡식과 포도가 잘 되는 것이 그렇고, 모든 사람이 섬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그렇다.


하지만 야곱의 실제 삶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양과 소가 많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에서가 더 부요했고,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서 수고하여 얻은 것도 형에게 다 보내기도 했고, 또 곡식이 풍성하길 바란 축복을 받은 이가 말년에 가뭄이 들어 먹을 것이 없게 되고 그 아들의 은혜를 입긴 했지만 애굽 왕에게 경배하고 애굽에 빌붙어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된다. 한 마디로 이삭이 한 축복, 형에게 목숨을 빼앗길 위험을 무릅쓰고 받은 축복은 어디로 갔는지, 정말 그 축복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것을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곡식과 포도주>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성찬이다. 곡식은 떡이고요 빵이며, 포도주 역시 성찬의 그 포도주기 때문이다.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의 소산인 곡식과 포도주.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 내어 놓는 곡식과 포도주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야곱의 축복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체성의 풍성함 그것이 바로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내용인 것이다. 곡식과 포도주가 그렇다면 모든 만민이 야곱을 섬길 것이라는 것 역시 이 땅의 사람들이 가치롭게 여기는 돈과 명예와 같은 것에 관함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하여 모든 사람이 야곱을 섬길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야곱은 그 축복,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축복을 받기 위하여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축복을 받기 위하여 자신이 한 모든 일에 대하여 자신이 감당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축복을 얻기 위하여 행한 눈에 보이는 세계의 모든 야비함에 대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가 그에게 가하는 모든 일을 다 감당했다는 것이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14년간 고생한 것도 그렇고, 이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형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도 그렇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추구함에 따르는 희생에 대하여 감수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것을 따지는 이들에게 ‘신앙 없다.’고 심판하고, 외면하고 가족이라도 등지는 그런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런 모습은 적어도 야곱의 축복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의 축복’이라는 CCM을 부르는 그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야곱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야비하고 형을 속였던 모든 것에 대하여 그 삶으로 감당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하면서, 하나 밖에 없는 육신을 신앙생활에, 교회 생활에 투자함으로 생기는 육신의 삶의 부담은 외면하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복권 당첨시켜주듯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젊은 날 어떤 학생 하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정말로 수고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착했지만 신앙적으로 야곱과 같은 야비함과 같은 것이 있었다. 그의 신앙관은 남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거저 얹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라는 식에 가까웠다. 그런 그의 모습을 모든 교인들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찬양하기만 했다. 신앙이란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거저먹는 것과 같은 것에 있어서 그에 합당한 수고를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야곱의 모습인 것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인데, 그것을 외면하고 자신의 그런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모습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의 감동을 얻지 못하는 본 모습이다


야곱의 축복은 기본적으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떡과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가 풍성해지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풍성해 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하여 표현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 있어서 장자(곧 그리스도의 정체성)의 명분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보이시기 위하여 그 육신을 십자가에 허락하심과 같이 야곱도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하여 보이신 하나님의 의에 축복을 받기 위하여 자신이 취한 모든 것에 관하여 자신의 육신의 수고를 감당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심문 받으실 때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하신 말로 죽으심을 감당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야곱을 축복을 찬양하고 그것을 자신의 축복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시험을 이기심과 같이 야곱의 축복이 눈에 보이는 것에 관함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또한 야곱의 축복을 얻기 위하여 자신이 취한 모든 일에 대하여 값을 요구하는 세상의 모든 요구에 자신이 가진 눈에 보이는 것, 곧 육신의 삶으로 그것을 감당해 내어야 한다. 그것이 십자가고 그것이 야곱의 축복이다. 육신은 그러라고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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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가의 아름다움을 탐한 아비멜렉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2. 24. 15:26 Writer : 김홍덕

이삭의 아비인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 한 전력이 있는데, 이것도 유전인지 그 아들 이삭도 아비 아브라함과 똑같이 아내인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여서 아비멜렉이라는 왕이 취할 뻔 했는데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경고하심으로 위기(?)에서 벗어나는 일이 있게 된다.


아브라함의 때와 다르다면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을 때는 사라에게 아들이 없었지만, 리브가는 이미 쌍둥이 아들인 에서와 야곱이 있는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아비멜렉왕은 아브라함 때와 같은 왕이 아니라, 그 지역(블레셋)의 왕에 대한 호칭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애굽의 모든 왕을 ‘바로’라고 하는 것과 같다.)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또 야곱으로 그리고 12아들이 나오고 12지파가 되어 애굽에서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나라가 되는 여정은 우리의 신앙 여정이라고 했다. 한 사람이 바벨탑과 같이 인간의 공적을 쌓아서 하늘에 이르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땅, 곧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이끄시는 여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에 이른 사람들의 신앙, 곧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아들로 나타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 안에서는 거듭난 생명이 잉태되는 것이고, 또 밖으로 보면 거듭난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어 또 하나의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이 또한 아들을 얻는 것인데, 그것을 이삭이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야곱을 거쳐서 나라가 되는 것은 그런 신앙이 교회의 신앙이 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 백성의 나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고, 이 땅위 위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법이 다스려지는 사람들의 모임이니, 하나님의 의와 법과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바로 이 땅위 의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통하여 표현하신 것이다.


그런 여정에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서, 야곱에게서, 그리고 야곱의 12 아들에게서 나오는 본성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여정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교회로, 공동체로 살아가는 여정에서 우리 안에서 나오는 사람의 본성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그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세상의 임금들이 아내를 탐내게 한 것도 같이 반복되는 모양이지만 신앙의 여정에서 겉모양이 비슷하게 보이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이삭을 낳기 전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아름다움은 한 사람의 신앙 여정에서 거듭난 생명이 되기 전에 그 사람이 가진 삶의 형식을 말한다면,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사람들의 삶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유대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바울의 능력을 흉내 내다가 오히려 악귀에 당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아브라함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와 이삭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배필이다. 그러니까 사라와 리브가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존재들이지, 이방 왕의 의를 아들로 내는 것을 위한 여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라와 리브가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삶의 모양이 나타내 보이는 아름다움과 영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방의 왕들이 그것을 가지려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때도 그렇고, 이삭의 때도 그랬지만 생각해보면 아내를 주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는 두 부자의 모습을 보면 의당 ‘그게 남자야?’할 법 한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을 책망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브라함과 이삭의 아내를 취하려 한 왕들을 혼내시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그 의를 나타내시는 삶의 형식도 귀하게 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일 중에서도 아브라함이 처음에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갈 때의 모습을 본다면, 아브라함도 아브라함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생산해야 하는 아내를 가벼이 생각했다는 것에서,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가 삶의 모양을 쉽게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기도 해야 한다. 이러한 것은 초대 교회 시대의 영지주의와 상관이 있다. 아내를 쉽게 생각한다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이 삶의 모양을 가볍게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내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의 모습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보는 이방인들의 눈에 그 아내들이 심히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은 아내도 미인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아름답게 나타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교회에 다닌다면서 저런 짓이나 하다니?’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이 다르기에 신앙의 모든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다 공감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것은 일면 맞는 말이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 중에서 세상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수동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나서서라도 돕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게 없다. 십자가가 그것이다.


십자가가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멸망의 것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되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법,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관점의 차이로 이해할 수 없을 수는 있어도,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 인하여 손해를 봤다고 여길만한 짓을 한다면, 적어도 그 모습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시대에 이방인들이 본 사라와 리브가의 아름다움은 아닌 것이다.


이 중에서 리브가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미 아들을 얻은 다음에 이방인들이 그 아름다움을 탐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깨달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삶의 아름다움을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 곧 사람 지으신 목적을 깨닫지 못한 이들이 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에 대하여 아비멜렉이 말하기를 ‘누구든지 이삭이나 그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겠다.’고 명령한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이들이 생명은 없으면서 삶의 모양만 탐하는 것은 죽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인데, 정작 하나님의 생명은 없으면서 성경을 몸으로 지켜내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죽은 생명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아름다움을 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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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은 언제인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5. 12. 24. 14:11 Writer : 김홍덕

12월 25일 크리스마스다. 'Christmas'라는 말은 <예수 축제>라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어원의 의미와 전혀 상관이 없는 성탄절, 크리스마스이다. 그것은 비단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교회도 크게 다를 것 없다. 성탄 헌금을 하고 그 내역을 주보나 그와 비슷하게 공개하는 것과 같은 것도 그렇고, 많은 이들이 12월 25일을 두고 <예수님이 오신 날>이라는 대명사로 보고 있다는 것이 그렇다. 그것은 마치 구원파가 '네가 구원 받은 날이 언제인가?' 묻는 것과 같다. 구원의 날이 달력에 있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이나, 달력의 어떤 날이 예수님이 오신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또 어떤 이들은 12월 25일은 태양신을 섬기는 기념일인데 예수 탄생일이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성경에 예수님이 나시던 상황을 보면서 별이 있었다는 것이나, 유월절의 절기와 같은 것을 기준으로 예수님이 나신 때가 봄일 것이라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성탄절에 교회에 가면 한 번쯤은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런 이야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의 시간과 시점을 크로노스적인 관점으로 보기 때문이다. 신앙의 어떤 절기나 예수님이 오시는 것과 같은 신앙적 사건이 자신의 인생 안에 있는 어떤 의미 있는 시점이 이나 상황의 전환이 아니라 객관적 시간의 개념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에 대한 그런 객관적인 시각, 곧 크로노스적인 관점의 시간 개념으로 성탄절을 보는 것이나, 구원파가 구원의 날을 달력의 날로 말해보라고 하는 것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사실이니까 그것을 달력으로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날을 정확히 알아서 매년 기념하는 것이냐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신 것이 자신과 상관이 없는데 그것을 기념하는 것은 한국 사람이 미국 독립기념일을 즐거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신 것이 자신과 상관이 있다는 것은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잉태되고 자라서 거듭난 생명이 되는 과정에 들어선 사람이 가지는 의미를 만한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가 없다면 성탄절은 교회 아니라 하늘 가까운 우주에서 잔치를 연다해도 그냥 젊은이들의 흥분된 공휴일과 다를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오신 날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날을 기념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날이 언제지는 잘 모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 보다 더 중요한, 아니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 안에 예수님이 오셨는가 하는 것이다. 내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나셨다면 성탄절이 의미 있는 사람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휴흥에 적합한 휴일 그것 뿐이다. 교회는 교회 방식대로 유흥을 즐기고(그나마 도덕적일 뿐), 세상은 세상적으로 유흥을 즐기는 것일 뿐이다.


교회에 대하여 다소 날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블로그에서 늘상하는 이야기와 같은 이유이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아는 것이어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생 어디를 봐서 예수님이 세상에서, 세상의 법으로 성공하신 분으로 보이는가? 그런데 교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이 세상에서는 물론이고 죽어서 천국에 가서도 호의호식하며 산다고 가르친다. 그런 것은 예수님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예수님이 오심을 찬양하는 것, 기뻐하는 것은 세사아 살아가는 것을 본질로 보는 사람에게, 실상은 본질이 아니지만 자신들이 본질이라고 믿는 것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슈퍼맨이나 헐크 혹은 아이언맨과 같은 히어로로서의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 사람의 정체성을 알려 주러 오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기쁨과 찬양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이방신과 같은 신으로 모욕한 예수님, 아니 그들만의 예수님이 탕생한 것을 기뻐하는 것일 뿐이다.


성탄절이 언제냐? 그것은 자신 안에 이 인생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그 때가 예수님이 오신 날이다. 예수님 오신 목적이 그것이니 사람 안에 그 목적이 열리는 것이 바로 성탄절인 것이고, 크리스마스 곧 <예수 축제>의 날인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보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태초의 날이기도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날이 바로 성탄절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신 인생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의 의미가 된 날을 맞이한 사람, 그 사람에게 그 날이 성탄절이고 천지창조의 날인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 주시는 하나님,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 돈 달라 밥 달라, 여(남)자 달라, 직장 달라, 자식의 성공을 달라는 것을 기도할 수 있는 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12월 25일인지 아니면 봄의 어느날인지가 중요할 것이다. 구원파에게 구원 받은 날을 날짜로 말해야 하는 것 처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뜻, 곧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아는 날이 성탄절이고, 그런 날이 없었다면 성탄절에 설칠 것이 없다. 왜냐고? 아무 상관없는 날이니까?


그러나 오히려 세상은 거꾸로 되어 본질을 아는 이들은 조용하게 지낸다. 어떤 날을 특별히 정해서 예수님 오심을 기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생명으로 계신 이를 특별히 날 정해서 기념하려 하겠는가? 자기 안에 예수님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에게 제사 지내고 기념하는가? 없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지. 예수님은 어느 특별한 날에나 오시는 분이 아니다. 바울 사도의 말처럼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지. 그게 성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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