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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신앙의 내용, 그리고 형식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20. 11:22 Writer : 김홍덕

너무 간단한 인생의 정의



<내용과 형식>이라는 관점으로 성경을, 신앙을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생소한 관점일 수 있다. 처음 시작할 때 밝힌바와 같이 이는 성경의 법칙을 종교적인 색채가 없는 일반적인 용어와 관점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정확한 관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내용과 형식이 하나로 합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이동이라는 내용과 바퀴 달린 몸체라는 형식이 하나가 되어 존재한다. 칼은 그 날카로운 모양인 형식이 자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즉 자르는 것이 본질이고 칼의 내용이다. 내용이란 다른 말로,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목적이다.


사람들의 삶은 정신없다. 그리고 늘 불안하다. 사람들이 불안한 것은 내일 자신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지만 아주 명백한 가정 하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정확하게 뭘 모르는지 조차 모른다. 살아가기 힘든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지만, 그렇게 두렵고 대비를 해서 죽지 않는 것도 아닌데도 그렇게 불안해한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불안해할까? 정말로 그냥 안 좋은 일이 일날까봐? 아니면 아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 그 자체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에, 그러니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미친 듯이 대비하면서도 떨쳐지지 않는 불안감의 원인은 사실 다른데 있다. 사람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의 모든 불안의 원인은 <왜 사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왜 사는지를 안다면, 내일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지도 분명하고, 더 나아가서 왜 사는지 목적을 주신 분이 누군지 알면 그 목적대로 사는 것에 필요한 것도 다 준비되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을 믿는 망치는 주인의 공구함에 들려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아니 뭘 할지도 알뿐 아니라, 가면 못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자신이 망치라는 것을 아는 이상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이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것은 내일 먹을 양식이 아니라, 내일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도 같은 의미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왜 만드셨는지 그 의도와 그 의가 다스리는 나라를 알게 되면 그 의를 표현하기 위한 형식들은 다 주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들이라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마음이 있으니 그 마음에 합당한 제물이 예비 된 것이다. 이런 모든 말씀들은 결국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면 그 존재 목적을 이루면서 살기 위한 육신의 모든 것은 다 예비 되어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즉 내용이 무엇인지 알면 형식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있으니 그 형상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이라는 내용을 표현할 형식인 사람을 예비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것으로 볼 때 사람이 내일을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존재의 목적을 알면 삶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려워말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려주러 오신 분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예수 믿으면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사람이라는 존재의 본질, 곧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라는 육신을 가진 형식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사람의 내용만 알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 하나뿐인데, 왜 그렇게 성경을 어렵게 보고, 신앙생활 힘들다며 쟁쟁거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얼토당토않게 신앙을 학문으로 만들어서 신학이라고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공부한다고 알 일이 아니다. 이 세상의 사람 어느 누가 태어나서 호흡법을 배워서 숨쉬기 시작했는가?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 있어서 그 어떤 것도 그렇게 익히는 법은 없다. 그냥 생명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 그것이 사람의 내용이라는 것, 그 내용은 곧 인생의 목적이고 의미라는 것, 그리고 육신의 삶은 그 목적을 표현해내는 형식이요 도구라는 것, 이 얼마나 간단한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줄이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게 다다. 성경을 왜 연구하고 앉았는가? 이것이면 족하다. 단 하나 이것이 자기 안에 없고, 성경이 이것 하나라는 것을 믿지 못해서 다들 부산을 떨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하나님 당신께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표현하시겠다는 것이 인생의 모든 내용이고 본질이고 의미다. 이것을 믿는다면, 이 육신의 삶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지 너무 분명한 것이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천부께 다 아시느니라” 그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자기 삶에 대하여 그렇게 걱정하고, 뭔가를 해야 하나님께서 반응하실 것이라고 난리를 떨고 있는가? 그것은 인생의 본질이 자기 육신의 삶, 곧 눈에 보이는 것, 그 형식을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그것뿐이다.


그래서 육신이 하나님 앞에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하여 선과 악을 규정하고 육신이 선한 것을 행하기 위하여 심지어 남을 죽이기도 하고 난리도 아닌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내용이고 내 존재의 목적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이 육신의 삶은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임을 안다면, 이 육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누가 준비하겠는가? 당연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이 자기 삶을 대비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곳간을 새로 지은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딴 게 아니다. 바로 이것이지.


인생과 신앙은 간단한 것이다. 스스로가 이 인생을 시작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이 아님을 알 것이고, 그러면 누가 시작했는가를 알면 그 시작하신 분이 나의 존재 목적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삶의 주인이고 내용이고 목적이고 의미이신 것이다. 그러면 육신의 모든 것은 그 뜻에 맞게 예비 되고 사용되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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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소리

Category : 잡동사니 Date : 2015. 10. 19. 14:38 Writer : 김홍덕

<바람의 소리>라는 영화가 있다. 2009년 영화로 알고 있다. 영화의 내용은 항일 운동을 하고 있는 중국의 항일 조직을 밝히려는 일본이 첩자를 밝히기 위하여 첩자로 의심이 되는 사람들을 어떤 성에 가두고서 밝혀 내려고 하고, 성에 갇힌 사람 중에 있었던 첩자들은 자신들이 세운 거사가 일본의 계략이었다는 것을 외부로 알려야 하는 두뇌싸움에 관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정말로 잘 만들어졌다. 중국의 항일 스토리 중에 이만한 이야기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는 결국은 성에 갇힌 첩자들이 외부로 작전 취소를 알림으로 이를 계획한 일본이 실패하고 주도한 장교는 일본 항복 후에 당시 성에 갇여 있었던 첩자의 대장에게 살해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죽어서라도 성 밖으로 작전 취소를 알리려 한 한 젊은 여인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남긴 메세지를 같이 성에 갇혀 있었던 암호 전문가 언니에게 남긴 메세지를 전하면서 끝난다. 그 메세지가 참 감동이어서 남겨 본다.


메세지를 전할 수 있을지는

오늘에 달렸어

죽는 건 무섭지 않지만

날 사랑하는 이들이 내가 죽은 이유를 모를까봐 무서워

난 지옥에 있겠지만 메세지는 여기에 남길게

우리 가족들과 언니가

나의 이 결정을 용서하길 바래

그렇지만 나중에 나의 이 마음을 알아줄 거라고 믿어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내가 이렇게까지 무정하게 한 것은

민족이 존망의 위기에 처해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바쳐 여러분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육체는 이렇게 사라지겠지만

영혼은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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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4)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19. 13:55 Writer : 김홍덕

교회



이 글의 기본 주제는 <내용과 형식>이다. 이것은 성경의 일반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성경의 기본 구조를 보편적인 용어로 설명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성경의 기본 골격이고 법칙이기도 하다. 영이신 하나님과 그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형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창조의 섭리가 그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사람의 내용, 곧 본질은 하나님의 의다. 그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게 있어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이다. 성경은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표현했다. 여기서 형상은 이미지다. 즉 사람은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누군가 자신을 볼 때, 혹은 그 삶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그 사람에게서 이루어졌으므로 그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산 사람이다. 그것을 성경은 구원, 거듭남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생명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즉 세상의 모든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서 깨달아진 사람은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이루어진 사람이고 그렇지 않다면 물리적 세상을 아무리 잘 알아도 하나님의 세상이 그 사람에게 열리지 않은 것이다. 즉 흑암과 혼돈 가운에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이 자기 안에서 열리지 않으면 인생을 왜 사는지 모르기 때문에 흑암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의 그림자다. 즉 이 세상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고 그렇게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 열린 사람, 즉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태초가 있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하나님의 세계이다. 그런 사람에게만 이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지나 신념으로 의심을 물리치고 믿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다.


그렇듯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내용 – 육신을 가진 삶은 그 형식>이라는 구조와 같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삶을 살던 사람들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서 들어가는 곳이라면,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곳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예표인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의를 삶으로 표현한 사람들이 모이는(들어가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교회도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라는 내용이 교회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 이전에 이 세상이라는 것이 전부 하나님의 의가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라는 내용이 이 땅에서 형식으로 표현된 곳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가장 먼저는 교회가 설립되는 과정부터 설명하고 있다. 즉 교회가 건물을 세우고, 세상의 법칙대로 시험 쳐서 설교 면허를 얻은 목사가 있고 난 다음에 성도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인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 삶이라는 형식이 된 사람이 모임으로 교회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렇게 모인 교회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라는 내용을 표현한 형식, 즉 하나님 나라의 예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는 너무 많은 성경의 말씀들이 있다. 먼저는 예수님께서도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다. 분명히 모인 다음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사람이란, 그냥 육신이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목적임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그런 면에서 보면 성경에 사람이라고 나온다고 육신인 사람이 그것에 해당된다고 믿는 것은 난센스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삶, 곧 하나님의 의가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 상식적인 이치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을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모이면 대한민국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교회는 그냥 사람이 모여서 예배드리면 모인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터미널과 같은 곳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생명을 가진 이들,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모인 곳이라는 것이다.


많은 교회가 문제를 일으키고, 사람들이 교회에서 안식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을 알지 못하고 방향을 거꾸로 해서 일단 모으면 교회가 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안식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일단 건물과 목사라는 설교 면허가 있으면 교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형식이 있으면 내용이 찰 것이라는 거꾸로 된 방향을 가진 것이다. 그것은 형식이 본질로 아는 가치관의 산물일 뿐 온전한 하나님의 법이 아니다.


교회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사람이 모일 때 이미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성령의 감동이 있어서 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는 것은 세상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든지(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전도다.), 육신이 교회에 와서 그렇게 모인 사람들의 삶을 보고서 감동하든지 간에 먼저는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기 위한 순종의 세계가 시작되어 모이는 곳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예표이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의로 통치되듯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법인 공동체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이들의 공동체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당연히 몸이 머리에 순종하듯 그리스도의 의에 자기 삶이 순종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아주 자연스럽고 안식할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심판이 없듯이 교회에는 심판이 없다.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곳이듯, 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육신의 다양한 성향대로 마음껏 자신의 육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표현함에 있어 심판도 거리낌도 없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형식이고 예표며,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교회에 가는데 의무감이 있고, 또 가면 사람들의 눈치 보이고, 또 신앙 없다고 심판 받고 한다면 그곳은 온전한 교회가 아니다. 또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고, 교회를 아름답게 지어 놓으면 사람이 온다고 하는 것 역시 온전한 교회가 아니다. 하물며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싸우는 교회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교회를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우고 운영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에 사람의 외모와 행동을 기준으로 심판하고, 편을 갈라 싸우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중심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모든 행동이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이 나오는 것이라는 것 자체도 모르기에 하나님의 의가 온전한 삶의 내용으로 있어 그것을 삶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온전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할뿐더러 그런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교회가 사람을 심판하고 다투고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며 쫓아다니는 것이다. 그러한 곳은 교회 노릇을 하는 곳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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