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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으므로 아들의 배필을 구하고자 하였다. 남자에게 여자와 하나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의가 육신이 된 이삭에게 배필을 구한다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아들로 여기는 이에게 어떤 형식을 배필로 삼을 것인지에 대한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를 가진 이들이 어떤 삶의 모양을 가질 것인가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여인을 아들의 배필로 삼지 말고 아브라함의 고향에서 아들의 배필, 곧 아들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이어갈 배필을 이방의 여자 중에서 취하지 말고, 고향의 여자 중에서 취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의 고향 땅은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한 땅이다. 그곳은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그 지방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함을 좇는 사람들)의 땅, 곧 그런 사람 중에서 아들의 배필을 얻겠다는 것이다. 이는 언뜻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떠나라고 할 때는 언제고, 또 그곳에 가서 아내를 취하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일은 이삭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야곱 역시 그 아내들을 가나안이 아닌 아브라함의 고향에서 얻게 되기도 한다.


먼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브라함이 그 종에게 한 언약의 내용이다. 그것은 두 가지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여자가 그 땅을 떠나오려 하지 않으면 아브라함과 종의 언약이 무효가 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절대로 아들 이삭을 아브라함이 떠난 고향으로 데리고 가지는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람을 아브라함이 떠난 고향에서 얻되, 반드시 그 땅을 떠나는 여자로 하여금 아들의 아내를 삼게 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한 사람의 신앙 여정이라고 한다면, 고향에서 살고 있는 여자라는 것은 신앙의 여정을 출발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자기 삶의 형식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본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목적이 하나님을 믿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신앙,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이 땅에서 위대해지고자 한 삶의 자리를 떠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생명으로 거듭났을 때에 그 생명을 표현해내는 삶의 방식을 기존에 가지고 있던 종교적인 관습,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는 것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문득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지만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도 아들의 배필을 구하러 보내는 종에게 환도 뼈에 손을 넣게 하고 맹세하게 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신앙의 여정을 가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살겠다는 사람들에게도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가지면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다 버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 믿기 시작하면 성격도 바꾸어야 하고 말투도 바꾸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직장도 버리고 예수를 같이 믿어주지 않으면 가족도 떠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결단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잘못된 관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자신의 것이 있다. 성격이 그렇고 외모가 그렇고 혈통(성씨)이 그렇고, 성별도 그렇다. 그러한 것은 다 고향과 같은 것이다. 그런 것 중에 어떤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도 있고, 바꾸려 하고 원망스럽게 여기는 것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믿고, 또한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으로 안다면 자신에게 주신 모든 것은 그 어떤 것도 다 선한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염두에 보고 이 말씀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지만 반대로 아들의 아내를 반드시 그 땅에서 구하라고 하셨다는 것은 깊은 뜻이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라고 한 아브라함은 남자다. 즉 의를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의(무엇이 가치 있는 것이고, 무엇이 선한 것인가 하는 가치관과 정체성)는 위대함을 추구하는 것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반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로 지어졌기에 사람의 육신이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예비 된 것이므로 그것은 다 온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의는 위대함을 좇는 것에서 떠나야 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생명의 배필, 그 생명을 표현하는 형식은 고향과 같이 원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것을 통하여 표현하라는 것이다. 다만 그 고향의 여인, 자기 삶에 주어진 육신과 같이 주어진 모든 형식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이미지와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고향 땅에서 떠난 여자로 아들의 배필을 삼겠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형식의 본질을 모른 체 지키며 살다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알고 보니 그런 모든 것은 본질이 아니므로 아무렇지 않게 버리고 사는 것이 온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기도하는 것을 두고, 기도라는 것이 육신이 먹고 사는 것에 관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이전에 기도하던 습관과 모양까지 다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무릎 꿇고 무엇을 기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고향 땅과 같이 위대함을 좇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기도하는 내용이 먹고 마시고 세상의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생명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고향 땅에서 아내를 얻으라는 것이다. 즉 자기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자신의 어떠함들, 하나님께서 주신 성격이나 자신의 육신의 어떠함이나, 또한 그런 환경에서 몸에 베인 종교적인 습관들을 버리지 말고 그러한 것을 내용인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표현하는 배필인 형식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성격을 100%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가진 것 중에 어떤 것은 바꾸려 한다. 바꾸려 한다는 것은 잘못되었고 나쁘고 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성격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조성하실 때 주신 것이므로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성격 자체가 나쁜 것은 없다. 그것을 어디에 쓰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을 바벨탑을 쌓는데 사용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거하시게 자신의 본질로 여겨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사람으로 순종하느냐의 문제인 것과 같은 것이다.


칼의 날카로움이 위험하지만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의 문제다. 칼을 만들고 사는 이가 가진 목적 안에 있으면 그것은 선한 것이고,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으면 악한 것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떠난 고향과 같은 것,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삶의 어떠함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알기 전에 가지고 있고 훈련된 종교적인 관습과 같은 것들이 리브가가 그 고향 땅을 떠나듯이 위대함을 좇는 것에 사용되지 않고, 이삭의 아내가 되는 것, 즉 하나님 아들이 된 생명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고향 땅의 시로 자손을 삼을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고, 이방인과 같이 자신에게 주신 것을 다 고치고 버릴 것으로 삼는 마음으로 삶의 모양을 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이삭의 아내를 이방인들 중에서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노아의 홍수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아 하나님을 격노케 한 일이 있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 즉 이삭의 아내를 아브라함의 고향 땅에서 얻는 것,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육신의 어떠함을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자기 삶의 표현 형식으로 삼으라는 것에 관하여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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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은 자세히 보면 특이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하려고 아들을 보냈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뿐 아니라 심판에 관해서도 ‘세상을 심판하러 오심이 아니라.’고 하고 있고, 구원 역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는데 아직도 세상은 혼돈스럽고 전쟁의 소식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소식들이 일상인데 예수님이 오신 것이 어떻게 세상을 구원했다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누구나 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뜻을 가장 설명하는 말씀이라고 여기지만 정작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말씀이라는 것을 주목해 보면, “정말 그대로 됐나?” 싶은 것이 현실적인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을 구하기 위함이라고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어떤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에도 사람들이 세상을 평화롭게 여기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자.


사람이라는 존재는 정말로 작아 보이지만 또한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온 우주를 그 마음에 담고도 남음이 있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그 마음에 담고도 남음이 있으며, 태초 이래의 모든 역사를 그 안에 담음에도 부족함이 없는 존재가 사람이기도 하다.


성룡이라는 배우와 배우 윌스미스의 아들이 나오는 <베스트키드>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는 흑인인 아이가 중국에서 무술을 배우는 영화인데, 성룡에게 무술을 배우는 중에 많은 사람들이 무술을 연마하는 산에 가는 중에 아이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이기고 싶다.”고 그러자 스승인 성룡이 이렇게 답한다. “너 자신만 이기면 된다.”라고.


사람이란 정말로 그런 존재다. 자기 마음과 안목만을 바꾸면 세상이 바뀌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이 구원 받은 세계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셨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아는 사람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세상이 온전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얻겠다는 말씀인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죄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이다. 죄라는 것은 자기의 자리를 떠났다는 것이니 구원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 자리를 회복한 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다. 미운 오리새끼에게 구원은 자신을 구박하는 오리들을 물리치거나 그들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백조라는 것을 깨닫고 하늘로 날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구원은 사람을 만드신 이가 사람을 만드실 때에 정하신 자신의 정체성을 떠난 자리인 죄에서 자신을 지은 이가 정한 자기 정체성의 자리로 회복된 것이 구원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한 것은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온전히 인식하게 되는 밝음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온 우주와 세상은 구원을 받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구하러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지창조와도 같은 말씀이다. 한 사람에게 구원이 임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렸다는 것,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경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세상이 운영되는 모든 것에 자신을 순종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바울사도가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가 이루어진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회복했다는 것이고, 그 정체성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의 육신을 가진 삶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이 보이셨기에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 받은 사람,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아들, 곧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과 존재하는 것의 존재 목적이 그 사람으로 인하여 달성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존재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인 구원 받은 사람이 나왔다는 것이 그것이고,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의 존재 목적이 제 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기에 모든 피조물 또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하신 목적 아래 들어가도록 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그것을 바꾸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존재가 가진 안목과 인식과 의가 바뀜으로 사람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그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로 움직이는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세상을 창조하신다는 것이고, 그 사람이 이 모든 것을 바로 보게 된다는 것이 또한 빛이 있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하는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것의 심판이 되는 기준을 보이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 곧 구원 받은 이들에게 이러한 일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 3장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서 구원하시려 하심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구원, 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이 밝히 보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것을 고쳐야겠다고 소리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베스트키드의 대사처럼 자신만 온전한 구원 안에 있으면 세상은 정말로 온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온전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영향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모욕하는 것이다. 세상이 온전하지 못한 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볼 때 시끄러운 것이고, 또 세상이 시끄러운 다른 이유는 그렇게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소리들로 인함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절대로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시끄럽지 않게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창조하신 목적을 회복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사람을 만들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시고 안식하심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사람이 나오는 것, 그것에 천지창조의 목적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이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신 목적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안식하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 목적이 회복된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존재 목적이 회복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 사람이 그 안에 있는 정체성이 회복된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하여 사는 모양이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고, 그것을 다른 사람이 볼 때, 먼저 된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였듯이 그 사람의 삶을 볼 때 자신도 그렇게 회복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이고 구원이 전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먼저 깨달은 사람이 보여준 삶으로 사람의 정체성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기에 먼저 깨달은 사람의 삶의 수고가 십자가를 진 것과 같은 삶이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심은 실로 이렇게 놀라운 비밀의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복된 소식인 것이다. 그래서 또한 복음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온전히 알 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산 사람만이 이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에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이다. 원래 소속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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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16-21) 심판에 대한 오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10. 11:05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이 생각하는 심판은 아주 능동적이다. 능동적이라는 것은 주도적으로 영향을 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행동에 대하여 잘했다 잘못했다고 분명하게 말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 맥락에서 심판을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과 같은 말이 그렇다. 종교 안에서 생각하는 심판이라는 것이 그렇게 능동적이라는 것이다.


종교 안에서 보는 심판은 사람을 위협하듯 한다. 물론 어떤 심판이든 간에 심판이나 재판은 위협적인 결과를 동반한다. 하지만 심판이라는 것이 그렇게 벌을 받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판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인식은 <심판의 결과 = 벌을 받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회의 법이 주는 이미지가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라는 종교 역시 사회적인 법률이 주는 이미지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능동적인 것이고, 심판 받는다는 것은 지옥에 가는 것과 같이 여기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심판이 되시는 것은 그런 부정적인 결과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결과를 목적을 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심판이라는 것의 모양새도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니까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라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심판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본 사람들 자기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는 것에 있다.(아마 마르크스가 이것을 보긴 본 모양이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몰라 봐서 그렇지.)


많은 교회들이 교인들에게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위협하기도 한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지옥에 간다.’, ‘그러면 큰 벌 받는다.’, ‘그러면 큰 손해를 볼 것이다.’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런 모습들은 정말로 심판에 대한 견해가 잘못된 것이다. 심판에 대한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도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고 그것을 본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의와 자신의 의를 비교해서 자신의 것이 하나님의 의와 맞지 않음을 깨닫는 것에 있다. 그 깨달음이 바로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이고, 그것이 회개고 돌이킴이며, 그런 돌이킴을 계기로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의로 삼아 살게 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런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그것이 심판인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 9:39)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교적인 지위나 신앙이 좋다는 것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신앙이 없다느니, 그러면 지옥에 간다느니 이렇다 저렇다 말로 사람을 심판하고 있기도 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심판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거니와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비밀과 법을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의 심판은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하여, 또한 다른 사람의 행실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심판도 교훈도 훈계도 사랑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무식하고 무례한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훈계와 교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높이 달리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이나 신앙이 잘못되어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인 것이다.


그런 삶은 아주 힘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도록 살아가는 것은 정말로 힘든 것이다. 억지로 하려 한다면, 그래야 하는 것이라서 그렇게 하려 한다면 너무 힘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렇게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사는데 수고가 필요하고 힘들기는 해도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정말로 힘들고 고되고 위험한 일이지만 연어가 아닌 다른 고기는 그렇게 하는 것이 힘들지만 연어에게 그렇게 한다는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다. 그것이 자기 본성이고 유전자고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그렇게 지는 것이고, 생명이란 그런 것이고, 우리의 육신은 그렇게 사용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런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영광과 성품과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비밀을 모르면 입으로 신앙을 논하고 다른 사람의 어떠함을 논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신앙이 없는 것이다. 그 입으로 아무리 거룩한 것을 이야기하고 사랑으로 책망한다고 해도 그것은 다 무례하고 신앙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고전 13장)


하나님의 심판을 바로 아는 것은 십자가를 바로 아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의를 돌이킨 것이 심판이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심판하고 돌이키는 것을 위하여 예수님의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이끌리어 십자가를 지는 수고를 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남이 깨달을 수 있는 삶을 사는 수고는 마다하고 입에 성경말씀을 무쳐서 사람을 심판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십자가다. 십자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서 벗어난 모습을 비쳐주는 놋뱀과 같은 거울이기도 하고, 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사람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스스로 심판하도록 수고하신 상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바로 아는 것은 십자가를 바로 아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를 바로 아는 것이다.


반대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을 인용해서, 또한 교리를 이용해서 교회 안에 사람의 어떠함을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이 수고로운 삶을 살아서 다른 사람이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서 심판하고 지적질하고, 또 그것도 모자라서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이 틀려먹었다고 떠들고 실력행사를 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십자가도 심판도 모르는 자들의 일이다.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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