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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2. 14:54 Writer : 김홍덕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는 신앙


멜기세덱과 관련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멜기세덱의 이름과 신분이다. 먼저 그는 살렘 왕, 곧 평화의 왕이다. 평화의 왕이 아브람을 맞이하고 축복했다는 것은 아브람이 평화의 왕이 가진 의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아브람에게 평화가 있다는 것이다. 평화가 있다는 것은 곧 안식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아브람은 어떻게 보면 자기 안에 있던 애굽을 사모하는 본성이라 할 수 있는 혈육인 조카 롯을 떠나보냄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이 온전히 이루어진 존재가 되어 하나님께서 땅을 주셨다. 그렇다는 것은 다시는 그런 본성과는 엮이지 않아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자신은 손해 본 것도 없음에도 조카 롯이 위대함을 좇고 애굽을 사랑하는 본성들끼리 싸우는 싸움에서 져서 잡혀가나 것을 자기 집에서 기르던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되 찾아왔다. 어떻게 보면 불필요한 싸움을 했거나, 아니면 그냥 두는 것이 더 은혜로운 것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브람이 롯을 찾아 온 것은 오늘 우리 신앙 여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도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믿음이 또 믿음을 낳고 그렇게 많은 자손 같이 복음이 전파되어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라 할 수 있는 교회가 되는 여정에 대한 말씀이 바로 아브람의 여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아브람이 어떻게 보면 자기 안에서 빠져나간 애굽의 본성과 같은 롯을 다시 구해오는 것과 같은 신앙의 여정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앙을 가지면 세상과 독립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청소년들이 어른이 되는 것이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듯이. 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어른이 되듯이, 신앙이라는 것도 세상에서 독립될 때 좋은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존재하는 목적대로 잘 다스릴 때 좋은 신앙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평강의 왕이 마중을 나오는 평화와 안식의 신앙이 되는 것이다.


아브람이 세상의 법끼리 싸우다 잡혀간 롯을 다시 찾아 온 것은 바로 그런 신앙의 여정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신으로부터 나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사람이 되는 여정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난데없이 멜기세덱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롯을 되찾아 온 아브람의 정체성이 살렘 왕의 영접을 받을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모순 중의 하나가 세상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게 좋은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왜 세상 가운데 살게 하겠는가 하는 것만 생각해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어두우면 그런 것을 모르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그라운드요 도화지와 같은 곳이지 어울리면 나 자신이 지옥으로 끌려가는 위험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얻으려 하고, 하나님을 힙 입어 세상의 피라미드 더 높은 곳에 올라가려 하면서 그렇게 세상에서 더 높은 곳에 서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며 하나님을 이용하는 믿음이 더 세상적인 것이다. 아브람이 보여준 것은 자기 안에서 버려야할 애굽의 본성, 곧 세상의 일도 방관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브람에게 롯은 자신 안에 있는 애굽의 본성이고, 또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한 아비 친척의 일부지만 그 롯이 세상에 사로잡혀가는 것을 그냥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브람은 롯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롯은 자기가 좋아서 간 땅에서 그 땅의 법에 의하여 포로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세상의 법대로 다투다가 잡힌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롯을 위하여 괜히 수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브람도 자기 안에 애굽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을 때에 애굽이 자신의 기근을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하고 갔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했었고, 그런 애굽을 사랑하는 롯과 함께 있어 다툼이 있었던 아브람이다, 그런 아브람이 그냥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께 제사나 잘 드리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세상을 멀리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기와 연관된 세상일이야 어떻게 되든지 그냥 방치한다. 친인척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멀리하기도 하고, 부모가 교회에 가는 것에 대하여 뭐라 한다고 집을 나오기도 한다. 먹고 사는 일도 신앙에 위배된다고 생각되면 버린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과 세상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을 인지하고 인정해야 할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자기와 상관이 있는 세상의 일을 방관하지 않고, 오히려 다스리는 자가 되었을 때, 그때에야 평안과 안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때가 되어서 평강의 왕 멜기세덱이 와서 축복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제사장이 떡과 포도주, 예수님의 몸을 먹음과 같이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므로 예수님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평강의 왕이 축복하는, 세상을 평안하게 살아가는 생명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십일조


살렘 왕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마중 나와서 축복할 때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왔다고 했다.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성찬에서 예수님께서 몸과 피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면서 먹고 마시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너희의 몸으로 나타내는 삶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아브람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었다는 것은 아브람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생명이 되었다는 축복이라는 것이다.


그 때에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그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고 하였는데 이 얻은 것은 싸움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이 가지고 온 떡과 포도주를 말하는 것이다. 아브람은 기본적으로 빼앗긴 것이 없고, 또한 롯과 함께 찾아온 것도 소돔 왕에게 소위 말해서 인건비만 제하고 다 돌려주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재물의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것은 스티브 잡스에게 아이폰을 선물하는 꼴 밖에 더 되겠는가? 하나님 만든 세상에서 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그러므로 십일조는 세상에서 얻은 세상의 것을 드리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그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으로 드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옛날에 십분의 일은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십분의 일을 드린다는 것은 전부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진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인 것이다. 그러니까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보화를 쌓을 곳이 없이 준다고 하셨으니 십일조를 드리면 이 땅에서 그리고 죽어서 천국에서 부자로 사는 것을 믿고서 드리는 것이 십일조가 아니라, 쩍과 포도주를 먹은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삶으로 표현되는 순전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로서 드리는 것이 십일조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조카가 잡혀갔는데 가슴 아프지만 ‘애굽(세상)을 사랑하는 녀석이니 그냥 두자.’라는 식의 신앙과 십일조를 드려서 부자가 되겠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이지만 같은 신앙이다. 아브람과 같이 세상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을 멀리하려 한다. 두렵기 때문이다. 괜히 세상에 어울렸다가 천국에 못갈까 싶은 것이다. 주일날 회사에 가서 일하면 지옥에 갈 것 같고, 예수 안 믿는 친인척과 같이 어울리면 그렇게 물들 것 같은 마음이 있기에 그런 것이다. 그게 아니고 언제라도 세상을 다르실 능력이 있다면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본성 자체가 하나님을 이기는 생명이어야 되는 것이다. 세상의 법으로 신앙을 지키려 하면 세사아과 어울리거나 맞붙으면 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울리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과 그런 신앙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지 않기 위해서 십일조를 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행동이 생명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이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떡과 포도주를 받음과 같이,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몸으로 표현하는 모든 삶이 된다면, 세상을 외면할 이유도 없고, 그런 생명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든 그것이야 말로 온전한 십일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삶은 삶 전제가 드려진 산(살아 있는) 제사요 단번에 모든 것을 드린 제사요 언제나 불이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과 같은 삶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온전한 십일조요, 그것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하나님의 제사장 평강의 왕에게 축복을 받은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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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18) 영접하는 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1. 2. 12:09 Writer : 김홍덕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자기 땅>에 오신 것이라고 했다(요 1:11) 자기 땅에 왔는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두움>이라고 했다. 왜 그것이 어두움인가 하면 자기 땅에 오신 예수님이 바로 사람과 세상 곧 백성들의 빛이시기에 그 빛을 몰라본다는 것은 어두움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 빛은 모르기가 더 어렵다. 눈을 감고 있어도 빛이 비취면 아는 것이 빛이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빛이 어두움에 비쳤는데 어두움이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것은 이 빛이 우리가 아는 그 빛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빛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인식>과 <깨달음>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미디어의 발달로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이름은 들었다고 봐야 한다. 영어권에서는 Jesus라는 단어가 ‘맙소사!’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정도니 예수님의 실존에 대하여 모르기가 더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바로 이것이 어두움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의도, 그것을 모르면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때로 신학이나 고고학 혹은 역사학적으로 그 실존을 확신하다고 해도 아무소용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그렇게 연구나 하라고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세상에 오신 빛인 예수님을 아는 것인가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영접하는 자”는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1-12)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영접하지 않는 자 = 어두움에 비친 빛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자>, 그리고 <영접하는 자 =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문맥만 읽을 수 있다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영접하는 것이고, 무엇이 믿는 것인가 하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빛은 조명이나 물리적인 광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빛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빛의 개념이 표현된 형식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빛은 목적이 의미가 있어지는 깨달음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사람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시작에 함께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 그것이 빛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질 때에 예수님이 빛인 것이다.


요즈음은 컴퓨터가 어디에나 있다. 길가다가도 천원만 주면 한 시간씩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컴퓨터다. 하지만 컴맹에게는 가을 길의 낙엽처럼 컴퓨터가 널려 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것처럼 예수님에 대하여 매일 듣고 매일 새벽에 가서 부르짖어도 예수님의 존재 목적, 곧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자신에게 의미가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고,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위하여 보내신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컴퓨터를 가지고 밭을 갈면서 자신에게 컴퓨터가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을 두고 컴퓨터가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영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접의 사전적 의미이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과 이유가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 영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그렇지 않고 자기 맘대로 컴퓨터로 밭 갈면서 유용하다 여김과 같이 예수님을 자기 생각대로 믿는 것이 바로 세상에 비친 빛을 알지 못하는 어두움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묵상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보게 된다는 것이다.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 대구를 대표하는 성당 앞을 지나게 된다. 성당 앞에는 미사 안내(?)와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중에서 <자동차 축복>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정말로 허망함을 느낀다. ‘예수님이 자동차 축복하러 이 땅에 오신 것인가?’하는 생각에.


그것은 비단 그 성당의 안내문의 문제가 아니다. 잘 생각해보면 교회나 성당이나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은 늘 사람이 살아가는 육신의 삶을 안위하고. 육신의 삶에 관한 것에 복 주시는 분 이상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에 가서 선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가서 전하는 것이 결국 그것이라면 다를 것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냥 세상의 모든 신들 중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인생의 문제를 더 잘 해결하시는 분이라는 믿음 그 뿐이다.


단연코 그런 신앙은 영접하는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어두운 신앙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영접한다는 것이지, 하나님을 이용하거나 보급계로 생각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흉측한 일들 면하고, 같은 시험이나 경쟁에서 남들보다 잘 된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을 이용하고 보급계로 여기는 것이지 영접하는 것이 아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영접하는 대상의 뜻을 받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오실 곳에 오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땅이 예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말씀이다.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곧 땅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 땅에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땅에 오셨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면 빛이 어두움에 비쳤음에도 알지 못하는 어두움인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가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인 것이다. 이름은 정체성인데, 하나님의 이름 ‘기도하면 필요한 것 주시는 자’라든가, ‘수고하면 상 주는 자’라든가, ‘자기 소유를 많이 바치면 축복하는 자’와 같은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신들이 따로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바알이요 아세인 것이다. 즉 이방신이고, 우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생이 살 동안 겪는 일을 안위하고, 세상에서 육신이 하는 일을 남보다 잘 되게 복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은 이방신으로 섬기는 것이다. 즉 문맹이 글자로 표시된 사람의 뜻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자신의 수고와 소유의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와 또한 내세에서 하나님을 그렇게 섬지 않은 사람과 달리 복 주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은 다 어두움인 것이다. 하나님의 의미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 땅에 비친 빛을 깨닫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안위를 살피신다고 영접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뜻이 온전히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자기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존재 목적과 이유가 바로 뒤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이 되는 것, 그것이다.


이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시는 것, 곧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아들이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땅은 하늘의 기운을 표현한다. 하늘이 차가우면 땅의 모든 것이 춥고, 하늘이 따뜻하면 땅의 모든 것이 덥다. 차고 더운 것은 영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땅이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의도(그것이 가장 기초적인 종족보존의 본능이라 해도)는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표현된 것이 아들인 것도 마찬가지 법이다. 


그렇게 될 때 사람이 하나님의 땅, 곧 자기 땅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영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빛을 영접한다는 것은 인식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 존재의 목적 그것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들이고, 그것이 빛이 비친 것이고, 그것이 태초이며, 그것 하나님의 세계와 나라가 시작된 것이다. 영접한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 그것을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로 영접한다는 것, 그것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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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잡힌 롯을 구한 아브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0. 30. 15:58 Writer : 김홍덕

롯은 떠났지만 죽은 것은 아니다. 그게 특별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우리에게 롯과 같은 본성이 우리 안에 계속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람이 롯과 함께 있을 때는 기근이 나니 자기 정체성을 채우러 애굽으로 가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그 롯의 본성과 같이 행하지 않고 오히려 위대함을 다투는 전쟁을 다스려 버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 땅에 있었는데 바벨탑을 쌓은 땅 시날의 왕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과 소돔과 고모라성의 왕들이 연합한 연합군과 싸움이 있었다. 그리고 먼저는 그 전쟁을 시날 왕의 연합군이 이겨서 결국 롯도 잡혀가 버린다. 즉 위대함을 다투는 전쟁에서 롯이 패한 것이다. 롯은 위대한 애굽이 좋아서 갔는데 그 전쟁에서 진 것이다. 즉 사람이 세상의 방법으로 세상과 싸우니 항상 더 강한 자가 있어 결국은 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람은 그렇게 끌려간 롯을 자기 집에서 기르고 연습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시날 왕 연합군을 물리치고 롯과 그의 모든 소유를 다 찾아온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본성이 어떻게 세상을 이기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브람은 롯과 함께 있을 때에 갈등이 있었다.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가기도 했다. 그것은 자아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롯의 본성으로 해결하려 했었다는 것이다. 즉 세상에서 인간의 허전함을 채우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롯의 목자들과 자신의 목자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그 땅이 자신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곳을 떠났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에 도착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에 도착한 것이다. 이 아브람의 모습과 여정이 우리 신앙의 여정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누구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자리에 이르려면 애굽을 좋아하는 본성과 자신의 본성이 다투는 것을 보면 그 땅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 상태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을 보면 떠나라고 하셨다. 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 내용과 형식이 다른 것을 보면 그 땅을 떠나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브람은 헤브론에 이르기 전까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있었다. 애굽으로 가기 전에도 그곳이었고, 애굽에서 사래를 빼앗길 뻔하고 돌아와서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아브람을 수용할 수 없었다. 즉 하나님도 아니고 세상도 아닌 자리는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을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에 가려는 사람에게 그 땅은 만족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군에 있을 때에 일찍 일어나 기도를 했는지 아닌지에 따라 일과가 달라진다고 느꼈다. 그러면 그냥 ‘열심히 기도하자.’ 이랬을 수도 있었는데 그건 제대로 된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이것이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유일까?’, ‘다만 산신령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그저 하루 편하게 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굿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라고 생각했다. 내 안에 있는 롯의 목자와 아브람의 목자가 다툰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갈등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Do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Be에 관한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고, 결국 그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필자의 경험이 모든 사람의 공통분모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어떤 행위를 보이고 또 어떤 소유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보응하신다는 것이 자신이 믿어야할 하나님인가 생각하거나, 세상에서 위대해지려고만 하는 교회에 자신의 영혼과 정체성을 맡겨도 되는지 고민하지만 아브람이 롯과 갈라서서 헤브론에 이른 것과 같이 그 자리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아브람은 우리 신앙의 여정을 보이고 있다. 아브람은 그런 자리가 자신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 떠났다. 그리고 롯의 본성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서 남은 땅으로 갔는데 그곳이 바로 헤브론, 곧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 우리 안에 있는 애굽의 본성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이 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그 본성은 서로 위대해지려는 다툼에 의하여 사로잡혀 가 버리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지내게 하라고 하심과 비슷한 것이다.


롯은 아브람을 떠났지만 죽은 것은 아니다. 아브람을 떠난 롯이 살아 있듯이 우리 사람 안에는 늘 롯과 같은 본성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싸워 이기려 한다. 하지만 무엇으로 이길 것인가 할 때, 바벨탑을 쌓은 시날 왕을 대적하여 소돔과 고모라가 맞서 싸워봤자 이기지 못하듯, 위대함을 추구하는 것을 애굽과 같은 물이 흐르는 땅의 사람들의 방법, 곧 애굽의 방법으로는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은 행위나 소유를 드림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수녀원에 젊은 수녀가 들어왔는데 남자 생각을 이기기 힘들어서 원장 수녀를 찾아 갔다고 한다. 그러자 원장 수녀는 권총을 한 자루 주면서 남자 생각이 날 때마다 이 총을 쏘면 남자 생각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권총을 받아들고 온 젊은 수녀는 남자 생각이 나자 총을 쏘았다. 그러자 난생 처음 들은 총소리에 놀라서 남자 생각이 싹 가셔 버렸다. 젊은 수녀는 ‘역시 원장님이구나!’ 생각했지만 이내 총소리에 적응이 되고 효과가 없어졌다. 그래서 다시 원장 수녀를 찾아 갔다. 그러자 원장 수녀는 큰 엽총을 주었다. 젊은 수녀는 엽총을 쏘았더니 큰 소리에 놀라서 얼마간 효과가 있었지만 이내 소용없었다. 그러자 다시 원장 수녀를 찾았지만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지하실에서 총소리가 나서 보니 원장 수녀가 기관총을 쏘고 있었다.


위의 글은 언젠가 유머 책인가 어디서 본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람 안에 있는 본성은 사람의 행위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애굽의 땅과 같은 땅을 좋아하는 롯이 거하는 땅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은 시날왕을 이길 수 없었다. 이는 사람을 연단해서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마음을 육신의 방법으로 세상의 방법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을 육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아니면 소유를 드림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 안에 있는 위대함을 추구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어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이 이김은 그냥 다 죽이고 없애는 것이 아니다. 이 이김은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나는 이김이다. 즉 평강의 왕, 정의의 왕이 나와서 대적을 이기는 자라는 축복을 하는 이김이다. 이것은 사람이 위대해지려는 갈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이 있는 자리가 이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김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할 때 얻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브람이 롯을 구하러 갈 때 자기 집에서 연습하고 자란 이들이 가서 구했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할까?’가 아니라, 어떤 땅에 있는 사람의 집에서 자란 것이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이 어떤 자리,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정체성이 가진 생명이 자람서 위대해지려는 다툼을 이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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