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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은 자세히 보면 특이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하려고 아들을 보냈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뿐 아니라 심판에 관해서도 ‘세상을 심판하러 오심이 아니라.’고 하고 있고, 구원 역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는데 아직도 세상은 혼돈스럽고 전쟁의 소식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소식들이 일상인데 예수님이 오신 것이 어떻게 세상을 구원했다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누구나 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뜻을 가장 설명하는 말씀이라고 여기지만 정작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말씀이라는 것을 주목해 보면, “정말 그대로 됐나?” 싶은 것이 현실적인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을 구하기 위함이라고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어떤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에도 사람들이 세상을 평화롭게 여기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자.


사람이라는 존재는 정말로 작아 보이지만 또한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온 우주를 그 마음에 담고도 남음이 있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그 마음에 담고도 남음이 있으며, 태초 이래의 모든 역사를 그 안에 담음에도 부족함이 없는 존재가 사람이기도 하다.


성룡이라는 배우와 배우 윌스미스의 아들이 나오는 <베스트키드>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는 흑인인 아이가 중국에서 무술을 배우는 영화인데, 성룡에게 무술을 배우는 중에 많은 사람들이 무술을 연마하는 산에 가는 중에 아이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이기고 싶다.”고 그러자 스승인 성룡이 이렇게 답한다. “너 자신만 이기면 된다.”라고.


사람이란 정말로 그런 존재다. 자기 마음과 안목만을 바꾸면 세상이 바뀌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이 구원 받은 세계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셨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아는 사람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세상이 온전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얻겠다는 말씀인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죄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이다. 죄라는 것은 자기의 자리를 떠났다는 것이니 구원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 자리를 회복한 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다. 미운 오리새끼에게 구원은 자신을 구박하는 오리들을 물리치거나 그들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백조라는 것을 깨닫고 하늘로 날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구원은 사람을 만드신 이가 사람을 만드실 때에 정하신 자신의 정체성을 떠난 자리인 죄에서 자신을 지은 이가 정한 자기 정체성의 자리로 회복된 것이 구원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한 것은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온전히 인식하게 되는 밝음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온 우주와 세상은 구원을 받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구하러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지창조와도 같은 말씀이다. 한 사람에게 구원이 임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렸다는 것,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경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세상이 운영되는 모든 것에 자신을 순종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바울사도가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가 이루어진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회복했다는 것이고, 그 정체성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의 육신을 가진 삶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이 보이셨기에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 받은 사람,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아들, 곧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과 존재하는 것의 존재 목적이 그 사람으로 인하여 달성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존재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인 구원 받은 사람이 나왔다는 것이 그것이고,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의 존재 목적이 제 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기에 모든 피조물 또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하신 목적 아래 들어가도록 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그것을 바꾸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존재가 가진 안목과 인식과 의가 바뀜으로 사람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그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로 움직이는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세상을 창조하신다는 것이고, 그 사람이 이 모든 것을 바로 보게 된다는 것이 또한 빛이 있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하는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것의 심판이 되는 기준을 보이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 곧 구원 받은 이들에게 이러한 일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 3장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서 구원하시려 하심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구원, 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이 밝히 보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것을 고쳐야겠다고 소리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베스트키드의 대사처럼 자신만 온전한 구원 안에 있으면 세상은 정말로 온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온전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영향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모욕하는 것이다. 세상이 온전하지 못한 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볼 때 시끄러운 것이고, 또 세상이 시끄러운 다른 이유는 그렇게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소리들로 인함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절대로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시끄럽지 않게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창조하신 목적을 회복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사람을 만들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시고 안식하심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사람이 나오는 것, 그것에 천지창조의 목적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이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신 목적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안식하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 목적이 회복된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존재 목적이 회복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 사람이 그 안에 있는 정체성이 회복된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하여 사는 모양이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고, 그것을 다른 사람이 볼 때, 먼저 된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였듯이 그 사람의 삶을 볼 때 자신도 그렇게 회복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이고 구원이 전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먼저 깨달은 사람이 보여준 삶으로 사람의 정체성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기에 먼저 깨달은 사람의 삶의 수고가 십자가를 진 것과 같은 삶이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심은 실로 이렇게 놀라운 비밀의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복된 소식인 것이다. 그래서 또한 복음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온전히 알 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산 사람만이 이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에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이다. 원래 소속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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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16-21) 심판에 대한 오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10. 11:05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이 생각하는 심판은 아주 능동적이다. 능동적이라는 것은 주도적으로 영향을 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행동에 대하여 잘했다 잘못했다고 분명하게 말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 맥락에서 심판을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과 같은 말이 그렇다. 종교 안에서 생각하는 심판이라는 것이 그렇게 능동적이라는 것이다.


종교 안에서 보는 심판은 사람을 위협하듯 한다. 물론 어떤 심판이든 간에 심판이나 재판은 위협적인 결과를 동반한다. 하지만 심판이라는 것이 그렇게 벌을 받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판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인식은 <심판의 결과 = 벌을 받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회의 법이 주는 이미지가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라는 종교 역시 사회적인 법률이 주는 이미지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능동적인 것이고, 심판 받는다는 것은 지옥에 가는 것과 같이 여기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심판이 되시는 것은 그런 부정적인 결과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결과를 목적을 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심판이라는 것의 모양새도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니까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라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심판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본 사람들 자기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는 것에 있다.(아마 마르크스가 이것을 보긴 본 모양이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몰라 봐서 그렇지.)


많은 교회들이 교인들에게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위협하기도 한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지옥에 간다.’, ‘그러면 큰 벌 받는다.’, ‘그러면 큰 손해를 볼 것이다.’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런 모습들은 정말로 심판에 대한 견해가 잘못된 것이다. 심판에 대한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도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고 그것을 본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의와 자신의 의를 비교해서 자신의 것이 하나님의 의와 맞지 않음을 깨닫는 것에 있다. 그 깨달음이 바로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이고, 그것이 회개고 돌이킴이며, 그런 돌이킴을 계기로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의로 삼아 살게 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런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그것이 심판인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 9:39)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교적인 지위나 신앙이 좋다는 것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신앙이 없다느니, 그러면 지옥에 간다느니 이렇다 저렇다 말로 사람을 심판하고 있기도 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심판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거니와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비밀과 법을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의 심판은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하여, 또한 다른 사람의 행실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심판도 교훈도 훈계도 사랑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무식하고 무례한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훈계와 교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높이 달리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이나 신앙이 잘못되어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인 것이다.


그런 삶은 아주 힘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도록 살아가는 것은 정말로 힘든 것이다. 억지로 하려 한다면, 그래야 하는 것이라서 그렇게 하려 한다면 너무 힘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렇게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사는데 수고가 필요하고 힘들기는 해도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정말로 힘들고 고되고 위험한 일이지만 연어가 아닌 다른 고기는 그렇게 하는 것이 힘들지만 연어에게 그렇게 한다는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다. 그것이 자기 본성이고 유전자고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그렇게 지는 것이고, 생명이란 그런 것이고, 우리의 육신은 그렇게 사용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런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영광과 성품과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비밀을 모르면 입으로 신앙을 논하고 다른 사람의 어떠함을 논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신앙이 없는 것이다. 그 입으로 아무리 거룩한 것을 이야기하고 사랑으로 책망한다고 해도 그것은 다 무례하고 신앙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고전 13장)


하나님의 심판을 바로 아는 것은 십자가를 바로 아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의를 돌이킨 것이 심판이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심판하고 돌이키는 것을 위하여 예수님의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이끌리어 십자가를 지는 수고를 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남이 깨달을 수 있는 삶을 사는 수고는 마다하고 입에 성경말씀을 무쳐서 사람을 심판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십자가다. 십자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서 벗어난 모습을 비쳐주는 놋뱀과 같은 거울이기도 하고, 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사람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스스로 심판하도록 수고하신 상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바로 아는 것은 십자가를 바로 아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를 바로 아는 것이다.


반대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을 인용해서, 또한 교리를 이용해서 교회 안에 사람의 어떠함을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이 수고로운 삶을 살아서 다른 사람이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서 심판하고 지적질하고, 또 그것도 모자라서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이 틀려먹었다고 떠들고 실력행사를 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십자가도 심판도 모르는 자들의 일이다.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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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벨라 굴에 사라를 장사지내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2. 9. 09:09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127세를 살고서 죽자 아브라함이 이를 애통하게 여기고 그 땅 곧 헷족속의 땅에서 장사할 묘실을 구하고, 이에 막벨라 굴을 택하여 헷족속에게서 그것을 사서 그곳에 아내 사라를 장사 지내게 된다. 이후에 이 막벨라 굴은 아브라함, 이삭, 이삭의 아내 리브가, 야곱의 아내 레아와 그리고 야곱 등이 이곳에 매장된다.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거할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 묘실을 구할 때에 이르기를 ‘나는 당신들 중의 나그네요’(창 23:4)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는 소유한 땅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고, 또 헤브론 땅에 거할 때에 그곳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했는데 땅의 등기는 아브라함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여정을 가는 이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여정은 우리 신앙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삶을 <나그네의 삶>이라고 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즉 이 육신을 가진 우리의 삶은 우리의 고향이 아니라는 것이고, 우리의 소유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육신을 가진 삶이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나그네와 같은 삶이라는 것은, 이 육신의 삶의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이것은 때로 이 삶에 대한 허무주의로 변질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이 나그네라는 것은 이 땅의 삶에 대한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대단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본질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 증거는 육신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이 삶의 전부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아는 이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도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것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도해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들을 얻기 원하는 사람이 아이를 가졌다고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아들을 원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딸을 주실 수도 있다는 것을 순종하는 이는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어쨌든 아들이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삶이 나그네와 같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정말로 뱃속의 아이가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설사 딸로 태어난다고 해도 언젠가 아들로 바뀔 것 까지 믿어야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라 할 수 있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셨지만 그것은 토지가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그네의 삶인 것이다.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가 된 땅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 신앙인의 삶이다. 이 땅에 속한 것을 얻는 것이 우리 신앙의 여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땅의 재물이나 명예를 얻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나그네로 산 것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무덤이었다. 자신이 묻힐 땅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사람의 육신은 이 땅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무덤은 그야말로 내용이 없는 것을 두는 곳이다. 즉 하나님을 표현하는 이 육신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용은 나그네와 같고, 형식은 이 땅에 속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삶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삶은 달라질 것이다. 기도도 달라질 것이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할 것이다. 이 땅의 것이 본질이 아니고, 이 땅에 속한 육신의 문제는 무덤에 둘 것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것을 위하여 무엇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육신은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려놓기 위한 로켓과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에 사용되는 것이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켓은 땅에 떨어지고 인공위성은 하늘 궤도에 정착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의 삶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과 영광을 표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수고하고 무덤에 장사지내지만 본질인 하나님의 의는 나그네와 같았지만 하나님의 품속에 속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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