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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5. 12. 2. 18:36 Writer : 김홍덕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나는 수요일 예배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것도 항상 장로님들보다 앞, 예배실 가장 앞쪽에. 어느 수요일 조금 늦게 도착해서 기도하는 중에 들어가서 앉았다. 그리고 눈감고 고개 숙이고 있는데, 앞줄에 앉은 친구가 뒤로 돌아보면서 조용히 “야, 20원 있으면 줘봐라.”하니 우리 줄에 앉은 친구들이 “야, 예배 시작했는데 어디에 전화 걸려고?(당시 공중전화가 20원)”라고 하니 그 친구가 말하길, “그게 아니라, 이거 헌신예배야?” 뒷줄에 앉은 우리는 웃음을 참고 있는데, 그 중 한명이, “야 임마! 하나님이 걸뱅이(거지의 경상도 사투리)가?” 말해서 끝난 일이 있었다.


헌신예배하면 가장 먼저 떠오는 것이 이 에피소드다. 그러니까 헌신예배라면 헌금하는 예배, 헌신예배를 드리는 부서의 재정 충당을 위한 헌신예배라는 정도가 생각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만 이야기하는 것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날 헌신이라는 의미가 정말로 온전히 교회에 용해되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헌신, 몸을 드린다는 것에 대한 이해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헌신은 몸으로 하나님께 수고의 열매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청소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에 몸의 수고를 드리는 것이나, 또 몸을 수고하여 얻은 소득을 헌금으로 드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더 고상하게 삶을 하나님께 드리자고 하는 것도 있고, ‘주님을 위하여 죽자!’라는 각오로 선교나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해 가는 것도 헌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헌신은 그야말로 말 그대로 몸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몸에서 나오는 공로나 몸으로 얻은 소유나 목숨으로 바꾸어 내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도록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헌신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하신 말씀이야 말로 제대로 된 헌신의 정의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사람들은 몸을 제사로 드리라고 하니 몸이 할 수 있는 어떤 행동이나, 몸의 수고나 목숨을 그리라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몸을 주신 것, 아니 사람에게 육신을 주신 것, 사람을 몸으로 만드신 이유가 있기에 그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려서 예배가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몸 자체에 목적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제사로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말씀에 ‘영적 예배’라는 것과 ‘산(Live) 제사’는 같은 의미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을 성전이라 하고, 성전이란 예배를 드리는 곳이라는 점이 그렇다. 그러니까 사람 안에 하나님이 거하심으로 사람이 성전이 되는 것, 그것이 영적 예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산 제사라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헌신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수고한 땀을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몸이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는 형식과 도구와 육신이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자세히 본다 해도 미묘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자동차를 태워주는 것과 자동차를 주는 것의 차이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몸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을 드리는 것을 헌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 자동차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로 태워드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동차를, 몸을 달라고 하시는데 말이다.


이렇게 헌신에 대하여 오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헌신이라는 것 자체만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잘못 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헌신이라는 것이 몸의 열매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두루미와 여우의 식사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람의 몸의 열매가 아니다. 사람이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몸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람의 몸을 쓰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바로 사람의 몸 가진 삶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제사가 아니라 순종을 원한다.”고 하신 것이다.


사람은 빈 그릇이다. 그 빈 자리를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자기 자신을 채우려 한다. 입으로 음식을 먹는 것 뿐 아니라, 눈으로 읽고 보아서 자기 안에 채우려 하고, 또 귀로 들어서 채우려 하고, 또 느낌과 기억을 채우려 한다. 그것은 그 빈자리가 채워질 것으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있을 것이 제 자리에 채워지지 않으면 그것이 채워질 때까지 계속 채워야 한다. 그것이 안식이 없는 것이다. 


반대로 있을 것이 채워지면 더 이상 수고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안식하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좋았다는 것은 사람의 빈자리에 하나님의 형상과 숨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온전히 있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안식하셔도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창조가 끝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의 몸과 삶이 하나님이 거하시게, 하나님이 채워졌을 때 그 모습이 바로 온전한 성전이 된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산 제사요, 영적 예배며 그것이 온전한 헌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헌신예배라며 한복 입고 특송하고, 또 헌금하고,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자고 각오를 다지는 것이 헌신이 아니라, 이 육신을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온전한 성전으로 여기고 하나님이 거하시게 순종하는 것이 바로 헌신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몸에 거하시는 것을 순종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육신의 삶을 부정한 것으로, 연약하고 감추어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몸을 절제하고, 훈련하고, 노력한다. 몸이 연약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그 수고를 헌신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헌신은 하나님께 몸의 수고나 공로나 재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드리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려면 이 몸을 가진 인생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삶이 하나님께 드릴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데서야 어떻게 드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헌신하는 삶이 되려면 이 육신을 가진 삶이 아담과 같이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순종하고 보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자기 삶의 본질을 하나님으로, 빈 그릇과 같은 인생을 하나님을 모심으로 몸이 성전이 되고, 삶이 산 제사와 영적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헌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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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신앙 여정 요약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30. 17:32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은 반복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이스라엘의 조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려는 사람의 심령이 변하는 여정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사람의 심령이 세상에 속했다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을 낳을 수 있는 삶에 이르는 여정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간단하게 요약해 보았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과정은 거의 비슷하다. 사람의 처한 환경이나 사고방식, 그리고 각 개인의 성향에 따라 각 과정을 거치는 시간(크로노스적인 시간)의 차이나 과정을 겪는 심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여정을 겪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점점 바뀌기 때문이다. 그런 여정은 대부분의 사람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먼저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 전에 세상에 대하여 인식한다. 태어나면서, 철이 들면서 세상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태신앙이라도 다를 바 없다. 모태신앙이라고, 하나님을 믿는 집에서 태어났다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 알게 된 하나님의 인식을 바로 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도구요 수단이요 형식인 사람의 육신을 가진 삶이 세상 안에 보내지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신앙의 여정을 세상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은, 아니 어디에 속했다는 것이나, 성경에 많이 나오는 것과 같이 어디 아래에 있다거나 어디 안에 있다는 것은 그것의 법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세상에 속했다면 세상의 법을 따른다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속했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의 법을 따르는 생명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 속한 상태로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법대로 사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창세기에서는 흑암이 혼돈하고 빛이 없고 어두운 상태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사람은 하나님의 법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창세기의 천지창조 과정 역시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안식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존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그렇다. 그 고향 땅은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 즉 위대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땅이다. 즉 아브라함 역시 세상의 가치관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정체성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인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의 자리로 떠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뜻 안으로 들어가려는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성경을 이렇게 보지 않으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그냥 이스라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에서 떠났다고 바로 하나님의 정한 자리로 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곤란하다. 떠나라 했으면 단숨에 인도하실 것이지 뭐 그렇게 복잡하고 이래라 저래라는 것이 많으냐는 식의 태클은 다분히 사람의 생각이다. 사람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편하고자 하는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여정은 여러 과정을 거쳐 간다. 아브라함이 롯과 함께 다니다가 애굽을 사모하는 롯과의 갈등이 있었듯이 세상의 가치관을 떠나서 하나님을 믿는 자리로 가기 시작해도 세상의 것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필자도 처음 이 복음,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라는 안목이 열리고서 마음에 ‘그래도 돈이 있으면 더 복음을 누리는 삶이 더 좋지 않을까?’와 같은 생각을 떨치는데 정말로 적지 않은 세월을 보냈다. 그 시절을 한 마디로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위로함이여 만족이 되라!”라고 했다. 복음을 아는 것이 힘든 삶의 위로가 되기는 하지만 만족이 되지 않았는데 만족이 되기를 소망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정들을 거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은 것과 같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고자 하는 사람,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삼으려 하고,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더 알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런 사람들이 모이고 만나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손자에 때에 이르러 야곱에게서 12아들이 나오고 12지파가 되어 나라가 된 것 같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여정이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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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을 번제로 드린 아브라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26. 15:56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을 논함에 있어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에 따른 것을 빼 놓을 수 없다. 이 말씀은 정말로 대단한 순종의 말씀으로 회자되지만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은 참 고약한 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의아한 요구를 했고, 그것에 보통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지만 아브라함은 따랐다는 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까? 그리고 이 말씀은 정말로 어떤 말씀인가? 순종에 관한 말씀인 것은 맞지만 정말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순종하는지 시험(test)해 보시려한 것 그것이 이 말씀의 의도인가 하는 점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고행에서 불러내어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이끌어내신 택한 사람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지만 아들이 나지 않자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보려고 이스마엘을 낳아도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하지 않으시면서 끝내 주신 아들이 이삭이다. 그리고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는 것이다.


지금 이 블로그에서 아브라함에 관한 창세기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신앙 여정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누누이 이야기 해 왔다. 그렇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것이 위대함을 좇는 가치관으로 살던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간의 정체성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는 자리로 이끄심이듯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것 역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여정에서 반드시 있는 일이라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존재이며, 그것은 또 오늘 창세기의 말씀을, 또 아브라함과 이삭에 관한 말씀을 읽고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이 이삭과 같은 것이며,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것 마저 바치라고 하시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바로 이 말씀을 바로 보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알기 위하여 먼저 아브라함의 여정을 잠깐 돌아보자. 아브라함의 고향은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았던 땅이다. 땅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 그 자체이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있던 땅은, 위대함을 좇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흙으로 벽돌을 만들되 그 안에 짚을 넣고 또 굽기까지 한 것과 같이,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는 하늘에 이르지 못한다고(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서 세상의 지식과 재물과 공로와 고상함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치장하여 하늘에 이르려 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고향이고, 또 오늘날도 하나님을 온전히 알기 전에 사람들의 삶이고 가치관이다.


그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가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 인생의 자리, 삶의 모습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고향과 같이 사람이 위대하게 되어 하늘에 이르는 자리가 아니다. 아브라함도 롯과 갈등이 있을 때에 그런 위대함을 상징하는 애굽과 같은 땅을 롯이 선택한 다음에 남은 땅을 선택했다. 그랬더니 그 땅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자리는 위대함을 좇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려 하는 본성을 광야로 보내는 여정을 거친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아들이 생기지 않자 자신의 힘으로 낳은 아들인 이스마엘을 광야로 쫓아내는 것이다. 즉 행위로 성경을 지켜내려는 것, 소유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율법의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자신에게서 내어 버리는 여정을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서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곧 백세에 아들을 얻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만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심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산에 가서 소나무 뿌리를 뽑는 기도로도 아니고, 성경을 몸을 지켜내기 위하여 새벽기도, 철야기도를 하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니고, 1월 한 푼 틀림없는 십일조를 드리려 노력하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닌 자리에서 난 자라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니?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 자신의 능력으로 얻은 것도 아니고, 또 위대함을 좇은 것도 아닌 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것인데 그것을 왜 번제로 달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과정에서 정말로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안다면 어쩌면 놀랄지도 모른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생각을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관한 것은 양보 못한다.’는 식의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걱정을 한다. ‘세상에 동성애자가 많아지면 세상이 어지러워진다.’는 생각, ‘신천지와 같은 이단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니 기독교인들이 막아야 한다.’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런 생각과 외침을 대할 때 정말로 마음속에 강력하게 드는 질문이 있다. ‘하나님이 그것도 처리 못해서 네가 걱정하고 돌봐야 하는 분이냐?,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창조주로 믿는 믿음의 본질이냐?’라는 것이다. 어떤가?


그리고 또 교회에서도 그렇다. 하나님의 뜻을 지킨다며 사람을 내어 쫓고 서로 다툰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삭을 지키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죽거나 손상당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상처 준다. 이삭을 지키려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걱정하는 것,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고 사람이 나서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세상에 외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다 이삭을 지키려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그렇다. 십자가를 지러 가는 말린 제자들은 다 이삭을 지키려 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 보이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그것을 보이시려 하는 하나님의 뜻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지 못하게 하려 한다. 그것이 사람들이 사회적인 문제에 하나님을 걱정하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에게 상처주고, 신앙을 지킨다면서 다투고 사람에게 상처 주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이삭을 바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아브라함에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창 22:12)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증거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 마저 주관하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앙 안에서 신앙적으로 귀하면 귀할수록 지키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뜻을 이루심과 같이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의와 가치관과 신앙의 귀한 것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요구 받을 때 내어주는 자리에 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나 신앙심이 좋다는 사람들에게 각성을 요하는 말씀이다. 신앙이 좋은 사람들은 늘 신앙으로 사람들을 심판하려 한다. 이삭을 바치지 않겠다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결국 신앙을 권력으로 삼는 것이다. 교회에서 신앙이 좋은 사람이면 좋은 사람일수록 신앙 없고, 세상적인 사람들이 그를 편하게 여기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는 것에 순종한 삶이다.


하지만 많은 교회와 신앙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 목사나 목자나 자기들끼리 사도라고 하는 사람들 앞에 가면 왠지 신앙이 없는 것이 들통 날 것 같은 두렵고 긴장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이 좋은 신앙을 지키려고 날이 서 있기 때문이다. 이삭을 바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질 수 없고, 좋은 신앙은 무시당하거나 손상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가장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존재인 이삭을 바치는 것이나, 이 세상에서 가장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 받고자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간다는 사람들은 정작 신앙적으로 귀한 것을 지키기 위하여 그렇지 못한 사람들 앞에서 죄인이 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거룩하고 높은 강대상으로 또 만나기 힘든 자리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삭을 바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안다면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것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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