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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6. 17:20 Writer : 김홍덕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이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고, 성경 좀 봤다 하는 사람이면 거의 암송하는 구절이다.(사실 요한복음 14장에서 17장까지의 말씀은 소름 돋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바울 사도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거의 입버릇처럼 하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가 주는 혜택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살아가면서 남들 겪는 어려움을 하나라도 덜 겪을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세상에서 겪는 어려움이 그리스도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이나 부적과 같은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즉 형식을 본질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시장에서 사온 포도송이가 “포도(the grape)”라는 과일에 속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내가 지금 시장에서 사와서 먹는 포도나, 지구 반대편 어떤 사람이 먹는 포도나 다 포도라는 과일명인 ‘포도 안에’ 있는 것이듯,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하신 것도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정체성은 세상의 모든 포도가 다 포도이듯이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 모든 포도를 포도로 이야기 하듯이 예수님도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대표하여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래서 영어로 표현할 때 예수님을 the Christ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Christian 즉 a christ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a christ)라고 말하는 것을 겁낸다. 그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대변하는 겸손한(?) 표현이 ‘닮아가고 있다.’, ‘과정 중에 있다.’, ‘노력해야 한다.’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포도나무고 우리가 그 가지이면 같은 DNA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나무 다르고 가지 다른 생명이 아닌 다음에서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그리스도인 것이지 그게 왜 말 못할 소리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예수님이 the Christ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첫 열매로 장자 되심과 같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정체성,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고 내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안다면 당연히 자신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 것이다. 포도 DNA를 가졌으면 포도지 뭐겠는가? 포도이든지 아니든지 할 뿐인 것이다. 사실 이것을 모르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고 하면 펄쩍 뛴다. 만약에 사람이 첫 열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안 될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을 보면서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고,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구나!’ 깨달았다면 포도가 포도 안에 있듯 예수님과 자신이 같은 생명 안에서 발견된 것인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아닐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the Christ를 보고 자신의 정체성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리스도(a christ)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왜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다. 다른 이유가 있다면 아마 하나일 것이다.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의 삶이 복 받는 것?


예수님께서 포도나무고 우리가 가지라면 우리도 포도나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인 것이다. 이는 예수님은 모든 포도를 대표하는 the grape이시고 우리는 시장에서, 마트에서 보는 포도송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시장에, 마트에 있는 포도송이는 포도라는 유전자가 표현되고 나타난 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정체성이자 생명인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신 분이였듯, 우리도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과 같이 나의 생명이 되어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듯 나의 삶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하신 뜻이 그것이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자기 삶의 내용이자 생명이 되어 육신을 가진 삶으로 표현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였듯,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삶으로 표현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이 예수님을 세상사는 문제 해결의 도구로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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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주의 vs. 영지주의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5. 15:50 Writer : 김홍덕

율법주의 vs. 영지주의



이글에서 영지주의를 인용한 것은 영지주의 대표적인 특성이자 골격을 인용하는 것이다. 영지주의가 육신의 문제를 간과하는 것 때문이다. 사실 영지주의와 같이 지금도 많은 교회들, 신앙가치관들이 세상을 무시한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것은 결국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는 것에서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신앙은 신앙이 없는 사람과 세상을 도화지로 하여 그리는 그림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 역시 믿지 않던 사람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에 있는 것이다.(물론 믿는 사람들도 믿는 사람에게서 표현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광스럽게 여긴다.)


그러므로 신앙은 세상을 떠나면 안 된다. 세상을 주인으로 삼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믿는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그 삶으로 표현되면, 믿지 않던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나의 정체성과 존재의 목적도 저것이구나!’라고 깨닫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이다. 안 믿는 사람이 없으면 관객 없는 연극이고, 도화지 없는 수채화일 뿐이다. 영지주의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일을 등한시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부모와 등지기도 한다.(물론 정말로 좋지 못한 부모 밑에서 혹독한 삶을 사는 이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누가 봐도 참 신사적이고 점잖고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인데도 단지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등 돌리기도 하는데 그런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바로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의 의가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용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니 육신이라는 형식의 삶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지’,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보이신 예수님의 정체성이 이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그렇다는 것은 누구라도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제자의 삶을 살려고 한다면 결국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과 의를 가진 존재가 되어야 하니,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 곧 사람 안에 생명이라는 내용이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신앙에 대하여 더 알면 알수록 이런 형상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에 대하여 더 밝으면 밝을수록 그렇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썬데이 크리스찬이라 할 수 있는 사람, 관습으로서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은 오히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선은 열정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은 율법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행동을 똑바로 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핵심은 그 사람들의 행동이 안에 생명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살아야 천국을 가던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지의 차이이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든 영지주의든 또는 세상과 타협하여 타락한 신앙이든 간에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 안에 생명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이 생명 있는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나무가 되고 열매가 되듯 그 사람의 삶과 생활을 바꾸어 내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존재 목적임을 깨닫고, 그 깨달음이 삶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내용만 부여잡고 있으면 된다고 하면서 세상을 등한시하는 것은 영지주의고, 의지와 신념으로 자신의 행동을 관리하면 영혼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영혼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주의다. 그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생명의 법은 모르는 것이다. <내용과 형식>이라는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의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나면 천부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의가 가진 생명이 모든 것을 나타낼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생명을 하나님께서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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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주의 vs. 영지주의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5. 11:55 Writer : 김홍덕

영지주의적인 신앙



영지주의는 왠지 옛날이야기 같아 보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을 직접 본 사람들이 있던 그 시절의 이야기 같아 보인다. 그래서 지금은 없는 이야기 같다. 하지만 지금도 이런 사상은 넘쳐 난다. 아니 영지주의 신앙이 넘쳐난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신앙에 있어 현대적 영지주의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앙 없는 이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신앙의 모습이 사회에서 외면을 받게도 하고, 심화되면 신앙을 사수한다는 이유로 자기들만 모여서 공동체라며 이단이 되기도 한다.


신앙에 있어서 지금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 중에 어쩌면 사회와 육신의 삶을 외면하는 것, 돌보지 않는 것, 심지어 적대시 하는 것, 그것이 신앙에 있어 가장 흉측한 모습일 수 있다. 이것은 신앙만으로 산다면서 사회생활을 단절하다 시피 하는 것을 말한다. 


우선은 그런 문제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말하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육신의 행위에 있다. 육신이 행동으로 범죄 하지 않는 것을 신앙의 아주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고 있고, 세상은 죄악이 관영하므로 그것과 연관되면 자신이 죄를 지을까봐 멀리하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누누이 말한 것과 같이 신앙이나 믿음이 아니라 신념이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세상을 멀리하려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신앙의 본질을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임을 모르고, 단지 육신의 행동이 죄를 짓지 않는 것에 매몰되어 있다 보니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육신을 그것에서 멀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멀리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안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세상을 멀리하는 것은 온전한 신앙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육신의 행동이 죄를 짓지 않도록 육신을 훈련하고 단련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려고 마음을 먹게 되면 율법적인 신앙이 되고, 반대로 세상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단절하면 할수록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면 영지주의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부모님 혹은 가족을 대하는 것에서 구분 지을 수 있다. 율법적인 신앙은 자기 마음에는 화가 나지만 자신을 다스리면서 부모님이나 가족에게 공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면, 영지주의적인 신앙은 가족이나 부모를 떠나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모여서 그런 결정을 칭송하고 좋은 신앙이라 하고 영광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면 당연히 <그 의가 어디에 나타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육신이고, 우리 육신이 사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 육신이 사는 세상을 부인하면 어디에서 누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을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좋은 신앙을 가지는 것,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 좋은 신앙을 어디에 쓸 것인가? 그냥 좋은 신앙을 가지는 그 자체가 신앙의 전부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의 전부라면, 뭐한다고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사람의 정체성을 보이였겠는가? 그냥 누가 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능력만 보이시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음 세대에 오셔서 보이시고 요즘 같이 미디어가 발달된 세상에서는 인터넷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생중계하면 될 것이지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가진 인생이 어떤 모습이고,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지를 보이신 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도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자신들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자기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셨다. 즉 세상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도구와 형식이고, 그것을 나타내심은 다시 육신을 가진 이가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삶으로 표현해 내는 존재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오신 것이다.


즉 육신을 가진 인생,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지 못하는 죄인들, 육신이 하는 모든 것이 죄인인 이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전해져서 그 안에서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의가 다시 그런 인생들에게서 삶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인 것이다. 그런데 육신을 가진 이들을 외면하고, 세상을 외면하면 어디에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것인가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의를 그려낼 도화지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또한 죄인들과 함께 하지 않고 자기들의 의만을 가지고 숨듯이 모여서 살며 세상을 등지고, 육신의 부모와 직장생활 같은 것을 죄인들의 소행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한다면 화가가 도화지에 그림 그리는 것을 죄라 여기는 꼴인데, 도무지 그 좋은 신앙의 근본은 무엇이며,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렇듯 예전 영지주의자들이 영혼만 중요하게 여기고 육신은 무조건 버릴 것으로 여긴 영지주의,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가지지 않으셨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그런 신앙과, 앞에서 이야기한 세상과 세상에 있는 사람들, 심지어 가족들까지 외면하는 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여기는 것은 같은 것이다. 바로 그런 신앙이 영지주의적인 신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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