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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할 때 강함 되시네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5. 12. 28. 17:33 Writer : 김홍덕




약할 때 강함이 되신다는 것은 CCM으로도 유명할 뿐 아니라 신앙에 있어 기초적인 룰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약할 때 어떻게 강함이 되시고, 우리는 또 어떻게 강하게 되는지는 분명하게 알고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기도하거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약할 때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자신이 강해지는 것을 <약할 때 강함 되심>이라고 생각하는듯 하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하게 아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것이 맞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한 없이 약한 상태였는데, '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는가?' 하는 문제를 풀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약한 것으로 보면 그렇다. 그런 관점은 또 십자가에서 내려 오는 강력한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 또한 강함이라고 생각하는 안목인 것이다. 그러니까 약할 때 강함이 되신다는 것을 온전히 알고자 한다면 무엇이 약함이고 무엇이 강함인지를 바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약함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사람이 자신이 가진 생각에 육신이 미치지 못함' 그것이 사람이 생각하는 약함의 총칭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강함은 그런 사람의 한계를 극복하는 놀라운 능력을 하나님의 강력한 권능이라고 여긴다. 물론 하나님은 그런 능력이 있고, 그것은 분명히 강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런 강함을 가지기 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그런 강함, 곧 자기 생각대로 되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 보실 때 좋은 것이라면 사람을 만들 때 그렇게 만드시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성을 빼앗는 자 보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강하다고 하시기도 했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의 강함이라는 것은 무력이나 초능력이 아님이 분명하다. 단적으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자기 모습이 벌거벗었음을 부끄러워하여 몸을 가렸다고 했는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때 마음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먹고 보니 선악과로 인하여 밝아진 안목으로 보니 자신이 가진 몸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는 부끄러운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즉 자신은 하나님과 같은 강함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람의 강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인생을 볼 때 그렇게 연약해 보이는 그 육신을 가진 삶 그 자체가 바로 강함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같이 세상을 만드는 신적 능력과는 비교도 안 되고, 물 위를 걷는 능력도 없으며, 하늘도 날지 못하고, 바닷 속에서 숨도 쉬지 못하며, 수고하지 않으면 밥 먹을 돈도 얻을 수 없는 그런 인간의 연약한 모습, 그것이 바로 사람이 가진 강함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강함도 그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의 한계와 무능을 다 드러내고 벌거벗겨져서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린 약하디 약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는데, 그것을 본 사람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고,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임을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그야말로 강하고도 강한 능력이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이 연약한 존재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을 내용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이 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약할 때 강함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이, 더할나위 없는 초라하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 그 마저도 죄인으로 사형을 당하는 그런 연약한 그 모습을 보이실 때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놀라운 강함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할 때 강함이 되신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이 사람이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볼 때 그지없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그 때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 그것이다.


그러므로 약할 때 강함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약해지면 태권브이나 아이언맨이 나타나듯 하나님께서 우리 약함을 메우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기준으로 정말로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강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약할 때 강함이 되는>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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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다. 안식일에 유대인들은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율법을 지켰다. 안식일은 쉬는 날이니까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맞다. 하지만 ‘무엇이 안식인가?’ 하는 것과 ‘안식일은 어떤 요일이나 날짜인가?’하는 것을 알아야 안식일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는 관점에 있어 의미적인 해석을 알레고리컬한 해석이라며 경계한다. 예를 들면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에서 토요일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가 안식인 사람이 보내는 날이 안식일이라고 하면 그것을 경계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경계하는 것이야 자기 마음이지만, 그렇다면 그렇게 해석을 하지 않을 때 모든 사람이 지킬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안식일은 언제인지를 제시해야 마땅하겠지만, 현대의 기독교가 지키는 주일은 안식일과는 전혀 다른 시간이다. 그러니까 이런 해석 역시 알레고리컬한 해석의 부류인 것이다. 즉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식으로 성경을 보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해석이 맞는 것인가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설명하시고, 예수님의 관점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핵심이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중에 유대인들과 안식일에 대하여 끊임없이 마찰을 빚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유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것을 굽히지 않으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그렇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고,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렇다는 것을 보이신 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도 예수님과 같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심으로 병자를 고치셨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일이라고 보았다. 자기가 누웠던 자리를 들고서 걸어가는 것이 본질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것은 쉬는 것이 아니라 노동, 곧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안식일은 몸이 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안식일은 사람이 자기 자리에 돌아가는 것이 안식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있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하실 일을 다 하셨기 때문에 안식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안식이므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라 육신의 힘으로 자신을 회복하는 자리에서 늘 죄인으로 있던 병자에게 그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로 돌아가라고 하심은 진정한 안식이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해야 할 온전한 일을 하신 것이다.


안식은 목적이 달성된 것이 안식이다. 집에 있는 부엌칼은 시간을 정해놓고서 쉬는 것이 아니다. 칼이 쉬는 안식일은 자기가 자를 것을 다 자르고 나서 맞이하는 시간이 바로 안식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때에 사람을 만드시고서 안식하셨다는 것은 천지창조의 목적과 하나님의 일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나오는 것,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날을 맞이한 사람이 사는 날은 모두 안식일인 것이다. 그래야 천국에서 영원히 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천국은 일하는 것이 없으니, 그 사람의 삶 자체가, 존재 자체가 안식을 맞이하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안식일은 달력에 표시된 크로노스적인, 객관적인 시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상태에서 보내는 시간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는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두신 목적 안에 들어 있는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사람의 상태, 그것이 바로 안식의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38년 된 병자에게 육신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는 자리는 너의 자리가 아니니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 그 본질로 네 자리를 옮기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안식이기에 안식일에 그런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하나님께서 사람 창조하신 목적이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가 되는 그 안식의 자리로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것이 바로 창조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있다고 하는 생명의 세계에 속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경쟁의 세계,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그 세계가 자신의 존재 목적이나 존재의 정체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원래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고 하나님의 일이며,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것이 또한 예수님의 일인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은 아버지의 일과 같은 것이고, 예수님이 자신의 뜻대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일하시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또한 하나님과 동등 되게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일과 안식일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달력에 표시된 날 교회에 가는 것을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안다. 그리고 그렇게 안식일을, 주일을 지키러 가서는 그렇게 오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대책을 강구하고 심지어 심판도 한다. 무엇이 본질인지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 그런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그 사람 안에 온전히 회복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그런 상태의 사람이 보내는 모든 날이 안식일이다. 안식일이 언제냐며 교파가 갈라질 일도 아니고, 주일날 11시 예배에 가지 않으면 주일 성수가 아니라고 할 일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 있는지 아닌지, 그것을 아는 것이 안식일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런 안식에 들도록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이러 오셨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그것이 안식이고 하나님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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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1-18)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26. 17:37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명절을 지키러 올라가시다가 베데스다 연못이라는 곳을 지나셨다. 그 연못에는 가끔씩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하는데, 그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다 낫게 되는데 그곳에 38년간 물이 동하기를 기다린 병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가 이미 오래된 줄 아시고, 병자에게 다가가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이에 그 병자는 물이 동할 때에 자신을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다른 사람이 먼저 물에 들어가므로 자신이 낫지 못하였다고 대답을 한다.


이 말씀은 정말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는데 있어서 남보다 더 빨라야만 하는 세계에 있어 이 38년 된 병자는 늘 죄인이고 패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천사가 물을 동하게 했을 때, 육신의 능력으로, 혹은 사회적 능력으로 돕는 사람을 통해서 가장 먼저(피라미드의 꼭대기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38년 동안 있었지만 들어가지 못해서 병을 고침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병자의 모습은 서로 경쟁해서 이겨야 영광을 얻고 목적을 달성하는 세계에서 패한 모든 인생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이는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볼 때 이 사람은 절대로 자신이 가진 병을 고침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신앙 안에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법, 남들보다 먼저 물에 들어가야 하는 법, 어떤 기준에 있어 남들보다 강한 육신의 능력이나 사회적인 능력이 있을 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그 법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유대인들의 법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지금 이 세대의 기본적인 생존 법칙이고, 더 황망한 것은 대부분의 교회가 가진 신앙의 법칙이기도 한 것이다.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이 장로가 쉽게 된다는 것은 물이 동하였을 때 먼저 들어갈 돈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그런 경쟁하는 자리에 두고 있었다. 자신은 그럴 능력이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경쟁해서 자신의 병을 고치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께서 낫고자 하느냐고 물을 때에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고백한다. 남들보다 빨리 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이 법에서 자신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즉 성경이 말하는 대로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이다.


이 사람의 죄는 두 가지다. 하나는 경쟁해야 이기는 법,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선인 법으로 볼 때 이 사람은 헤어 나올 방법이 없는 죄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심각한 죄는 그런 존재임에도 그 자리에 자신의 자리를 두고 있는 것 그것이다. 이 두 번째 죄가 바로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에 ‘다시 죄 짓지 말라(요 5:14)’고 하신 그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고치신다. 그 고치시는 말씀은 병이 나았다고 하심이 아니라,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것이었다. 즉 너의 자리를 이곳에 두지 말고 떠나라는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자리(where)는 하나님께서 범죄 한 아담에게 물으시는 그 자리이기도 하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신 그 자리와 같은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서로 경쟁하여 이긴 것을 선으로 여기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자신의 벌거벗음이 부끄러웠던 것은, 자신의 정체성으로는 이겨서 선에 이르기에 너무 부족해서 부끄럽다고 여긴 것, 그것이었다. 지금 이 병자도 그런 경쟁의 자리에서 죄인으로 자기 자리를 깔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떠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렇게 자기 자리를 들고 일어나서 간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시고 안식하심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그렇게 경쟁해서 이기는 것이 선이라고 여기는 자리에서 떠나면 그 사람에게 진정한 안식일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이 안식일인 것이고, 안식이란 또한 사람이 이 죄의 자리에서 떠나는 것 그것이 안식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은 물이 동했을 때 자신의 능력으로 물에 먼저 들어가서 몸이 낫는 것처럼 육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구원은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렇게 육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사람의 정체성이 육신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의 구원은 바로 그 자리에서 떠나는 것 그것에 있다는 것이다.


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가 육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또한 우리 안에 갈급하고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 말씀을 기록하신 이유이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의 일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는 것은 이것은 또한 예수님을 믿고 그 생명대로 살고자하는 이들의 일이다. 즉 육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리를 떠나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고, 예수님의 일이며, 또한 우리의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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