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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벨라 굴에 사라를 장사지내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2. 9. 09:09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127세를 살고서 죽자 아브라함이 이를 애통하게 여기고 그 땅 곧 헷족속의 땅에서 장사할 묘실을 구하고, 이에 막벨라 굴을 택하여 헷족속에게서 그것을 사서 그곳에 아내 사라를 장사 지내게 된다. 이후에 이 막벨라 굴은 아브라함, 이삭, 이삭의 아내 리브가, 야곱의 아내 레아와 그리고 야곱 등이 이곳에 매장된다.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거할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 묘실을 구할 때에 이르기를 ‘나는 당신들 중의 나그네요’(창 23:4)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는 소유한 땅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고, 또 헤브론 땅에 거할 때에 그곳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했는데 땅의 등기는 아브라함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여정을 가는 이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여정은 우리 신앙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삶을 <나그네의 삶>이라고 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즉 이 육신을 가진 우리의 삶은 우리의 고향이 아니라는 것이고, 우리의 소유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육신을 가진 삶이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나그네와 같은 삶이라는 것은, 이 육신의 삶의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이것은 때로 이 삶에 대한 허무주의로 변질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이 나그네라는 것은 이 땅의 삶에 대한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대단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본질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 증거는 육신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이 삶의 전부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아는 이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도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것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도해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들을 얻기 원하는 사람이 아이를 가졌다고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아들을 원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딸을 주실 수도 있다는 것을 순종하는 이는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어쨌든 아들이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삶이 나그네와 같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정말로 뱃속의 아이가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설사 딸로 태어난다고 해도 언젠가 아들로 바뀔 것 까지 믿어야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라 할 수 있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셨지만 그것은 토지가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그네의 삶인 것이다.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가 된 땅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 신앙인의 삶이다. 이 땅에 속한 것을 얻는 것이 우리 신앙의 여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땅의 재물이나 명예를 얻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나그네로 산 것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무덤이었다. 자신이 묻힐 땅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사람의 육신은 이 땅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무덤은 그야말로 내용이 없는 것을 두는 곳이다. 즉 하나님을 표현하는 이 육신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용은 나그네와 같고, 형식은 이 땅에 속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삶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삶은 달라질 것이다. 기도도 달라질 것이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할 것이다. 이 땅의 것이 본질이 아니고, 이 땅에 속한 육신의 문제는 무덤에 둘 것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것을 위하여 무엇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육신은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려놓기 위한 로켓과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에 사용되는 것이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켓은 땅에 떨어지고 인공위성은 하늘 궤도에 정착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의 삶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과 영광을 표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수고하고 무덤에 장사지내지만 본질인 하나님의 의는 나그네와 같았지만 하나님의 품속에 속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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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16-21) 심판과 구원(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8. 08:52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심판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 그러니까 법원에서 재판을 받듯이 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렇듯 압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이 하나님의 선하심인지를 보이심으로 사람이 그것을 보고 스스로 자신을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 스스로가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심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자신을 스스로 심판하고 돌이키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오심이 구원이 되지만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자신이 가진 의로 예수님을 심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으면 그의 행실을 재판하듯이 심판하는 것이 예수님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심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하여 오신 분이시고, 예수님의 심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보이심으로 심판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제품을 만드는 공장에서는 <한도견본>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양품과 불량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샘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이 양품이고 무엇이 불량인가 할 때 그 한도견본과 비교한다는 것이다. 마치 이와 같이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존재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이 예수님이 보이신 것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이는 구원을 얻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예수님이 보이신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심판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 무엇이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는 모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죄인이 된 모습이다. 세상이 옳다하고 이긴 것이라고 하는 기준으로 볼 때 악하고 실패한 모습, 그것이 바로 십자가로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실패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뱀은 죄악의 상징이다. 뱀을 높이 들었다는 것은 높이 든 것이 바로 죄인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죄인으로 달리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놋(당시 놋은 거울의 재료)으로 만든 뱀은 바로 거울과 같아서 그것을 본 사람은 자신의 모습이 뱀 곧 죄인이라는 것을 보게 된 이들이며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세상의 기준과 율법으로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광야에서 놋뱀을 본 자가 살았듯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심판은 행위에 관한 심판이나 재판이 아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존재인지 마치 한도견본과 같이 딱 보여주심으로 그것을 보고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구원을 받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그것과는 다른 하나님의 아들을 생각하고 믿는 이는 심판을 받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기준은 너무 쉬운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그 어떤 이도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이 옳다고 하는 것으로 죄인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그 앞에서 적어도 한번은 죄인이 되기 때문이다. 올림픽에서 영원히 금메달인 사람이 없고, 부자 순위에서 영원히 일등인 사람이 없으며, 노벨상을 계속 수상하는 이도 없다. 세상은 언제나 같은 기준에서 더 강하고 더 이긴 자가 항상 나온다. 그것은 그 이긴 자 외에는 그 다툼의 기준에서 죄인이요 패배자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패배는 곧 종이 되는 것이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패한 자는 세상의 기준으로 이긴 자의 종이 되는 것이다. 군사력이라는 세상의 기준으로 이긴 자들은 그렇지 못한 나라의 백성을 노예로 삼고, 여자를 마음대로 취했고, 아이들은 죽이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와 같이 지금도 세상의 법과 기준으로 이긴 자는 그렇지 못하고 패한 자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가치기준으로 이긴 자가 세상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한 분야에서 이긴 자는 또 다른 분야에서는 패한 자가 되고 종이 되는 것이 세상이다.


바로 그렇게 세상의 기준으로 이긴 자가 되려해 보았지만 결국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죄인이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심판을 받아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이신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은 그것에서 이긴 자가 되라고 만들어진 존재라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이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구원인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서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고 한다. 그것이 지금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세상의 가치기준에서 이긴 자가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이긴 자로 여기는 부자가 되려하고, 세상이 이긴 자로 여기는 박사가 되려하고, 세상이 이긴 자로 여기는 권력을 가진 이가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도우시기를 기도하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 그런 자리에 이르렀을 대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찬양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도전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심판을 받게 될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기준에 적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이신 구원과 심판은 예수님으로 보이신 정체성이 기준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고, 무엇을 이루어내고, 어떤 행함이 있었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이신 구원과 심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를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으로 인정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분이 되게 하시는 것,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구원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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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16-21) 심판과 구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7. 14:31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이유는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고 하시기도 했고, 예수님께서 오신 것 자체가 심판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구원이라는 것을 심판이라는 것과 연결하여 보면 심판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곳에서는 심판하러 오셨다고 하고 어떤 곳에서는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은 어떤 것을 심판하시는지에 대하여 먼저 알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당연히 하나님의 의의 기준과 하나님의 법에 의한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법으로 사람을 심판하지는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삶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신으로 안다. 물론 그것은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해결하고자 하시는 사람의 삶의 문제는 돈이나 이성문제나 사업이나 자녀의 성공에 관한 것이나 건강에 관한 것이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본질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해결하고자 하시는 사람의 가장 크고 근본 된 문제는 바로 사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의외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면 되고(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가?> 하는 것이다. 교회가 가르치는 것, 성경을 가지고 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궁금해 하지 않고, 어떤 행동을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궁금해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런 믿음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정체성, 곧 하나님은 어떤 신인가 하면,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행동은 용납하고, 어떤 행동은 용납하지 않는 그런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너는 누구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이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그러하심은 심판과 어떤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하나님께서 존재의 하나님으로서 사람을 만나시기 원하신다고 한다면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만난다면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 될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다르게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과의 상관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은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존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하나님을 어떤 신으로 알 때 심판이 없는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아들을 보내셔서 구원하시기로 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만약에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라면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여야 할 필요성을 아들을 보내서 구원하고자 하셨다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람의 존재 목적을 가지신 창조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에서 구원하시려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사람이 살면서 겪는 어려운 문제에서 구원하시겠다는 것도 아니고, 또 단순하게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게 하심도 아니다. 이 땅에 살면서 육신을 가진 삶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지 못한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가는 법은 없다. 왜냐하면 육신으로 사는 삶을 저주로 여기고 그 삶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으로 여기는 사람은 육신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실패한 신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그렇게 삶의 문제 해결이나, 이 땅의 삶을 벗어 버리는 것이 구원이라고 여기는 이들의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사람인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하게 깨달음으로 이 육신을 가진 삶의 목적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고 이 땅에 살 동안 삶을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구원이다. 왜냐하면 이 육신을 가진 삶을 감사한다는 것은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께서 이 육신으로 하나님을 표현하시려 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너무 영광스러움을 아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시는 그 자체가 심판이다. 그것이 보이게 되고 또 나타나면 하나님을 하나님의 정체성과 다르게 믿는 모든 믿음과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심판을 받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그런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과 신앙과 믿음을 심판하신 것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은 어떤 관계이어야 하는지를 육신으로 보여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과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거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아닌 믿음을 가진 모든 것은 다 심판을 받은 것이 되지만, 반대로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씀이 육신이 된 육신을 가진 삶을 살고 있다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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