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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만물이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쉬운 말씀이 아닐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 말씀은 바울 사도의 표현이나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이 더 잘 이해하기 쉬울지 모른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이 세상을 경영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에는 이의가 없는데, 예수님께서 모든 만물의 근원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냥 막연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 모든 것에 대한 대표적인 의미, 상징적인 의미로서 그런 말씀이 있나 할 뿐, 정말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리고 이것이 나와 어떤 상관이 있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만물의 근원일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어졌다는 것이 무엇이며, 예수님 없이 지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은 또 무슨 말씀일까?’ 예수님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신데, 어떻게 사람의 육신에서 모든 만물이 비롯되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냥 예수님은 신이시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고만 한다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에 무관심한 신앙이 되니 그것도 아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세계가 열린 사람의 안목으로 볼 때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새로운 세계가 열린 사람, 마치 대학에 새롭게 입학해서 그간 막연히 알았던 대학에 대하여 새롭게 알게 된 대학생활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사람이 만물을 보는 관점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만물의 근원이신 것은,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높은 산과 깊은 바다 태풍과 번개와 같은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표현된 것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이미지, 그러니까 딱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만물로 표현된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 다 사람 안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표현하시려는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의 최고 정점에 바로 예수님이 계셨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만물로 표현된 것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로 표현하고자 한 하나님의 형상, 곧 사람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형상, 이미지, 성품, 그것이 최종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만물이 고대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하나님의 법이 자기 안에서 열린 사람, 그 하나님의 안목이 열린 세계에 속한 사람은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났다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는 세계가 열린 사람은 바로 자신이 요한 사도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말씀이 자신과 함께 있어 그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것이다. 모든 만물로 하나님을 표현하신 태초를 시작하는 목적이 함께 있었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 없이 태초가 시작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집을 지을 때, 누가 살 것인지 어떤 삶을 살 것인지가 먼저 있고, 그 계획으로 인하여 설계되고 지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을 목적으로 세상을 지으셨으니 당연히 예수님의 정체성이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가 시작될 때 같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그 예수님이 우리 모든 인생의 표상이라는 것, 우리 모든 사람이 태초부터 함께 있었던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는 것,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전하러 이 땅에 오셨다는 것과 그 예수님을 보고 자신의 삶의 목적이 예수님과 같다는 것을 성령의 잉태하심과 같이 깨닫는 사람은 또한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태초가 시작된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태초의 시점에 함께한 것과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요한 사도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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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으로 간 아브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0. 28. 14:12 Writer : 김홍덕

벧엘과 아이 사이 어중간한 곳에 자기 장막을 친 아브람은 점점 남쪽으로 내려갔고, 자신이 머물던 곳에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애굽에 가는 길에 아브람은 아내 사래가 너무 예쁘기 때문에 애굽의 왕이 사래가 자신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자신을 헤치고 아내 사래를 취할까 싶어 아내 사래에게 자신의 아내가 아닌 누이라고 거짓말을 사주한다. 그리고 아브람의 걱정은 현실이 되어 실재로 바로 왕이 아내 사래를 취하려 하자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심으로 바로 왕이 아브람을 불러서 ‘왜 자신을 속였느냐?’고 책망하고 애굽을 떠나라고 하여 그곳을 떠나게 된다.(창 12:10-20)


지금 아브람은 자신이 살던 땅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갔다.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애굽은 세상을 대표하는 곳이다. 세상은 늘 누군가의 위에 서는 것을 이긴 것 곧 선이라고 여기는 것이 피라미드로 대변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으로 내려오셨다. 애굽과는 반대이다. 바로 그런 곳으로 기근을 피해서 아브람이 내려갔다는 것이다. 즉 먹을 것을 찾아서, 자신을 채우기 위해서 애굽으로 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사람이 자기 육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없다는 것은 그 신앙이 아직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 낼 정도로 장성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가는 아브람의 모습은 빈 그릇인 자기 삶을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는 마음과 같은 것이다. 아직 그의 이름, 곧 정체성은 ‘위대함의 아비’라는 아브람이니까.


하나님을 믿는 여정은 누구나 아브람과 같은 여정을 거친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자기의 장막을 치듯 머무르면서 위대함을 좇는다. 어떤 사람도 이 신앙의 여정을 생략할 수 없다. 각양의 과정을 거치는 기간이 다를 수는 있지만 아이가 9살에서 10살인 해를 건너뛰고 바로 11살이 될 수 없듯이 지나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구나 아브람이 애굽으로 간 것과 같은 여정을 거치고 할례를 받는 과정을 거치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여정을 거친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많은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정도 그렇다. 애굽에서 출발해서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이르러 나라가 된다. 한 개인의 여정이 애굽과 같은 가치관에서 큰 물을 건너서 광야 곧 율법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세월을 지나고 또 큰 물을 건너 가나안에 이르러 나라가 되듯이 그 사람으로 인하여 많은 하나님의 백성이 나오는 여정을 가는 것이다. 그것이 개인의 신앙 여정이다. 그 여정을 아브람을 통해서 또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는 남자의 의(성)를 여자를 통해서 얻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아들을 얻듯이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 갈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아들이 아직 아브람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쳤고, 또 자신을 채우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사람은 그 정체성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즉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살기 위해서 왜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였을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면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을 쉽게 생각한다. 아브람이 아내 사래를 아내가 아니라고 한 이유는 아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내의 아름다움 때문에 자신이 죽을까봐 그랬다. 아내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자신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신앙에 있어 아내의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는 육신의 여러 가지 모습들, 능력이 있다거나 돈이 많다거나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생명을 헤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 회사나 가정 등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에 요구하는 것들이 자신의 신앙을 헤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꾸 멀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 일 하러 나오라는 것이나 회식 때 소주 한잔 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육신과 그 삶의 요소들이 자신의 아내, 곧 자신이 가진 신앙을 표현해 낼 대상이 아니라고 해 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경계해야할 세상은 그런 삶의 형식이 아니라, 위대함을 좇는 마음, 그것이다.


신앙인들은 세상의 것을 취한다고 하면 살아가는 사회 속에 있는 것을 취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 이유는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그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자신의 정체성을 둠으로서 자신을 채울 것이 없자 애굽에서 자신의 속사람을 채우려고 했다는 것 때문이지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아브람이 죽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브람의 이 모습은 신앙인들에게 사회가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것 때문에 신앙이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요구들 앞에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가진 신앙으로 세상을 굴복시키고 심판하는 위대함으로 대하는 그 가치관 때문에 죽을 수는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이든 무엇이든 남보다 위대해져서 높은 곳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 바로 피라미드의 가치관, 애굽의 가치관,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아브람이란 이름은 ‘위대함의 아비’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것 역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얼마든지 세상적인 것이 된다는 것을 모른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렀다는 것, 그것은 애굽의 피라미드와 같이 세상 사람들 위에 신앙으로 높아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섬기기 위하여 부르신 것이다. 술 마시는 사람을 보면서 세상 사람의 타락이라며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심판하는 권세를 주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그 죄인들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신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지금 자기 눈에 자신에게 든 기근을 애굽에서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애굽에 가려고 보니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애굽과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은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이 애굽 스타일이 아니라면 걱정할 것이 없을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자신의 의를 표현할 아내의 아름다움이 바로 애굽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신앙인들이 자신이 가진 여러 사회적인 모습과 조건을 세상의 것이라며 터부시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모습이 심해지면 정말로 전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바쳐버리는 것이다.


신앙은 결국 육신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마당이 바로 세상이다. 그리고 또한 남자가 아내에게서 아들을 얻듯,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삶, 표현하는 삶은 아내와 같은 자신의 육신으로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가진 육신의 여러 가지 신분, 조건,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을 주신 것은 다 그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아내 사래를 준 것은 아들 이삭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지 애굽에서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닌 것처럼.


그러므로 신앙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자신이 가진 것, 아내와 같은 육신의 모든 것은 버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를 나타낼 도구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굽 바로왕의 지비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아브람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가지고 애굽을 떠나게 하신 것이다. 즉 그런 피라미드와 같이 높은 곳에 서려는 위대함을 추구하는 가치관에서 떠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 여정을 거쳐서 사람들이 이삭을 얻는 것이다. 즉 생명의 아버지, 곧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므로 다른 사람이 다시 이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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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의 글 -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만남을 기다리며...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15. 10. 26. 16:59 Writer : 김홍덕

안녕하십니까? 블로그 운영자 김홍덕입니다.


제가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운영한지도 어느새 2년 정도가 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온라인 공간에 말씀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전 세계 어디서나 이 글을 볼 수 있고, 또 얼마나 티스토리라는 서비스가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될지 모르지만 그 동안은 제가 쓴 글이 다소 미흡하더라도 인터넷이라는 개방된 공간에 남겨진다는 점을 감사하게 여기면서 가능하면 하루에 하나 이상의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 쓰고 있는 글은 어디서 카피를 하거나 캡쳐한 것은 아닙니다. 순전히 제가 말씀에 대하여 묵상하면서 올리는 글이며, 또한 살아가면서 세상이 하나님의 법대로 경영되어가고 있다는 (묵상한) 말씀의 증거를 얻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말씀은 누구라도 출처를 밝히지 않고서 성경공부 혹은 설교의 내용으로 사용하셔도 무방합니다. 제가 바란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바라는 바가 있다면 임의로 내용을 변경하지는 말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와 의견이 다르신 것이 있다면 있는대로 이야기 하시고 첨언으로 본인은 생각이 다르며 그 다른 생각을 이야기하시는 형태로 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글들은 말 그대로 온라인 상에 있는 글입니다. 그리고 온라인 중에서도 카페와 같이 그나마 상호 의견을 주고 받는 공간조차 아닌 블로그로 운영되고 있다 보니 저의 글을 독자분들이 읽고 계시는 것이 기본적인 시스템입니다.(항상 카페와 같은 방식으로 바꾸어 볼까 고민하지만 이미 글이 너무 많아서 힘들기도 하고, 카페는 대부분 로그인을 해야 하는 문제들이 있어서 고민입니다.)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신앙이라는 것은 삶이기 때문에 온라인은 신앙을 나누고 공유함에 있어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이 블로그를 읽고 성경에 대한 계시가 밝아지시면 아마 틀림 없이 삶의 모양이 달라질 것이라 믿습니다. 사람이란 마음에 생각하는 바가 달라지면 행동이나 삶이 달라지는 존재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말씀은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삶의 변화, 그리고 이전까지 예수님을 육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깨비 방망이로 여기는 것과 같은 신앙관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신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제가 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목적이자 이유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저의 이 글들이 이론에 그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또 몇명이 되었든 언젠가는 이 블로그를 통하여 말씀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하게 되고 또 더 나아가서 이 말씀으로 인하여 변화된 개인들의 삶을 서로 나누는 날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만남은 꼭 필요하지만 신중하고 또 어떤 분들에게는 부담스러운 만남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자연스러워야 하기에 그러한 만남은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누군가 그런 마음이 들 때 올 수 있는 장은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싶어 조만간 그런 자리를 한번 만들까 준비 중입니다.


더욱이 저는 지방에 거주하고 있고, 이 블로그를 보고서 제게 연락을 주시는 분들은 많은 경우 수도권에 계시고 서울이나 수도권은 지방과는 다르게 이동 거리가 멀고 하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준비해야할 것 같아서 마음으로 준비하고 조금씩 준비를 해가고 있습니다. 준비라고 해 봐야 잘짜 정하고 장소 정하는 정도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글을 올립니다. 아직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장소는 서울 강남역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날짜를 정하게 되면 블로그로 또 메일을 주셨던 분들께는 메일로 알려드리겠습니다. 한가지 첨언하는 것은 초대 메일이나 공지는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울수 있지만 안 오셔도 상관없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이 블로그에 올리는 글과 관련한 저의 생각을 조금 덧붙이고서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위에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말씀은 자유롭게 인용하시고 비판하셔도 무관합니다. 그리고 혹시 이 말씀을 가지고 교회에서나 또 속한 모임에서 말씀을 전하심에 있어 그 독립성은 언제나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이 저의 바람이고 생각입니다. 물론 말씀을 전하시는 분께서 필요해서 저를 부르신다면야 기꺼이 가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독립적으로 말씀을 전하시는 것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하며 그 관계에 관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이 말씀을 가지고 이런 모양으로 살아가면서 겪게되는 일들, 마음들 그러한 것을 나누는 자리를 늘 소망할 뿐 입니다.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모임을 공지한 모양이네요... 모두들 건강하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삶의 생명이 되시기를 기원드리면서.....


김홍덕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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