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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16-21) 이름을 믿는다는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15. 13:00 Writer : 김홍덕

요한복음 3장 18절에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말씀이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 안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다. 이것에 대하여 사도행전에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독생자, 곧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그냥 기도할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고 하니 기도의 끝에 주문처럼 인용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고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먼저 생각해볼 것은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막상 ‘뭘 믿는다는 거지?’ 생각해보면 오히려 막막할 정도로 무엇을 믿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지 의아스럽기까지 할 때도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실존하셨다는 것과,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믿음들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한 핵심적인 모습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라 오라고 하셨고, 예수님 닮은 삶을 살라고 하셨고, 또 예수님이 하신 것 보다 더 큰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문제점은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것과 같이 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누가 바다 위를 예수님과 같이 걸을 것이며, 또 누가 죽은 사람을 살리겠는가? 설사 그렇게 하는 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렇게 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했으니 구원을 받는다고 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는 구원을 못 받기 힘들다는 것이다. 구원은커녕 믿음도 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바한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이 더 신앙이 좋다는 인식이야 교회의 암묵적 상식이 아닌가?


만약 정말로 예수님의 실존과 행하심을 객관적으로 신뢰하는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것이 좋은 믿음이라면, 누군가의 죄를 위하여 객관적으로 십자가를 지고서 대신 죽어야 신앙이 완성될 것이라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로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일 뿐인 것이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하는 것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이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하시는 것에 있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따라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예수님은 실패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예수님이 하신 <일>을 따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다 예수님이 가진 정체성에서 나온 것이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인하여 하신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것,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한다는 것,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하는 이유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행적을 객관적인 사실로 믿는다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 생명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름의 곧 생명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모든 일과 행적과 말씀과 기적과 십자가를 지심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람 안에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거하게 되면 예수님의 존재하심과 행하신 모든 일을 객관적으로 믿으려 애쓰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게 믿어지지 않겠는가?


그러면 ‘예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가? 바다를 가를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하겠지만, 그러면 나는 먼저는 ‘그럴 것이 아니면 왜 예수 믿느냐?’며 반문할 것이고, 다음으로는 ‘심청전을 읽고 부모님을 잘 모시면 심청전을 쓴 작가나 심청이보다 더 큰 일을 하는 것이지, 꼭 바다에 몸을 던져야 심청전을 기록한 목적을 이행한 것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이름은 정체성이다. 이름은 생명의 정체성이다. 사자라는 이름으로 사자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고, 사람이라는 이름이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도 그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심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준 사람의 정체성이 사람인 나의 정체성임을 내가 깨닫고 내가 그 정체성을 순종하므로 나의 존재 의미가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사람이 못하겠는가? 이건 사람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원래 지어진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사람이 못할 이유나 한계나 어려움이 도무지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그 목적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 정체성을 사람으로 오셔서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 사람인 자신의 정체성이요, 자신의 존재 목적이요, 삶의 의미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생명으로 인하여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지게 된다면, 제 아무리 대단한 능력이 있어 성경대로 살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게가 마음먹는다고 바로 걸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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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2. 14. 16:41 Writer : 김홍덕

성경에서 말하는 남자와 여자는 의와 형식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었다.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라는 사람의 두 성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와 그것을 표현하는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을 설명하시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을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와 같이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 연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삶의 본질이 되어 그 생명이 그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이 아내를 얻었다는 것은 이삭이 가진 생명을 표현해낼 아들을 얻을 형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한 아들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이라는 아들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만을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나타내시기 원하셨던 하나님의 의를 거쳐낸 다음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이 이삭인가 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여정으로 우리의 신앙 여정을 설명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아내를 얻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서 거듭난 생명을 표현해낼 삶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육신의 삶이 거듭난 생명을 가진 이후로는 마치 새롭게 아내를 얻어서 아들을 얻는 것과 같이, 거듭난 생명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삶을 살아서 다시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해 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삭이 아내를 얻는다는 그런 의미이다. 그렇다는 것은 거듭난 생명을 가지고서 다시 또 거듭난 생명을 얻는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얻는 아내와 같은 하나님 의의 형식인 육신의 삶은 이방인의 모양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거듭난 생명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육신의 모양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육신으로 주어진 삶의 모든 것을 어디에 사용하느냐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성격이나, 또한 환경, 그리고 그 환경으로 인하여 형성된 자아 정체성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바꾸려 한다. 그것을 바꾸려 하는 사람이 바로 이방인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조성하신 하나님은 온전하시고 실수함이 없으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어떠함을 비난하거나 부정하게 여기지 않으나, 하나님을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어떤 부분들을 부정하게 여기고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을 이겨내려는 사람들의 하나님은 자기 하나님, 곧 이방신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이방인들 중에서 얻지도 말고, 또 본향을 떠나지 않는 여자도 아내로 삼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주신 육신의 삶의 모든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이방인과 같은 삶의 모양을 거듭난 생명이 살아가는 모양으로도 삼지 말고,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의로 여기며 그것으로 하나님께 도달해보려는 마음에서 떠나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자신에게 주신 모든 것을 다 거듭난 생명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라는 것을 아브라함의 고향 땅을 떠나는 여자로 아들의 아내로 삼으라고 하심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필자도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 말씀은 존재의 말씀이니 행동이야 어떻던 무슨 상관이냐며, 술 마시는 자리도 자청하면서 ‘사람 마시라고 만든 술, 사람이 마시는데 무슨 죄냐?’며 능동적으로 마시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시비를 걸기도 했다. 그렇다는 것은 그런 모습을 보고서 누가 나와 같이 되고 싶어 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아들과 같이 내 안에 있는 거듭난 생명을 만나는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나쁜 것이 없다. 그렇다는 것은 신앙관이 바뀌었다고 버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관이 바뀌었으면 그 바뀐 신앙관으로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이전에는 내가 위대해지려고 사용하던 하나님이 주신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나를 볼 때 성령의 감동이 있을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에 사용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던지심과 같이. 


그리고 그와 같이 우리의 성격에서부터 가진 모든 것 까지 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이 우리의 삶을 볼 때 그것을 보는 이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깨달을 수 있도록 살아내는 것이 바로 우리 육신, 나의 삶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들이 아내를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이전에 살던 삶을 단절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것이 교회 시대에 와서 <영지주의>로 나타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도 많은 신앙 공동체가 이런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성경에서 밝아졌다고 막무가내로 종교적인 관습을 버리고,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세상을 심판하고 가족을 등지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모든 신앙은 아들을 이방신과 결혼 시키는 것이나, 아니면 아들 이삭을 고향 땅으로 데리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신앙은 떠나야 하는 것이다.


아들이 아내를 얻는다는 것은 거듭난 생명이 다시 아들을 얻을 수 있는 있는 삶의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비의 고향 땅과 같이 하나님께서 원래 나에게 주신 모든 것, 그것들로 아들을 얻을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삶이어야 비로소 그 삶을 보는 이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고백이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들을 얻는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전도요 선교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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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카페를 개설했습니다.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15. 12. 14. 12:35 Writer : 김홍덕

안녕하십니까? 블로그 운영자 김홍덕입니다.


블로그에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블로그를 매게로 하여 오프라인에서 모임과 만남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들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많은 만남을 가지기 어려운 상황임에 비해

저에게나 서로에게 안부나 또 질문이 하고 싶을 때 마땅한 방법이 없어서

인터넷상의 카페를 개설해 보았습니다.


여건이 된다면 이 블로그를 완전히 홈페이지처럼 꾸미면 좋겠지만,

현재로서는 저의 능력이 그 정도가 되지 않기 때문에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의 카페를 이용하여 상호간 교류와 또한

계획 중이 음성 파일의 공유와 전달 등에 활용하고자 합니다.


아직은 서로 인사도 하지 못한 분들도 계시기도 해서

금방은 친숙하게 운영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일단 시도를 해 보는 것이니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페의 이름은 <평교인 신앙 공동체>로 정했습니다.

주소는 http://cafe.naver.com/laymanclub 입니다.


그럼 그곳에서 많은 교제가 일어나기를 바래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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