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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다른 성경 구절은 몰라도 이 구절 정도는 어지간하면 암송하고 있으리라 생각되는 말씀이다. 아마 초등학생들조차도. 그만큼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질문하는 것은 오히려 우문에 가깝다. 너무 많은 정의가 있기 때문이고, 또한 객관적인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도 하나의 정의를 선택하라면 그것은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 세상이 의미가 있어졌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영광과 성품을 나타내셨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다.


성경에는 신앙적으로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말씀으로 “세상을 사랑했다.”라는 표현들이 있는데, 그것과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은 다르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비슷한 부분도 있는데 사람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 역시 세상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세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아는 것, 그것을 두고 이르심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다른 것은 주권에 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의미를 두심으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성품과 능력을 세상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게 의미를 주신 것이다. 반면에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주권이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것도 문제고, 세상이나 사람이나 모두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인데, 사람이 세상에 의미를 두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월권이다. 그것을 잘 표현한 이들이 바로 롯의 두 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의미가 있어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영광과 성품과 능력을 나타내셨는데 그것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갈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는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 아주 잘 설명하고 있는데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이 그것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은 세상의 모든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얻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존재함과 그 성품과 영광을 나타내는 존재다. 아들이 있다는 것은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고, 아들이 보여주는 모든 성품과 육신의 모든 것은 다 아버지의 품 안에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 곧 피조물들의 소망과 그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에 수렴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의미를 주신 것이고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래서 독생자다. 독생자는 예수님의 유일성을 상징하는 것에 한정된 말이 아니다. 예수님의 유일성은 시작이라는 유일성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말구유에서 나서 자라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몸의 유일성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법이 없다는 그 유일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외에는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방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바로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아버지를 표현하는 한 사람인 아들이 나오는 것에 수렴하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의미를 주신 것을 두고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과 피조물의 존재 목적을 자신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으로 알게 되는(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인 것이다. 또한 그것이 세상을 향하여 또한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가지신 유일한(독생한)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존재 목적을 주시는 사랑하심을 알고 그 모든 것이 사람인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로,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존재했고 성경에 기록된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모든 것과 모든 말씀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기를 바라셔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으로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질 때 비로소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성경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살아가면서 당면하는 시험이나 결혼이나 재정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것이 자기 기대대로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것을 행하시고, 자신을 통하여 어떤 일을 하셔도 다 수용한다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나, 하나님은 나를 절망 중에 두시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자신의 기대나 신념이지 믿음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자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온전히 사용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육신으로도 아들은 아버지의 어떤 성품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아들은 그냥 아버지의 모든 유전자, 그것이 설령 유전적인 질병이라도 그냥 다 수용해내는 존재가 아들인 것이다. 그렇듯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과 존재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필요해서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순종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사람의 생각에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믿음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신 유일한 존재 목적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자 정체성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 유일한 것,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방법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보고서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로서 드려지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영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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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와 나누신 예수님의 말씀은 거듭난다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한 유대 관원에 대한 말씀만이 아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볼 것인지, 하나님을 믿어 거듭난 생명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들을 때에 어떻게 모태에 다시 들어가느냐고 물은 것은 거듭남이라는 것을 보는 안목이 눈에 보이는 육신과 세상을 본질로 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육신의 어떠함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거듭난 이들이 본다는 말을 듣고서 몸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은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하셨고, 이 성령의 역사하심은 땅에서 일어나는 일, 곧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영이 그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이스라엘의 관원인 니고데모가 하나님의 일이 땅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함을 지적하신 것이다. 땅의 일을 말해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늘의 일을 알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아니면 하늘에 올라갈 자가 없다는 말씀을 하신다. 급격한 대화 주제의 전환이다. 어떤 의미일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것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듯이 내려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주기도문의 시작부분처럼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또한 성령의 일이라고 하시는 것이고, 그것이 거듭난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법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법이라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그런 법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니고데모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시면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기를 늘 바란다. 그것이 삶이고 그것이 신앙이고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을 니고데모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듭남이라는 말씀을 육신의 일로 보았다. 마치 니고데모와 같이 지금도 사람들은 육신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거듭남이 있다고 생각한다. 


육신으로 공로를 쌓아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육신으로 방언을 할 수 있어야 한다거나, 달력으로 특정된 어떤 날에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느낌이 있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들이 바로 니고데모가 ‘어떻게 모태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 말과 뿌리가 같은 것이다. 다 육신의 어떠함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증거가 된다고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일은 그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하게 하심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뜻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시지 않고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육신의 일이 아니라고 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했다. 이 말씀 하나님의 의와 계획과 뜻이다. 그것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아니면 하늘에 올라갈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사는 사람의 삶이 아니면 하늘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아니면 하늘에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어떻게 말씀이 육신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사람의 육신, 사람의 삶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람이 되려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심령의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남이라는 것이 육신이 모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뱀과 같이 들려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뱀과 같이 들리시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 영생을 얻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볼 때 사람의 본질이 이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육신의 연약함을 행위로 가리는 것이 아니라 이 육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으로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자주 언급하지만 초자연적인, 초인적인 일을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어떻게 보면 육신을 가진 이 인생,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에 대한 안목이 바뀌는 것이다. 사람들이 육신을 보니 연약하고 추해서 이것을 어떤 법으로 정한 것을 지켜내면 그 연약함과 추함이 면죄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안목이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안목이 사람을 수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수고함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안목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을 보면서 ‘저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구나!’라고 깨닫는 것, ‘내가 저주하던 이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아들이 되는 삶이었구나!’라고 깨닫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뱀과 같이 들리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이 육신,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몸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인 것이다. 


그 이유와 목적을 십자가를 보는 이가 깨닫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2,000년이 넘도록 예수님의 십자가를 듣고 읽었지만 이것을 깨닫는 이가 적은 것은 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었다는 것은 십자가를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으로 보지 못하고 니고데모가 본 것과 같이 보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어두움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밤에 찾아 온 것도 그것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보다 도덕적이고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교회에 헌금하고 봉사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런류의 모든 생각은 다 거듭남이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거듭남이 모태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면 다들 웃으면서 정작 신앙은 그것과 같은 안목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연코 성령의 역사하심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영생도 모르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땅이라 할 수 있는 흙으로 지어진 사람에게 이루어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이고 직임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자신의 삶인 사람들만 하늘에 올라간다는 것이다. 즉 그 삶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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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5. 12. 2. 18:36 Writer : 김홍덕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나는 수요일 예배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것도 항상 장로님들보다 앞, 예배실 가장 앞쪽에. 어느 수요일 조금 늦게 도착해서 기도하는 중에 들어가서 앉았다. 그리고 눈감고 고개 숙이고 있는데, 앞줄에 앉은 친구가 뒤로 돌아보면서 조용히 “야, 20원 있으면 줘봐라.”하니 우리 줄에 앉은 친구들이 “야, 예배 시작했는데 어디에 전화 걸려고?(당시 공중전화가 20원)”라고 하니 그 친구가 말하길, “그게 아니라, 이거 헌신예배야?” 뒷줄에 앉은 우리는 웃음을 참고 있는데, 그 중 한명이, “야 임마! 하나님이 걸뱅이(거지의 경상도 사투리)가?” 말해서 끝난 일이 있었다.


헌신예배하면 가장 먼저 떠오는 것이 이 에피소드다. 그러니까 헌신예배라면 헌금하는 예배, 헌신예배를 드리는 부서의 재정 충당을 위한 헌신예배라는 정도가 생각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만 이야기하는 것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날 헌신이라는 의미가 정말로 온전히 교회에 용해되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헌신, 몸을 드린다는 것에 대한 이해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헌신은 몸으로 하나님께 수고의 열매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청소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에 몸의 수고를 드리는 것이나, 또 몸을 수고하여 얻은 소득을 헌금으로 드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더 고상하게 삶을 하나님께 드리자고 하는 것도 있고, ‘주님을 위하여 죽자!’라는 각오로 선교나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해 가는 것도 헌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헌신은 그야말로 말 그대로 몸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몸에서 나오는 공로나 몸으로 얻은 소유나 목숨으로 바꾸어 내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도록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헌신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하신 말씀이야 말로 제대로 된 헌신의 정의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사람들은 몸을 제사로 드리라고 하니 몸이 할 수 있는 어떤 행동이나, 몸의 수고나 목숨을 그리라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몸을 주신 것, 아니 사람에게 육신을 주신 것, 사람을 몸으로 만드신 이유가 있기에 그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려서 예배가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몸 자체에 목적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제사로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말씀에 ‘영적 예배’라는 것과 ‘산(Live) 제사’는 같은 의미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을 성전이라 하고, 성전이란 예배를 드리는 곳이라는 점이 그렇다. 그러니까 사람 안에 하나님이 거하심으로 사람이 성전이 되는 것, 그것이 영적 예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산 제사라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헌신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수고한 땀을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몸이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는 형식과 도구와 육신이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자세히 본다 해도 미묘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자동차를 태워주는 것과 자동차를 주는 것의 차이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몸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을 드리는 것을 헌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 자동차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로 태워드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동차를, 몸을 달라고 하시는데 말이다.


이렇게 헌신에 대하여 오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헌신이라는 것 자체만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잘못 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헌신이라는 것이 몸의 열매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두루미와 여우의 식사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람의 몸의 열매가 아니다. 사람이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몸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람의 몸을 쓰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바로 사람의 몸 가진 삶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제사가 아니라 순종을 원한다.”고 하신 것이다.


사람은 빈 그릇이다. 그 빈 자리를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자기 자신을 채우려 한다. 입으로 음식을 먹는 것 뿐 아니라, 눈으로 읽고 보아서 자기 안에 채우려 하고, 또 귀로 들어서 채우려 하고, 또 느낌과 기억을 채우려 한다. 그것은 그 빈자리가 채워질 것으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있을 것이 제 자리에 채워지지 않으면 그것이 채워질 때까지 계속 채워야 한다. 그것이 안식이 없는 것이다. 


반대로 있을 것이 채워지면 더 이상 수고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안식하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좋았다는 것은 사람의 빈자리에 하나님의 형상과 숨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온전히 있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안식하셔도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창조가 끝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의 몸과 삶이 하나님이 거하시게, 하나님이 채워졌을 때 그 모습이 바로 온전한 성전이 된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산 제사요, 영적 예배며 그것이 온전한 헌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헌신예배라며 한복 입고 특송하고, 또 헌금하고,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자고 각오를 다지는 것이 헌신이 아니라, 이 육신을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온전한 성전으로 여기고 하나님이 거하시게 순종하는 것이 바로 헌신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몸에 거하시는 것을 순종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육신의 삶을 부정한 것으로, 연약하고 감추어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몸을 절제하고, 훈련하고, 노력한다. 몸이 연약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그 수고를 헌신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헌신은 하나님께 몸의 수고나 공로나 재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드리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려면 이 몸을 가진 인생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삶이 하나님께 드릴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데서야 어떻게 드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헌신하는 삶이 되려면 이 육신을 가진 삶이 아담과 같이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순종하고 보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자기 삶의 본질을 하나님으로, 빈 그릇과 같은 인생을 하나님을 모심으로 몸이 성전이 되고, 삶이 산 제사와 영적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헌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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