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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생자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일에 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고, 그 영광을 보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증거하고 있다.(요 1:14)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말씀이다. 이 독생자는 요한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생각처럼 예수님께서 독생자라는 것이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의 그 몸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독생자는 하나 밖에 없는 방법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예수라는 이름 되에 구원을 얻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다.


만약에 그것이 아니라,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의 몸 자체가 독생자라는 것으로 이것을 본다면 그런 독생자가 있는데 다른 아들이 굳이 그렇게 필요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그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면서 까지 다른 아들을 얻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생자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나 앞으로 태어날 모든 사람들은 성경을 믿을 이유가 없다. 예수님의 몸과 같이 될 방법이 다시 있다면 모를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나에게 아들이 있다.’라는 것을 자랑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나는 이런 사람을 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표상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독생자이신 것이다.


사람들이 <독생자>라는 말을 들을 때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유일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예수님은 유일하시다. 다른 예수님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적은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실패하지 않았는데 왜 다시 오시겠는가? 하지만 그 때 그 예수님의 몸과 삶을 독생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역시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의 몸을 독생자로 보느냐? 아니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이유가 유일한 것이냐? 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을 믿느냐 하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a christ)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요한 사도도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했다는 것은 이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을 얻기 위하심인데, 예수님만이 독생자면 나머지는 뭐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아니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니까 사람이라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이 단 하나이기 때문에 이를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요한복음을 읽고서 이 말씀이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독생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고, 그 목적이 요한사도 안에서 생명이 되어 쓴 책이 요한복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반복하는 말이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그러니까 오늘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영광

그것이 또한 영광이라고 요한 사도는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영광이다. 영광은 ‘나타나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 역시 그렇게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영광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영광이라고 하면 세상에서 경쟁해서 이긴 것을 이야기하거나,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나타나면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경쟁하여 이겨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타락(구약의 모든 선지서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타락이 바로 이것이다.)이다. 또한 기도하여 이루어진 것이 영광이라는 것은 맞지만 기도란 바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생명을 구하는 것이 기도지, 세상의 일을 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 영광이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와 말씀과 성품과 생명이 나타나는 것을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지, 사람이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 아닌데 나타났다면 그것이 바로 가증한 것이 거룩한 것에 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의를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유일한 방법이 사람을 통하여 나타난 것, 그것이다. 오히려 사람은 오직 그것 하나만을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사람의 유일한 존재 목적, 그것이 온전히 나타나는 것 그것이 바로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은혜

그 독생자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다. 은혜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가 필요한 것을 기도하여 얻은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하나님이 아니시면 누가 사람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있겠는가? 그럼으로 존재 자체가 은혜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적어도 태어나지 않은 것 보다 자신이 사람으로 나서 살고 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한 일이라는 마음이 없는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흔히들 시상대 위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수상소감을 할 수 있게 된 것과 같은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아는 것은 큰 함정이 있다. 바로 경쟁에서 진다는 것은 은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기지 못한 삶은 실패한 삶이라는 전제가 깔린 감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태어나 보니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안 되겠다는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즉 태어났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나 은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시겠다는 뜻을 시행하셨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사람만이 아는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다. 그것이 아니라 자기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 것은 자기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다. 언뜻 사람에게 산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기 어려울 수 있다. 그것은 육신의 문제가 본질이라고 알면서 살다보면 도저치 태어났다는 것 그것이 은혜와 영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재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를 통하여 표현하시겠다는 것이 나의 존재 목적이 된다면 그 영광스러움과 은혜의 감사는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은혜다. 요한 사도가 전하는 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서 그 뜻을 자신을 통해서 나타내시려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은혜가 충만했던 것이다.


진리

그리고 또한 은혜 뿐 아니라 진리도 충만하다고 했다. 그것 역시 요한 사도가 예수님을 통하여 알게 된 자신의 정체성을 알았을 때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의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사람에게 진리라는 것이다.


진리라는 정의는 굳이 필요 없을 것이다. 진리에 반대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거짓’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짓을 싫어하신다는 것은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거짓은 다름 아닌 존재의 목적과 행위가 다른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망치로 사과를 깎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사람의 삶이 다른 것, 그것이 바로 <거짓>이다.


예수님이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은 육신의 존재 목적이 충만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니 너무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셨으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삶이 하나이니 온전한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한 사도가 예수님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도, 요한 사도의 심령 안에 예수님이 보여준 삶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삶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또한 그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요한 사도 마음에 예수님의 삶이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일치한다는 것임을 알았고, 그것이 참 진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진리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 하나 하나를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과 사람의 삶이 일치가 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리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씀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인데(개인적일 수 있음) 그것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의 무엇이라도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그 용도대로 사용되어지는 것이 바로 자유다.(그래서 물고기가 물 속에 있는 것이 자유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리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방법을 보이신 분이시고, 그 보이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기에 사람에게 은혜이며, 그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온전히 이루어져서 사람의 삶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과 일치가 된 것이 진리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독생자시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도 그와 같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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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과의 언약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3. 14:54 Writer : 김홍덕

민족에 대한 언약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너와 네 자손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온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 한 개인과의 언약이라 할 수 있다면, 자손들, 모래 보다 많은 자손들도 이 땅을 얻을 것이라는 언약을 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이 말씀을 대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역시 같은 언약이고, 또한 순종해야할 말씀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아브람이 애굽을 거쳤듯이 그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을 거친다. 더욱이 예수님도 애굽을 거친다. 그 기간은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 여정, 그리고 교회의 신앙 여정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간에 의미를 둔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종살이에, 40년 광야를 거쳤다는 점인데, “4”라는 숫자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면 아브람의 고향 갈대아 우르의 본성, 곧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사람의 가치관이 처리되는 여정을 거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애굽을 거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신앙 여정이라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으려면 세상에서 한 번 놀아봐야 한다는 식의 관점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이 자기 안에서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브람도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갔고, 야곱과 그의 가족들도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갔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공허함이 들 때 먼저 세상에서 그것을 채우려 하는 본성이 있는데 그것이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개인이든 나라와 민족이든 다 같다는 것이다. 나라와 민족은 다름이 아니라 신앙공동체 곧 교회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브람의 자손은 아브람의 정체성이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들이다. 그렇다는 것은 아브람의 신앙이 육신이 된 존재라는 것이다. 아브람이 그렇게 자손을 얻었다는 것은 아브람의 씨에서 비롯된 자손이란, 아브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씨)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생명이 된 또 다른 사람들이 바로 아브람의 자손이요 믿음의 후예라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오늘날 전도라고 한다. 하지만 보통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교회에 데려다 놓는 것을 전도라고 한다. (물론 신앙의 좋은 점을 이야기해서 그 사람의 동의를 얻어서 함께 오는 것이겠지만.) 하지만 진정한 전도는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을 본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다시 들어와서 생명이 되어 다시 그도 하나님의 의가 삶으로 표현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잉태하심이고, 그것이 전도고, 거듭남이다.


아브람의 자손들이라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아브람을 통해서 표현되고, 아브람을 통해서 표현된 하나님의 의를 듣고 본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다시 생명이 된 사람들이 바로 아브람의 자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21세기를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브람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다시 자기 생명이 되어서 아브람이 그랬던 것과 같이 자기 안에 있는 애굽을 사랑하는 가치관이 처리되고 롯을 위대함을 추구하는 자들에게서 구해내듯이 위대함을 좇는 세상을 다스려내는 생명이 된 사람은 누구라도 아브람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아브람보다 먼저 이 생명이 있으신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람)보다 먼저 계신 것이다. 아브람이라는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다는 그 계획(LOGOS)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은 설계도고 아브람은 그 설계도로 먼저 지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아브람과 같이 육신의 삶으로 표현해내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누구라도 다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 아들들,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이들을 보고 다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아브람의 자손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사람들이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였을 때 바로 교회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육신을 통해서 이삭이라는 아들을, 그리고 그 이삭이 야곱을 통해서 열두 아들이 나오고 그 후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 삶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도들이 그것을 삶으로 전하였고 그들의 삶과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심령 안에 그들이 본 사도들의 삶과 들은 말씀이 다시 생명이 되어 그들의 삶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삶이 된 것이다.


그것이 전도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요 생명 공동체인 것이다. 그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늘의 별보다, 바닷가의 모래보다 더 많은 자손들이 나올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아브람의 자손이기에 그들의 삶도 아브람과 같이 애굽을 거치고 나오는 것이다. 애굽을 거치고 나온다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증거요 운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아브람과 같이 애굽이 처리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안에는 당연히 애굽이 처리되는 과정이 있을 것이다. 그 모인 생명이 애굽과 같은 세상을 사모하고 그것을 본질로 여겼던 시절이 있었던 사람들이 모였으니 당연히 그 공동체 안에는 애굽을 처리하는 과정이 역사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처리해내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브람에게 약속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약속이 아니라 생명의 본성이라 할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낸 아브람에게서 나오는 자손이니 당연히 아브람이 애굽을 거쳐낸 속에 있는 생명이 표현된 자손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에 대한 이야기는 차츰 해 나가기로 합니다. 창세기로만 본다면 야곱의 때부터 교회에 관한 이야기 구체화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블로그의 글을 읽으면서 완성되지 않는 부분을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자리일 것입니다. 신앙에서 교회라는 공동체가 삶 안에 있을 때에 채워지는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동체의 오프라인 모임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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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과의 언약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3. 13:11 Writer : 김홍덕

아브람 개인으로서의 언약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실 때에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아브람은 헤브론 땅으로 왔다. 그 땅을 아브람과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셨다.(창 13:14-18) 그러면 그것이 다 인가? 그렇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아브람이 헤브론 땅에 왔다는 것이 약속의 본질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람도 그렇고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도 그런데, 단순히 사람이 먹고 살 땅이 약속의 본질이라면 금방 오면 된다. 그런데 돌고 돌아서 들어가게 된다. 아브람도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애굽으로 갔다가, 애굽에서 나와서 다시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있다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으로 왔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걸어서 보름이면 갈 수 있다는 길을 40년을 돌고 돌아서 도착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지도(地圖) 상의 땅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땅은 곧 사람이다.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은 헤브론이라는 지명을 가진 땅이 본질이 아니라, 아브람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이 나타난 전부라고 성경을 본다면 아브람의 믿음을 본받으려면 헤브론 땅으로 가야할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고서 그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을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도 사람의 일을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일이겠는가? 성경을 눈에 보이는 대로 믿으려 하다 보니 예루살렘을 두고 싸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은 그렇지 않다 싶겠지만, 교회나 성당에 가서 기도하면 더 잘 들어주신다고 여기거나, 교회나 성당의 건물이 더 거룩하다고 여기는 생각이 있다면 그게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가 부정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이는 것인 본질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지시한 땅은 헤브론이 아니라 아브람이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 관한 말씀을 성경으로 사람들에게 읽으라고 주신 것은 아브람과 같이 같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 육신의 자리에서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정체성을 가진 자리로 가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일을 해결하고, 육신을 위하여 살던 자리가 바로 본토 아비 친척 집이라는 의미다. 가끔씩 사람의 삶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목숨이 붙어 있으니 그 목숨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어떻게든 견디듯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곤고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갑부나 권력자나 또 반대로 굶어 죽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육신의 문제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좋은 기술과 철학으로 만들어낸 놀라운 물건과 사상들이 지향하는 효과, 이익이 무엇인가 할 때 인류라는 인간 종족의 육신을 가진 삶의 윤택함 그것일 뿐이다. ‘인간다운 삶’ 존엄성과 같은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 어떤 고상한 철학도 결국 인생이라는 삶의 기간 동안 스스로가 만족할 만한 어떤 의미를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일 뿐이기에 그 모든 것은 아무리 고상하든, 놀라운 기술이나 발명이라도 다 살라고 주어진 시간을 버티듯이 사는 것일 뿐이다. 그런 모든 것이 다 보이는 세상 이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육신으로 사는 삶이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신앙과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믿노라 하여도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안다면 결국은 신앙이 육신의 문제에 수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을 역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그냥 산신령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신앙을 가지지 말라고 십계명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지 말라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금식 후에 마귀가 세상 만국을 주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을 시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너무나 많은 신앙이 하나님을 세상사는 동안 보급계나 해결사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잘 공급을 받는지를 기준으로 신앙이 좋다 아니다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잠깐 이야기가 곁길로 가겠지만, 오늘 당신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를 두 가지 관점에서 보자. 먼저 그 기도가 이루어지면 하나님께 유익인가 당신의 육신(과 연관된 또 다른 육신)에게 유익인가? 나에게 유익이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은 단연코 당신의 이익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 한 가지는 내가 한 기도로 인하여 다른 사람은 손해를 보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입학 정원 10명인 대학에 기독교인 20명과 신앙 없는 사람 10명이 지원했을 때 그곳에 합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의 기도가 이 둘 중의 하나 이상에 속한다면 당신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있는 사람이다. 당신의 기도가 눈에 보이는 것을 구했지 않는가?


한 가지를 생각해보자. 세상의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위하여 자동차를 만들겠는가? 자동차는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만든 것이다. 사람이 만든 그 어떤 것도 그 물건을 위하여 만든 것이 하나도 없다.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은 사람 안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만든 목적과 그 목적이 이루어짐으로 사람이 유익하게 되도록 눈에 보이지 않는 목적과 유익을 위하여 만든 것이다. 그것이 그럴 찐데 하물며 하나님이 만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사람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믿음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바로 그런 얼토당토않은 가치관을 가진 세계에서 떠나서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삶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 감사한 자리로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아브람을 통해서 우리 모든 인생에게 보여주신 언약의 말씀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본토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할 땅, 곧 사람의 정체성으로 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람이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언약한 것이고, 우리 각 사람을 향한 언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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