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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과의 언약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3. 13:11 Writer : 김홍덕

아브람 개인으로서의 언약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실 때에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아브람은 헤브론 땅으로 왔다. 그 땅을 아브람과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셨다.(창 13:14-18) 그러면 그것이 다 인가? 그렇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아브람이 헤브론 땅에 왔다는 것이 약속의 본질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람도 그렇고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도 그런데, 단순히 사람이 먹고 살 땅이 약속의 본질이라면 금방 오면 된다. 그런데 돌고 돌아서 들어가게 된다. 아브람도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애굽으로 갔다가, 애굽에서 나와서 다시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있다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으로 왔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걸어서 보름이면 갈 수 있다는 길을 40년을 돌고 돌아서 도착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지도(地圖) 상의 땅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땅은 곧 사람이다.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은 헤브론이라는 지명을 가진 땅이 본질이 아니라, 아브람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이 나타난 전부라고 성경을 본다면 아브람의 믿음을 본받으려면 헤브론 땅으로 가야할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고서 그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을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도 사람의 일을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일이겠는가? 성경을 눈에 보이는 대로 믿으려 하다 보니 예루살렘을 두고 싸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은 그렇지 않다 싶겠지만, 교회나 성당에 가서 기도하면 더 잘 들어주신다고 여기거나, 교회나 성당의 건물이 더 거룩하다고 여기는 생각이 있다면 그게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가 부정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이는 것인 본질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지시한 땅은 헤브론이 아니라 아브람이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 관한 말씀을 성경으로 사람들에게 읽으라고 주신 것은 아브람과 같이 같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 육신의 자리에서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정체성을 가진 자리로 가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일을 해결하고, 육신을 위하여 살던 자리가 바로 본토 아비 친척 집이라는 의미다. 가끔씩 사람의 삶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목숨이 붙어 있으니 그 목숨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어떻게든 견디듯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곤고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갑부나 권력자나 또 반대로 굶어 죽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육신의 문제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좋은 기술과 철학으로 만들어낸 놀라운 물건과 사상들이 지향하는 효과, 이익이 무엇인가 할 때 인류라는 인간 종족의 육신을 가진 삶의 윤택함 그것일 뿐이다. ‘인간다운 삶’ 존엄성과 같은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 어떤 고상한 철학도 결국 인생이라는 삶의 기간 동안 스스로가 만족할 만한 어떤 의미를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일 뿐이기에 그 모든 것은 아무리 고상하든, 놀라운 기술이나 발명이라도 다 살라고 주어진 시간을 버티듯이 사는 것일 뿐이다. 그런 모든 것이 다 보이는 세상 이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육신으로 사는 삶이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신앙과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믿노라 하여도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안다면 결국은 신앙이 육신의 문제에 수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을 역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그냥 산신령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신앙을 가지지 말라고 십계명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지 말라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금식 후에 마귀가 세상 만국을 주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을 시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너무나 많은 신앙이 하나님을 세상사는 동안 보급계나 해결사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잘 공급을 받는지를 기준으로 신앙이 좋다 아니다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잠깐 이야기가 곁길로 가겠지만, 오늘 당신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를 두 가지 관점에서 보자. 먼저 그 기도가 이루어지면 하나님께 유익인가 당신의 육신(과 연관된 또 다른 육신)에게 유익인가? 나에게 유익이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은 단연코 당신의 이익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 한 가지는 내가 한 기도로 인하여 다른 사람은 손해를 보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입학 정원 10명인 대학에 기독교인 20명과 신앙 없는 사람 10명이 지원했을 때 그곳에 합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의 기도가 이 둘 중의 하나 이상에 속한다면 당신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있는 사람이다. 당신의 기도가 눈에 보이는 것을 구했지 않는가?


한 가지를 생각해보자. 세상의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위하여 자동차를 만들겠는가? 자동차는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만든 것이다. 사람이 만든 그 어떤 것도 그 물건을 위하여 만든 것이 하나도 없다.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은 사람 안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만든 목적과 그 목적이 이루어짐으로 사람이 유익하게 되도록 눈에 보이지 않는 목적과 유익을 위하여 만든 것이다. 그것이 그럴 찐데 하물며 하나님이 만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사람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믿음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바로 그런 얼토당토않은 가치관을 가진 세계에서 떠나서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삶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 감사한 자리로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아브람을 통해서 우리 모든 인생에게 보여주신 언약의 말씀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본토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할 땅, 곧 사람의 정체성으로 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람이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언약한 것이고, 우리 각 사람을 향한 언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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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18) 말씀이 육신이 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1. 2. 19:02 Writer : 김홍덕

성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건을 꼽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그 사건의 가장 큰 의미는 바로 이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라고 하면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으로 잉태하심이고, 이것이 구원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2-14)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과 다르게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거나,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오셔서 정말로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이 오신 것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너무 중요한 것이다. 정말로.


혈통이나 육정은 일반적인 사람의 탄생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렇게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이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육정이나 혈통으로 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에 의하여 난 자, 곧 하나님으로 인하여 새로운 삶이 시작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의미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 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시작된 삶이 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인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삶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다. 그것은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졌다면 누구라도 예수님과 같아질 수 있다, 아니 같아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요한 사도의 말씀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하셨다. 복수다. 그렇다는 것은 단 한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 한 분만이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이 된 사람은 누구라도 다 하나님의 자녀요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다.


자녀는 아버지의 의가 어머니의 몸에서 잉태되어 난 자다. 하나님의 자녀란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자기 인생을 통해서 자녀와 같이 자기 생명 안에서 삶으로 표현해 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여자의 몸 안에서 자녀가 태어나듯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 역시 그 사람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육신의 행동이 성경을 지킨다고 되는 것이라, 그 사람의 행동과 삶이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도록 하는 생명이 그 사람의 심령 안에 있는 이유로 그것이 표현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자녀가 없으면 결혼한 남녀는 결코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녀가 결혼해서 하나가 되는 것은 자녀로 인함이다. 남자의 의(성씨)가 여자의 육신을 통해서 나타난 존재가 바로 자녀이다. 즉 자녀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된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도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삶으로 나온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을 그렇게 살아내는 생명이 사람 안에 없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 역시 같은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이 삶으로 표현될 때 아들이 태어난 것과 같이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도 증명하듯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그 생명으로 인한 삶이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을 본 사람은 또 다시 그 마음 안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런 삶을 살게 되는 생명이 잉태되어 그 사람 역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어 삶으로 나타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하기에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보니 자기 안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즉 요한 사도도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가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듯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유일(독생한)한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되어서 자기 안에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과 같은 생명과 법이 자기 안에서 생명과 법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임을 아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아들들이 자신이 아들을 얻을 때에 아버지가 아들 얻은 법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 오늘 나의 사건이 아니라면 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아직 생명이 삶을 주관하는 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 맘대로 성경을 보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생아가 되는 것이다. 오늘 이 요한복음의 말씀을 대하는 사람, 그 사람 안에 말씀이 육신이 되는 법이 생명이 되면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과,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과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 열릴 것이다.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새롭게 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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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2. 14:54 Writer : 김홍덕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는 신앙


멜기세덱과 관련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멜기세덱의 이름과 신분이다. 먼저 그는 살렘 왕, 곧 평화의 왕이다. 평화의 왕이 아브람을 맞이하고 축복했다는 것은 아브람이 평화의 왕이 가진 의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아브람에게 평화가 있다는 것이다. 평화가 있다는 것은 곧 안식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아브람은 어떻게 보면 자기 안에 있던 애굽을 사모하는 본성이라 할 수 있는 혈육인 조카 롯을 떠나보냄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이 온전히 이루어진 존재가 되어 하나님께서 땅을 주셨다. 그렇다는 것은 다시는 그런 본성과는 엮이지 않아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자신은 손해 본 것도 없음에도 조카 롯이 위대함을 좇고 애굽을 사랑하는 본성들끼리 싸우는 싸움에서 져서 잡혀가나 것을 자기 집에서 기르던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되 찾아왔다. 어떻게 보면 불필요한 싸움을 했거나, 아니면 그냥 두는 것이 더 은혜로운 것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브람이 롯을 찾아 온 것은 오늘 우리 신앙 여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도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믿음이 또 믿음을 낳고 그렇게 많은 자손 같이 복음이 전파되어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라 할 수 있는 교회가 되는 여정에 대한 말씀이 바로 아브람의 여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아브람이 어떻게 보면 자기 안에서 빠져나간 애굽의 본성과 같은 롯을 다시 구해오는 것과 같은 신앙의 여정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앙을 가지면 세상과 독립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청소년들이 어른이 되는 것이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듯이. 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어른이 되듯이, 신앙이라는 것도 세상에서 독립될 때 좋은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존재하는 목적대로 잘 다스릴 때 좋은 신앙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평강의 왕이 마중을 나오는 평화와 안식의 신앙이 되는 것이다.


아브람이 세상의 법끼리 싸우다 잡혀간 롯을 다시 찾아 온 것은 바로 그런 신앙의 여정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신으로부터 나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사람이 되는 여정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난데없이 멜기세덱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롯을 되찾아 온 아브람의 정체성이 살렘 왕의 영접을 받을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모순 중의 하나가 세상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게 좋은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왜 세상 가운데 살게 하겠는가 하는 것만 생각해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어두우면 그런 것을 모르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그라운드요 도화지와 같은 곳이지 어울리면 나 자신이 지옥으로 끌려가는 위험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얻으려 하고, 하나님을 힙 입어 세상의 피라미드 더 높은 곳에 올라가려 하면서 그렇게 세상에서 더 높은 곳에 서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며 하나님을 이용하는 믿음이 더 세상적인 것이다. 아브람이 보여준 것은 자기 안에서 버려야할 애굽의 본성, 곧 세상의 일도 방관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브람에게 롯은 자신 안에 있는 애굽의 본성이고, 또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한 아비 친척의 일부지만 그 롯이 세상에 사로잡혀가는 것을 그냥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브람은 롯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롯은 자기가 좋아서 간 땅에서 그 땅의 법에 의하여 포로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세상의 법대로 다투다가 잡힌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롯을 위하여 괜히 수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브람도 자기 안에 애굽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을 때에 애굽이 자신의 기근을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하고 갔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했었고, 그런 애굽을 사랑하는 롯과 함께 있어 다툼이 있었던 아브람이다, 그런 아브람이 그냥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께 제사나 잘 드리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세상을 멀리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기와 연관된 세상일이야 어떻게 되든지 그냥 방치한다. 친인척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멀리하기도 하고, 부모가 교회에 가는 것에 대하여 뭐라 한다고 집을 나오기도 한다. 먹고 사는 일도 신앙에 위배된다고 생각되면 버린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과 세상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을 인지하고 인정해야 할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자기와 상관이 있는 세상의 일을 방관하지 않고, 오히려 다스리는 자가 되었을 때, 그때에야 평안과 안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때가 되어서 평강의 왕 멜기세덱이 와서 축복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제사장이 떡과 포도주, 예수님의 몸을 먹음과 같이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므로 예수님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평강의 왕이 축복하는, 세상을 평안하게 살아가는 생명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십일조


살렘 왕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마중 나와서 축복할 때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왔다고 했다.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성찬에서 예수님께서 몸과 피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면서 먹고 마시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너희의 몸으로 나타내는 삶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아브람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었다는 것은 아브람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생명이 되었다는 축복이라는 것이다.


그 때에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그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고 하였는데 이 얻은 것은 싸움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이 가지고 온 떡과 포도주를 말하는 것이다. 아브람은 기본적으로 빼앗긴 것이 없고, 또한 롯과 함께 찾아온 것도 소돔 왕에게 소위 말해서 인건비만 제하고 다 돌려주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재물의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것은 스티브 잡스에게 아이폰을 선물하는 꼴 밖에 더 되겠는가? 하나님 만든 세상에서 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그러므로 십일조는 세상에서 얻은 세상의 것을 드리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그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으로 드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옛날에 십분의 일은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십분의 일을 드린다는 것은 전부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진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인 것이다. 그러니까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보화를 쌓을 곳이 없이 준다고 하셨으니 십일조를 드리면 이 땅에서 그리고 죽어서 천국에서 부자로 사는 것을 믿고서 드리는 것이 십일조가 아니라, 쩍과 포도주를 먹은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삶으로 표현되는 순전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로서 드리는 것이 십일조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조카가 잡혀갔는데 가슴 아프지만 ‘애굽(세상)을 사랑하는 녀석이니 그냥 두자.’라는 식의 신앙과 십일조를 드려서 부자가 되겠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이지만 같은 신앙이다. 아브람과 같이 세상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을 멀리하려 한다. 두렵기 때문이다. 괜히 세상에 어울렸다가 천국에 못갈까 싶은 것이다. 주일날 회사에 가서 일하면 지옥에 갈 것 같고, 예수 안 믿는 친인척과 같이 어울리면 그렇게 물들 것 같은 마음이 있기에 그런 것이다. 그게 아니고 언제라도 세상을 다르실 능력이 있다면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본성 자체가 하나님을 이기는 생명이어야 되는 것이다. 세상의 법으로 신앙을 지키려 하면 세사아과 어울리거나 맞붙으면 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울리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과 그런 신앙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지 않기 위해서 십일조를 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행동이 생명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이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떡과 포도주를 받음과 같이,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몸으로 표현하는 모든 삶이 된다면, 세상을 외면할 이유도 없고, 그런 생명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든 그것이야 말로 온전한 십일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삶은 삶 전제가 드려진 산(살아 있는) 제사요 단번에 모든 것을 드린 제사요 언제나 불이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과 같은 삶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온전한 십일조요, 그것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하나님의 제사장 평강의 왕에게 축복을 받은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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