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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의 물두멍과 세족의식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5. 10. 29. 10:59 Writer : 김홍덕

물두멍과 세족의식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전의 규례를 말씀하시면서 성전 뜰에 놋으로 된 물두멍(물바다)을 만들라고 하셨다.(출 30장 17-21)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자손, 그러니까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물두멍에 손과 발을 씻지 않으면 죽기를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른바 <세족의식>과 연결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가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답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물두멍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 13:6-10)


성전(막)은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면 번제단이 있고 다음에 물두멍이 있고 그 다음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먼저 번제단에서 자신의 죄를 씻을 제물을 제사장이 번제단에 사르고 다음에는 그들을 대표하는 제사장이 물두멍에 손과 발을 씻고서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만나는 절차라면 절차가, 자신의 죄를 번제단에서 사르고, 다음에 손과 발을 씻고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여기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인가?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구하는 것을 들어 주신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지만, 문제는 ‘하나님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고, 사람은 혜택을 보는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정말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사람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것이냐 그 말이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염없다. 돈과 명예에서부터 천국에 가는 것까지 다양하다.


만약에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는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함이라면 번제나 손과 발을 씻는 것은 점쟁이에게 주는 복채에 불과하다. 자기 필요한 것 얻으려고 공급자가 제시한 것을 내어 놓고 그 기준을 통과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잘 보여서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필요로 따진다면 하나님께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계시고,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할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이 만나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이유가 있고, 혜택으로 따진다면 하나님께 유익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만남으로 하나님이 유익해지는 것, 곧 영광을 얻으시는 것 자체가 사람에게 은혜가 되는 것이다.


그런 목적을 나타내는 곳이 성전이다. 성전이라는 건물 양식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사람들은 성전을 보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 성전의 목적이다. 그렇게 보면 왜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지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이 그 심령에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것,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모든 것을 표현해 내는 생명과 목적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전 문에 들어서서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자기 삶이 하나가 되는 법에 관한 것이다. 이는 성전이라는 건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육신의 삶의 생명과 목적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하나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이기 때문에 사람이 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본질과 목적과 생명과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번제를 드리고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목욕한 자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예수님과 베드로가 세족의식 때 나눈 대화에 대하여 깔끔한 설교를 들어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설교가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해도 행동으로 짓는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 이상을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성전 물두멍과 상관이 있다는 것은 더더욱 들어본바 없다.


번제단에서 제물을 드렸다는 것, 자신이 번제와 같이 드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모든 행동은 사람의 유전자에서 비롯되었듯,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된 사람은 그 삶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생명이 달라진 것이기에 거듭난 것이라고도 한다. 이전에는 자기의 의가 삶으로 표현되었는데, 이제는 생명이 달라졌기에 하나님의 의가 삶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거룩한 산 제사’라고 하시는 것이다. 살아서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삶 자체가 살아 있는 제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손과 발을 씻어야 하는가?


번제를 드린 자가 왜 물두멍을 거쳐야 할까? 왜 물두멍을 거쳐서 손과 발을 씻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을 생각해 보자. 손과 발은 모든 행위의 상징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신 것이다. 행동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물두멍의 재료는 놋이고, 놋은 거울이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 보면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는 것은 번제를 드린 사람은 그 행동이 하나님의 의의 생명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번제를 드린 이가 손과 발을 씨는 다는 것은 번제를 드리기 전,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주관하기 전에는 자신의 의가 손과 발로 표현한 것이다. 즉 모든 행동이 자신의 의를 나타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번제를 드린 자, 목욕을 한 자는 그 행동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행동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생명이 유전자와 같이 자기 안에 있어서 모든 생명체가 그 유전자에 의하여 모양과 행동이 정해지듯이 그 사람의 삶의 모양과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게 된다는 것이다. 즉 손과 발로 표현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의 행동이 아닌 번제를 드린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으라고 하신 것이고, 예수님은 손과 발을 씻기지 않으면, 즉 행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을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 것이다. 생명은 그 유전자의 명령에 따르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 행동이 없다면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안에 있는 물로 손과 발을 씻으라고 하신 것이다. 놋은 거울이다. 그렇다는 것은 놋을 보면 자신의 모습이 비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비치는 그 안에 있는 말씀(물은 사람을 채우는 말씀)으로 손과 발을 씻으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말씀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번제를 드림으로 얻은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말씀에서 비롯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삶의 내용이 되시고 자신은 그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듯, 내용과 형식이 만나듯, 목적과 방법이 만나듯이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번제를 드림으로 그 손과 발의 모든 행위가 내용이신 하나님의 의와 생명으로 표현하는 손과 발, 곧 행동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손과 발을 예수님이 씻기지 않으면, 즉 행동이 그리스도의 행동이 아니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건 너무 당연한 것이다.(이때까지 베드로는 몰랐지만)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듯, 삶의 모양과 행동이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비롯되지 않는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전에 물두멍을 두신 것도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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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만물이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쉬운 말씀이 아닐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 말씀은 바울 사도의 표현이나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이 더 잘 이해하기 쉬울지 모른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이 세상을 경영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에는 이의가 없는데, 예수님께서 모든 만물의 근원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냥 막연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 모든 것에 대한 대표적인 의미, 상징적인 의미로서 그런 말씀이 있나 할 뿐, 정말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리고 이것이 나와 어떤 상관이 있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만물의 근원일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어졌다는 것이 무엇이며, 예수님 없이 지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은 또 무슨 말씀일까?’ 예수님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신데, 어떻게 사람의 육신에서 모든 만물이 비롯되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냥 예수님은 신이시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고만 한다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에 무관심한 신앙이 되니 그것도 아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세계가 열린 사람의 안목으로 볼 때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새로운 세계가 열린 사람, 마치 대학에 새롭게 입학해서 그간 막연히 알았던 대학에 대하여 새롭게 알게 된 대학생활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사람이 만물을 보는 관점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만물의 근원이신 것은,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높은 산과 깊은 바다 태풍과 번개와 같은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표현된 것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이미지, 그러니까 딱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만물로 표현된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 다 사람 안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표현하시려는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의 최고 정점에 바로 예수님이 계셨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만물로 표현된 것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로 표현하고자 한 하나님의 형상, 곧 사람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형상, 이미지, 성품, 그것이 최종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만물이 고대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하나님의 법이 자기 안에서 열린 사람, 그 하나님의 안목이 열린 세계에 속한 사람은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났다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는 세계가 열린 사람은 바로 자신이 요한 사도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말씀이 자신과 함께 있어 그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것이다. 모든 만물로 하나님을 표현하신 태초를 시작하는 목적이 함께 있었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 없이 태초가 시작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집을 지을 때, 누가 살 것인지 어떤 삶을 살 것인지가 먼저 있고, 그 계획으로 인하여 설계되고 지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을 목적으로 세상을 지으셨으니 당연히 예수님의 정체성이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가 시작될 때 같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그 예수님이 우리 모든 인생의 표상이라는 것, 우리 모든 사람이 태초부터 함께 있었던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는 것,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전하러 이 땅에 오셨다는 것과 그 예수님을 보고 자신의 삶의 목적이 예수님과 같다는 것을 성령의 잉태하심과 같이 깨닫는 사람은 또한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태초가 시작된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태초의 시점에 함께한 것과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요한 사도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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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으로 간 아브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0. 28. 14:12 Writer : 김홍덕

벧엘과 아이 사이 어중간한 곳에 자기 장막을 친 아브람은 점점 남쪽으로 내려갔고, 자신이 머물던 곳에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애굽에 가는 길에 아브람은 아내 사래가 너무 예쁘기 때문에 애굽의 왕이 사래가 자신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자신을 헤치고 아내 사래를 취할까 싶어 아내 사래에게 자신의 아내가 아닌 누이라고 거짓말을 사주한다. 그리고 아브람의 걱정은 현실이 되어 실재로 바로 왕이 아내 사래를 취하려 하자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심으로 바로 왕이 아브람을 불러서 ‘왜 자신을 속였느냐?’고 책망하고 애굽을 떠나라고 하여 그곳을 떠나게 된다.(창 12:10-20)


지금 아브람은 자신이 살던 땅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갔다.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애굽은 세상을 대표하는 곳이다. 세상은 늘 누군가의 위에 서는 것을 이긴 것 곧 선이라고 여기는 것이 피라미드로 대변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으로 내려오셨다. 애굽과는 반대이다. 바로 그런 곳으로 기근을 피해서 아브람이 내려갔다는 것이다. 즉 먹을 것을 찾아서, 자신을 채우기 위해서 애굽으로 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사람이 자기 육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없다는 것은 그 신앙이 아직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 낼 정도로 장성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가는 아브람의 모습은 빈 그릇인 자기 삶을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는 마음과 같은 것이다. 아직 그의 이름, 곧 정체성은 ‘위대함의 아비’라는 아브람이니까.


하나님을 믿는 여정은 누구나 아브람과 같은 여정을 거친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자기의 장막을 치듯 머무르면서 위대함을 좇는다. 어떤 사람도 이 신앙의 여정을 생략할 수 없다. 각양의 과정을 거치는 기간이 다를 수는 있지만 아이가 9살에서 10살인 해를 건너뛰고 바로 11살이 될 수 없듯이 지나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구나 아브람이 애굽으로 간 것과 같은 여정을 거치고 할례를 받는 과정을 거치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여정을 거친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많은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정도 그렇다. 애굽에서 출발해서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이르러 나라가 된다. 한 개인의 여정이 애굽과 같은 가치관에서 큰 물을 건너서 광야 곧 율법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세월을 지나고 또 큰 물을 건너 가나안에 이르러 나라가 되듯이 그 사람으로 인하여 많은 하나님의 백성이 나오는 여정을 가는 것이다. 그것이 개인의 신앙 여정이다. 그 여정을 아브람을 통해서 또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는 남자의 의(성)를 여자를 통해서 얻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아들을 얻듯이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 갈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아들이 아직 아브람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쳤고, 또 자신을 채우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사람은 그 정체성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즉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살기 위해서 왜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였을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면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을 쉽게 생각한다. 아브람이 아내 사래를 아내가 아니라고 한 이유는 아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내의 아름다움 때문에 자신이 죽을까봐 그랬다. 아내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자신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신앙에 있어 아내의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는 육신의 여러 가지 모습들, 능력이 있다거나 돈이 많다거나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생명을 헤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 회사나 가정 등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에 요구하는 것들이 자신의 신앙을 헤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꾸 멀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 일 하러 나오라는 것이나 회식 때 소주 한잔 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육신과 그 삶의 요소들이 자신의 아내, 곧 자신이 가진 신앙을 표현해 낼 대상이 아니라고 해 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경계해야할 세상은 그런 삶의 형식이 아니라, 위대함을 좇는 마음, 그것이다.


신앙인들은 세상의 것을 취한다고 하면 살아가는 사회 속에 있는 것을 취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 이유는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그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자신의 정체성을 둠으로서 자신을 채울 것이 없자 애굽에서 자신의 속사람을 채우려고 했다는 것 때문이지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아브람이 죽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브람의 이 모습은 신앙인들에게 사회가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것 때문에 신앙이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요구들 앞에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가진 신앙으로 세상을 굴복시키고 심판하는 위대함으로 대하는 그 가치관 때문에 죽을 수는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이든 무엇이든 남보다 위대해져서 높은 곳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 바로 피라미드의 가치관, 애굽의 가치관,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아브람이란 이름은 ‘위대함의 아비’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것 역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얼마든지 세상적인 것이 된다는 것을 모른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렀다는 것, 그것은 애굽의 피라미드와 같이 세상 사람들 위에 신앙으로 높아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섬기기 위하여 부르신 것이다. 술 마시는 사람을 보면서 세상 사람의 타락이라며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심판하는 권세를 주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그 죄인들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신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지금 자기 눈에 자신에게 든 기근을 애굽에서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애굽에 가려고 보니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애굽과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은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이 애굽 스타일이 아니라면 걱정할 것이 없을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자신의 의를 표현할 아내의 아름다움이 바로 애굽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신앙인들이 자신이 가진 여러 사회적인 모습과 조건을 세상의 것이라며 터부시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모습이 심해지면 정말로 전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바쳐버리는 것이다.


신앙은 결국 육신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마당이 바로 세상이다. 그리고 또한 남자가 아내에게서 아들을 얻듯,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삶, 표현하는 삶은 아내와 같은 자신의 육신으로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가진 육신의 여러 가지 신분, 조건,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을 주신 것은 다 그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아내 사래를 준 것은 아들 이삭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지 애굽에서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닌 것처럼.


그러므로 신앙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자신이 가진 것, 아내와 같은 육신의 모든 것은 버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를 나타낼 도구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굽 바로왕의 지비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아브람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가지고 애굽을 떠나게 하신 것이다. 즉 그런 피라미드와 같이 높은 곳에 서려는 위대함을 추구하는 가치관에서 떠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 여정을 거쳐서 사람들이 이삭을 얻는 것이다. 즉 생명의 아버지, 곧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므로 다른 사람이 다시 이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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