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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이스마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24. 17:20 Writer : 김홍덕

이삭이 태어났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한 아들을 아브라함이 얻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 안에 있는 씨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들로 나타나게 할 만한 의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얻고자하신 뜻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표현될 수 있었기에 아들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자신의 의지대로 낳은 아들인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다. 그것을 본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쫓아낼 것을 요구하게 되고, 아브라함은 고민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내 사라의 말대로 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아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났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날 때 아브라함의 기업을 이어받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재물 중의 어떤 것도 분깃으로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겨우 떡 한 덩이와 물 한 가죽부대가 다였다. 그나마 얼마 가지 않아서 다 고갈되어 죽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종 하갈의 눈을 여시므로 샘이 보여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들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활 쏘는 자가 되었다고 하셨다.


광야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세례 요한이다. 이 세례 요한을 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다. 여자가 낳았다는 것과 광야에 있었다는 것이나 그의 음식이 메뚜기와 석청과 같이 광야의 소산이었다는 것과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아브라함의 의지로 낳은 아들이라는 것은 다 같은 뿌리다. 같은 것을 말한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의지대로 낳은 아들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능력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 아니라 육신의 힘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것이다. 육신의 씨가 맺은 열매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삭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난 아들이다. 육신으로 아들을 낳았다고 할 수 없는 나이에 낳은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아들은 육신의 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낳은 아들, 아브라함 안에 있는 의가 하나님이 보실 때 아들로 표현되어도 좋겠다고 할 그 때에 낳은 아들인 이삭과는 다르다.


율법도 그렇다. 율법은 육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즉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육신의 씨가 맺은 열매다. 육신의 노력으로 신앙의 의를 나타내는 것, 성경 말씀을 읽고서 말씀이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이 행동과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몸으로 지켜내는 것, 그것이 율법이다. 지켜내려는 말씀이 신약이거나 구약이거나 무관하다. 그런 신앙은 다 율법적인 것이고, 그것은 아브라함이 육신의 능력으로 낳은 이스마엘과 같은 신앙의 열매다.


세례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는 것은 여자는 형식이기에 성경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의 최고봉은 세례 요한이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그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은 그 율법적인 세계가 끝나고 예수님으로 신앙의 세계가 넘어가는, 바통을 넘겨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행위로 삶으로 지켜내는 그 어떤 삶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지극히 작은 자 보다도 작은 자가 되는 것이다.


십 수 년 전에 고등학생일 때 필자가 고등부 교사로서 성경을 가르친 청년이 되어 나름 성경을 공부하고 선교사가 될 꿈을 가진 열심을 가진 자로 살았는데 내가 전하는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하여 찾아 왔었다. 처음에 몇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하다가 그 느낌이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시비를 걸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질문을 했다.


“네가 모세보다 크다고 생각하나?” 그러자 머뭇거리면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서 열심히 살다가 네 스스로 모세보다 크다고 생각되거든 다시 찾아 온나(오라).” 했더니 아무 말 없이 가 버렸다.(아직도 안 오는 것을 보면 아직 광야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신앙이 모세가 보여준 것조차 보여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신앙의 세계가 모세와 같이 율법 곧 말씀이 생명이 되어 표현하는 삶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문자대로 지켜내려는 신앙 안에 있었기에 스스로 생각하기에 모세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례 요한은 어림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듯 율법적인 신앙은 세례 요한이 보여준 것과 같이 광야와 같은 신앙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몸으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한 열매인 이스마엘은 광야에 거하는 자가 된 것이다. 광야는 분명한 규율을 가져야만 살 수 있는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를 보면 가는 것도 마음대로 가지 못했다.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없으면 가지도 거하지도 못하는 곳이 광야다. 마치 지금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신앙의 지침을 주는 것과 같다. ‘이것은 하면 안 되고, 저것은 해야 한다.’라고 하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율법이고, 광야의 신앙인 것이다. 그리고 이스마엘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몸으로 이루려하는 신앙인 것이다.


그런 신앙은 늘 나를 찾아 온 청년과 같이 생명이 표현되는 신앙을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듯 희롱하려 한다. 육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것으로 보이니까 생명이 표현되는 신앙이 작고 가소롭게 보이는 것이다. 마치 포크래인이 볼 때 사람의 손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과 같다. 화려한 교회가 진정한 신앙 공동체를 볼 때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는 것도 바로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함과 같은 것이다.


참 신앙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너의 후손이라 한다고 하신 것과 같이, 몸으로 성경을 지켜내고, 세상 사람들이 성공이라 여기는 것을 이룬 신앙을 위대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힘으로 낳은 아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난 아들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아브라함 안에 있는 의가 충분히 하나님이 보실 때 아들로 나타날 수 있다고 여기는 의를 가졌을 때 생명의 법으로 난 아들과 같은 신앙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하는 신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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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심에 잘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이 어떻게 모태에 다시 들어가겠는가?’ 하는 것도 그렇지만 거듭남이라는 것이 물과 성령으로 인함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제자들도 예수님이 돌아기시고 부활하신 다음에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자연현상인 바람으로 비유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요 3:8)

그러자 니고데모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예수님께 물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어찌하여 모르느냐?’며 반문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육신이요 삶이 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을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난 사람이 아니라면 이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람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듯이 성령의 세계 역시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이라는 것이다.


성령을 이해한다는 것, 성령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거듭난 사람에게 한정된 세계이다. 말이 한정되었다고 사람의 육신을 기준으로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사람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그래야하지만 그 사람의 의무대로 성령으로 난 사람은 알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알지 못하는 세계가 바로 성령의 세계이다.


사람들은 성령이라고 하면 방언을 하거나 병을 고치는 것과 같은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성령이 표현되는 아주 작은 일부의 일이다. 성령의 본업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의 본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잉태케 하는 것, 그것이다. 즉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의 뜻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일이 바로 성령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고, 아주 중요한 차이다.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바뀌고 생명이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계가 바뀐다는 것은 의가 바뀌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로 바뀌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상의 법과 가치관이 하나님의 법과 가치관으로 바뀌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고,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 온 자라, 그리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면 이전에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니고데모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모태 속에 다시 들어가는 것과 같이 육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며 물었던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났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다가 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사람의 존재 목적을 상실하고 살다가 그 목적대로 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삶이고,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보통사람이 하지 못하는 방언을 하게 하는 것이나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이 주 업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육신의 정체성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세계에서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도록 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성령의 기적과 은사가 있는 것이지, 성령의 기적과 은사가 성령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각종 은사에 대하여 말씀하시다가 “내가 더 큰 것을 보이리라.”하고서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서로의 정체성이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서로의 존재가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가장 큰 사랑이 그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의미가 있다는 것, 그것을 알게 하심으로 사람이 자기 정체성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말씀은 온갖 은사와 기적도 결국은 다 사랑, 즉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 보다는 다 작다는 것이다. 사랑을 위하여 은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령의 거듭남도 그것이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온갖 기적을 보이시다가 최종적으로 십자가를 지실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셨다. 어떻게 보면 그 때가 가장 기적이 필요한 때였는데 보이신 것이라고는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것 그것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하늘로서 온 사람이 보여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즉 성령의 거듭남이라는 것이 바로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니고데모와 같이, 또 많은 신비주의적인 신앙 가치관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보기 때문에 거듭남이라는 것을 모태에 사람이 들어갔다가 오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모태에 어떻게 다시 들어가느냐고 물은 것을 어리석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병고치고 방언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어리석음 중에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을 보고서, “아! 저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구나!”라고 깨달을 때, 그 때 그 사람에게 임하심으로 “이때까지 내가 연약하다고 여기고 감추고 싶어 했던 저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존재의 정체성이었구나!”라고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아들로 잉태되어 거듭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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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20. 16:43 Writer : 김홍덕

기독교 신앙 안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뿌리가 아브라함에게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 후손 누구라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흔히 신앙인들은 ‘믿으면 다 된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면 그 다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과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이 같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서 믿는 것이, 또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브라함과 다르다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한 번도 밥 달라 돈 달라 한 적이 없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간 것과,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한 아들을 낳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알고 보면 깔끔하게 믿었던 것도 아니다. 기근이 든다고 애굽으로 가기도 하고, 아들이 생기지 않자 아내가 아닌 아내의 종을 취하여 아들을 낳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은 흙으로 만든 인생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정체성의 자리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의를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는 것으로 표현하시고자 했는데 그것을 아브라함이 순종했던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았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한 아들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들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칭하는 아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한 아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좇아서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이 정한 자리로 옮겨 가고, 또 하나님의 의가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던 본성들을 처리해 내고 난 다음에 육신이 되는 아들을 말하는 것이다. 애굽을 좋아하는 본성(롯이 떠나는 일)도 아브라함 안에서 처리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배필인 아내 사라가 아닌 여자에게서라도 아들을 얻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의지로 이루려고 했던 마음도 드러나고 처리해 내고서 얻은 아들이어야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아들은 이삭이라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룬 민족, 아브라함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으로 어떤 혈통을 가진 민족의 이야기나 국제학적으로 어떤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목적하신대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자신의 존재 의미와 목적과 정체성이라는 것을 믿는 모든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을 믿는 이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한 믿음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잠깐 딴 이야기를 해 본다면 예전에 김도올이라는 학자가 성경을 읽는 것을 두고 우리나라 역사도 모르면서 남의 나라 역사책을 읽는다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을 인정하지 않아서 그랬다는 점에서 용서는 될 수 있지만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의 정체성을 제시도 못하면서 그런 비판이나 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바보 같은 소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육신으로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해당되는 말씀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렇듯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을 사람이 수용하는 것에 관한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또 아브라함을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순종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긴다면,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말씀하신 말씀을 믿고자 한다면 세상을 살면서 육신에 관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믿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가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삶을 통하여 나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을 얻은 것을 두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할 때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기를 기도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 구한다. 사람에게 육신의 일이 있는 것은 육신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신의 일은 육신으로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와서 육신의 일을 자꾸 구하고 그것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다. 그러면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면서 하나님께 자꾸 떼를 쓴다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은 단 한가지다.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 그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성경을 부정하고 과학이든 미신이든 다른 종교든 뭐든 간에 사람이 존재한 이유가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바보 같이 박테리아가 사람이 되었다고,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기는 해도 사람이 사람의 삶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수 없는 오직 한 가지는 사람을 존재하게 한 것, 그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의 존재 목적이 원숭이에게서 나왔겠는가? 그건 더 모욕이다. 혹성탈출 영화도 아니고.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구할 것은 단 한 가지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즉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존재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리가 어딘지를 아는 것, 그 하나는 사람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고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목적이 이루어진 자리가 있으니 그리로 가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사람을 만드신 이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이 사람에게 이루어지기를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일진데 그것은 사람이 사람의 존재 목적의 자리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 사람의 자리가 어디인지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땅과 같다. 그것은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기로 할 때 생각하신 창조의 목적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믿는 것이다. 그 목적은 절대로 사람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와 뜻이 온전히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하는 믿음인 것이다. 사람이 자기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하여 보이신 것이다. 누가 백세에 아들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한 아들은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란 그런 사람이다. 즉 하나님께서 뜻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회복되어 그 삶이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나타나심)과 성품을 표현하는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 아들은 하나님이 아니면 백세에 아들을 낳게 할 수 없듯이 하나님이 아니시면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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