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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22-40) 생명의 떡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1. 21. 11:31 Writer : 김홍덕

밤(날이 저물어)에 예수님 없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또 사람이 왜 존재하고 왜 사는지를 모르는 빈 배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이 오병이어와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전하신 그 사이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사도가 볼 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런 것이다. 빈 배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지 않아서 예수님의 정체성이 사람 안에서 생명으로 자리하고 있지 않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인생, 그렇게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배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에게 세상은 늘 광풍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배 안에 계신 것과 같이, 또 예수님을 먹어서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기의 생명과 본성이 된 사람은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신 것과 같이 바다 같은 세상이 잠잠해진다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실 때에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셨다는 것이 그 떡과 예수님이 같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그 들에 있던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정체성이 되라고 보이신 것임에도, 사람들은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육신의 문제인 소유와 공로의 임금으로 삼으려 했고, 그 정체성에 맞지 않는 예수님은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인 산으로 떠나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예수님 없이 바다를 건너려 한 것이다. 즉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 인간의 정체성이 무엇이며,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모든 인생이 그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어 살아야 함을 보이신 예수님을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 생명과 삶의 본성이 되지 않은 상태로 세상을 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뿌리는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하고, 오천 명이 넘는 이들에게 빵을 먹이려면 돈이 얼마가 들 것이라는 식의 가치관을 가진 제자들의 마음과 안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면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을 덮치고 죽이려 드는 것과 같이 다가옴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의 일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위협과 두려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을 위협하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만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세상이 삶을 위협하고 신앙의 적이라고 생각이 된다면 당신은 예수님을 세상을 살면서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임금으로 삼고 싶은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예수님이라는 생명의 떡을 먹어 그 생명이 본성이 된 사람은 아니다. 이것은 확실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정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도 예수님의 정체성도 결코 볼 수 없다. 세상이나 사람이나 다 한 아버지 하나님에서 나온 하나님의 표현인데, 그것이 어떻게 적이겠는가? 한 몸 안에서 서로 장기들이 거부반응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 이유는 예수님의 표적을 본 때문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즉 예수님께서 보이신 표적을 바로 보지 못했기에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으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다만 육신의 배가 부름과 같이 예수님의 능력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이렇게 블로그에 하나님의 존재의 신이심을 전함에 있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으로 신앙하고 있다는 사실에 먹먹해지는 가슴을 느끼는 순간들이 너무 많다. 새벽 운동을 가는 길에 만나는 새벽기도회를 다녀오는 사람들의 열정이나, 인터넷 유듀브에서 만나는 절고 아리따운 청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있는 신앙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정말로 간절하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라고 자신을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을 먹으면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먹은 음식이 우리 몸과 삶의 에너지가 되듯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우리 삶의 생명이 되어 그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사람이 창조된 목적이고,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의미이다.


이것이 생명인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기 삶의 생명이 또 본성이 된 사람만이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이어야 생명이 있고 산 것이라는 것이다. 시간을 보려고 산 시계가 시각을 알려주지 않으면 죽었다고 하듯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창조한 인간은 육신으로 숨 쉬고 살아 있다고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과 같이 자기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와 뜻과 성품과 존재를 나타내는 것에 사용되지 않으면 제 아무리 튼튼하고 활기찬 몸을 가졌다고 해도 죽은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 있다면 그 육신의 삶이 심지어 처참하고 살았다 할 만한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생명이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와 뜻과 육신을 가진 인생의 의미와 십자가의 의미가 자신의 삶의 정체성이요, 삶의 모든 것의 근원과 뿌리요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하늘 나는 백조를 보고 자신이 백조임을 깨달은 미운 오리새끼와 같이 자기 정체성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에게 떡을 나누어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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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1-21) 바다를 잔잔케 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1. 20. 17:11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시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을 삼으려 해서 예수님께서 혼자서 산으로 가셨다고 했다. 이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말씀이다. 사람들이 방금 전에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면서 보여주신 것을 육신의 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왕으로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피해서 산으로 가셨다고 했다. 산이라는 것이 여러 의미가 있지만 대체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가 짙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이나 임금으로 영접하고 믿으려 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계시지 않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인 산으로 가신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육신의 문제, 즉 소유와 공로의 신이 아닌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을 만나러 가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아들이요, 그 세계의 왕이시라는 의미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셨다는 말씀에 이어서 16절이 “저물매”라고 시작하고 있다. 물론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신 시각이 해가 저문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성경을 기록한 요한 사도의 안목에는 그것이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예수님을 육신의 먹거리를 해결하는 신으로 여기면 해가 어두워진다는 것이다. 즉 빛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요한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의미고, 사람들도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다. 예수님은 존재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즉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뜻인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시기에 예수님은 사람의 존재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을 육신의 먹거리,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으로 믿으면 어두워진다는 것이다. 그 안목과 삶의 정체성, 그리고 세상이 캄캄해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삶이 늘 어둡고 불확실하다면서 하소연한다. 사람이 자기 삶을 해가 저문 세상과 같이 어둡게 여기는 것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나 해결하는 주님으로 믿는 것도 포함된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 예수님의 정체성을 모른다는 것은 결국 자기 인생의 정체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사람의 정체성,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전하러 오신 분이니 예수님을 모르면 자기 삶의 정체성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연 듯 자신이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사색이 들면 소주를 마실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그 정체성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것을 알고자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딱히 소주를 마시는 것이 아니어도, 인생이 힘들고 어두운니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러 간다면, 육신에게 일어날 일이 어떠할지 모르는 것을 해결해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왜 존재하는지, 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와 같이 존재의 의미를 예수님을 통해서 알고자 해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이냐를 주님께 묻지 말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 달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 사도의 눈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임금으로 삼고자하나 예수님이 산으로 가신 것은 단순히 날이 저물고 어두워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제자들이 바다로 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없이 바다로 갔다는 것이다. 어두워진 것이나 예수님이 없이 바다 같은 세상을 사는 것이나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요한 사도는 보았다는 것이다. 큰 풍랑이 일어났으니.


사람들은 인생을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고들 한다. 삶의 풍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풍파는 알고 보면 자기 맘대로 안 되는 일을 뜻하는 것이지, 세상이 사람을 괴롭히라고 창조된 것은 아니다. 즉 바다를 건너는 배와 같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바다 같은 세상에 풍랑이 이는 것이지, 세상이 자기 맘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을 풍랑 이는 바다가 아니라 여행 온 바다와 같이 여기는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이 없이 세상을 산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자기 맘대로 세상이 되지 않고, 그런데 그것을 세상이 험하다고 푸념하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배와 같은 자기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자기가 주인으로 있으니 세상은 자기 맘대로 되지 않고, 그러니 세상을 풍랑 이는 바다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배에 계시지 않다는 것은 결국 자기 정체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빈 그릇과 빈 배와 같은 존재인데, 하나님의 뜻을 담아야할 그릇, 예수님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뜻인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가 자기 안에 없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배가 풍랑을 만난 것이라는 것임을 요한 사도가 봤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전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나 사람이나 다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 있다. 그러므로 그 뜻을 알면 세상이 풍랑이 아니라 순풍이 되는 것이다. 그 뜻이 사람 안에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배에 예수님께서 타시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안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 되려 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자기 인생이 엮여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의가 하나님과 같이 자기 인생을 주관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 인생을 만든 것도 아닌 주제에.


그때 예수님께서 바다를 걸어서 제자들이 탄 배로 오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바다가 잔잔해졌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계시면 세상이 풍랑이 아니라 순풍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만든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니 그것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세상과 마찰될 것이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순종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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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을 먹는다는 것은 그 먹은 것이 내 몸의 일부가 되고, 그 먹은 것으로부터 얻은 에너지로 삶을 살아낸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고, 어떤 것을 먹는다는 것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니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신 것이다.


오병이어는 그 맥락에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주신 음식, 그것을 먹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며, 그 남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일으키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에게야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경험이지만, 2,000년이 훨씬 넘은 지금의 사람들이 그 말씀을 대할 때 남은 것은 단 하나, ‘내가 믿는 예수님이 그런 능력이 있다.’는 그 객관적인 사실 그것뿐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런 능력이 있으시니 내가 먹고 살기 힘들 때 기도하면 내게도 그런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아전인수 격으로 믿는 것, 그 의미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떡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몸을 먹는 것이나, 그때를 기념하면서 빵이나 떡으로 성찬식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삶의 본질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먹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기도 하다.


보리떡 다섯 개, 보리떡은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그렇다면 물고기 두 마리는 어떤 의미일까?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준행했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물고기는 조건이 있었다.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는 물고기만 먹을 수 있었다. 만약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면 오징어 같은 것은 먹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물고기 어종에 따라 먹을 수 있는 것이 정해진 것이 아니다. 지금은 독이 든 복어와 같은 물고기도 먹는데 어종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비늘과 지느러미를 조건으로 하신 것은 큰 물, 고기가 사는 큰  물은 늘 세상을 의미하기에, 그 세상 속에 있지만 비늘이 있어 세상과 자신이 구분이 되고, 또한 지느러미가 있어 인생의 방향이 분명한 생명을 먹으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리떡과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누어주어 먹게 하신 것은 보리떡과 같은 사람, 또한 세상에서 방향성과 구분(거룩)된 삶을 사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렇게 구분되고 방향성이 있는, 목적이 있는 삶이라는 것의 기준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께서 그것을 나누어 주시고 먹게 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오병이어는 예수님이 사람들이 굶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분이라는 의미나,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라거나, 남은 음식을 버리지 않는 환경 운동가가 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병이어는 결국 예수님의 정체성, 그것을 먹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런 기적을 일으키실 이유가 없다. 선지자들의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바로 기적을 행하시면 되었는데, 뭐하러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그런 수고를 해야 한단 말인가?


다시 한 번 먹는 것은 먹은 것과 먹는 몸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상기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가 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즉 예수님의 정체성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자 의미라는 것을 상고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정체성이다.


많은 종교나 심지어 성경의 말씀을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과 이 땅에서의 성공과 안위를 믿는 사람들까지, 그 모든 이들의 신앙은 자아 밖에 있다. 그들이 신께 또 정체성을 잘못 알고 있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바라며 믿는 것 모든 것이 다 자아 밖에 있다.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일, 자기가 결혼할 상대, 자기가 속한 조직과 사회의 일, 그리고 그 육신의 안위와 같은 것들이 전부이다. 자기가 왜 존재하는지, 자아 정체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신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하고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자아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르면 자기가 살고 있는 모양과 눈에 보이는 자아 밖의 일을 만물의 본질로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마치 자기가 백조임을 몰랐던 미운 오리새끼의 어린 시절과 같이.


오병이어가 되었던, 성경의 어떤 말씀이라도 내가 먹을 수 없으면 성경이 아니거나, 성경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오직 우리 인생들이 먹어서 우리의 정체성과 삶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먹을 수 없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값이면 단언컨대 이 신앙을 버리는 것이 오히려 낫다. 어차피 자기 것도 아닌데 매달릴 이유가 있겠는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일도 그렇고 성찬도 그렇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인생이 그 모습을 보게 하신 일도 다 같은 목적과 이유이다. 우리 인생들, 육신을 가진 우리 모든 인생들, 그들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말씀, 그 육신이 되어서 우리가 할 수 있고, 우리의 정체성에 의미가 있는 그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나의 이야기라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은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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