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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얻는 야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 26. 11:43 Writer : 김홍덕

야곱은 두 아내를 얻어서 아들들을 얻는다. 레아가 아들들을 낳자 이것을 시기한 동생 라헬이 자기 종을 남편 야곱에게 주어 아들을 얻고, 이것을 본 레아 역시 자기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또 아들을 얻고, 하나님께서 라헬을 생각하시므로 라헬이 요셉과 베냐민을 얻어서 12명의 아들과 디나라는 딸을 얻는다. 그리고 그 아들들과 후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12지파가 형성된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민족인 유대인만 하나님의 민족이라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이 아직 그 착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선민의식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성경의 본질,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의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백성인지를 그들의 성전과 율법과 관습을 통해서 보이셨다. 즉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삶이라는 어떤 삶인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이신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아닌데, 이것을 모른다. 이것을 깨우치기 위하여 바울 사도가 그렇게 노력했었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할례나 율법과 같은 이스라엘의 모든 관습과 규례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인 사람이 사는 삶을 표현한 것이다. 마치 심청이가 바다에 뛰어 들어 그 효를 표현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관습이라는 모양이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그 외형과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기에 이 땅위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신 의가 자기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다.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의(헌법)의 다스림 안에 있는 사람이고, 그것을 자신의 국가관과 삶의 방식과 의로 삼는 사람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삶의 의가 된 사람들이 모인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의가 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어딘가? 그곳이 바로 교회다.


비유컨대 이것은 영토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미국에 가 있어도 대한민국의 법 그 아래 있다. 그와 같이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살아도 그 삶의 의가 하나님의 의에 있다면 그 사람은 육신이 이 땅에 산다고 해도 이미 천국의 사람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살지 않았던 사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몰랐던 사람은 천 번을 죽어도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야곱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말씀하시고자 한다. 그 시간의 역사는 수천 년이지만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봐도 그것은 하나님께 긴 시간은 아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즉 이 야곱의 이야기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그것을 보고 듣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야곱이 아들들을 얻음으로 그 아들들이 지파가 되고, 그 지파들이 번성하여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되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표현된 이삭과 또 그 이삭의 아들인 야곱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육신, 곧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시작이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야곱이 아들을 얻었다는 것은 한 사람 안에 있던 하나님의 의가 여러 삶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삶의 모양은 달라도 하나님의 의는 하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의가 일률적인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이 딱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과도 여러 가지고 귤도 여러 가지며 소도 양도 딱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나라라고 할 수 있는 교회가 규격화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신앙이라는 것은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우상이라고 하셨고, 그래서 금이나 은을 쳐서 모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쳐서 모양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것을 자기 의지대로 규격화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다.


즉 ‘교회에 다니려면 사람은 이래야 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도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 그것도 틀린 것이고, 봉사도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법이 아니라 우상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그 아비조차 의도한 것을 반영할 수 없는 것이 생명인데, 하물며 자기 나라와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구성원을 어떻게 몇몇 사람이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야곱의 아들들도 그 성격과 행실이 다양했다. 아버지가 같지만 다 달랐다. 또한 네 명의 어머니에게서 나왔다. 즉 하나님의 의가 여러 형식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4”라는 숫자가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면에서 보면 네 명의 아내요 어머니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이 가진 그 다양한 성품과 모양과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것이며, 그렇게 다양하게 표현되는 모든 의가 다 한 나라로 있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요, 이 땅위의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라 할 수 있는 교회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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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 대하여 많은 신앙인들이 비판적인 소리를 내지만 사실 지금도 그 때 그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같은 이들은 적어도 범죄나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오히려 그들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온 떡이라고 하니 유대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데 하늘에서 왔다고 하니 그것이 어이없고, 또 자기 몸이 영생을 위하여 사람들이 먹어야할 떡이라고 하니 그 또한 어이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 몸을 사람이 먹을 수 있게 준다는 말이며, 백번 물려 그렇다고 사람들이 그것을 또 어떻게 먹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황당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왔다는 그 말씀이다.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신성모독일 수밖에 없었다. 강도는 다르지만 지금으로 치면 ‘무슨 이단 같은 소리야?’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왜 그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라보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예수님의 육신과 행동 그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형식을 본질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오해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씀을 하셨다. 사실 알고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육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산상수훈에서부터 너무 많이 말씀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다만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그러시거나 말거나 자기 생각과 기준과 안목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본질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은 같은 상황이다. 어쩌면 교회가 크면 클수록 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6-57)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말이 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잘 보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사람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소고기를 먹었다면 소고기가 내 안에 있는 것이지 내가 소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그 정도의 상식만 있어도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 사람이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색다르고 눈에 띄며 그 말씀을 상고할 텐데 자기가 육신의 일을 본질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이런 말씀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매주일 기독교인들은 주기도문을 드린다. 그 시작이 무엇인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닌가? 그렇게 입만 떼면 하늘의 뜻이 자기에게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예수님께서 하늘로서 온 떡이라는 것이, 음식이 소화되어 육신이 되듯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육신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은 거의 난센스에 가까운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것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 인하여 사심과 같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자도 예수님을 인하여 산다는 것, 이것만 있으면 성경의 모든 것이 다 자기의 삶이 되는데, 이것은 알려고 하지 않고 그냥 예수님께서 하신 말과 행동만 따라 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배가 불러서 예수님을 찾고 임금 삼으려 하는 것이며 예수님 없이 항해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지키면서 살려고 하는 모든 성경,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기에 예수님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뜻 그 자체이기에 예수님께서 숨만 쉬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이듯,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심이 그러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그 의가 사람 안에 있으면 모든 삶이 예수님과 같아진다는 것을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지를 늘 의심한다. 아무 것도 안하고 믿는 마음만으로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하여 헌신 하는가 의심한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다고 하셨으면 그런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랬으니 나는 안 되지만 그럴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는 그 믿음이 있으면 믿음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된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그런 생명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예수님을 먹지 않은) 것이다.


같은 행동이라도 그것이 본성인 행동이 있고, 의무나 다른 목적이 있는 행동이 있다. 천국에 가기 위하여 교회 청소를 하는 것과 하나님의 전이라는 감사함에 청소하게 되는 본성에서 비롯된 행동이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천국에 가기 위하여 청소한 사람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대중 앞에서 이야기하게 되고, 본성인 사람은 원래 자기 일처럼 하니 생색내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시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행동들이 자기 몸과 본성이 되어서 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지, 그런 행동을 해야 천국에 간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 분명한 말씀을 오해하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인데, 그렇게 된 연고는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것 그것 때문이다. 그것을 본질로 보면 어떤 것이든 자기의 유익이 되게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니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유익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유익해지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적반하장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이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6:46)

이는 분명히 방향성이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보려고만 하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의 의가 되었다는 것, 즉 하나님의 정체성이 자기의 정체성이 되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체성이 자기의 정체성이 되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믿음은 방향성을 반대로 해서, 육신의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것이라고 믿고서 수도한다면서 심지어 자기 육신을 학대하면서 까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방향이 하나님에서 시작되어 사람으로 표현되면 너무 쉬운 일인데.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은 예수님의 본성이 자기 생명이 되어 그 본성대로 사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의 유전자대로 살고, 돌고래는 돌고래의 유전자에 따라 사는 것이듯,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생명을 자기 정체성으로 수용한(믿는) 사람은 그 생명이 본성이 되어 그것대로 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삶인 것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삶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대로 살고,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서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것이 되면 그 생명대로 사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 힘든 십자가도 그냥 지신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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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께 왔지만 예수님께서는 냉대했다. 기적 때문이 아니라 배가 불러서 온 것이라고. 밥 달라고 하지도 않았을 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고 또 기적으로 먹이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은 사람들을 냉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은 적어도 이런 의심을 가지고 봐야 한다. 그냥 무조건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오병이어에서 계속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결국 예수님의 정체성이 모든 사람의 정체성이므로 그것이 음식을 먹음과 같이 먹어서 자신의 정체성이 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자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했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먹지 않아 자기 안에 예수님이 없는 상태로 배를 타고 세상으로 나갔다. 이 모두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에 반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오병이어 사건 전후의 모습만이 아니다. 지금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니까 오병이어를 일으키는 예수님이 육신의 배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임금 삼으려 한 것이나, 예수님을 믿어서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 세상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려 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 경쟁 종목은 세상의 부와 명예는 물론이고, 도덕적 우월감과 신앙적 우위에 까지 모든 것을 아우른다. 


이는 종목이 문제가 아니라 방식이 문제다. 방식이라는 것이 결국 정체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신앙이라는 것도 남보다 나은 신앙이라는 관념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세상적인 것이다. 세상적인 가치와 혼음한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상태, 이런 신앙관을 사마리아라고 미가서에서 말씀하고 있다. 생명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얼마나 표현하는지에 대한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하는 것 역시, 육신의 문제를 본질로 알고 신앙의 초점을 그것에 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왜냐하면 결국 그것이 썩을 양식이기 때문이다. 육신이나 세상의 것이 다 썩어 없어질 형식에 관한 것인데 본질이 아니라 형식을 신앙하는 것, 예수님의 본질은 보지 않고 표현된 형식을 가치로 보고 임금을 삼는 것, 교회에 다시는 이유가 육신의 문제 해결에 초점을 두는 것, 그 모든 것이 다 썩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썩을 것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어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그 썩을 것을 위하여 예수님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일을 위하여 예수님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제대로 먹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바로 아는 것이 아니며, 한 마디로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로 생명의 떡,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하셨으니, 바로 그것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생명의 떡을 먹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떡은 배가 불러지는 것과 육신의 배를 불려주는 이를 자신을 다스리는 왕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세상의 종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에 대하여 모세가 준 떡, 만나와 메추라기는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울러 말씀하신다.


또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는 것도 늘 오해한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신 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오천 명의 육신을 먹인 것 때문이 아니듯이, 하나님의 일도 육신의 노동과 수고와 헌신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오해한다. 그래서 교회가 늘 일을 만드는 것이다.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일이란 뭔가 몸으로 수고해야 하는 것으로 가르쳤으니, 그렇게 할 일을 계속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늪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 즉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심을 믿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면서 보여주신 우리 인생들의 존재 목적과 본질이 바로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믿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자신이 같은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이것을 두고 ‘믿기만 하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것이냐?’고 묻기도 하는데, 단언컨대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생명이 안에 있으면 자신이 살아 있고, 그 생명을 표현하는 행동과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데, ‘아무 것도 안 해도 돼?’라고 묻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이것은 땅에 씨를 심으면 나무가 되는 것과 같다. 씨는 보기에 살아 있다고 여길 것이 없어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다. 어떻게 보면 다른 책과 다를 바 없는 문자로 된 성경책 그것일 뿐이고, 또 어떻게 보면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죽어 버린 예수님은 겉보기에 생명이 없어 보이는 씨앗과 같다.


하지만 그 씨가 땅에 심겨서 생명이 되듯이, 그렇게 보잘 것 없는 그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사람의 심령 안에 심겨져서 그것이 씨앗이 심겨진 곳의 흙을 생명으로 바꾸어 내어 그 씨의 이름을 가진 열매는 맺게 되듯 사람을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바꾸어 내는 것이다. 그 잉태함이 성령의 잉태함이고, 성경이 말하는 행함이 그 생명의 역동성과 본성과 모습과 행동인 것이다. 


이것은 너무 단순하고 확실한 말씀이다. 사람이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은 배가 불러서 예수님을 배불려 주는 임금으로 삼으려는 그 안목, 육신의 일을 삶의 본질로 알아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어두운 눈 때문에 그런 것일 뿐,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두움만 벗으면 너무 쉽고, 밝은 것이며, 사람이기만 하면 아무 어려움도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 하나도 없는 복음이고 쉬운 짐이다.


하나님의 일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 그것뿐이다. 그것만 있으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사람은 사람으로 나기만 하면 사람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 말(의사전달)도 하고, 움직이고 일한다. 그리고 역사를 만들어 왔고, 또 만들어 간다. 하나님의 생명도 동일하다. 모든 것, 이때까지 하나님의 일이라 여기며 수고한 모든 육신의 일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가 있어야 한다. 그것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된다. 그것이 바로 영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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