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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과 갈라선 아브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0. 29. 16:12 Writer : 김홍덕

애굽에서 나온 아브람에게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카 롯도 함께 있었고 롯에게도 많은 재산이 있었다. 그들의 재산은 금과 은 외에도 많은 육축이 있었다. 그런데 육축이 많다보니 목자들끼리 다투게 되었다. 창세기 13장 10절에서 롯이 물이 넉넉하다고 소돔과 고모라 쪽으로 간 것을 보면 물 때문에 많이 다투었던 것으로 보인다. 뭐 굳이 그것이 아니라도 목자가 서로 자신들의 소와 양을 먹이려는 이유가 아니면 싸울 일이 없을 테니 결국은 먹을 것으로 인하여 다툼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그 땅이 그들을 수용할 수 없었다고 하고 있다. 즉 그 땅이 그들의 먹을 것을 공급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지금 머물고 있는 땅은 애굽에서 다시 돌아왔지만 역시 벧엘과 아이 사이다. 그곳이 아브람과 롯에게 먹을 공급해주기에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람을 채워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먹을 것이라는 것이 단순히 육신이나 육축이 먹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정체성의 허전함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불러서 나온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집이라는 벧엘이 아니라 벧엘과 황폐함이라는 아이 사이에 있었으니 하나님이 부르신 그 부르심의 뜻이 아브람을 채워주지 못함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신앙의 여정이 그렇다. 신앙이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삶으로 수용하는 것인데, 자신의 정체성이 어중간한 자리에 있으면 그 허전함이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또 교회에 다니면서도 불안하고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으로 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나 죄에 대하여 그렇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살다가 자신의 죄 스스로 인지하는 순간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회개하면 또 나아지고, 그러다 죄 지으면 또 회개하고, 그러다 그것이 반복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져도 그나마 그 반복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안식 아닌 자기만족이라도 있다 보니 그곳에 안주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삶은 자기 땅, 자신의 육신의 삶이 자신을 수용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늘 다툼이 있다. 그러면서 마음에 선과 악이 싸운다고 한다. 그렇지만 결론은 나지 않는다. 그냥 그러고 사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라며, 그래서 더 기도 열심히 하고, 교회에 빠지면 안 되며, 늘 아니 자주 회개해야 한다고 하는 말에 자신을 맡겨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람은 그런 자리에서 떠나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브람이 그랬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뭐한다고 아브람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읽고 앉았는가 하는 것이다. 아브람이 자기가 있는 땅이 자신을 수용하지 못하고 그 땅에서 계속 다툼이 있어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오늘 아브람의 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듣는 사람도 자기 땅, 곧 자기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갈등에서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것이 아니면 성경 덮고 그냥 애굽으로 가는 것이 장담컨대 더 현명한 것이다.


그래서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땅을 선택하면 롯이 선택하지 않은 땅으로 자신이 가겠다고 하며 롯에게 자기가 갈 땅을 정하라고 한다. 그러자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소알 땅을 선택했다. 소알은 ‘속이 좁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롯은 ‘가리웠다’라는 이름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 앞에서 멸망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패역한 땅이다. 그 땅이 롯이 보기에 좋아 보였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애굽과 같아 보였다는 것이다.


롯이 그 땅이 마음에 들고 그 땅으로 가기로 했다는 것은 그 땅이 자기에게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롯이 애굽과 같은 땅이 자신에게 맞는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롯 안에 내용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롯은 또한 아브람의 혈육이라는 것이다. 롯은 아브람의 사촌인데, 어떻게 보면 롯은 아브람이 떠난 본토 친척 아비의 유산인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아비의 땅을 떠났는데, 그 아비 형제의 아들이 지금껏 따라 왔으니 몸은 본토 친척 아비의 땅을 떠났지만 아브람의 정체성은 아직 그곳을 다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남은 롯이 이제 떠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롯이 떠남으로 진정으로 아브람이 아비 본토 친척을 떠난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아브람에게서 애굽을 흠모한 본성이 롯이 떠남으로 이제 처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롯이 떠난 사건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신앙 여정도 그와 같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 개인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그 마음에서 애굽의 법을 사모하는 것이 처리된 것이 아니라, 애굽을 거쳐내고 그 안에서 애굽을 좋아하는 마음이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좇는 법과 다투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롯과 아브람의 목자들이 다툼과 같이, 또 그래서 롯이 아브람을 떠나는 것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과정이 없으면 아브람이 헤브론에 들어가지 못함과 같이 한 개인의 신앙도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조카 롯이 떠난 아브람,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떠나라고 한 아비의 본성 안에 있던 애굽을 흠모하여 기근이 들면 애굽으로 가던 그 본성이 롯이 떠남으로 아브람에게서 처리되고서야 아브람이 할례를 받고 또한 묻히는 (헤브론에 막벨라 굴이 있음) 땅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제야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네가 서 있는 땅을 주겠다.”고 하신 것이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창 13: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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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5) 빛과 생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0. 29. 14:11 Writer : 김홍덕

빛은 인식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가장 먼저 만드신 것이 <빛>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중에서 임의로 빛을 처음 선택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빛이 있어야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는 생명도 마찬가지다. 생명이 있어야 생명에게 어떤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빛은 그런 의미에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 깨닫는 것 그것이 시작이고 그것이 빛이다. 생명도 생명이 되어야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태초다.


글을 모르면 문맹이라고 한다. 문자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자의 존재 목적이 자신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문자를 통하여 사람의 생각과 뜻을 전하는 문자의 존재 목적이 글자를 모르는 사람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두움이다. 즉 어두움은 존재 목적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빛이 세상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시려 하나 문맹이 글자를 읽지 못하듯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육신으로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이 사람에게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어두움인 것이다.


빛이 있다는 것은 어떤 시작이 있다는 것이다. 빛이 없으면 어떤 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즉 인식과 깨달음이 없이 어떤 세계가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확률에 대한 인식이 없는데 통계학을 시작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세계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 곧 사람의 존재 목적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이 없다면 시작되지 않는다. 즉 태초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빛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게 하시는 인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창세기) 천지창조 첫째 날 - 빛이 있으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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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있어야 살아 있는 생명


요한 사도는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바로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다(요 1:4) 사실 이런 말씀들을 대할 때에 빛과 생명은 엄청나게 좋은 것이고 예수님이니까 그렇게 말한다는 식으로 볼 것이 아니다. 왜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으며, 그 생명이 왜 사람들에게 빛이 되는지, 그것이 궁금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궁금한 마음이 드는 것이 은혜일 수 있다. 그것이 궁금하다는 것은 적어도 예수 믿어서 이 땅을 사는 육신의 삶에 육신을 평안하게 하는 복 받고자 하는 것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목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은 아마 왜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는지, 그리고 그 생명이 왜 빛이 되는지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싶기도 하다.


생명에 대한 정의는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있지만 일정하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있는 것, 곧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정의는 너무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있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산에 있는 바위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표현하고 있으면 산 것이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면 펄펄 날아도 죽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사람이 필요해서다. 괜스레 사람 만들어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 들어주면서 ‘나는 니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줄 수 있어!’라는 만족을 위하여 만드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 존재를 알 수 없다. 보이지도 않고 그림자도 없는데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능력,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표현할 형식을 만드신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도 절실한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피조물은 다 하나님의 그 필요와 목적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피조물도 그것을 벗어나면 다 죄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라는 또 세상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세상과 사람의 존재 이전부터 있었던 계획이다. 태초 이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도 사람도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것이고, 아브라함 보다 먼저 계신 분이신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다는 그 뜻이 모든 것 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므로 생명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 그 생명이 사람 안에 있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되려고 한다면 당연히 예수님과 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육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육신이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자기 원하는 것을 잘 얻어내는 것이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이 사람들의 빛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어떻게 되어야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람들의 빛인 것이다. 빛이 비취므로 사람들이 모든 물건을 인식하고, 또한 각양의 물건들의 존재 목적이 이해되고 또 목적대로 사용되어서 사람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있어 빛이 비췸과 같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모르는 어두움에서 어떻게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될 것인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먼저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사람이야 자신이 육신을 입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이 육신이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라는 것을 예수님을 육신으로 보내심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육신을 가졌다면 누구라도 예수님과 같이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존재,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하는 존재,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형식이 된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심으로 사람들에게 빛을 비취신 것이다.


위에서 어두움은 목적과 의미를 인식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 삶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의 어두움이고 죽은 인생이라는 의미다. 사람이 그런 어두움에 있었던 것은 자신이 그런 상태라는 것을 비춰줄 빛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것이다. 이 육신의 존재 이유와 삶의 의미를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서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깨닫게 되면, 빛이 비취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당연히 회복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든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모르다가 그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회복이고 구원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세상의 빛인 것이다. 사람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초에 빛이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이다. 그 빛이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다. 


산의 바위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아는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로 보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바위도 산 것이 되는 것이다. 존재의 목적이 회복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의 존재 목적 안에서 의미가 있어지는 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 곧 자신의 존재의 목적을 회복한 사람에게 세상의 모든 만물의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모든 만물의 목적인데 그 목적을 회복시켜 주는 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안목과 생명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회복되기 때문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 사람과 같은 육신으로 오심으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요 생명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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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의 물두멍과 세족의식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5. 10. 29. 10:59 Writer : 김홍덕

물두멍과 세족의식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전의 규례를 말씀하시면서 성전 뜰에 놋으로 된 물두멍(물바다)을 만들라고 하셨다.(출 30장 17-21)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자손, 그러니까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물두멍에 손과 발을 씻지 않으면 죽기를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른바 <세족의식>과 연결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가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답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물두멍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 13:6-10)


성전(막)은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면 번제단이 있고 다음에 물두멍이 있고 그 다음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먼저 번제단에서 자신의 죄를 씻을 제물을 제사장이 번제단에 사르고 다음에는 그들을 대표하는 제사장이 물두멍에 손과 발을 씻고서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만나는 절차라면 절차가, 자신의 죄를 번제단에서 사르고, 다음에 손과 발을 씻고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여기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인가?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구하는 것을 들어 주신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지만, 문제는 ‘하나님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고, 사람은 혜택을 보는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정말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사람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것이냐 그 말이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염없다. 돈과 명예에서부터 천국에 가는 것까지 다양하다.


만약에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는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함이라면 번제나 손과 발을 씻는 것은 점쟁이에게 주는 복채에 불과하다. 자기 필요한 것 얻으려고 공급자가 제시한 것을 내어 놓고 그 기준을 통과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잘 보여서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필요로 따진다면 하나님께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계시고,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할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이 만나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이유가 있고, 혜택으로 따진다면 하나님께 유익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만남으로 하나님이 유익해지는 것, 곧 영광을 얻으시는 것 자체가 사람에게 은혜가 되는 것이다.


그런 목적을 나타내는 곳이 성전이다. 성전이라는 건물 양식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사람들은 성전을 보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 성전의 목적이다. 그렇게 보면 왜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지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이 그 심령에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것,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모든 것을 표현해 내는 생명과 목적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전 문에 들어서서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자기 삶이 하나가 되는 법에 관한 것이다. 이는 성전이라는 건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육신의 삶의 생명과 목적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하나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이기 때문에 사람이 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본질과 목적과 생명과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번제를 드리고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목욕한 자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예수님과 베드로가 세족의식 때 나눈 대화에 대하여 깔끔한 설교를 들어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설교가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해도 행동으로 짓는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 이상을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성전 물두멍과 상관이 있다는 것은 더더욱 들어본바 없다.


번제단에서 제물을 드렸다는 것, 자신이 번제와 같이 드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모든 행동은 사람의 유전자에서 비롯되었듯,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된 사람은 그 삶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생명이 달라진 것이기에 거듭난 것이라고도 한다. 이전에는 자기의 의가 삶으로 표현되었는데, 이제는 생명이 달라졌기에 하나님의 의가 삶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거룩한 산 제사’라고 하시는 것이다. 살아서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삶 자체가 살아 있는 제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손과 발을 씻어야 하는가?


번제를 드린 자가 왜 물두멍을 거쳐야 할까? 왜 물두멍을 거쳐서 손과 발을 씻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을 생각해 보자. 손과 발은 모든 행위의 상징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신 것이다. 행동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물두멍의 재료는 놋이고, 놋은 거울이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 보면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는 것은 번제를 드린 사람은 그 행동이 하나님의 의의 생명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번제를 드린 이가 손과 발을 씨는 다는 것은 번제를 드리기 전,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주관하기 전에는 자신의 의가 손과 발로 표현한 것이다. 즉 모든 행동이 자신의 의를 나타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번제를 드린 자, 목욕을 한 자는 그 행동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행동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생명이 유전자와 같이 자기 안에 있어서 모든 생명체가 그 유전자에 의하여 모양과 행동이 정해지듯이 그 사람의 삶의 모양과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게 된다는 것이다. 즉 손과 발로 표현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의 행동이 아닌 번제를 드린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으라고 하신 것이고, 예수님은 손과 발을 씻기지 않으면, 즉 행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을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 것이다. 생명은 그 유전자의 명령에 따르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 행동이 없다면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안에 있는 물로 손과 발을 씻으라고 하신 것이다. 놋은 거울이다. 그렇다는 것은 놋을 보면 자신의 모습이 비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비치는 그 안에 있는 말씀(물은 사람을 채우는 말씀)으로 손과 발을 씻으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말씀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번제를 드림으로 얻은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말씀에서 비롯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삶의 내용이 되시고 자신은 그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듯, 내용과 형식이 만나듯, 목적과 방법이 만나듯이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번제를 드림으로 그 손과 발의 모든 행위가 내용이신 하나님의 의와 생명으로 표현하는 손과 발, 곧 행동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손과 발을 예수님이 씻기지 않으면, 즉 행동이 그리스도의 행동이 아니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건 너무 당연한 것이다.(이때까지 베드로는 몰랐지만)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듯, 삶의 모양과 행동이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비롯되지 않는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전에 물두멍을 두신 것도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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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믿음의 힘  (0) 2015.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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