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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아비멜렉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18. 13:56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다른 남자에게 빼앗길 뻔 한다. 한번은 애굽에서고 이제 두 번째로 아비멜렉이라는 그릴 왕에게 또 그렇게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때마다 아브라함을 꾸중하시는 것이 아니라, 속은 죄 밖에 없는 애굽왕과 아비멜렉 왕을 책망하신다는 점이다. 그리고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많은 재물을 주어서 돌려보낸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다른 남자에게 주고서 자신은 살겠다는 남편은 참 비겁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아내 사라가 이복동생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보통의 관념으로는 잘 이해하기 힘든 처사인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책망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순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다른 취급을 받는다는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애굽의 왕이나 아비멜렉이나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그들이 얻어야 할 것이 있다면 아브라함의 아내가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으로부터 얻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의 생명이 된 하나님의 의와 말씀을 취하려고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형식(아내)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와 말씀과 생명이 자신의 것이 되기를 바라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에 관한 말씀은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육신이 여자라도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가지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남자와 같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남자와 여자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굽의 바로왕이나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만나면 그들은 아브라함 앞에서 여자 곧 아내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받아서 자신의 생명이 되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지, 아브라함이 가진 의를 육신으로 표현해낼 형식이라 할 수 있는 아내를 취하려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려 한 일로 아비멜렉의 집안의 모든 태를 닫아 잉태치 못하게 하신 것이 그 이유인 것이다. 사람이 육신으로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삶의 모든 모양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내는 아들의 삶을 살아내는 생명이 되도록 성령으로 잉태케 하시고 또한 그 생명이 자라서 하나님의 의를 더 장성한 분량으로 표현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을 했을까?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애굽왕이나 아비멜렉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브라함이 가진 의를 표현할 형식을 자신의 것으로 취한 것이고,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표현할 형식을 지키려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해를 돕는다면 영지주의를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형식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상태이다. 그 약속을 받고서 아들이 잘 생기지 않자 종에게서 아들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종이 아닌 아브라함의 아내를 통하여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시겠다는 의(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을 자신의 형식이라 할 수 있는 아내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신앙인들의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육신의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겉모양을 지켜내려고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의 교리에 따라) 직장이나 사회생활과 같은 것을 대수롭지 않게 버려버린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런 과정, 그런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 드러나고서야 비로소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전하여 하나님의 의가 삶이 되는 아들과 같은 새로운 생명(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아내와 같은 육신의 삶을 그냥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 관계를 끊어 버린다는 것과 같은 것을 해서는 그 사람(아들)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브람이었을 때, 애굽으로 자기 정체성의 기근을 찾아 갔을 때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인 사건을 말씀하신 것은 개인이 하나님이 지시할 땅, 곧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가는 과정에서 육신의 삶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이고,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고서 또 누이를 속이는 장면을 보이신 것은 우리 자신이 사람의 자리로 가서 다시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알게 하려 할 때도 아내라 할 수 있는 육신의 삶이 가진 것들을 그냥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아내가 없으면 어떻게 아들을 얻겠는가? 그와 같이 우리의 삶도 이 육신의 삶이 없으면 어디에다가 하나님의 의를 담을 것이며, 또한 다른 이들이 하나님을 모른다 하여 외면하고 배척하기만 한다면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얻을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너무 분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앙인들, 특히 오히려 성경에 대하여 계시가 밝다고 하는 이들일수록 더 그렇기도 하다.


몇 번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 해 보고, 잘 안 듣고 못 알아들으면 ‘만나는 시간도 아깝다.’고 돌아서면 어떻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얻을 수 있는지 사뭇 의심스러운 것이다. 예수님은 만나는 시간을 투자한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죄인이 되어 돌아가셨는데, 그 예수님을 따라가고 전한다면서 육신이 가진 여러 가지 삶의 모양과 형편을 신앙에 불편을 준다고, 또 투자를 요한다고, 때로 방해가 된다고 그냥 버려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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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3-22) 성전을 깨끗케 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1. 17. 10:11 Writer : 김홍덕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시간적 순서가 맞지 않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일과 오병이어 사건은 4복음서에 공통으로 나오는 말씀인데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오병이어가 먼저 나오지만 요한복음은 그와는 다르다. 이는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을 순차적으로 따라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이 사람에게 밝아지는 과정을 따라 예수님의 일을 요한 사도가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 (마태복음) 21:12-17 성전을 깨끗하게 하심



가나 혼인잔치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첫 기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맞아 들어가셔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이 이어졌다는 것은 생각해볼 의미가 있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빛이 세상에 왔으나 세상이 알지 못했다.”고 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빛으로 오셨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모른다고 하고서 세례 요한과 나다나엘과 가나 혼인잔치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요한 사도에게 있어 당시의 세상을 볼 때(지금도 마차가지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몸으로 율법(성경) 지켜내는 것이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어두움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일이라는 것은 당시에 제물을 준비하지 못한 이들이라도 제사를 온전하게 드릴 수 있도록 성전에서 제물을 팔고 사는 것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제사라는 것의 형식만 남고 본질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몸이 바로 성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육신이 성전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전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자리다. 그러므로 결국 사람의 육신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요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 본체이자 표상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성전을 깨끗케 하심으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육신으로 율법(성경)을 지켜내는 것이 빛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정리한다면 그것은 <‘이 육신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육신을 가진 삶이 어떤 의미인지를 안다는 것, 아니 그것에 대한 진리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고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육신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바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빛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신앙의 초점은 육신의 문제 해결에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본질이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려고 한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려고 하는 것을 성경대로 사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본질을 모르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엎으신 것은 장사하는 사람들의 판매물품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잘못 인식하고 있는 가치관을 엎은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장사를 하려고 하는 것, 그것을 엎으신 것이다. 살면서 흉한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려는 것, 그것이 바로 장사다. 성전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 이런 것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것을 주실 것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모든 것이 다 샤머니즘적인 신앙이다.


예를 들어 헌금을 떼어 먹었더니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보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헌금을 잘 드려야 한다고 한다. 정말로 그것이 신앙이고 교회에서 할 소리인가 귀가 의심스럽다. 미친 짓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헌금이라는 것은 경제적 보상을 담보하기 위하여 드리는 복채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경제적인 손실을 입지 않기 위하여 헌금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고, 성전에서 비둘기를 파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신앙은 모두 예수님께서 뒤엎으시는 신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도하지 않고 시험 치면 떨어질 것 같아서 기도하고 시험 친다거나, 시험 잘 치려면 꼭 기도하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도가 목적인가? 아니면 합격이 목적인가? 정말로 사람이 세상의 시험에서 떨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협박이다. 하나님을 협박하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화를 내실만 것이다. 그런 것은 신앙이 아니다. 다 미신이다.


사람과 사람의 일과 세상은 모두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의 일과 세상이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되고 경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이 세상을 살면서 먹고 자고 일어나는 것과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렇게 삶이 평안하기 위하여 성경에 기록된 것을 지키려 한다. 지키지 않으면 자기 삶이 평안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그것이 바로 성전에서 비둘기를 파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으로 육신을 위하여 하나님과 장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차에 기름 넣어주고, 세차해 주고 정비해 주기 위하여 차를 사는 사람이 있는가? 천하의 바보도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밥 주고, 돈 주고, 평안해지는 것을 위하여 사람을 만들고 일하시는 바보로 알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이 그 모든 소산을 가지셔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의 기쁨이 됨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인 것이다. 사람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 곧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 되는 것을 위하여야 한다. 그것이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런 빈도부사를 지켜내려면 그런 생명이 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로봇이 사람처럼 움직일 수는 있어도 항상 사람일 수는 없지만, 사람이라는 생명은 자거나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사람인 것이 그것이다.


사람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면 신앙도 믿음도 아니다. 성경도 모르는 것이다. 사람이 감사할 것이 있다면, 그 하나님의 일에 쓰였다는 것,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사용되었다는 것, 그것이 영광스럽고 감사하여 감사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삶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산제사인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신다는데 당연히 그 격이 하나님과 같지 않겠는가? 그것이 진정한 사람의 가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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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의 종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16. 16:36 Writer : 김홍덕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신 것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롯은 여기서 그 여정이 끝난다. 그리고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두 이방족속의 조상이 된다. 그리고 그 아내는 소돔에서 떠날 때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렸다.


소금은 기둥이 되거나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어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소금은 녹아서 없어질 때 존재하는 목적이 이루어지는 물질이다.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것은 사뭇 의미가 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위대함을 좇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나섰지만, 결국은 애굽과 같아 보이는 땅을 선택한 사람이다. 그것은 그 의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의 본성과 생명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그의 아내는 소금기동이 되었다. 소금은 녹아서 없어질 때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냥 기둥이 된 것이다. 롯이 세상을 본질로 아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의를 표현해 낼 아내 역시 소금의 존재 목적을 이룰 수 없는 기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즉 이 사건은 의가 없는 형식의 종말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존재의 목적이 생명이 되어 사람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의 삶이라는 형식은 소금기둥과 같이 아무 의미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소금은 정말로 귀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둥으로나 자기 모양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롯이 가진 의는 목적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의를 표현하는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애굽을 좋아하는 심령이라는 것은 결국 존재의 본질이 아닌 존재의 형식만 남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귀해 보이지만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애굽을 좋아하고 세상을 본질로 아는 의의 종말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짠 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셨다. 소금은 녹아서 형체가 없어지면서 짠 맛을 내는 것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신앙이 그렇다. 하나님의 의와 말씀은 소금기둥과 같이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금물 안의 소금과 같은 것이다.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있으면 겉으로 보기에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른 것이 없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있어, 그 생명이 삶(맛)으로 표현되는 것이 사람(소금)의 존재 목적인 것이다.


그런데 롯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애굽과 같은 땅 소돔과 고모라로 갔다. 롯 안에 있는 의와 생명이 그것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것이 그의 생명이고 본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를 소돔으로 가게 했고, 그 의가 표현되는 아내는 소금기둥이 된 것이다.


그리고 롯에게는 아들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았다. 그것은 그 생명은 의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형식인 여자만 낳은 것이다.(이것은 육신으로 여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롯이 가진 의와 생명은 대를 이어갈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딸들은 하나님과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육신으로 아들을 얻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롯의 딸이 아닌가?


그들은 아버지의 씨를 훔쳐서 아들을 낳았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근친상간의 일이니 지금 시대에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겠지만, 하나님의 의와 무관하게 하나님을 믿는 모든 신앙은 다 롯의 두 딸이 아버지를 취하게 하여 동침하여 얻은 아들과 같은 신앙이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니 사람에게 원하시는 의는 하나님 앞에 사람이 누구인가? 어떤 관계인가? 어떤 생명인가 하는 것으로 아들을 얻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사람(여자, 딸)의 의지대로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다른 신들보다 더 잘 해결해 주시는 신으로 믿어서 그 성과(아들)를 얻는 모든 신앙의 결과(사람들은 이것을 영광이라 오판하기도 한다.)들은 전부 모압과 암몬과 같이 딸이 자기의 의지대로 아버지의 씨(이름)를 훔쳐서 낳은 아들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해서 신학교 간 것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은 다 롯의 딸들의 일과 같은 것이다. 자기 공로와 의지로 신앙을 학문으로 만든 곳에 들어간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고, 그 결과를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의 씨를 훔쳐서 아들을 낳은 딸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신앙 안에 깊이 뿌리박힌 신앙의 타락이다. 즉 소돔과 고모라의 일이 신앙 안에 너무나 많은 것이다.


그렇게 롯이 종말을 맞이했다. 이는 롯이 죽었다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으로 표현된 신앙의 여정에서 아브라함과 친족인 롯의 신앙이 망한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서 롯과 같은 본성이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 함께 나왔던 롯은 아브라함의 친족이다. 그것은 아브라함 안에 롯과 같은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신앙인,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그런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삭이라는 약속받은 아들을 얻는다는 것(얻기 전에) 그런 신앙의 본성은 심판을 받아서 제거된다는 것을 롯의 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소금기둥과 같이 의의 모양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멸망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소금이 녹지 않고 기둥이 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목적이 사람 안에서 녹아서 생명이 되지 않고,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는 신앙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심판 받아 멸망하는 신앙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이고,


롯의 두 딸이 보여준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아닌 자기의 유익, 그러니까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세상을 편하게, 다른 사람보다 나은 삶을 살려고 하는 모든 것은 다 롯의 두 딸이 아버지의 씨를 훔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훔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와 영광이라 칭하는 모든 것은 다, 이방의 조상이요 이방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롯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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