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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22-30) 그는 흥하여 하겠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19. 16:34 Writer : 김홍덕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고 있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강 건너편에서 세례를 베푸시니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것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걱정하면서 세례 요한에게 고했을 때에 세례 요한은 그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세례 요한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 할 이들이 바로 지금 세례 요한을 걱정하는 제자들이고 말하면서 결국은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세례 요한도 사람인데 그런 상황이 섭섭하지 않았겠는가 싶기도 한데 세례 요한은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니까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체념적이라는 것은 자신도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말함이고, 운명적이라는 것은 자기 안에서부터 인정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생명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단순히 한 사람에 한정된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모든 하나님의 아들의 대명사인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은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대명사다. 하나님의 생명이 육신으로 삶으로 표현된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듯 세례 요한은 육신으로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내려는 율법적인 신앙의 대표고 대명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의 생명이 삶으로 표현되는 이들을 그리스도인(a christ)이라 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첫 열매요 표준이요 대명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예수님을 the Christ로 표현하듯, 하나님의 말씀을 속에 있는 생명의 본성으로 인하여 지켜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힘과 의지와 육신의 힘으로 지켜내려는 율법적인 모든 신앙인들의 대표가 세례 요한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하셨다. 이를테면 세례 요한은 <the 율법신앙>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자신은 쇠하여야 하고, 예수님은 흥하여야 한다고 한 것은, 이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의 신앙이 율법적인 신앙이 쇠하여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사람의 생명과 삶 안에서 흥하여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말한 것은 자신이라는 한 사람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지금 자신과 대화하는 제자들이 증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인생에 세례 요한을 따르던 율법적인 신앙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가진 삶으로 바뀌어서 그 증거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는 사람은 이 성경을 읽는 연대나 시대에 무관하게, 자신의 신앙이 몸으로 성경을 지켜내는 신앙은 점점 쇠하여지고 반대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의 본성이 되어서 그 생명의 본성이 행함과 삶으로 나타나는 삶이 흥하여지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뭐한다고 우리가 이 시대에 2,000년 전에 두 사람이 누가 세례를 더 주느냐 하는 것과 관련한 말씀을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으로 지켜내려고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막상 해보면 그게 잘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지혜 있는 사람은 ‘이게 아닐 텐데?’하는 생각을 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더 열심히 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분명히 몸으로 성경을 지켜내는 신앙은 쇠하여져야 한다고 율법의 최고봉인 세례 요한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자. 정말로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사고 멀쩡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면서도 교회에 가면 잊을 만하면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또 그러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또 노력하라고 하고 있다.


사람이 그 정도가 되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로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맞는가?’ 같은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면 이런 괴리가 있는 것을 하라고 시키신 것은 심술인가 오류인가 의심해 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야 사람을 또 만들면 되지만, 나는 한번 뿐인 인생을 살고 있는 일회용 삶을 살고 있는데, 지키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는데 당연히 염려해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행동을 지켜내는 것은 결국 쇠하여야 하는 것이다. 즉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정이 되어야 사람이라는 존재의 본질이 그렇게 행동으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행동의 상징인 손과 발이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몸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례 요한은 쇠하여야 하고 예수님은 흥하여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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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엘과 에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2. 18. 10:51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의 여정이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 자신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인 생명을 얻게 되는(이것을 전도라고 한다.) 여정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의 신앙 여정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표현하신 것이 아브라함의 일생이라 할 수 있다. 그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여긴 유일한 아들 ‘이삭’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뜻과 육신의 능력으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있다. 이것은 앞서 다른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앙을 가진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것이 표현된 삶과 행동이다. 이삭으로 표현된 것이 이것이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낳을 수 없는 아들이 이삭이었다는 것이 그것이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심령의 상태가 그 여정을 거쳐내어서 하나님이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실 때, 곧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받고서 낳은 아들이 이삭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럴 조짐이 없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 여종을 남편에게 동침하도록 하여 낳은 아들이다. 이는 사라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일을 걱정해서 자신들의 육신의 생각과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여 자신들의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낸 결과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늘 있는 일이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지키는 것에 관한 것이 그것이다. 이삭의 신앙, 곧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한 사람 안에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이 있는 사람은 성경의 말씀을 자기 힘으로 지켜내지 않는다. 그럼 무엇으로 지켜내느냐? 그것은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이 삶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삶을 주관한다는 것은 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은 사람의 유전자와 본성에 의한 것이다. 남자로 나서 남자로 사는 것이지, 나서 어떤 노력에 의하여 남자가 되는 것이 아닌 것이 생명으로 인함이다. 이와 같이 성경의 모든 말씀도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말씀을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키려 하지 않다고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았지만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끈 것이다.


반대로 자기 안에 성경을 지켜낼 수밖에 없는 생명은 없는데, ‘성경을 지키면서 살아야 천국에 간다.’고 하니 때로는 스스로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야말로 바늘로 허벅지 찔러가면서 의지와 신념으로 지켜내는 사람들의 신앙이 바로 아브라함이 자기 육신의 힘으로 낳은 이스마엘의 신앙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시대에 정통성을 주장하는 어떤 화려한 교회에 다닌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는 것이다. 교회를 이고 천국에 갈 것이 아니라면.


이 이스마엘의 일이 아브라함에게서 비롯된 것을 성경에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여정에서 한 때는 누구나 다 자신의 의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시절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철없는 시절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여정에서 그런 마음을 처리해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 안에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는데 그것을 스스로 고백하고 인정할 때 온전한 신앙의 여정으로 간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마엘의 여정을 처리해 내었으면 끝났다고 하면 좋을 텐데, 하나님께서 아들로 주신 이삭에게서 쌍둥이 아들이 나왔는데 그 중의 하나가 또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길로 간 것이다. 쌍둥이의 형 에서의 일이 그것이다. 에서는 부모 이삭과 리브가가 걱정하는 결혼을 했는데 바로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이다. 


물론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는 것과 아브라함이 자신의 의지로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다르지만, 우리 신앙 여정에서 우리 안에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본성이라는 점에서 같고, 또 그것이 우리 안에서 반복적으로 나온다는 점에서 우리 신앙의 여정과 상관이 있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과 왜 반복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먼저 이스마엘과 에서는 전혀 다른 신앙의 모습이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명을 낳을 수 있는 존재로 보시기 전에 자기 육신의 힘으로 낳은 아들이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힘과 육신의 능력을 신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장로는 세울 때에 세상적인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언급한다면, 아브라함의 고향 땅에서 있었던 바벨탑과 같은 일은 하나님의 일을 육신으로 이루어내려는 율법적인 신앙이 아니라, 육신의 능력 자체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흙을 굽고 짚을 넣어서 만들고 쌓아서 하늘에 이르려 했다는 것이다. 흙에 짚을 넣어 만들고 흙으로 만든 벽돌을 구웠다는 것은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을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고 단련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한 이삭의 아들 에서는 아브라함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낳은 아들 이삭에게서 난 아들인데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을 살았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 심령 안에 에서와 같은 본성이 있고, 그것을 처리해내고 가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에서는 무엇을 설명하는 존재인가?


에서가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을 산 것은 이방의 여자를 아내로 취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아내를 이방 여인 중에서 취하지 말라고 했다. 이것은 혈통의 문제가 아니다. 아내는 남편의 형식이다. 하나님이 의를 가지시고 그 의가 사람으로 나타나기에 하나님 앞에 모든 인생이 여자인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에서는 그 아비와 할아버지의 의와는 다르게 가나안 땅 곧 이방의 여자를 아내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 있어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는 온전한 생명, 행위나 공로의 신앙이 아닐 존재의 신앙이고, 또한 성경의 말씀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생명의 본성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다 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그 신앙을 표현함에 있어 이방여자와 같은 형식, 곧 세상의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기성교회라고 할 수 있는 율법적인 신앙을 넘어선 교회들도 많다. 그러니까 성경을 지켜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속한 생명을 가졌기에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교회들도 제법 있다. 그런데 그 중에 보면 그런 좋은 신앙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앙을 계급화한다거나, 더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 내 말을 들으라는 식의 주장과 같은 것이다.


신앙의 그런 모습은 이스마엘로 표현된 율법주의적인 신앙에 비해서는 더 온전하고 장성한 신앙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복음을 가지고 사람을 심판하고, 복음을 기준으로 사람을 계층화 하는 것은 너무나 세상적인 것이다.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하면,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신앙으로 본다면 표준이고 최고봉이지만,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이 좋으면 좋을수록 어떤 모습이 되는가 하면, 더 좋은 신앙을 가졌기에 더 수고하고, 더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단들의 교주가 보여주는 모습이 성경적이지 않은 것도 이것에 비추어 보면 명확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것이다. 더 좋은 신앙,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 신앙과 믿음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을 모르는 이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삼고 십자가에 처형하는 자리에 끌려가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 법인 것이다. 그것이 어떤 아내를 얻을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한 개인의 신앙 여정을 가다보면 이러한 일들은 명확해진다. 자신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던 때가 있고, 그 신앙을 지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자리에 이르게 되어서는 어쩌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 세상적인 방법을 배필로 삼는 여정을 거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쌍둥이로 낳았다는 것에서 우리의 여정에 그런 일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음에 이야기하겠지만 야곱은 아내를 얻기 위하여 14년을 종살이 하듯 한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스마엘과 에서는 전혀 다른 정체성에서 나온 하나님의 의를 저버리는 두 가지 우리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이야기함은 우리가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우리 모습을 인정하는 것을 위함이다.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정하지 않는데 돌이키는 회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으려 한다면,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 모습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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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16-21) 구원의 모든 것은 빛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16. 15:36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정체성과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미지(형상)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과 의가 사람 안에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이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과 의가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을 통하여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나타내신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나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예수님의 육신으로 보이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심이다.


그래서 그것은 일면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은 어떤 존재라는 것을 정하셨다. 사람의 존재목적을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목적과 정체성이 무엇인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심으로 보이셨다. 그렇다는 것은 그 기준에 합당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빛은 인식이라고 했다. 빛이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목적대로 인식하고 사용하고 나타내기 때문이다. 빛이 없으면 제 아무리 잘 만든 것도 목적을 나타낼 수 없다. 보이지 않는데 무슨 소용인가? 마치 그것처럼 사람을 아무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놓아도 빛이 없어서 그 목적이 보이지 않는다면 사람은 그냥 살아 있는 고깃덩어리뿐이다. 빛이 없다는 것은 존재의 목적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이시고자 한 뜻을 알지 못하고 거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가진 신으로만 믿고, 예수님의 모든 기적을 객관적 사실로 믿으려고 신념을 가지는 것을 믿음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빛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제대로 모르니 컴퓨터를 앞에 두고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을 컴맹이라고 하듯,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어두운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것은 수동적인 것이고 수용하는 것은 여기서 나온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수용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은혜는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을 주심이 은혜이기에, 사람은 자기가 자신을 지은 것이 아니므로 존재의 목적을 사람 스스로 알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을 알게 하시는 것은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은혜고, 믿음은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즉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고, 그것이 바로 나의 존재의 목적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믿음이고, 그렇게 된 사람이 바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과 믿음의 모든 것은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에 있다. 즉 빛을 아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 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는 것이 사람이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고 자기 맘대로 사는 인생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두운 곳에 빛이 비췸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흑암과 혼돈 가운데서 빛이 있게 된 것이 그것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다. 이것이 인생에게 유일한 진리다. 인생에게 그 존재 목적에 관한 것이 진리가 아니면 뭐가 진리이겠는가? 그래서 정말로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이 빛, 곧 예수님을 만나려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살면서 겪는 당면한 문제에 매몰되어 그것이 본질로 아는 것은 마치 컴퓨터를 사서 매일 닦고 광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어두움이고 심판을 받은 것이다. 비싼 돈을 주고 산 컴퓨터를 활용도 못하고 오히려 매일 닦느라 종노릇하는 것이니 그것이 심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도 자신의 존재 목적을 모르고 육신의 일만 신경 쓰는 것은 마치 자동차나 컴퓨터를 사서 타거나 계산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매일 닦고 청소하는 노동의 종노릇 하는 것과 완전히 같은 것이다. 그것은 심판 받은 것이다. 존재의 낭비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정죄, 곧 죄가 있다고 하는 것이 이것인 것이다.


반면에 진리를 좇는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러 오게 되어 있다. 예수님이 진리이시니 진정한 진리를 좇았다면 반드시 예수님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리를 좇는 사람들은 그 진리의 행함을 나타내려 할 수 밖에 없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모든 생명은 그 생명의 본성(DNA)을 표현하기 위하여 자시 생명의 모든 것,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이다. 


예수님을 좇아 빛으로 온 이들의 행위가 나타난 것이 바로 성경에서 “~하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것은 억지로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생명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면 언제나 항상 쉬지 않고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념으로는 항상 할 수 없다. 빛이 비취면 보이는 모든 것을 다 목적대로 쓰는 것이 그것이다. 캄캄한 방에 들어가서 불을 켜면 그 방에 있는 모든 것을 존재의 목적대로 사용하게 되는 것과 같이, 인생이 그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다가 예수님을 만나면 육신의 삶의 모든 것을 그 목적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것이고, 빛 안에서 빛의 자녀로 사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뭐가 있겠는가? 이것 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인생이 존재의 목적대로 사는 것. 바로 그것이 구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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