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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잉태되심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에 대하여 마태복음에서는 “성령으로 잉태하심”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이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의 육신을 사실대로 표현한 것은 마태복음이고, 그렇게 잉태되심으로 이 당에 우리와 같이 육신을 가지신 분으로 오신 예수님의 의미 곧 내용을 요한복음에서 표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과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내용이 형식으로 되는 과정이 바로 성령의 본분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성령은 바로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이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게 하는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성령을 어려워하고 때로 두려워하는 것은 영이라는 측면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령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분이라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이 하시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영역에 대하여 사람들은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 예를 들어 산을 옮기는 것과 같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의 입장에서 초인적이고, 초자연적이기에 사람이 볼 때 두렵고 놀라운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령의 본업이 아니시다. 성령의 본업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면 그것은 <감동(感動)>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고백을 하게 되는 과정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예수님이다. 사도행전에 예수 이외에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다. 구원받을 이름이라는 것은 구원받을 생명이자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름이란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전한 법이 있다. 그냥 ‘오늘부터 내가 예수 믿는다.’며 작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 신자로 등록한다고 예수 믿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심령 안에 성령으로 잉태되는 생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우리의 심령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성경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나 업적을 객관적 사실로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과 동일한 생명이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게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내 안에서 생명이 되는 일을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시다. 그것이 진정한 기적이다. 사람에게는 어쩌면 산을 옮기는 능력보다 본성이나 성격이 바뀌는 일, 즉 사람이 바뀌는 것이 더 기적이기 때문이다. 산을 옮기는 것이야 애굽의 술사들이 모세의 몇 가지 기적을 따라했듯 포크레인으로 옮길 수도 있지만 사람을 바꾸어내는 것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사람이 바뀌는 것은 사람의 밖의 어떤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고문이나 힘으로 굴복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그런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일은 얻을 수 있어도 마음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 마음 안에서 변화가 있어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 아는 이야기처럼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따뜻하게 하여 스스로 덥다고 여겨 벗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게 사람이 자기 마음을 바꾸는 것에 결정적인 감정이 바로 감동이나. 그 감동이 없으면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어떤 계기로 자기 마음이 바뀔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지, 일요일에 놀던 사람이 교회에 가는 것과 같이 사람 밖의 조건만 바뀐다고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고, 오늘부터 예수 믿노라 선언한다고 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의 절대적인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 마음 안에서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감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감동의 역사가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사람 안에 감동을 주시기 위해서는 사람 안에 어떤 것이 들어가야 한다. 땅이 열매를 내려면 씨가 심겨야 하고, 여자가 아들을 낳으려면 남편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늘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즉 사람이 어떤 것을 자기 안에 받아 들였을 때 그 받아들인 것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를 일으키는 감동의 역사가 바로 성령의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무엇을 받아들일 때 성령의 감동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다. 즉 예수님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모습과 보이신 것을 볼 때, 그 예수님의 모습이 사람 안에 들어와서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삼위일체이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계획대로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시고, 그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이 무엇인지를 보이셨고, 그것을 보는 사람은 그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마음 안에 마치 땅에 씨가 심기듯 심겨지고, 그것이 잉태되어 생명이 되게 하는 감동의 역사를 성령이 일으키시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뜻이며 이미지고 감동이고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이 땅에서 보이신 모습을 읽고 들을 때에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삶으로 표현된 내용인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심겨져서 그것이 다시 자기 삶의 내용이요 본질이 되어 표현됨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사람의 본질이 바뀌도록 예수님이 보이시고, 그 이미지가 사람 안에서 생명으로 잉태되게 하시는 성령이 계심으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자 뜻이 한 사람의 본질이 되고 삶의 내용이자 목적이 되어 삶이란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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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 나타난 것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유명한 말씀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난해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씀은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의미인데, 그러면서 부연하기를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나타난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우리가 눈으로 보고, 또 세상으로 나타난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비롯되었다는 것은 생명으로 본다면 그 생명이 가진 유전정보가 형체를 가진 동물 혹은 식물로 표현되고, 또한 그 생명의 특성을 나타내며, 그 유전적인 본성에 따라 행동하거나 모습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동물이나 식물의 본질은 보이는 그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보이도록, 또 그렇게 행동하도록 하는 유전자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실재로 이제는 많은 부분에서 생물의 유전정보를 활용하고 있다. 드라마를 통해서 많이 접하듯이 과학 수사와 같은 것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렇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유전자는 절대적인 배타성, 즉 유일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는 같은 유전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한 생명의 개체 자체로도 그렇고, 또한 종(種)으로도 그렇다는 것이다. 바로 그 유일한 유전자가 표현됨으로 우리가 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그렇다는 것은 그 생명을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영이신 본성과 품성과 의를 세상으로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게 하신 하나님의 법으로 만들어진 세상이기 때문에 그 세상 역시 어떤 보이지 않는 것이 나타나는 법(法) 아래 있고, 그것을 생물에 관해서 이제 사람들이 유전자라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 것이다. 즉 이 세상은 어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생명으로 치면 DNA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 마네킹이나 박제처럼 껍데기나 형체가 그 생명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외형이 같다고, 외형을 만든다고 그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유전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처럼 이 세상도 눈에 보이게 나타난 것이 본질이 아니라 이 세상으로 표현된 근본이자 본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



그와 같은 법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또한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창세기에서는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하셨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영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숨, 하나님의 영을 내용으로 하는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첫 번째 아담이고, 그 아담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내용으로 할 때 하나님께서 만족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사람에게 만족하시기 위하여 아들을 보내셨는데 그 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이를 두 번째 아담(두 번째 사람, 고전 15장)이라고도 하셨는데, 그 예수님에 대하여 표현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라고 하셨다. 그 표현이나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신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의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의 표현이 있다. 먼저는 로고스(LOGOS) 그리고 뤠마(Rhema) 그리고 케리그마(Kerygma)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상태라고 할까 그렇게 구분이 되는 것이다. 먼저 로고스는 ‘하나님의 의도하심’, ‘계획’, ‘뜻’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표현되지 않고 하나남 안에, 하나님 자체로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뤠마는 로고스가 표현된 것으로 바로 사람으로 나타난 것을 말하는 것이며, 케리그마는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곧 사람이 전하는 말씀을 의미한다.



 로고스(LOGOS)

 하나님의 의도하심’, ‘계획’, ‘뜻’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안에 있는 것

 뤠마(Rhema)

 로고스가 표현된 것으로 바로 사람으로 나타난 것을 말하는 것

 케리그마(Kerygma)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곧 사람이 전하는 말씀 / 사람으로 표현된 말씀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뤠마를 말하며,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사람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을 ‘뤠마’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첫 번째 아담에게 생기 곧 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 만드시고 만족하셨던 그 모습의 본체이시고, 또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인 자신에게 원하시는 정체성을 회복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신 것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의와 뜻이 사람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내용이자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셨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회복하여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내용이 자기 삶이라는 육신을 가진 형식으로 표현해 내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인생의 본질이고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신앙과 믿음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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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9. 18. 13:43 Writer : 김홍덕

왜 아버지와 아들인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삼으신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영이신 하나님, 형체가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리고 왜 아들인가? 딸은 없는가? 또 아들은 있는데 어머니는 왜 없는가? 같은 의문들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아주 초보적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또 명확하지 않은 것들이다.


어떤 일은 볼 때는 정확한 관점이 있어야 한다. 봐야할 것을 보지 않으면 이상하고 의문스럽지만, 정확한 관점에서 본다면 전혀 이상하지 않고 너무 자연스럽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인치 나사와 미리 나사가 있는데, 그것은 아무리 끼워 넣으려 해도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왜 아버지인지, 왜 어머니는 없는지, 또 왜 딸이 아니라 아들인지도 이와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어떤 절대적인 관계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아버지가 있다. 누가 아버지인지 전혀 모른다고 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뿐 아니라 아버지의 성격이나 또한 신체적은 유전도 있어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하게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아버지 뭐 하시노?”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단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아버지의 존재 유무를 따지지 않고 하는 질문이고, 아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아버지의 성품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묻는 질문인 것이다.


즉 아들은 아버지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고, 또 아버지의 성품을 나타내는 형식인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아들은 아버지가 가진 본성이나 의라는 무형의 내용이 아들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가진 의가 아들이라는 생명이 같은 존재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는 사람인데 아들은 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듯이 아버지가 가진 의가 같은 생명을 가졌고 형식을 가진 아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혈통으로 아들이 아니어도 자신이 가진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 제자와 같은 이들 중에서 자신이 의도한 것을 잘 표현하는 이들을 보고 아들이라 칭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가진 생각을 형식으로 실존으로 표현해내는 존재가 바로 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씀’은 LOGOS이다. 이 LOGOS는 ‘계획하다’, ‘뜻하다’와 같은 의미의 어원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든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냄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이미지(형상)를 나타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 첫 열매가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와 법을 나타내면 아들이 되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와 법이 표현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법이 아니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떤 것도 그렇게 될 수 있는 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8:15, 8:23, 9:4)에서는 ‘양자’라는 이해를 돕는 표현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법은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삼으시는 법 어디에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라는 것이 있는가? 다만 남자와 아버지라는 것은 혈통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의라는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사람으로 알게 하시기 위하여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에서 비롯된 것이지, 육신으로 남자라는 것과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들이라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의를 그렇게 표현하신 것일 뿐이다.



어머니 하나님? 그건 본질을 모르는 소리



하나님이 왜 남자냐? 여자 없이 어떻게 아들을 낳느냐? 하는 의문은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이지 의미 있는 질문이나 의문은 아니다. 남자와 여자,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사람의 세계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셨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이미지를 나타내려 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들이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사람의 모양은 본질이 아니라, 사람이 그렇게 창조되고 관계를 또한 혈통을 이어가는 본성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그 의를 표현하셨기 때문이지 그 모양과 사람의 관계들이 본질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자 정체성의 본질인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육신을 가진 삶이 온전히 하나가 될 때 온전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인생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는 알지 못하고 표현된 것만을 본질로 보다보니 엉뚱하게 ‘어머니 하나님’이라든가, ‘왜 딸은 없느냐?’ 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문을 가졌다가 그 해답으로 ‘어머니 하나님’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받으신 세 번째 시험을 전혀 이기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그런 의문을 가진 것만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어머니 하나님과 같은 표현으로 믿지 않고 그냥 아버지 하나님으로 부른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겪는 문제의 해결에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 역시 신앙의 본질을 육신의 문제에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고 해도 그것은 본질을 모르는 것이라는 것에서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의에 관한 것이다. 육신은 그 의가 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의를 알지 못하면서 표현된 육신의 상태만으로 보는 것은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천하 만물을 보여주는 사탄을 경배하고 절을 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이 그것이다. 무엇이 본질인지 모른다면? 또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는다면, 어머니 하나님을 믿는 이들을 이단이라 비난하는 것도 웃기는 것이다. 어차피 본질을 모르는 것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심판 날에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신 “주여! 주여!” 외친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이 가진 삶의 본질이자 내용이라는 것을 믿고 받아  들이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릇을 채우는 것과 같고 성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본질로,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순종한다는 것은 육신의 문제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육신은 본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표현되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육신의 행동을 바르게 하므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본질이 되고 본성이 되므로 육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되는 하나님의 의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자기의 기준이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에 대한 기준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또한 다들 그것을 믿는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는 것이다. 교단 회의에서 싸우거나, 교회가 분열이 일어날 때 보면 정말 가관이다. 서로 자신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고 상대를 마귀라고 몰아붙인다. 그리고는 결국 세상의 법정에 가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정말로 상식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세상의 모든 다툼의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이것 외에 세상에서 다투는 이유는 절대로 없다. 그것은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그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의 바탕에서 나오는 생각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해도 결국은 선악과를 먹은 생각이다. 그것이 교회를 위하는 것이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든, 영적 전쟁이라 하든 뭐라고 해도 다 선악과를 먹은 원죄의 열매일 뿐이다. 뿌리가 사과나무인데 배가 열리겠는가? 그런 생각이 표현되는 것은 그 아버지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선악과이고,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생각이 아버지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의가 삶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람의 본 모습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신 뜻과 의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모습을 가진 사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내게 하는 본성이 바로 하나님의 의다. 이 의(義)는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를 말한다. 이것은 사람이 가진 원래의 모습이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모습이고, 또한 사람이 가진 연약함이나 부족함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한다는 것을 대단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은 사람이 가진 정체성을 부인하고 더 나은 곳, 자기가 생각하는 더 나은 정체성으로 가려는 생각, 그것이다. 사람은 자손을 얻기 위하여 성욕이 있는데 이것을 목적과 본성에 무관하게 일괄된 욕구나 악으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식욕이 없으면 죽는데도 먹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먹으면서 기도하는 것보다 무조건 나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생각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본성은 악한 것이니 더 나은 것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벽돌을 쌓아서 하늘에 이르려고 한 것이다. 인간이 가진 본성을 넘어 하늘에 이르면 모든 인생이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즉 사람이 가진 연약한 본성과 욕망을 가지고는 하나님께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생각이 바로 선악과를 먹고서 본 인간의 정체성이 부끄럽게 여겨졌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사람들이 그렇게 떠나려고 한 인간의 육신을 가진 모습, 그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육신을 가진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 즉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가진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온전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그렇게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의 모습,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강한 것에는 사랑이 없다. 강하고 위대한 것은 부럽고 열광할 수는 있지만 사랑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연약함이 있어야 사랑이 있다. 위급을 피할 수 있는 주력을 가지고 도망가는 사람에게 사랑이 느껴지겠는가?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달리지 못하는 사람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사랑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신 것이 바로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다. 바위를 쪼개는 바람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사람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하지만 연약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미세한 음성은 사람이 들을 수 있기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의를 나타내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 의가 삶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위대하고 놀라운 것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의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남루한 목수의 아들을 보니 어느 한 구석 경건하고 위대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니 죽여 버린 것이다. 즉 인간의 연약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니 죽였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그 의 앞에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며, 그것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성공하고 위대해질수록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오히려 그렇게 위대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의요 영광이며 아들이 된다는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되는 의가 하나님의 의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사람의 부족함을 뛰어 넘어 위대해져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는 모습,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 삶으로 표현해 내는 본성을 가진 이가 바로 하나님의 의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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