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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30-47) 아버지의 뜻대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1. 12. 10:44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때로는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모든 권세를 주신 것으로 말씀(요 17장)하시기도 하셨는데, 여기서는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다. 성경의 이런 미묘한 차이는 어떨 때는 의문과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의 본질과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알면 절대로 혼돈스럽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도 하고, 또한 어떻게 보면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버지께 들은 대로 하신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심판은 의롭다고도 하신다. 이런 것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아들이라는 존재는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존재다. 아니 정확히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기 때문에 아들이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이라는 존재성 그 자체가 아버지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이니 아들의 삶의 모든 것은 다 아버지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단순하게 아버지와 아들을 혈통으로, 생물학적 부자 관계로 보면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생물학적으로 부자 관계에서도 아버지가 하던 일들, 사업들, 유지를 아들이 이어가는 것은 자연스럽고 그것을 아버지가 싫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여길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원하고 그렇게 되었을 때 감동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아버지의 일을 이어가려 하면 소송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옳은 말씀이고, 또 모든 권세를 주신 것도 같은 것이다. 아들이 모든 권세를 가진 것처럼 마음대로 행동해도 아버지의 의가 그 행동과 삶, 어느 하나에서도 빠짐없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아들이라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들이란 아버지의 뜻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표현과 같이 육신이 된 존재라는 것을 증거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을 증거하는 이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스스로를 증언하면 그 증언이 참되지 않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증언하시므로 참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그 증거가 참된 줄 아신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의 모든 삶이 그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아신다는 말씀이다. 이는 마치 수가성 여인에게 속에서 생수가 넘쳐 나리라고 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증거를 자기 밖에서 얻으려고 한다. 자신이 성경의 말씀이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학자나, 매체에서 성경에 기록된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고 하는 기사를 보면서 자신의 믿음이 참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한계가 있다. 그런 방식으로는 아직 성경의 모든 것이 다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죽기 전에 자기 믿음이 참됨을 모두 알 길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들은 자신이 살아가면서 자기 안에 아버지의 의와 뜻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육신적으로도 사람이 나이가 들고 자신도 부모가 되어 살다보면 그 부모의 생각과 뜻과 마음을 이해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알게 되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전하고 싶었던 의를 깨닫고, 스스로 자신이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아버지가 자신을 증언하는 것이고, 그 증언은 참된 것임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알게 된다.


육신적으로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은 그런 일의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육신의 모든 삶은 어떤 의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육신으로 살면서 그 육신의 부모의 마음과 뜻을 알게 되는 참된 증언을 알게 된다는 것은 the Man이라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아버지의 증언이라는 것이 있고, 그 아버지의 뜻과 의가 인간의 삶을 증언하심을 알게 되며, 그것을 알게 된 인간은 그것이 참된 것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들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니다.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쳐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아버지의 증언을 알고, 그것이 참된 것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또한 성령이 오셔서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그 깨달음(요 14:26)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그 아버지가 자신을 증언하고, 그렇기에 자신의 심판이 모두 참된 것이며, 그런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참된 것으로 안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높이는 말이나 자랑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 아니 모든 인생이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예수님을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과 같이 되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자아 밖의 객관적인 증명에 의지하는 것이나, 기도원에 가서 뱀소리 내는 기도자들에게서 얻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그 아들의 속사람 안에서 알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너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된 존재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생명이 된 사람이고, 그 생명으로 숨 쉬고 살아가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삶이다. 그런 삶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 아닌 것으로 행할 수 있으며, 그 하나님의 뜻이 참된 것이라는 것을 모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뜻과 자기의 정체성이 같은 것이 아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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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얻기 위해 수고하는 야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 11. 16:48 Writer : 김홍덕

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착한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외삼촌 라반이 그 일의 값을 쳐주겠다고 하면서 ‘무엇을 줄까?’ 물었을 때에 야곱은 외삼촌의 둘째 딸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하고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을 일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7년을 수일처럼 여겨질 정도로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하였다.


하지만 라반은 야곱과의 약속을 깨고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를 혼인한 날 밤에 들여서 야곱을 속이고 또 다시 7년을 수고한 다음에야 야곱이 사랑한 라헬을 얻는다. 사람이 아내를 얻는다는 것은 삶의 모양을 갖추고, 후사를 얻으며, 자기의 의를 표현할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내를 얻는다는 것은 자기 의의 형식을 취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내가 네게 장가들어(호 2:19)’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 말씀 역시 하나님의 의를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야곱도 아내를 얻고자 했다. 즉 그렇게 자신이 사모하고 얻기 원한 장자의 명분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니 7년이라는 세월을 수고해야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음은 어떤 행동도 요구하지 않고 그냥 믿는 마음이나, 입술의 고백이면 된다는 것을 큰 착각을 한다. 야고보서와 로마서가 서로 상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 그 오판과 착각 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절대로 상충되지 않는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은 같은 말씀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고, 생명은 그 생명의 본성을 표현하는 행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없는 물체는 죽은 것이듯, 행함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기에 행함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같은 말이다.


이것을 왜 야곱이 라헬을 얻기 위해 결과적으로 14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이야기를 할 때 말 하는가 하면, 야곱이 아내들을 얻기 위하여 종과 같이 수고했다는 점이 바로 믿음의 행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뜻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교회에 있는 독자인 청년 하나가 그 교회 안에서 결혼을 했다. 그런데 결혼 한 후 몇 개월이 되어도 아버지 집에 잘 들리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신앙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일은 참 어이없어 보인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런 삶을 산다. 신앙만 있으면 선하고, 신앙이 없는 이들과 어울리는 것은 시간 낭비며, 하나님 앞에 송구한 일이라고, 더 나아가서 그런 것은 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즉 육신이 속한 사회와 세상이 요구하는 삶의 형식을 신앙과 분리해 버리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것을 영지주의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성경에 대하여 아주 잘못된 견해이다.


야곱이 아내를 얻기 위하여 종과 같이 수고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섬기는 삶을 살아 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자신이 가진 믿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세상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법에 따라 종이 되어 섬김으로 아들을 낳은 여자(아내)를 얻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야곱이 라반의 법에 따라 종살이 하듯 수고한 것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착각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권력이나 권세로 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그 어떤 것보다 권세가 있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그런 권세를 가졌다는 것이지, 자기가 하나님과 다른 정체성의 신앙을 가졌는데 그 권세가 자신의 것이 될 리는 없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믿는 것, 그 믿음과 신앙으로 그 신앙이 없는 사람(하나님 앞에 여자)들의 법에 따라 종과 같이 수고하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얻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 믿는 사람이니 복 받으려면 내 말을 들으라.’는 식의 생각은 오만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고, 그 의가 또 다른 사람에게 의(義)가 되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의 의가 없는 이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이 가진 법 앞에 죄인 같이 종이 되어 그가 옳다고 여기는 법에 따라 육신으로 수고하는 삶을 살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기가 믿는 신앙이 너무 옳기에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다 죄인이며, 그 따르지 않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도 죄인이며, 그 사람이 부모든 은사든 누구라도 다 그렇게 죄인으로 여기는 것은 그야말로 사탄의 일이지 신앙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런 모습은 아내를 얻기 위하여 수고하는 야곱의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며, 자기를 못 박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없는 것이며, 십자가를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모독하는 것이다.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표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며, 자신과 같은 의를 가진 사람을 얻으려면, 형식을 취하여야 한다. 아내 없이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을 간과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고, 또는 누린다고 하는 것은 다 사상누각일 뿐이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야곱이 아내를 얻기 위하여 14년을 수고했다는 것을 성경에 기록한 의도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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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어서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면 모든 것이 함축될 수 있을 것이다.(물론 다른 표현도 그렇지만) 그런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은데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고 살림을 받아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의 권위와 정체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사람들은 육신으로 살아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죽은 자 중에서 구원을 받아서 살게 된다는 것을 신앙으로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육신이 죽은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 말씀을 두고서, ‘화장(火葬)한 사람은 어떻게 듣고 살아나는가?’ 같은 기막힌 말을 하기도 한다.(사실 그럴 때는 제법 난감하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싶어서)


그러니까 이 말씀은 육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무덤도 사람의 육신이 죽어서 장사지낸 그 무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죽음과 무덤은 사람이라는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형식이듯, 사람 사회에 있는 죽음과 무덤 역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상태라는 무형의 하나님이 의가 표현된 것이다.(이런 모든 것이 내용과 형식이라는 것, 무엇이 본질인가 하는 문제의 해결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증빙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도 죽은 자가 무덤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것을 기이하게 여기지 말라(요 5:28)고 하셨다. 그러니까 이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늘 신비롭게만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말씀을 하시고 보이셨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죽은 자가 무덤에서 듣는다고 하는 것은 육신이 죽어 땅에 장사 지낸 그 시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2,000년이 넘었는데 아직 그런 사람이 없고, 또 그것이 미래에 있을 일이라고 한다면, 그 이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평생 헛짓거리 한 것이 되니 그 또한 아니다. 이것은 육신은 살아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은 자, 무덤에 있는 것과 같은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죽은 자가 음성을 듣고 부활하는데, 선한 일은 언제 할 것이며, 악한 일은 또 언제 해서 부활할 것이냐 하는 것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무덤에서 살아난 것이 이미 부활인데, 그 다음에 또 선한 행실, 악한 행실을 하고 다시 또 부활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부활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서 생명을 얻는 이는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아들의 생명의 본성에 따라 살 수 밖에 없기에 선한 행실이 되고,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그 생명을 얻지 못한 자들은 그 행실이 남을 위하여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었다고 해도 하나님이 생명으로, 살았다고 여기는 생명에서 비롯된 삶을 살지 않았다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하나님께서 선하게 또한 살아 있다고 여기시는 생명이 자기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순종(듣는)하는 사람은 그 생명이 자신의 것이 되기에 생명의 부활이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즉 육신의 삶(목숨) 외에 또 다른 생명으로 살아가는 부활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의 말씀을 아무리 귀로 들어도 그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듣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신으로 믿고서 그 말씀을 듣는 자는 하나님과 그 믿음의 본질(정체성)이 다르므로 당연히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 말씀이 자신의 생명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들은 것이 자신의 삶이 되었을 때 들은 것이 되는 것이다. 두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밭에 가서 일하라는 말을 귀로 들었다고 해도, 가서 일하지 않는다면 들은 것이 아니듯,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을 가진 인생의 정체성을 보이시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수백 번 읽고 들어도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에 <행실>이 부족하다고 여긴다면 아무 것도 듣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 아들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목소리나, 말씀하신 문장을 듣는다는 것이 아니다.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들어야 비로소 듣는 것이다. 놀고 있는 아들을 본 엄마가 화가 나서 “그래 계속 놀아라!” 하는 말을 듣고서 놀면 되겠는가? 그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정도의 반어법도 아니고, 무식한 사람은 알 수 없는 복선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문장 그대로 지켜내려고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악한 행실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의 정체성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한 존재이고, 사람이 보기에 추하고 연약해 보이는 이 인간이라는 정체성이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드시고 심히 만족하신 그런 존재라는 것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들이 육신의 삶이 위대해지고 고상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이 연약한 육신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생명의 부활은 하나님 아들의 그 말씀이 자기 삶이 되는 사람의 것이다. 그 삶이 선한 행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들의 말씀을 듣고 사람이 그것을 지켜내려면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심판하고 괴롭히면서 각성시키려 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라도 다 하나님 앞에 악한 행실이다. 하나님 아들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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