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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라는 유대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생뚱맞게도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는 말씀을 하신다. 언뜻 생각하면 동문서답과 같은 답변이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개의치 않고 다시 질문을 한다.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 와야 한다는 말입니까?”라고. 이것은 참 바보스러운 질문처럼 보이고, 실제로 어떤 설교자들은 이 니고데모의 질문을 우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말로 이 대화의 내용을 알면 니고데모의 질문은 우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을 우문으로 보는 이들은 이 대화의 본질을 모르는 바보들일 가능성이 높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처음 말한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이야기하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기성교회나 당시의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이라고 하면 바다 위를 걷는 것과 같은 초인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기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적 중에 기적은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관원 곧 공무원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답하셨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말한 기적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나 있음직한 일들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니고데모가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이 보이시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물은 것이다. 그런데 이 니고데모의 의문을 우문이라고, 바보 같은 소리라고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기적을 니고데모와는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적이라는 것이 사람이 육신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니고데모의 질문도 우문이고, 예수님의 답도 동문서답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적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생각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모르는 것에 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일이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보이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일인데 어떻게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일이 나타나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그것을 묻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죽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그랬더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의문이 가득한 니고데모는 그 거듭남이 궁금해서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예수님 당신과 같이 사람이 육신으로 살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궁금할까? 이것이 궁금하려면 예수님의 일이 이 땅에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한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을 모르는데 어떻게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를 물을 수 있겠는가?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것을 육신이 거듭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이 나이 들어서 어떻게 모태에 다시 들어 갈 수 있느냐고 물은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육신의 시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6-7)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육신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나라와 같이 영토를 가지고 사람들을 모은 다음에 하나님께서 내려오시거나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하지만 제자들조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그렇게 알았다.)


지금은 어쩌면 하나님의 나라를 그렇게 생각하는 신앙인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영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나라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아니다. 어떤 안목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의 나라와 같이 생각하는 안목, 거듭남을 육신의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라고 보게 하는 안목이 있다는 것이다. 그 안목은 지금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에게도 있다. 그 안목으로 보면 앞에서 말했듯이 이 니고데모의 질문은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물이 포도주가 되었듯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되어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그러니까 육신이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삶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게 하는 사람 안에 생명이 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래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은 거듭남과 어떤 관계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도록 잉태케 하시는 일이 바로 성령의 일이시기에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신비한 기적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성령의 가장 놀라운 능력이자 일으키시는 가장 큰 기적은 바로 사람이 변하는 것,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 그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성경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정자 대신에 성령이 난자와 하나 되어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또 사람에게 들린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게 하는 일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로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명이 되고, 사람의 삶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과 성품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본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한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삶으로 표현되는 사람을 알아보고 그 사람의 삶이 보여주는 삶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고 그 말씀이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다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이 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것은 바로 이 비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안다는 것은 빛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한낮과 같은 밝은 때라고 요한 사도가 말씀하신 것이다. 니고데모는 적어도 예수님을 찾아 올 때에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일(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알았기에 찾아 왔지만)을 행하는지를 몰랐기에 그는 밤에 찾아왔다고 요한 사도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니고데모와 같다. 예수님이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주이신 것을 믿는다. 그러나 왜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신지는 모른다. 버스 차비를 대시니 내어 주듯, 아니면 죄는 아들이 짓고 매는 종이 맞듯이 대신 십자가를 져서 구주이신가? 그런 가치관은 언제나 예수님이 자기 밖에 계시다. 안에서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문제를 겪으면 태권브이처럼 나타나서 도우시는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분으로 그들 밖에 계시는 것이고, 그런 가치관이 말하는 기적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보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은 보지도 못하고,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기적이라는 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교회를 가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는 사람이고, 빛을 알지 못하는 어두움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죽지 않고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기적은 오직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져서 그 말씀이 성령으로 생명이 되는 거듭남으로 인함 그 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으로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 십자가를 볼 때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졌고,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심과 같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이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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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2: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떠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왜 그런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을 왜 알아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닮아야 할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사람을 다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표적(기적)을 보고서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님은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이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표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또 그리스도로 믿는 것에 있어서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고 주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신앙에 몸을 맡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아신다는 것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먹는지를 안다는 말씀이 아니다. 그것도 따지고 들면 모를 일도 아니지만 그것을 아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것을 아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아신다는 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 목적을 알면 다 아는 것이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 망치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컴퓨터로 계산을 기반으로 하는 사람의 요구사항을 이루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 컴퓨터를 아는 것이다. 그러면 망치 사용 기술이나 컴퓨터 활용 능력이 다른데 어떻게 그것으로 안다고 할 수 있느냐 하겠지만, 망치나 컴퓨터나 그 사용하는 방법이나 기술이 무궁하고 수준 높은 활용이 다른 것이 바로 믿음의 분량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의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의 장성함이 다르다는 것이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하니, ‘시험에 합격해야 하는 것을 아신다.’와 같은 것을 생각한다.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그럴 수 있는 분이라는 증거가 필요한데 그 증거를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죽었다 살아나신 능력을 증거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런 믿음에 몸을 의탁하시지도 않고, 그런 증거를 받으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시험에 합격하는 것, 돈이 필요하다는 것, 권세가 필요하다는 것,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영광이 필요하다는 것)은 모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표현되는 모양의 단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죽었다가 다시 사신 능력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다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증거가 필요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예수님은 그런 것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아시는 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아시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에는 기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순종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이 사람 만드실 때에 목적으로 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에 너무 좋아 하신 것이라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기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생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에 순종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 사람들의 빛이신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기적들이 일어 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두움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님의 기적을 인하여 믿는다. 


기적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대로 기적이 아니면 안 되는 것, 즉 초자연적인 현상이 없는 중에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방언을 못하면 구원이 없다는 것처럼. 이것은 사람의 육신을 부끄럽고 연약하고 추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상태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너머의 기적을 바라고, 그것이 있어야 믿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어두움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욕심을 가졌다는 것이나, 음란한 생각을 하는 것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그것을 억제하려 해도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죄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함정에 빠트린 것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죄인인 것은 오히려 그런 모습들을 부끄러워하고, 그것을 극복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사람에게 욕심이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의에 대하여 욕심을 가져야할 때 그 본성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고, 성욕이 있는 것은 육신으로 결혼하고 또 하나님의 형상을 이어갈 사람을 낳기 위함과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표현하기에 필요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은 어떤 목적 아래에서 그것이 사용되는지가 핵심이지, 그것이 있다는 것 자체로 사람을 부정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을 획일적으로 보는 것, 육신의 형식에 관하여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는 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성경을 몸으로 지켜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한다.


사람에 관하여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다.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이다. 그냥 삶이 주어졌으니 숙제하듯이 살아내는 것, 그 살아내는 것에 필요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마련하는 것에 인생을 소비하는 것이 삶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 정말로 그것은 아니다. 이것을 모르는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것이다. 정말로 이것은 울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존재 이유를 아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사람이라는 것에 관해서나,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증거가 필요가 없는 분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사람이 무엇인지, 사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면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서 넘칠 것이라고 하셨다. 증거가 없어도 인생의 목적을 아는 사람, 증거를 받은 믿음이 아닌 약속을 받은 믿음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 안에 있어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이자 목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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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아비멜렉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18. 13:56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다른 남자에게 빼앗길 뻔 한다. 한번은 애굽에서고 이제 두 번째로 아비멜렉이라는 그릴 왕에게 또 그렇게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때마다 아브라함을 꾸중하시는 것이 아니라, 속은 죄 밖에 없는 애굽왕과 아비멜렉 왕을 책망하신다는 점이다. 그리고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많은 재물을 주어서 돌려보낸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다른 남자에게 주고서 자신은 살겠다는 남편은 참 비겁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아내 사라가 이복동생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보통의 관념으로는 잘 이해하기 힘든 처사인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책망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순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다른 취급을 받는다는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애굽의 왕이나 아비멜렉이나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그들이 얻어야 할 것이 있다면 아브라함의 아내가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으로부터 얻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의 생명이 된 하나님의 의와 말씀을 취하려고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형식(아내)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와 말씀과 생명이 자신의 것이 되기를 바라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에 관한 말씀은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육신이 여자라도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가지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남자와 같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남자와 여자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굽의 바로왕이나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만나면 그들은 아브라함 앞에서 여자 곧 아내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받아서 자신의 생명이 되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지, 아브라함이 가진 의를 육신으로 표현해낼 형식이라 할 수 있는 아내를 취하려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려 한 일로 아비멜렉의 집안의 모든 태를 닫아 잉태치 못하게 하신 것이 그 이유인 것이다. 사람이 육신으로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삶의 모든 모양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내는 아들의 삶을 살아내는 생명이 되도록 성령으로 잉태케 하시고 또한 그 생명이 자라서 하나님의 의를 더 장성한 분량으로 표현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을 했을까?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애굽왕이나 아비멜렉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브라함이 가진 의를 표현할 형식을 자신의 것으로 취한 것이고,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표현할 형식을 지키려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해를 돕는다면 영지주의를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형식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상태이다. 그 약속을 받고서 아들이 잘 생기지 않자 종에게서 아들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종이 아닌 아브라함의 아내를 통하여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시겠다는 의(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을 자신의 형식이라 할 수 있는 아내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신앙인들의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육신의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겉모양을 지켜내려고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의 교리에 따라) 직장이나 사회생활과 같은 것을 대수롭지 않게 버려버린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런 과정, 그런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 드러나고서야 비로소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전하여 하나님의 의가 삶이 되는 아들과 같은 새로운 생명(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아내와 같은 육신의 삶을 그냥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 관계를 끊어 버린다는 것과 같은 것을 해서는 그 사람(아들)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브람이었을 때, 애굽으로 자기 정체성의 기근을 찾아 갔을 때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인 사건을 말씀하신 것은 개인이 하나님이 지시할 땅, 곧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가는 과정에서 육신의 삶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이고,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고서 또 누이를 속이는 장면을 보이신 것은 우리 자신이 사람의 자리로 가서 다시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알게 하려 할 때도 아내라 할 수 있는 육신의 삶이 가진 것들을 그냥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아내가 없으면 어떻게 아들을 얻겠는가? 그와 같이 우리의 삶도 이 육신의 삶이 없으면 어디에다가 하나님의 의를 담을 것이며, 또한 다른 이들이 하나님을 모른다 하여 외면하고 배척하기만 한다면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얻을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너무 분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앙인들, 특히 오히려 성경에 대하여 계시가 밝다고 하는 이들일수록 더 그렇기도 하다.


몇 번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 해 보고, 잘 안 듣고 못 알아들으면 ‘만나는 시간도 아깝다.’고 돌아서면 어떻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얻을 수 있는지 사뭇 의심스러운 것이다. 예수님은 만나는 시간을 투자한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죄인이 되어 돌아가셨는데, 그 예수님을 따라가고 전한다면서 육신이 가진 여러 가지 삶의 모양과 형편을 신앙에 불편을 준다고, 또 투자를 요한다고, 때로 방해가 된다고 그냥 버려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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