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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신앙은 신앙을 버리는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2. 4. 13:46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에서 가장 기이한 일을 꼽으라면 아마도 아내를 누이라고 해서 다른 남자에게 빼앗길 뻔한 두 번의 일과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 중에서도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일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일이라는 것도 특이하고, 아브라함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 ‘줬다가 뺐냐?’하는 생각이 드는 일이 아닐까 싶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것을 순종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고 하셨다. 고향을 떠나서 그렇게 먼 길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한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하나님이라 결국 아들을 번제로 바쳐야만 하나님은 사람의 신앙을 인정하신다는 말인가? 그리고 아브라함의 여정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 여정을 말하는 것이라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들을 다 번제나 아니면 신학교에 보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아들이다. 그러니까 이삭은 죽으면 안 되는 존재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한번쯤 이 사실은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순종했다. 과연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늘날 많은 교회와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 이유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사회적 요구를 일축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큰 세력을 바탕으로 그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가진 신앙을 훼손당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가진 신앙이 훼손당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아들 이삭이 죽으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점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고 한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성심성의껏 하려고 한다. 그것은 나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겠다는데 그게 나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법에 맞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는다는 이유로 촛불을 훔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그 어떤 것도 반드시 하나님의 법으로 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법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에서 찾아야 한다. 정체성에서 법이 나오기 때문이다. 배구라는 종목의 정체성에서 배구의 룰이 나오고, 야구라는 종목의 정체성에서 야구에서 선하다고 하는(점수가 되고 이기는) 법이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정체성은 <존재의 신>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 이름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름은 정체성의 대면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것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은 교회에서 수고하고 봉사하면 상주시는 하나님이 그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스스로 있는(Be) 자>라는 것이다. 이것을 간과하면 하나님을 믿는 평생의 일이 헛수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하나님께서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온 맘과 몸을 다하여 하면 그 공로를 잊으시는 분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그 기도와 수고가 생명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보답하신다고 하니 생명의 본성은 그것이 아님에도 하나님의 보응을 목적으로 했는지는 분명하게 가리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명의 본성으로 비롯되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체성인 존재에 관한 것이다. 어떤 존재가 되면 그것에 맞는 행동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 생명의 본성으로 인하여 그 사람이 하지 않으려 해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일을 외면하려 해도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고 한 예레미아와 같이 본능으로 인하여 수고하게 되는 그 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신앙은 정말로 힘든 것이다. 마음에는 하기 싫고,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해서, 또 교회가 그렇게 말하니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그런 삶은 끝내 하나님 앞에 허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억지로 하는 나라가 아니다.


바로 이 법을 아느냐 아니면 모르느냐가 이삭을 바칠 수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이고, 그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이요 법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법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뜻을 해야만, 아니 정확하게는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고, 이 생명의 법을 모르는 사람의 신앙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지켜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생각의 뿌리가 성경을 지키지 않으면 화를 당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는 것에서부터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당한다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기독교가 가진 신앙의 본 모습이다. 하지만 이 신앙의 모습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지 않으면 당하게 될 화를 면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한다면 하는 것이 목적이겠는가 아니면 화를 면하는 것이 목적이겠는가? 그것은 당연히 화를 당하지 않는 것이 목적이다. 즉 신앙의 수혜자가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신앙은 성경에서 왜 그렇게 하라고 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하지 않으면 혼난다는 것 그것 밖에 없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보지 않고 믿어야 믿음이다.’라고 그리고 또 ‘험한 꼴 당해봐야 안다.’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지금 그런 교회를 다니고 있다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교회는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지 몰라도 적어도 왜 해야 하는지는 분명히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이삭은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이삭이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즉 자신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약속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신앙을 지키려고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또 신앙이 좋은 사람이 신앙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심판하고 갈라서는 것이다. 그런 모든 신앙은 하나님의 법은 모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고 애쓰는 안타까운 교회와 인생일 뿐이다.


반면에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 아니라, 할 수 밖에 없어서 하는 신앙은 전혀 다른 세계이다. 이 신앙은 자기 마음 안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개는 그 안에 개의 유전자와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아무리 ‘멍멍’말고 다른 소리를 내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개를 죽일 수는 있어도 ‘야옹’하게는 못하는 것이다. 그것처럼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다른 짓을 하고 하나님을 떠나려 하고 용을 써도 아나 되는 것이다. 그런 신앙이 있다면 이삭을 바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닌 것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신앙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지키려 하지 않는다. 즉 이삭으로부터 큰 민족이 나와야한다고 하나님이 하셨으니 이삭은 반드시 아들을 낳을 때까지 살아야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사람 안에 있기 때문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과 같은 본성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 자기 속사람의 법인 사람은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하나님이나 같은 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법은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법이다. 세상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시자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신 것이 그것이고, 칼을 휘둘러 예수님을 잡으러 온 베드로를 말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한 아들이 장가도 안 갔는데 번제로 바쳐지는 것과, 세상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이 세상을 구하기는커녕 세상의 법에 심판 받아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따라 가겠다는 사람들, 곧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면서 이삭을 지키고 예수님을 지키려 한다는 것이다. 즉 신앙이나 교리를 지키기 위하여 사람을 심판하고,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하여 사회와 맞서고 심지어 자신들의 교인들을 축출하고 서로 다투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회 안에서 다투는 것을 보면 다 자신들의 주장이 하나님의 뜻이라며 싸우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즉 이삭을 바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정말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창조이심과 아브라함에게서 난 아들로 인하여 큰 민족이 된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주이심을 믿는다면 그 일에 간섭할 일이 아닌 것이다. 할 일이 있다면 오직 예수님과 같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다.’라고 주장하는 주장 앞에 자신의 의와 뜻은 죄인이 되는 것, 그것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이삭을 바치는 것이고,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로 여기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또는 신앙이 좋다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앙 없음을 심판하거나 하나님의 약속이 망해가는 것을 힘껏 막으려 하는 것을 본다면 그 자리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하나님의 약속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거룩한 자리(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한마디로 신앙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하나님의 아들을 새롭게 얻을 수 없고 부활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다면 신앙을 버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죽고자 하는 자가 산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을 정말로 제대로 믿으려고 한다면 신앙이라는 것을 지키려 하지 말고, 신앙을 지키려고 사람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주장 앞에 죄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 마음에 있는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당연히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야 한다. 마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려면 순종함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이루려고 하는데 자기 생각대로 날뛰고 어떻게 그 안에 생명이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이래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여정에서 너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여정을 거쳐내어서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면 이삭과 야곱에 이르러 12아들이 나오고 나라가 되는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의 화룡점정이다. 이것은 신앙을 버릴 수 있는 사람, 그들에게만 열리는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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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다른 성경 구절은 몰라도 이 구절 정도는 어지간하면 암송하고 있으리라 생각되는 말씀이다. 아마 초등학생들조차도. 그만큼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질문하는 것은 오히려 우문에 가깝다. 너무 많은 정의가 있기 때문이고, 또한 객관적인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도 하나의 정의를 선택하라면 그것은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 세상이 의미가 있어졌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영광과 성품을 나타내셨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다.


성경에는 신앙적으로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말씀으로 “세상을 사랑했다.”라는 표현들이 있는데, 그것과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은 다르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비슷한 부분도 있는데 사람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 역시 세상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세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아는 것, 그것을 두고 이르심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다른 것은 주권에 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의미를 두심으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성품과 능력을 세상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게 의미를 주신 것이다. 반면에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주권이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것도 문제고, 세상이나 사람이나 모두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인데, 사람이 세상에 의미를 두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월권이다. 그것을 잘 표현한 이들이 바로 롯의 두 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의미가 있어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영광과 성품과 능력을 나타내셨는데 그것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갈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는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 아주 잘 설명하고 있는데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이 그것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은 세상의 모든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얻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존재함과 그 성품과 영광을 나타내는 존재다. 아들이 있다는 것은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고, 아들이 보여주는 모든 성품과 육신의 모든 것은 다 아버지의 품 안에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 곧 피조물들의 소망과 그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에 수렴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의미를 주신 것이고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래서 독생자다. 독생자는 예수님의 유일성을 상징하는 것에 한정된 말이 아니다. 예수님의 유일성은 시작이라는 유일성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말구유에서 나서 자라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몸의 유일성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법이 없다는 그 유일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외에는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방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바로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아버지를 표현하는 한 사람인 아들이 나오는 것에 수렴하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의미를 주신 것을 두고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과 피조물의 존재 목적을 자신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으로 알게 되는(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인 것이다. 또한 그것이 세상을 향하여 또한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가지신 유일한(독생한)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존재 목적을 주시는 사랑하심을 알고 그 모든 것이 사람인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로,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존재했고 성경에 기록된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모든 것과 모든 말씀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기를 바라셔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으로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질 때 비로소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성경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살아가면서 당면하는 시험이나 결혼이나 재정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것이 자기 기대대로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것을 행하시고, 자신을 통하여 어떤 일을 하셔도 다 수용한다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나, 하나님은 나를 절망 중에 두시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자신의 기대나 신념이지 믿음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자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온전히 사용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육신으로도 아들은 아버지의 어떤 성품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아들은 그냥 아버지의 모든 유전자, 그것이 설령 유전적인 질병이라도 그냥 다 수용해내는 존재가 아들인 것이다. 그렇듯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과 존재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필요해서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순종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사람의 생각에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믿음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신 유일한 존재 목적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자 정체성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 유일한 것,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방법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보고서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로서 드려지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영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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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와 나누신 예수님의 말씀은 거듭난다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한 유대 관원에 대한 말씀만이 아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볼 것인지, 하나님을 믿어 거듭난 생명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들을 때에 어떻게 모태에 다시 들어가느냐고 물은 것은 거듭남이라는 것을 보는 안목이 눈에 보이는 육신과 세상을 본질로 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육신의 어떠함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거듭난 이들이 본다는 말을 듣고서 몸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은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하셨고, 이 성령의 역사하심은 땅에서 일어나는 일, 곧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영이 그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이스라엘의 관원인 니고데모가 하나님의 일이 땅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함을 지적하신 것이다. 땅의 일을 말해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늘의 일을 알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아니면 하늘에 올라갈 자가 없다는 말씀을 하신다. 급격한 대화 주제의 전환이다. 어떤 의미일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것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듯이 내려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주기도문의 시작부분처럼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또한 성령의 일이라고 하시는 것이고, 그것이 거듭난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법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법이라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그런 법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니고데모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시면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기를 늘 바란다. 그것이 삶이고 그것이 신앙이고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을 니고데모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듭남이라는 말씀을 육신의 일로 보았다. 마치 니고데모와 같이 지금도 사람들은 육신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거듭남이 있다고 생각한다. 


육신으로 공로를 쌓아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육신으로 방언을 할 수 있어야 한다거나, 달력으로 특정된 어떤 날에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느낌이 있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들이 바로 니고데모가 ‘어떻게 모태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 말과 뿌리가 같은 것이다. 다 육신의 어떠함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증거가 된다고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일은 그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하게 하심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뜻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시지 않고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육신의 일이 아니라고 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했다. 이 말씀 하나님의 의와 계획과 뜻이다. 그것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아니면 하늘에 올라갈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사는 사람의 삶이 아니면 하늘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아니면 하늘에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어떻게 말씀이 육신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사람의 육신, 사람의 삶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람이 되려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심령의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남이라는 것이 육신이 모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뱀과 같이 들려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뱀과 같이 들리시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 영생을 얻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볼 때 사람의 본질이 이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육신의 연약함을 행위로 가리는 것이 아니라 이 육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으로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자주 언급하지만 초자연적인, 초인적인 일을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어떻게 보면 육신을 가진 이 인생,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에 대한 안목이 바뀌는 것이다. 사람들이 육신을 보니 연약하고 추해서 이것을 어떤 법으로 정한 것을 지켜내면 그 연약함과 추함이 면죄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안목이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안목이 사람을 수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수고함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안목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을 보면서 ‘저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구나!’라고 깨닫는 것, ‘내가 저주하던 이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아들이 되는 삶이었구나!’라고 깨닫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뱀과 같이 들리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이 육신,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몸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인 것이다. 


그 이유와 목적을 십자가를 보는 이가 깨닫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2,000년이 넘도록 예수님의 십자가를 듣고 읽었지만 이것을 깨닫는 이가 적은 것은 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었다는 것은 십자가를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으로 보지 못하고 니고데모가 본 것과 같이 보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어두움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밤에 찾아 온 것도 그것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보다 도덕적이고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교회에 헌금하고 봉사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런류의 모든 생각은 다 거듭남이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거듭남이 모태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면 다들 웃으면서 정작 신앙은 그것과 같은 안목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연코 성령의 역사하심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영생도 모르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땅이라 할 수 있는 흙으로 지어진 사람에게 이루어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이고 직임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자신의 삶인 사람들만 하늘에 올라간다는 것이다. 즉 그 삶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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