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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2) 가나 혼인잔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1. 15. 16:5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나다나엘과의 대화를 하신 후 삼일 되던 날에 가나에 혼인잔치가 있어 예수님께서 참석하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일을 요한 사도가 기록하고 있다. 먼저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할 때에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과 같이 물이 포도주가 되는 일을 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럴 것이 아니면 요한 사도가 이것을 기록할 이유도 없고, 또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이유도 없다.


나다나엘과 가나 혼인잔치는 내용상으로 보면 별다른 연관성이 없다. 그냥 삼일이 지났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연관성이 있다.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에는 무화과, 곧 율법에 대한 말씀이 깊이 베여 있는데, 혼인잔치에서는 돌 항아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율법은 돌에 새긴 것이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빈 항아리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혼인이라는 것은 <내용과 형식>에서 다룬 바와 같이 의와 육신이 하나가 되는 것의 예표다. 의를 가진 남자와 형식과 모양을 중요하게 여기고 남자의 의(성씨)를 육신으로 표현해내는 여자가 만나서 의와 형식이 하나가 되는 아들을 얻게 되는 것이 혼인이다.


그리고 그 혼인잔치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포도주다. 포도주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다.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신 분이고,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해내신 온전한 아들이시다. 즉 온전한 혼인잔치의 목적이고 주인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진 가나 혼인잔치에도 포도주가 있었다. 하지만 모자랐다. 이것은 단순히 혼인잔치를 치르기에 양이 모자랐다는 것이 아니다. 혼인잔치의 목적을 이루기에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결례에 따라 준비한 항아리의 포도주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의 율례, 곧 율법으로는 온전한 혼인잔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심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없으면 유대인의 율법으로는 온전한 혼인잔치, 곧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나타나는 아들을 얻는 혼인과 같은 하나 됨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온전해 지려면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은 순종이다. 다시 말해서 시키는 자의 의를 시킴을 받는 자가 몸으로 표현하고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돌 항아리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안에 있던 포도주로는 혼인잔치를 온전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포도주가 모자란 것이다. 그러나 혼인잔치가 있다는 것은 그 혼인잔치가 온전히 마쳐야하고 신랑신부를 통하여 아들을 얻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지음 바 되었다는 것이 바로 혼인잔치에 참여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온전한 잔치가 되게 포도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있어야(나와야)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돌 항아리와 같은 우리 인생들은 마치 밭에 농부가 씨를 뿌림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채워져서 그것이 포도주와 같은 그리스도로 표현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있어서 그것이 표현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고, 그것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아들이 바로 아버지의 성품을 표현하고 대변하듯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돌 항아리에 예수님의 지시한 대로 물을 채우고서 그것을 다시 잔치에 내어 놓았더니 포도주가 되었다고 하셨다. 그것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차면 그 삶이 포도주와 같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찬 사람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삶을,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무화과 아래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하는 것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나오는 일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랬더니 사람들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이 이전의 포도주 보다 더 좋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율례대로 준비한 포도주, 곧 사람이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서 표현한 그리스도의 성품보다, 사람 안에 말씀이 가득차서 그것이 표현된 그리스도의 성품이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꽃그림이나 사진과 살아 있는 꽃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으냐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연회장은 잔치를 주관했으나 알지 못하지만 종들 곧 물을 항아리에 채운 자들, 곧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규례대로 포도주를 준비한 연회장은 그것을 모르지만 포도주 곧 그리스도의 성품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먼저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운 자들에게서 그것이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날 때 더 온전한 포도주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혼인잔치가 온전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영광은 나타내는 것이다. 화려하게 시상식에서 주인공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으로, 사람의 육신과 삶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이 바로 영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그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 생명이 표현되는 삶, 그것이 더 좋은 포도주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혼인을 온전케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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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과 고모라 (추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13. 10:50 Writer : 김홍덕

이렇듯 사람이라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아니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인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또한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을 주관하는 것을 반대하고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상관하려고 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어두움에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롯을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들이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 것이다.


이 어두움은 다른 어두움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두움이다. 또한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어두움이다. 그래서 문을 찾지 못하는 어두움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어두움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육신 곧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면 바로 어두움이라고 요한 사도가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은 어떻게 보면 참 단순한 책이다. 물론 구절구절을 다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록된 시대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주제와 행간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성경이 어려운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저자인 하나님의 시각이 아닌 독자인 사람의 시각으로 읽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성경은 절대 어려운 책이 아니다. 책이란 모름지기 저자의 생각을 독자가 받아들이기 위하여 읽는 것이다.


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결국 사람의 존재 의미이다. 사람이 대상이 아니라 만약 개가 대상이라면 개뼈다귀로 나타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먼저 사람의 존재 의미를 이야기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사람도 귀한 의미가 있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 의미를 사람이 져 버려서 사람이 죄인인 것이지, 그냥 사람이 죄인이라서 사는 게 힘들어져서 하나님께서 보급계로 도와주신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다. 어떤 것을 바꿀 때에는 가치가 같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을 바꾸었다는 것은 사람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사람들이 기도할 때 벌레만도 못한 인생을 구해주셨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벌레만도 못한 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부여한 가치를 버려서 그런 것이지 원래 인간의 가치가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과 바꿀 정도로 가치가 있는 귀한 존재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의 존재 의미를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지 않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부끄럽게 여겼던 사람의 본 모습이 바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존재요,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존재며,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두움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소돔의 사람들과 같이 상관하려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어두움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간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 그대로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그릇이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믿고 그것에 자신이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밝음이고 그것이 빛을 아는 것이다. 사람을 보노라면 늘 실수하고, 또 화를 내고 이기적이기도 한 이 사람의 모습,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표현하기에 너무 좋은 존재여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한 하나님의 의도된 모습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모르면 심판을 받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듯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결국 자기 인생의 종말에 또한 이 세상의 끝 날에 망하는 것이다. 사람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요 성전이요 아들인 것, 이것을 믿지 않고, 사람의 본성을 절제하고 다스리고 억제시키는 것이 신앙이고 경건이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멸망의 대상이고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사람의 본성을 부인하는 것을 경건이라 하는 사상과 이론과 말씀과 사람이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을 늘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롯에게 온 하나님의 사자도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라고 했고, 예수님도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으면 빨리 피하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부인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면 목사 면허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 사람의 본성을 부정하게 여기고 그것을 이기기 위하여 하나님의 힘을 빌어야 한다고 하는 것, 그런 모든 것이 다 소돔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상관하려 한 것이고, 또 진정한 신앙과 믿음을 얻고자 한다면 떠나야 하는 자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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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과 고모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13. 09:32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로 떠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숨길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보러 간다고 하셨다.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인과 악인을 함께 죽이는 것이 합장치 않다면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말 것을 구하면서 의인의 수가 몇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살리실 것인가를 계속 묻는다. 그 결과 10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아브라함은 돌아간다.


날이 저물어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을 때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마침 그것을 성문에서 발견하고는 자기 집으로 청하였는데 이것을 본 소돔 백성들이 롯의 집에 찾아와서 롯의 집에 온 사자들을 내어 놓으라고 요구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을 상관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알아야겠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상세히는 그들을 강간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롯은 그들을 만류하면서 자신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딸이 있어 그들을 내어줄테니 그리하지 말라고 해도 그들의 요구는 거두어지지 않는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상관하려고 하는 이유는 롯의 집에 방문한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들의 법관이 되려 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고 쳐도 자신들의 법관이 되려 하는 이들이 맘에 들지 않으면 죽이든지 할 것이지, 그들을 강간하려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의 사자는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요구했던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 이름의 뜻은 분명치 않다. 다만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강간하겠다는 소돔 사람들의 행태를 보고 소돔과 고모라가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육신의 성에 관한 타락을 이유로 심판하셨다면 지금도 뭐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지금은 소돔과 고모라에는 없던 의인들이 있어서 망하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망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있는 것 중에서 망해야 하고 심판하시겠다고 하는 것은 에덴동산에 거했던 아담을 만드셨을 때에 사람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자 말자 바로 유황불로 심판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보여준 일은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닌 것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육신의 성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이것은 육신의 성에 대하여 마구잡이로 성욕을 발산하고 누리는 것이나 동성애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셨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의에 관한 것이다. 사람이 가져야할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의가 사람 안에 있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다른 의가 있기 때문에 육신의 성이 타락하고 문란해지는 것이다. 사람은 그 안에 있는 것이 몸으로 표현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라는 것은 블로그 <내용과 형식>에서 다루었듯이 남자가 내용이고 여자는 형식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들 낳으면 그 아이의 성이 남자의 성을 따르는 것이다. 아이는 남자의 의(가문의 번성이라는 의)가 몸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결혼하면 여자의 성도 바뀌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남자는 의를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의는 곧 법이고 모든 형식의 근원이다. 모든 표현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의가 민주주의기 때문에 그 나라의 모든 법과 삶의 방식과 모양이 민주적인 것이 그것이다. 의는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가 주인이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뜻과 계획이 표현된 것이 세상이고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딸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은 신랑이요 교회와 우리 사람은 신부가 되는 것이다.


소돔의 사람들은 롯을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들이 자신들의 법 집행관이 되려 한다고 그들을 상관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다스리려 하는 것을 상관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관이란 성적인 관계를 말하는데 육신으로 보면 동성강간에 해당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남자에게 자신의 의를 관철시키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자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말씀을 성경을 육신으로 지키면 영혼의 정체성이 바뀐다고 생각하는 시각으로 보면 단순하게 성적으로 타락한 성읍을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시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안목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각으로 본다면 지금도 계속적으로 망하는 성읍이 있을 수 있고, 그런 시각으로 성경을 본다면 십자가에 직접 못 박혀야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될 것이다.


물론 소돔과 고모라가 성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한 성읍은 맞다. 하지만 성경은 육신의 문제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사람의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형식이고 도구이다. 즉 의를 표현하는 것이지 이 육신이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가치관이 몸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왔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들을 다스리는 것을 용납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상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지금 소돔과 고모라에 온 하나님의 사자들은 사람의 모습으로 와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어 하나님과 하나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성품을 나타낸다고 하면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아닌 목사가, 그리고 보통의 사람과는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의한) 거룩한 성자가 왔을 때는 용납하지만 그냥 이웃과 같은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오히려 자신들의 의를 그들에게 주장하려 하는 것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상관하려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모습과도 같다.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와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유대인들은 ‘그 몰골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권력과 화려함으로 교황이 와서 뭐라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사는 지역의 천하고 가난한 동네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이라고 하면 ‘웃기지 말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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