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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2. 14. 16:41 Writer : 김홍덕

성경에서 말하는 남자와 여자는 의와 형식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었다.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라는 사람의 두 성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와 그것을 표현하는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을 설명하시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을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와 같이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 연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삶의 본질이 되어 그 생명이 그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이 아내를 얻었다는 것은 이삭이 가진 생명을 표현해낼 아들을 얻을 형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한 아들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이라는 아들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만을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나타내시기 원하셨던 하나님의 의를 거쳐낸 다음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이 이삭인가 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여정으로 우리의 신앙 여정을 설명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아내를 얻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서 거듭난 생명을 표현해낼 삶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육신의 삶이 거듭난 생명을 가진 이후로는 마치 새롭게 아내를 얻어서 아들을 얻는 것과 같이, 거듭난 생명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삶을 살아서 다시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해 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삭이 아내를 얻는다는 그런 의미이다. 그렇다는 것은 거듭난 생명을 가지고서 다시 또 거듭난 생명을 얻는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얻는 아내와 같은 하나님 의의 형식인 육신의 삶은 이방인의 모양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거듭난 생명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육신의 모양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육신으로 주어진 삶의 모든 것을 어디에 사용하느냐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성격이나, 또한 환경, 그리고 그 환경으로 인하여 형성된 자아 정체성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바꾸려 한다. 그것을 바꾸려 하는 사람이 바로 이방인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조성하신 하나님은 온전하시고 실수함이 없으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어떠함을 비난하거나 부정하게 여기지 않으나, 하나님을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어떤 부분들을 부정하게 여기고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을 이겨내려는 사람들의 하나님은 자기 하나님, 곧 이방신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이방인들 중에서 얻지도 말고, 또 본향을 떠나지 않는 여자도 아내로 삼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주신 육신의 삶의 모든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이방인과 같은 삶의 모양을 거듭난 생명이 살아가는 모양으로도 삼지 말고,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의로 여기며 그것으로 하나님께 도달해보려는 마음에서 떠나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자신에게 주신 모든 것을 다 거듭난 생명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라는 것을 아브라함의 고향 땅을 떠나는 여자로 아들의 아내로 삼으라고 하심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필자도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 말씀은 존재의 말씀이니 행동이야 어떻던 무슨 상관이냐며, 술 마시는 자리도 자청하면서 ‘사람 마시라고 만든 술, 사람이 마시는데 무슨 죄냐?’며 능동적으로 마시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시비를 걸기도 했다. 그렇다는 것은 그런 모습을 보고서 누가 나와 같이 되고 싶어 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아들과 같이 내 안에 있는 거듭난 생명을 만나는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나쁜 것이 없다. 그렇다는 것은 신앙관이 바뀌었다고 버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관이 바뀌었으면 그 바뀐 신앙관으로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이전에는 내가 위대해지려고 사용하던 하나님이 주신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나를 볼 때 성령의 감동이 있을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에 사용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던지심과 같이. 


그리고 그와 같이 우리의 성격에서부터 가진 모든 것 까지 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이 우리의 삶을 볼 때 그것을 보는 이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깨달을 수 있도록 살아내는 것이 바로 우리 육신, 나의 삶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들이 아내를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이전에 살던 삶을 단절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것이 교회 시대에 와서 <영지주의>로 나타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도 많은 신앙 공동체가 이런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성경에서 밝아졌다고 막무가내로 종교적인 관습을 버리고,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세상을 심판하고 가족을 등지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모든 신앙은 아들을 이방신과 결혼 시키는 것이나, 아니면 아들 이삭을 고향 땅으로 데리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신앙은 떠나야 하는 것이다.


아들이 아내를 얻는다는 것은 거듭난 생명이 다시 아들을 얻을 수 있는 있는 삶의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비의 고향 땅과 같이 하나님께서 원래 나에게 주신 모든 것, 그것들로 아들을 얻을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삶이어야 비로소 그 삶을 보는 이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고백이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들을 얻는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전도요 선교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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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카페를 개설했습니다.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15. 12. 14. 12:35 Writer : 김홍덕

안녕하십니까? 블로그 운영자 김홍덕입니다.


블로그에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블로그를 매게로 하여 오프라인에서 모임과 만남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들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많은 만남을 가지기 어려운 상황임에 비해

저에게나 서로에게 안부나 또 질문이 하고 싶을 때 마땅한 방법이 없어서

인터넷상의 카페를 개설해 보았습니다.


여건이 된다면 이 블로그를 완전히 홈페이지처럼 꾸미면 좋겠지만,

현재로서는 저의 능력이 그 정도가 되지 않기 때문에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의 카페를 이용하여 상호간 교류와 또한

계획 중이 음성 파일의 공유와 전달 등에 활용하고자 합니다.


아직은 서로 인사도 하지 못한 분들도 계시기도 해서

금방은 친숙하게 운영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일단 시도를 해 보는 것이니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페의 이름은 <평교인 신앙 공동체>로 정했습니다.

주소는 http://cafe.naver.com/laymanclub 입니다.


그럼 그곳에서 많은 교제가 일어나기를 바래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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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으므로 아들의 배필을 구하고자 하였다. 남자에게 여자와 하나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의가 육신이 된 이삭에게 배필을 구한다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아들로 여기는 이에게 어떤 형식을 배필로 삼을 것인지에 대한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를 가진 이들이 어떤 삶의 모양을 가질 것인가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여인을 아들의 배필로 삼지 말고 아브라함의 고향에서 아들의 배필, 곧 아들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이어갈 배필을 이방의 여자 중에서 취하지 말고, 고향의 여자 중에서 취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의 고향 땅은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한 땅이다. 그곳은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그 지방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함을 좇는 사람들)의 땅, 곧 그런 사람 중에서 아들의 배필을 얻겠다는 것이다. 이는 언뜻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떠나라고 할 때는 언제고, 또 그곳에 가서 아내를 취하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일은 이삭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야곱 역시 그 아내들을 가나안이 아닌 아브라함의 고향에서 얻게 되기도 한다.


먼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브라함이 그 종에게 한 언약의 내용이다. 그것은 두 가지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여자가 그 땅을 떠나오려 하지 않으면 아브라함과 종의 언약이 무효가 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절대로 아들 이삭을 아브라함이 떠난 고향으로 데리고 가지는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람을 아브라함이 떠난 고향에서 얻되, 반드시 그 땅을 떠나는 여자로 하여금 아들의 아내를 삼게 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한 사람의 신앙 여정이라고 한다면, 고향에서 살고 있는 여자라는 것은 신앙의 여정을 출발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자기 삶의 형식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본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목적이 하나님을 믿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신앙,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이 땅에서 위대해지고자 한 삶의 자리를 떠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생명으로 거듭났을 때에 그 생명을 표현해내는 삶의 방식을 기존에 가지고 있던 종교적인 관습,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는 것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문득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지만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도 아들의 배필을 구하러 보내는 종에게 환도 뼈에 손을 넣게 하고 맹세하게 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신앙의 여정을 가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살겠다는 사람들에게도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가지면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다 버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 믿기 시작하면 성격도 바꾸어야 하고 말투도 바꾸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직장도 버리고 예수를 같이 믿어주지 않으면 가족도 떠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결단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잘못된 관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자신의 것이 있다. 성격이 그렇고 외모가 그렇고 혈통(성씨)이 그렇고, 성별도 그렇다. 그러한 것은 다 고향과 같은 것이다. 그런 것 중에 어떤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도 있고, 바꾸려 하고 원망스럽게 여기는 것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믿고, 또한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으로 안다면 자신에게 주신 모든 것은 그 어떤 것도 다 선한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염두에 보고 이 말씀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지만 반대로 아들의 아내를 반드시 그 땅에서 구하라고 하셨다는 것은 깊은 뜻이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라고 한 아브라함은 남자다. 즉 의를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의(무엇이 가치 있는 것이고, 무엇이 선한 것인가 하는 가치관과 정체성)는 위대함을 추구하는 것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반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로 지어졌기에 사람의 육신이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예비 된 것이므로 그것은 다 온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의는 위대함을 좇는 것에서 떠나야 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생명의 배필, 그 생명을 표현하는 형식은 고향과 같이 원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것을 통하여 표현하라는 것이다. 다만 그 고향의 여인, 자기 삶에 주어진 육신과 같이 주어진 모든 형식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이미지와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고향 땅에서 떠난 여자로 아들의 배필을 삼겠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형식의 본질을 모른 체 지키며 살다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알고 보니 그런 모든 것은 본질이 아니므로 아무렇지 않게 버리고 사는 것이 온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기도하는 것을 두고, 기도라는 것이 육신이 먹고 사는 것에 관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이전에 기도하던 습관과 모양까지 다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무릎 꿇고 무엇을 기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고향 땅과 같이 위대함을 좇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기도하는 내용이 먹고 마시고 세상의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생명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고향 땅에서 아내를 얻으라는 것이다. 즉 자기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자신의 어떠함들, 하나님께서 주신 성격이나 자신의 육신의 어떠함이나, 또한 그런 환경에서 몸에 베인 종교적인 습관들을 버리지 말고 그러한 것을 내용인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표현하는 배필인 형식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성격을 100%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가진 것 중에 어떤 것은 바꾸려 한다. 바꾸려 한다는 것은 잘못되었고 나쁘고 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성격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조성하실 때 주신 것이므로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성격 자체가 나쁜 것은 없다. 그것을 어디에 쓰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을 바벨탑을 쌓는데 사용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거하시게 자신의 본질로 여겨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사람으로 순종하느냐의 문제인 것과 같은 것이다.


칼의 날카로움이 위험하지만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의 문제다. 칼을 만들고 사는 이가 가진 목적 안에 있으면 그것은 선한 것이고,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으면 악한 것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떠난 고향과 같은 것,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삶의 어떠함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알기 전에 가지고 있고 훈련된 종교적인 관습과 같은 것들이 리브가가 그 고향 땅을 떠나듯이 위대함을 좇는 것에 사용되지 않고, 이삭의 아내가 되는 것, 즉 하나님 아들이 된 생명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고향 땅의 시로 자손을 삼을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고, 이방인과 같이 자신에게 주신 것을 다 고치고 버릴 것으로 삼는 마음으로 삶의 모양을 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이삭의 아내를 이방인들 중에서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노아의 홍수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아 하나님을 격노케 한 일이 있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 즉 이삭의 아내를 아브라함의 고향 땅에서 얻는 것,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육신의 어떠함을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자기 삶의 표현 형식으로 삼으라는 것에 관하여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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