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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있는 에서의 본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2. 21. 17:33 Writer : 김홍덕

이삭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약속 받은 아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아니면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고향 땅에서 불러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땅,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원하는 존재가 되게 하신 그 모든 의의 유일한 열매가 이삭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모든 역사와 뜻하심이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삭은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된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오늘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에 이르러서 하나님께서 아들로 여기는 사람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삭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런 이삭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을 주셨다고 하셨다. 아들을 얻을 수 없다면, 다른 여자를 취하면 될 것인데, 왜 하나님께 구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들로 여기는 아들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이삭에 관한 말씀을 읽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서 아들로 여기시는 생명을 얻어낼 수 있으려면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맞게 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아무리 전지전능하다고 하셔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뜻과 생명의 법을 넘어선 것을 구하는데 주시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능이 없으심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언약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야기함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과 영광을 나타내는 것에 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면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는 존재,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 그의 그런 삶을 보고 다시 그런 사람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고, 또한 하나님은 그런 기도만 들으시는 분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나서 유일한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을 받은 이삭에게서 난 아들들은 온전히 하나님의 의와 뜻을 나타내어야 하는데, 두 아들 모두 뭔가 허전한 점이 있다. 에서는 이방 여자와 결혼하여 그 부모의 근심을 사고, 쌍둥이 동생 야곱은 간사하여 형을 속여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는, 어떻게 보면 야비한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의 열매로 유일하게 인정하신 이삭의 아들들, 이삭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났는데 왜 그런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신앙 여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리로, 그리고 하나님을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믿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자리로 가는 여정을 거친다. 애굽에서, 광야로,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이 그것을 설명하고, 선지자들에게서 세례 요한으로, 세례 요한에서 예수님으로의 여정이 그렇다. 


아브라함으로 본다면 갈대아 우르에서 애굽으로 그리고 헤브론으로 간 것이 그렇고, 그 이름이 ‘위대함의 아비’라는 정체성을 가진 자에서,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약속을 지켜내려 이스마엘을 낳는 사람으로, 그리고 할례를 받음으로 형식을 벗어버린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 때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들을 얻는 존재가 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나면 사람들은 쉽게 말해서 복음의 시대를 살게 된다. 율법의 신앙을 지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율법의 신앙이라는 것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내려는 신앙을 총칭하는 말이다. 구약성경, 신약성경의 문제가 아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려 하면 할례를 받지 못한 신앙이고, 광야의 신앙이고, 율법의 신앙이다.


그런 신앙에서 교회에서 예식으로서의 세례가 아니라, 성령 세례(방언을 받아야 한다는 멍청한 이야기가 아니다.)를 받고 복음의 여정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에서와 같은 본성이 자기 안에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복음을 세상과 결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한 이삭의 몸에서 난 아들 에서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에서다.


사람들은 에서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 자신은 에서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좀 낫다면 에서와 같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에서와 같은 본성을 자신 안에서 고백해낼 수 없다면 이삭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즉 누구나 에서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복음을 알게 되면 세상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 본성이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의 계시에 밝아진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신앙의 방향, 소위 말하는 이단이 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스마엘은 아주 세상적인 가치관이라면, 에서는 어떻게 보면 이단 같은 가치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본성은 복음을 깊이 알게 되면 한 번씩은 다 자기 안에서 그 본성이 표현된다는 것을 에서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서와 같은 본성이 없다고 하면 이삭의 아들이 아니요, 에서와 같은 본성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 이단이 되고,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이단이라고 하는 집단들은 기성교회 보다 성경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고(자세히 안다는 것이지 바로 안다는 것은 아니다.) 더 열심이다. 그런데 그들이 온전한 신앙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좋은 것을 세상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에서가 이방인 여자를 아내 곧 형식의 배필로 삼은 것과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세상적인 모습으로 복음을 표현한다는 것은 다양하다. 세상의 가치관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계급이다. 신앙을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나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피라미드로 나타내는 것이다. 생명은 그렇게 피라미드식으로 등급을 매기는 것이 아니다. 교주가 있고, 반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을 기준으로 공동체 안에서 권력이 생겼다면 다 이단이고 에서의 본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은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다.


골로새서에서 바울 사도는 세상의 헛된 철학과 속임수가 교회에서 인정받는 것을 책망했다. 철학이나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무력한 에바브라가 세운 교회인데 에바브라가 세상의 철학이 부족하다고 외면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에 세상의 철학이라는 것에 얼마나 능통한지를 기준으로 옷을 다르게 입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서가 이방 여자와 결혼한 것이다.


미가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타락이 사마리아가 아니냐고 하셨다. 사마리아는 혈통이 섞인 사람들이다. 이방신과 서로 결혼한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다. 즉 복음을 세상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세상적인 것을 복음으로 표현하고 혼용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타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에서가 버림받은 이유이다.


복음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세상적인 방법인 정치적 권력이나 군사력이나 완력으로 나타내셨는가? 그것이 아니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심은 십자가의 법으로 하셨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죄인의 방법이고, 사형을 집행하는 틀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건축자가 버린 돌이요, 외면한 것 같으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이다.


복음은 언제 복음다워야 한다. 십자가의 도가 피라미드와 같이 등급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런데, 그런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에서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았듯, 복음을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나타내려 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복음에 대하여 밝을수록 더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에서와 같은 본성은 누구나 있다. 신앙의 여정을 가다 보면 잉태되는 아이가 내 맘대로 되지 않듯, 하나님의 복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에 세상적인 것으로 표현하려 한다. 그러면 그 때 그런 본성이 자신 안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길로 빠져들지 않을 것이고, 이삭의 아들이라는 것인 증거를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에서의 본성을 복음의 본질로,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으면 나락으로 빠져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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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때가 온다고 하니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면 그가 모든 것을 알려 줄 것이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고 하신다. 즉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이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라고 하면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물 위를 걸어 다니고 해야 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존재인 것이다.


사람들은 일요일이 되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 스스로나 사회적인 시각이 적어도 그 상태에 있는 이들, 그 상황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어떤 시간 어떤 공간에서만 그리스도인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예배를 드리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 그 자체가 예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을 소를 각 뜨듯이 죽여서 불 태워 제물로 드리라는 무식하고 끔찍한 말씀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그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성품과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지은 존재이다. 그런 존재가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은 죽여서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원하시는 대로 사용되는 것이 바쳐지는 것이다.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가 존경하는 장수에게 칼을 바치는 것은 칼이 그 장수가 원하는 대로 사용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지, 그 장수 앞에서 칼을 부러트리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린다고 하니, 사람으로서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망가트리면서 교회에만 빠져있고, 교회에서만 살고, 세상의 방법대로 시험 쳐서 목사가 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린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그것은 남편도 없고, 언제나 물을 길으러 가야하는 삶이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제물로 드려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즉 십자가의 삶이라는 것은 사람 안에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이 있으면 운명처럼, 본성으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기에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 본성으로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제사요,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짐이요,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과 그리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제사 제물을 미리 준비하지 못하는 문제 때문에 성전에서 비둘기를 파는 상을 엎으시기도 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곧 영과 진리로 에배드리는 분이라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이러한 모순처럼 보이는 모습을 궁금해 하지 않고, 예수님의 행동은 무조건 특혜를 주듯이 인정한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닐지 몰라도, 그렇게 하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이 되기를 바라신 의도는 희석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이해가 되고, 자신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이 될 때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지,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된다.’는 그것이 예수님을 공경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하신 것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 그것을 우리는 몰랐고, 예수님은 아셨다는 것 그것 하나다. 그런데 그 하나가 바로 우리가 예수님과 같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고, 그래서 비밀이고, 그래서 감사한 것이다. 하나님이 밥 주시고 돈 주시니 은혜고 감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예배드리는 때가 온다고 하셨다. 즉 너희가 그리스도가 되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수가성 여인은 메시아라 하는 이가 오시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그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이제는 나와 같은 존재가 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이제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진정한 예배의 산 제물이 되는 세계가 열렸다는 것이다.


수가성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좀 황당할 수 있다. 비록 자신에게 남편이 여럿 있었다는 것을 용케 아는 선지자로는 인정이 되었지만,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는 자기 살던 마을로 가서 자신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치게 된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메시아요 그리스도라는 것이 인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놀라운 것이 있다. 수가성 여인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기적이다. 육신의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하여 물을 길러 간 우물에서 만난 한 낯선 남자, 그것도 사마리아인인 자기에게 말을 거는 이상한 유대인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사람을 만났는데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이다.


이 여인은 목마른 여자였다. 이는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는 모든 사람의 모습이다. 그리고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 했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의 목마름을 해갈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런 그녀의 생각이 많은 남편을 맞이했었다. 즉 자신의 삶의 의미를 주는 남자, 곧 의를 만났다는 것이다. 마치 돈에서 인생의 목적을, 명예에서 삶의 성공을 찾는 사람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을 때,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것이 있다는 말씀 앞에서 그 여인은 이때까지 자신의 남편들이 자신의 남편이 아니었다는 것을 고백했다. 그랬더니 사람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세계가 그에게 열렸다는 것이다. 세상의 것들이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는 것, 돈이나 명예와 같은 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때,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것이 인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세계가 인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 그 자체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존재로서 지어졌다는 것이 인정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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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16-26) 진정한 예배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20. 08:49 Writer : 김홍덕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는 점점 미궁에 빠져들 듯 한다. 남편이 없다던 여자는 자신에게 남편이 있었고, 또 있음에도 남편이 없다고 한 자신이 옳다고 하는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인정하고서는 다시 난데없이 재화의 주제를 예배로 옮겨가고 있다. 더욱이 예수님도 그 대화가 너무 자연스럽고, 나중에 보면 그것이 예수님을 배부르게 하신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물 이야기를 하다, 그것이 남편 이야기가 되고, 그리고는 예배의 이야기가 된 것이다.


여자는 묻는다. 자신이 남편을 찾아 헤매던 사람이라는 것, 언제나 목마르다는 것을 아는 분은 선지자라고 믿었기에 ‘우리의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했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한다고 하든데, (어디서 예배하는 것이 맞느냐?)’라고 묻는다. 이것은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질문이다. 여자가 남편과 하나가 되듯, 인생이 무엇에게 자신을 드려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어디서 예배를 해야 하느냐?’고 묻는 것은 예배의 형식에 관한 것이다. 이는 마치 처음에 물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당신은 물을 기를 그릇도 없고, 우물도 깊은데 무슨 재주로 물을 마시려 하느냐?’고 묻던 것과 맥락이 같다. 물론 주제는 아주 깊어지고 본질에 다가 갔지만, 아직은 속에서 생수가 넘쳐나는 것이 무엇인지, 누가 제대로 된 남편인지는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본질에 가까워진 여인에게 예수님은 예배에 대하여 상세히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바울 사도가 다시 이렇게 풀어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예배는 어디서 드리느냐? 어떻게 드리느냐? 어떤 방법과 절차와 예식으로 드릴 것이냐? 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것은 언제나 목마르고, 아무리 바꾸어도 성에 차지 않는 남편 같은 것이다. 다른 것 볼 것 없이, 예배드리는 방법을 학문으로 연구해서(이런 코미디가 없지만 그것을 돈 주고 공부하는 것이 현실이다.) 시절마다 바꾸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자꾸 남편을 바꾸는 것이 그것이다.


예배는 드리는 장소나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드리는 사람이 누구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이다. 산이나 예루살렘이 아니라 <너희>가 예배할 때가 온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제물이 되는 그런 단계, 그런 상태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렇게 되라고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이 되는 것, 사람의 내용은 하나님의 의가 되고, 사람의 삶은 그것을 표현하는 삶이 되는 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진 상태인 것이다. 우리의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목적대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사용되는데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제사고 그것이 진정한 예배인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니까 예배 순서를 연구하고, 예배의 의식을 위하여 꽃꽂이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헌금 순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등의 정신없는 소리들을 하고 심지어 그런 일로 다투고 싸우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모두 남편과 살지만 남편 없는 이방인 보다 못한 사마리아 여인의 원래의 삶과 같은 모습일 뿐이다. 그것은 예배도 신앙도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예배를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우리>라고 하는 사람들, 곧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셨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 예수님께서 <우리>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성령으로 잉태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대명사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예수님께 이 <우리>를 유대인이라고 하신 것,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것은 육신으로 유대인이 아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방민족, 곧 하나님을 모르는 앗수르인들의 피(생명)가 섞여 있지만,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음을 인용하신 것인데, 이는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심령에 사람이 하나님이 뜻하시고 목적하신 것을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자기 혈통과 생명으로 삼은 이가 바로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이 유대인에서 난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영이란 하나님의 영, 곧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사람 안에 있어 그것이 생명이 되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는 사람에게 속한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 것이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 바로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 목적 안에 있는 것, 그것이 그 존재의 진리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지, 예배시간에 음향을 거룩하게 하고, 설교자가 쉰 목소리 같은 쥐어짜는 소리로 말하며, 잘 연습되고 자격과 신분처럼 여겨지는 가운을 입고 찬양하는 성가대가 있어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로 궁금한 것은 도무지 그런 모습의 어디가 영과 진리에 관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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