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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뭐고, 악은 뭔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1. 10. 21:55 Writer : 김홍덕

죄는 누구나 이해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생각하는 죄와 사람이 생각하는 죄의 개념이 다르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예수님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죄는 달랐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창녀와 세리가 죄인이라 여겼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보고 악한 세대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사람들의 행위를 기준으로 죄를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생각하는 죄는 행동의 결과나 모양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 곧 정체성이다. 생명의 유전자가 생명의 모든 행동과 생김새를 결정하듯,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졌는지가 그 사람의 모든 행실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쓴 글에서 하나님께서 죄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그 의를 나타내려 하시려고 사람을 지으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들어가면 사람의 정체성이 회복되어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죄란, 그렇게 되지 않은 상태에 사는 인생의 상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주기도문에서 죄는 빚(debt)을 말한다. 즉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빚진 자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께 돈을 빌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이 전구를 사거나 만든다는 것은 빛을 밝혀 주기를 바라는 목적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전구의 위치에서 보면 자신을 만들거나 구매한 사람의 목적을 빚진 것이듯,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는 목적, 그것이 바로 빚이다. 그것이 죄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법으로 또 도덕적으로나 사회 문화적으로 죄나 몹쓸 짓으로 여기는 모든 것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행동에 대한 것들이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도 그런 것을 죄로 여긴다. 그것은 나쁘거나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죄의 본질이라 여기는 것은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 죄를 해결하는 것을 신앙의 방향과 가치관으로 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확히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죄,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이 행동으로 지은 죄는 다름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 하나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난 자리에서 행동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양과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은 바로 선악과를 먹은 마음인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다는 것이다. 즉 어떤 일과 상황에 대하여 자기가 가진 의를 다른 사람에게, 또 사회와 상황에 주장하고 관철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다투다가 상대를 때린다는 것은, 자신의 주장을 자신이 가진 무력으로 관철시키려 한 것이다. 즉 그 상황을 관장하는 하나님이 되려 한 것이다. 자기 생각이 옳고,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했기에 남에게 그런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인식하는 모든 죄는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목적대로 사람이 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육신의 삶을 본질로 오판하고서 그 눈에 보이는 것 안에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주장하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연약하다고 여기는 사람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려 하시는데, 사람들은 육신의 능력을 강하게 하여 이기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죄, 곧 자기의 존재 정체성의 목적을 떠난 자리에서 살다보니 그 삶에서 비롯되는 것, 그 하나님을 떠난 마음이 표현되는 모든 것이 사회적으로 또 서로에게 상처와 갈등을 주는 죄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죄에서 구하시려 한다는 것은 그런 다툼에서 구하신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구하려면 근본 원인, 죄의 뿌리를 뽑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 안으로 회복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회복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도덕선생으로, 죄를 짓지 않게 계도하는 선도로서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뜻이 무엇인지를 보이시러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되셨다고 하는 것이다.


그 뜻은 사람이 아담이 먹은 선악의 기준으로 볼 때 한없이 부끄럽고,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을 것 같은 이 연약한 육신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즉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예비 된 존재라는 것, 이 육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사람이 자기 운명으로, 삶의 목적과 의미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사람들이 세상의 안목으로 자신을 볼 때 연약해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할 것 같고, 또 자기 안에서 나오는 인간의 본성을 세상의 도덕적인 기준으로 볼 때 너무 탐욕스럽고 추해서 그것들을 이겨내야 할 것 같은 육신을 가진 모습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안식과 평안을 주는 것, 그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가 되는 것과 같아지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의 모습 그대로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이라는 것이나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니,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악한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악은 그것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에 반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지 못한 상태라면, 악은 하나님의 창조목적,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사람이 가진 가치관으로 죄로 여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죽어야할 죄라고 하는 것이 악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성인으로 오시지 않았다. 육신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로 오셨다. 이것은 인생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 목적인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가능성의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죄라는 것은 사람이 인정하면 구원이 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인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니, 그것은 당연히 ‘이제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육신을 가진 삶’을 살겠다는 인식이 있어야 가능한 고백인 것이다. 그 고백의 기조가 바로 ‘천지창조’고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라는 명제의 정체성은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면 구원이고, 그렇지 않고 끝내 눈에 보이는 육신의 삶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자기 삶의 본질로 여기면서 살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믿는 이름으로 또 다른 의를 세상에 주장하면서 남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불편하게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산다는 것은 결국 육신을 가진 인생이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만드신 온전한 존재이며, 이 육신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으며, 그런 아들이 된 인생은 또한 하나님의 뜻을 삶으로 보이기에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고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부인하고, 그런 생각과 말과 삶을 부정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 그것이 악한 것이다. 그 악함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안에 속한 삶을 살지 않고 있는 상태라면, 악함은 그 상태가 선한 것이고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악함인 것이다. 죄는 사람이 스스로가 (아직)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지 못했음을 인정하므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나,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 아담이 부끄럽게 여긴 이 육신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나타낼 바로 그 존재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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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죄를 만드셨을까?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1. 10. 00:21 Writer : 김홍덕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또 언제나 세상을 경영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근간이다. 한편으로 보면 그것을 믿는 기독교 신앙인들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이것을 고쳐달라고 기도하고, 교회(기독교)가 이것에 앞장 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세상이 잘못 만들었고, 하나님이 경영하신다는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책임지시오”와 같은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신으로, 또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 믿는 것인데, 그렇게 하나님이 경영하신다고 믿는 세상을 잘못된 것으로 보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모습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이다. 세상을 바꾸어 달라고 제사를 드리는 것 보다,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할 때 그것에 순종하신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신앙의 영점을 조정하고 보면 이곳에도 의문스러운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죄와 같은 것이 과연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죄를 만든 것인가?’ 또 ‘사람이 타락할 것을 하나님은 몰랐단 말인가?’와 같은 의문들이 그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부분이 해결인 안 되니, 하나님이 세상을 경영하신다고 믿으면서 아이러니하게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부르짖는 신앙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일단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고쳐달라고 부르짖는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당신이 만든 것이 잘못되었으니 똑바로 하시오’라는 말이 즐겁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세상을 주관하시는 신으로 믿는다고도 할 수 없는 행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죄를 만드셨을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욥기의 시작부에 하나님과 사탄이 만나서 욥을 시험하고자 하는 토의(?)를 하는 장면을 보자. 그 장면에서 사탄은 하나님과 대등하게 맞서 싸우는 상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하나님께 동의를 얻고, 또 하나님께서 그은 선을 넘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들이 성경 말씀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을 사탄의 유혹에 의한 것이라고 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나님께 사탄을 이길 힘을 달라고 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탄과 싸워 이기시리라 믿는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악이 대결하는 구도로 본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이분법이다.


하지만 전지전능하신 만유의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사탄도 마귀도 죄도 있을 수 없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온전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은 세상의 일부를 마귀와 악에게 빼앗기고 그 빼앗긴 세력에 의하여 창궐해지는 죄와 싸우는 정부군 정도에 불과한 신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 구도라면 사람은 선과 악 중에서 어느 한 세력을 선택하면 되는 상황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사탄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것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사탄도 그냥 두고, 죄도 그냥 두시는가? 싶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만드셨고, 왜 사람을 만드셨는지의 문제를 바로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세상도 사탄도 심지어 죄도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죄를 터부시한다고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고 무지며 어두움이다. 무엇이 죄인지를 모르고, 하나님의 통치 이념, 곧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그 의(義) 아래 있는 사람의 존재 목적을 몰라서 그렇다. 그것이 바로 흑암이다. 즉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기 전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증빙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했다.(롬 3:9) 이것은 중요한 말씀이다. 죄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다르게 보면 죄 위에 있느냐 아래에 있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죄는 사람의 정체성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세상에 있는 것인데, 그 죄와 사람의 관계를 놓고 볼 때 사람이 그 죄의 영향력 아래에 종살이를 하느냐 아니면 죄를 다스리는 뭐랄까? 죄보다 더 높은 정체성에 있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는 무엇인가? 사람의 정체성에 무관하게 이미 세상에 있는 죄의 정체성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죄는 이 블로그에서 수도 없이 언급한 바와 같이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정확히는 어떤 존재라도 그 존재하는 목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면 다 죄인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의 말씀으로 본다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존재의 목적 밖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었다고 하시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시작은 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창조되면서(이 땅에 태어나면서) 시작된다. 즉 목적 아래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목적을 이룬 상태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을 때, 사람으로서의 의사 결정을 시작하는 그 시점이 되었을 때, 그 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로 삼을 것이냐 아니냐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을 맞이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것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사람의 시작은 죄를 시인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육신의 삶을 본질로 알아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망각하고 사는 시절에서 출발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바벨탑의 땅에서 떠나는 것으로 시작하고, 창세기의 천지창조도 흑암과 혼돈에서 시작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도 죄를 자백하는 것, 자신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그 목적 안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여정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삶에서 잉태되고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장성한 분량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이해가 되려면 먼저 창세기 천지창조의 시간 개념을 정리해야 한다. 아니 ‘시작(the Beginning)’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창세기의 시작을 객관적인 시간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시작은 한 개인이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시작이라는 것을 이 블로그 창세기에서 설명했다. 그렇다는 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태초 이전의 세상을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즉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하나님의 세계 이전의 삶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만드신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이 또한 무엇이 본질이냐 하는 문제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사람의 외모 곧 생김새가 하나님의 형상에서 온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형상이 없으신 영이시라고, 그림자조차 없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바위를 쪼개는 바람으로도 나타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시기도 하는 분이시다. 즉 그 가지신 의를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물리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으로 나타나시는 의(義)의 본체이신 분이시다.


창세기의 천지창조 과정이 몇일에 걸쳐서 진행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육신으로 나는 순간 바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을 나타내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육신으로 날 때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이룰 가능성의 존재, 그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가능성만 있기 때문에 아직 그것이 자기 삶이 되지 않았을 때의 삶은 어두움이고, 흑암과 혼돈이며, 죄의 상태인 것이다. 아직 목적이 자기 것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직 훈이가 타지 않은 로봇 태권브이의 상태인 것이다. 그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뜻하신 목적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기까지 6일이 소요된다는 것이다.(‘6’은 사람을 상징하는 숫자다. 즉 사람이 6일째 창조되었다는 것은 6일의 여정이 지나서야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6일은 달력의 6일이 아니라 상태의 과정이라고 창세기에 언급했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 아직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았을 때 그 사람이 죄 가운데 있는 상태로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라는 명제 혹은 상태를 따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만물을 지으신 목적을 가지심으로 인하여 파생된 하나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상태로 나타내지 않으셨다면 아마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며 뜻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하나님의 목적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에 이 목적대로 살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것이다. 법정주의가 바로 이것이다. 법이나 기준이 없으면 죄가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면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에 관해서는 따로 언급할 일이 있겠지만, 간략하게 말한다면, 그 시절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기준이다. 그것이 율법인 것이다. 그러면 이 블로그에서 성경을 시대적으로 신약과 구약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어떻게 되는가? 


성경을 보는 관점에 있어 달력의 흐름 같은 객관적인 시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오신 시점이라는 객관적인 시간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서고, 그 이후에는 예수님과 성령님께 맡겼다는 것을 객관적 시간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 역시 한 사람 안에 있는 과정의 여정이다. 구약 성경이라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것을 설명하는 하나님의 섭리고 또한 말씀이다. 


그 수천 년의 역사나 천지창조의 과정이나 아브라함의 여정이나 그 모두가 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이 땅 위의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역사를 통한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게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 긴 역사를 통해서 한 사람의 여정을 설명하시기도 하신다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시간을 달력의 흐름 같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라기보다 어쩌면 부산물 같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크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알지 못한 여정이 큰 것이 죄가 큰 것이다. 목적을 알지 못하고 살면서 발버둥 치고, 그 안에서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의를 주장하는 삶의 많이 살았다는 것, 그것이 죄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크다는 것은 그런 삶이 회복되었을 때 그 은혜가 크다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적을 자신의 운명으로 알고서 살아가기 전의 여정이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죄다. 그래서 그것을 인정할 때 구원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죄를 시인하면’ 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죄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그 안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과 기대 안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존재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구원이고 회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를 왜 만드셨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람 만드신 목적이 있으시고, 사람이라는 존재가 나면서부터 그 목적을 이루며 사는 존재가 아니기에 그 목적을 이루어내기 전의 상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신 것이다. 상태의 자리를 물으신 것이다.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다. 몸의 어느 부분의 세포라도 다 같은 DNA가 검출되듯,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그 하나만 온전히 알고 믿기만 해도, 죄나 사탄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그 존재의 정체성과 목적을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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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1. 8. 13:37 Writer : 김홍덕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이라는 단서를 붙이시고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고 하셔서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생각하면 먼저 엄청난 사건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지신 십자가’라는 것도 그렇고, 십자가의 형틀이 가진 형벌로서의 공포와 고통은 육신을 가지고 바늘에라도 찔려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끔찍하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고통을 감수하면서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한 사람이 그 고통을 대신 감수했다는 것이 그렇다.


그런 탓인지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스케일이 자못 크다. 마치 인류를 구하는 영웅과 같이 신앙적인 큰 역사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고, 할 상황이 되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행운 같은 은혜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지만, 문제는 누구나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복음이라는 것이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인데, 십자가를 지는 것에 있어서 누구는 할 수 있고, 누구는 할 수 없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십자가를 생각하는 시작점의 하나여야 한다. ‘너는 질 수 있는데, 나는 질 수 없는 십자가다’ 라면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한 복음을 전하러 오신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그것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있고, 그 기준 이상의 사람에게는 질 수 있는 십자가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온 인류를 위하여 오신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십자가를 지는 것에 있어서 어떤 이들은 세상도 공감하는 위대한 헌신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보잘 것 없고 미약한 사람 역시 질 수 있는 십자가이어야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이다. 그래야 모든 인류를 위한 십자가고,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이 공의의 십자가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질 수 있다는 그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는 죄인의 형들이다. 죄인을 벌하는 기구라는 것이다. 그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졌다는 것은 예수님은 그 형틀을 적용하는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을 죄인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는 사형을 집행하는 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죽은 죄인이 된 죄목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했다. 즉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 죽을 죄인이라는 것이다. 정확히는 유대인의 왕이 아닌데,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세부적인 내용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정치적으로 본 반역의 죄 외에 더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 그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더니 죽어야 한다며 죽인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죄목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이기실 능력이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바다 위를 걷고, 죽은 자도 살리신 분께서 정작 자신이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는 그 능력이 다 어디 가고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무력하게 돌아가셨는가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전하시려 했는데, 정작 당사자이자,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아는 아들 본인이 죽어 버리면 누가 하나님의 뜻을 전할 것이냐 하는 것도 생각지 않고, 그 많은 능력들을 뒤로 하고 그냥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가 하는 것은 너무 이상하지 않는가?


바로 이 의문이 해결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절대로 그 본연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의문이 바로 십자가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의문을 가진 채로 십자가를 지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 그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인류에게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 그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 되는 것, 그래서 죽을 죄인이 되어 자신의 육신을 그 죄의 값으로 내어 주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신 뜻의 본질인 것이다. 그것도 죄인도 아니면서 죄인이 되어서 죽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고 죽으실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일반적인 가치관이나 상식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죽으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보이심으로 자신을 믿게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 계획과 법은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죽임을 당하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법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그 법이 바로 십자가의 도고, 하나님의 계획이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에 그 육신이 운명적으로 십자가를 질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면 어리석고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은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 오늘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미가 있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르게 표현해 보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어 죄인이 의인이 되게 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온전한 의인이신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인이 의인인 예수님을 죄인이라 하는 것을 감당하시고 죄인이 되셔서 돌아가셨는데, 그 모습을 보고서 죄인이 예수님과 같은 의인이 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보면 십자가는 진정으로 죽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죽음은 육신의 죽음은 아니다. 이 죽음은 의에 대한 죽음이다. 즉 내가 가지고 있는 의, 즉 ‘이것이 옳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죽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온전한 의를 가지신 분이지만 그것을 나타내시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르고 모욕했다고 하는 죄목을 순종하신 것이 그것이다.


의가 죽는다는 것은 그 스펙트럼이 아주 넓다. 아니 사람이 가진 삶의 모든 영역에 의의 문제가 있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은 자기 삶의 모든 부분에서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하여 오셨다는 것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 모든 곳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것을 보이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의의 죽음이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의의 죽음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고 가는 모든 인류의 모든 삶의 영역 그 이상의 범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신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그 오신 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본체임에도 그 의를 주장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모르는 죄인들의 법 앞에서 죄인이 되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의가 죽으신 것이다. 사람은 그 어떤 인생도 이와 같은 범위를 넘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생의 의가 죽는 것 이상이기에, 인생의 모든 허물을 덮으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의의 죽음 그 이상을 보이심으로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자신의 의를 죽이고, 분명히 자신이 가진 의가 더 온전함에도, 그 의를 모르는 이들의 의 앞에 온전히 죄인이 되는 삶을 육신으로 살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사람이 살면서 부딪히는 모든 의의 충돌 앞에서 죄인이 되어 자신의 육신으로 수고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삶은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소금에 찍어 먹자는 아내(남편)의 뜻에 따라 주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런 작은 삶의 모습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의 시작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십자가의 삶이라고 생각하면 의아하게 생각한다. 먼저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렇게 작은 일이겠는가 싶은 생각부터 한다. 그러나 이 글의 서두에 밝힌 바와 같이 누구는 할 수 있고, 누구는 할 수 없는 일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1+1을 계산할 수 없는 사람이 미적분을 할 수 없듯이 삶의 그런 작은 부분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는 것에 있어 가장 핵심은 남을 위하여 그렇게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고 헌신하는 것이 가진 방향성이다. 즉 사람 안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있어서 그렇게 산다면 그것은 온전한 십자가의 삶이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십자가의 삶이라고 하니 자기 안에 그렇게 살 이유나 생명도 없으면서 그렇게 사는 것은 바로 외식이다.


그렇다면 그 생명은 어떻게 사람 안에 있게 되는가? 그것이 바로 성령의 잉태하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잉태되듯 심겨지고 그것이 자라서 육신이 되는, 즉 자기 육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되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이 없는데 아무리 남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삶, 십자가를 지는 삶의 모양을 보인다 해도 그것은 모두 소리 나는 꽹과리와 같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면 온전한 의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가진 하나님 앞에서 죄악 된 의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심과 같이 자기 의를 죽이고 자신의 육신의 수고를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산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사람의 헌신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질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성경의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늘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겠는가? 세상은 고사하고 자기 속도 시끄럽지 않다. 자기 생명이 그래서 그런데 왜 억지로 하며 속이 시끄럽겠는가? 고양이가 ‘야옹’하는 것이 짜증나겠는가? 그것이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서 남을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하는 육신의 삶은 자신에게도 힘들지 않고, 세상도 혼란스럽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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