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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 모임을 가집니다....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15. 11. 11. 17:10 Writer : 김홍덕

Bible bacome My Story!! 블로그 독자분들의 오프라인 첫 모임을 가집니다.


그간 많은 분들이 저희 블로그를 방문해 주시고, 

또 적지 않은 분들과 메일 등으로 소식을 나누었는데 

이제 자주는 아니어도 오프라인 모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복음이란는 것이 결국 육신의 삶으로 표현된 하나님을 나누는 것이기에 

시간이나 거리의 한계가 있지만 삶을 공유하는 시간들이 필요하기에 

다음과 같이 모임을 가지려 합니다.


** 참석 여부(인원수)를 메일이나 댓글로 알려주시면 장소 예약에 도움이 됩니다.

** 블로그 운영자 연락처 : 010-3396-5555 / the.elphis@gmail.com



모임 일시 : 2015년 11월 21일 토요일 14:00-16:00

모임 장소 : 공간더하기 강남점 - 호실은 당일 현장 공지('엘피스'로 공지) - 주차공간은 없습니다.

준비물    : 회비나 기타 준비물은 전혀 없으며 몸만 오시면 됩니다.

오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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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요한과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신 예수님께서 빌립을 만나서 역시 ‘나를 좇으라.’고 하시니 따라 갔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이 스치듯 지나가다가 예수님께서 부르시니까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인하여 제자들이 좇아갔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삶이 가서 보고 싶은 삶이고 그것을 빌립이 봤기 때문에 오라니 따라간 것이다. 안드레 역시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 물으심에 ‘어디에 계십니까?(당신은 누구십니까?)’ 물었더니 와 보라고 하신 자리에 가서 보니 형 베드로에게 말할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만난 사람이 바로 메시야더라는 것이다. 사람을 만났는데, 육신을 가진 인생의 삶을 보았는데 메시야였고, 그 삶을 보았는데 오라니 가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난 빌립은 나다나엘을 데리고 예수님께 갔다. 안드레가 베드로를 데리고 왔듯 나다나엘을 데리고 간 것이다. 그런데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만나러 가자고 하니 나다나엘은 ‘누구를 만나자는 것이냐?’ 반문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랬더니 빌립은 <나사렛 예수>를 만나자고 했더니, 나다나엘의 말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했다. 이것은 나다나엘이 율법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나다나엘이 말하는 <선한 것>도 하나님의 선하심과는 다른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가진 선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렛과 같은 천한 동네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다나엘의 생각은 사람을 외모로 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율법이라는 것이 그렇다. 사람의 행동과 모양새가 어떻게 되어야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시 나사렛은 천한 동네다. 뭐랄까 달동네 같은 곳? 그런 곳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한 것은 천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도 만연하다. 기왕이면 더 큰 교회에 다녀야 한다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사람이 행동으로 성경을 지켜내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은 한마디로 이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 그것이 천한 동네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고, 큰 교회가 지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큰 결단을 내렸다. 빌립을 따라 간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되듯 말 듯 하지만 이건 중요한 것이다. 자기의 가지관으로는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사렛이나 별반 다를 것 없는 갈릴리의 빌립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는데 따라 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보통일이 아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기성교회에 다니면서 어딘가 해결되지 않는 신앙의 의문들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사람이 와서 성경이 말하는 것이 이것이라고 말한다고 쉽게 가지는 않는다. 물론 그냥 가서는 안 된다. 지금 나다나엘에게 오라고 하고 있는 빌립은 사람이다. 빌립은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의 삶을 본 사람이다. 그것을 보았더니 성경에서 이른 이가 바로 이 분이라는 것을 보았기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성경을 가지고 어떤 관점 어떤 해석을 한다고 할 때, 그 추구하는 바가 육신의 문제에 관한 것이라면, 육신의 문제를 더 잘 해결하는 방법을 성경에서 찾아 주는 것과 같은 것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따라 나설 필요가 없다. 그것은 개진도진이기 때문이다. 이단이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신데 소유와 행위에 관한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이단이다.


행위와 소유에 관한 선함의 기준으로 보면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 나다나엘은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을 한 제자들이 가서 보니 10시 곧 밝음이 있음을 알게 된 제자들이 와서 전할 때에 나다나엘은 자신의 가치관을 뒤로 하고 따라 나선 것이다. 오늘날도 이런 안목이 필요하다. 성경을 보고서 행위와 소유에 관한 말씀으로 보고, 하나님을 우리가 육신으로 이 땅에 사는 동안 겪게 되는 일들을 잘 해결해 주시고 필요한 것 공급해 주시는 분으로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하는 신앙관에서 존재의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을 만나면 자기 가치관을 버리고 따라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간사하다는 것은 계산적이며 이기적인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렇다. 이 블로그에서 언제나 말하는 것이지만 나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누구의 유익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믿었더니 나 자신이 이 땅에 살 동안 평안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믿음인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사람이 유익인 것이다. 그것이 간사한 신앙이다.


얼마 전 글에서도 말했듯이, 사람이 자동차를 위하여 자동차를 만들거나 사지 않는다. 자동차는 전적으로 만드는 사람에게 경제적 이익을, 사는 사람에게 편리를 제공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즉 주인이 혜택을 받는 것이지, 자동차를 위하여 자동차를 만들거나 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만들었다는 그 하나만 제대로 믿는다고 해도 기도가 달라진다. 믿음이 달라진다. 자신의 육신의 삶을 위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저 이 인생은 하나님의 의와 말씀을 표현하는 도구로 쓰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감사하고 기쁘며 그것이 은혜임을 아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죽어서 버릴 이 육신이 살 동안에 육신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느 것이 더 영광스러운가? 하나님께서 이 썩어질 육신을 이 땅에 만들어 보내 놓고 수명동안 보살피는 것이 다른 신과 다르다는 것이 영광스러운가? 아니면 이 인생이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것, 그것이 더 영광스러운가? 이 단순한 것을 몰라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물건을 만들 때는 다 격을 맞춘다. 왕이 마시는 잔과 종이 마시는 잔을 같게 만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천지의 주제이신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드신 사람의 격이 어떻겠는가? 하나님과 같은 격인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인데 사람들은 그 존재의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의 하나님으로 늘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죄지, 사람의 원래 모습이 죄가 아니다. 하나님께 돈 달라, 여(남)자 달라, 직장 달라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고 죄인인 것이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도 늘상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라고는 육신의 문제들을 안위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죄인 것이다.


나다나엘은 그 자리를 떠난 것이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자신의 가치관을 떠나서 사람을 만났는데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는 빌립을 따라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러 간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안위를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심으로 인생의 이익을 누리는 자기 유익을 포기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간사함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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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1: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1: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1: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십시쯤 되었더라

(1: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이 장면을 다시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는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두 제자[각주:1]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신다. 그러니까 “왜 나를 따라 오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의 답이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라고 다시 묻자 <“와 보라”>고 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계신 곳을 보고서는 그곳에서 거했는데 시간이 10시쯤 되었다고 하고 있다.


이건 아주 재밌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온 이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셨다. 그랬더니 제자들은 ‘당신이 어디에 있느냐?’로 되물은 것이다. 이것을 영어로 한다면, ‘What do you want?’라고 했더니 ‘Where are you staying?’ 이라고 되물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온 제자들에게 DO를 물었는데 제자들은 BE를 되물은 것이다. 그랬더니 “와 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DO와 HAVE에 관한 것을 구한다. 소유와 공로에 관한 것을 구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살 동안 필요한 재물과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을 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 돈 주세요.’ ‘여(남)자 주세요.’ 아니면 ‘좋은 직장 주세요.’나 ‘이번에 시험 치는데 합격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와 보라>고 하시지 않는다. 그런 것을 기도하는 사람들의 하나님은 단연코 말 하건데 그들이 만든 자기 하나님일 뿐이다. 하나님은 DO와 HAVE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것을 구하지 않았다. 어부니까 ‘고기 잘 잡히게 해 주세요.’나 거창하게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구해 주십시오.’ 같은 것을 답하지 않고, ‘선생이여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반문한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정체성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곧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는 것이다. 그랬으니까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가서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물으신 것을 얻었다면 ‘예수를 만났더니 병이 나았다.’나 아니면 ‘돈이 생기더라.’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제자들이 예수님이 와 보라고 하는 곳에 갔더니 함께 거할만 했고 시간이 10시쯤 되었다고 했다. 요한복음의 시간은 공관복음의 시간과는 좀 다른데 공관복음은 새벽을 기점으로 한 것이고, 요한복음은 전날 일몰을 기점으로 한 시간이라고 한다.(KCM참조)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었더니 대낮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와 보라고 한 자리는 빛이 있는 자리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안드레가 형인 베드로에게 가서 메시야를 만났다고 한 것이다. 메시야는 어두운 시절에 기다리는 구세주요 영웅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은 예수님의 자리는 어두움이 없는 자리라는 것이다. 곧 예수님이 물으신 ‘무엇을 구하느냐?’의 세계인 DO와 HAVE의 세계에는 없는 빛이 ‘당신의 자리가 어디입니까?’라고 묻는 물음과 대답의 자리에는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제자인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와 보라>고 하니 제자들이 스치듯 지나다가 따라 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와 보라고 하신 자리는 그냥 길가다 약장사 따라 가듯이 가는 자리가 아니다. 소유와 행위의 신앙에서는 볼 수 없었던 빛, 곧 메시야는 존재의 자리에 계시더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자리)이 바로 사람들의 빛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구하는 것은 다른 종교나 신께 구하는 것과 다르다. 그런 믿음은 하나님이 다른 신보다 뛰어난 보급계라는 것을 믿는 것에 불과하다. 예수님이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은 다 그런 것을 구한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당신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묻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빛이 되신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인식할 수 있는 만남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진정으로 다니고 싶다면, 아니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싶고,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면 돈 달라, 여(남)자 달라, 합격 달라 기도하러 갈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왜 나를 만드셨는지? 나의 정체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알기를 원해야 한다. 관계가 정해지면 그 육신이 필요한 것은 다 알아서 준다. 군대 가서 운전병이 되면 차를 주고, 통신병이 되면 싫어도 무전기 준다. 그것과 같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정체성) 안다면 필요한 것은 다 주신다. 찌질하게 가서 돈 달라 뭐 달라 하지 않아도.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시는 것이다.



  1. 이 두 제자는 요한과 안드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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