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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마태복음을 마치고 어떤 내용의 글을 더 올려볼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글을 쓰다보면 어느새 성경을 해석하는 듯한 모양새로 흘러가곤 하는 것에 늘 ‘이래서는 안 되는데…’하곤 했다. 특히나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성경의 단어나 당시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지식은 아무래도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이라는 것은 훌륭한 견해는 아니라고 생각이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독자들이 볼 때 자신의 이야기로 와 닿는 그런 글들을 쓰고 싶었다. 사실 <미가서>나 <야고보서>와 같은 성경을 이야기 해 보고 싶었다. <미가서>를 가지고는 신앙이 변질되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과 혼합되는 것이라는 것을 써 보면 어떨까 싶었고, <야고보서>라면 그야말로 <‘행함과 믿음’>이라는 영원한 논제를 이야기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보다 앞서 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서 늘 배경처럼 깔려 있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주제를 먼저 다루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에 대하여 글을 쓸 생각이다.


마태복음의 말씀을 블로그에 올리기 위하여 적은 초벌 파일이 있는데, 아래한글로 작성한 분량이 A4용지 사이즈로 506페이지나 되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끝나고 나면 책으로 출간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분량이 많고, 무엇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장과 설명이 매끄럽지 못한 것 같아서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번에 쓰기로 한 <내용과 형식>은 글을 다 쓴 다음에 전자책으로 출간할 수 있게 좀 더 정성을 기울여 볼 생각이다. 


<내용과 형식>은 평범한 단어들이라서 성경을 보는 열쇠적인 관점으로 도입하기에 큰 임팩트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대명사적이 도입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가, 사람과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의도하신 바가 있고, 그 의도하신 바가 사람과 세상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내용>이 ‘사람과 세상’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지신 내용과 그것이 표현된 사람과 세상의 관계성을 성경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성경의 골격을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것들 중에서 대표적으로 내용과 형식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예를 보면,

  • 하나님과 사람

  • 남자와 여자

  • 보이는 것과 나타난 것(히 11장)

  • 약속과 증거(히 11장)

  • 하나님의 형상(이미지)과 사람

  • 믿음과 행위(야고보서)

  • 생명과 행함

  • 말씀과(이) 육신(이 되심)

  •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 복음과 율법 등

많은 것들이 있다. 이러한 것이 <내용과 형식>이라는 구조로 볼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하시고자 사람을 만드시고, 그 뜻하신 바대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의 의가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는(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이시고, 그것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 하나님의 의와 말씀과 같이 형식이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과 의와 목적과 같은 내용이 형식과 몸을 가진 세상과 사람으로 표현되고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성경의 말씀은 늘 어렵고, 그것을 지켜내는 것 또한 어렵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세계와 현상계 안에서 육신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오늘 우리 자신이 그렇게 갈구하는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자아 정체성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이, 사람인 나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아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신앙, 성경에서 진리와 자아 정체성을 찾으려는 신앙 안에 있는 지속적인 의문들이 있다. ‘행위냐 믿음이냐?’라든가, ‘정말로 말씀만 있으면 되느냐?’, 그리고 그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이것을 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에 관한 것들이 그것이다. 많은 의견들이 있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통일된 관점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필자가 또 하나의 이론을 더하는 것이 이 글의 정체성이 될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모든 난제들(실은 난제가 아니지만) 안목이 바뀌지 않으면 이해하거나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목이 바뀐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본질로 볼 것인가?’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까 <내용을 본질로 볼 것인가?> 아니면 <형식을 본질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즉 모든 형식은 내용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내용이 본질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이 현상계가 본질이라고 생각이 된다면 그것은 형식이 내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형식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성경을 믿는 신앙 안에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대하면서 그 모든 말씀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가 하는 절대적인 문제를, 행동과 삶의 모양, 즉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절제하고 연단하고 훈련함으로 풀어내는 것이 일반적인 신앙의 모습이다. 즉 형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거나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 형식은 언제라도 다시 만들 수 있는 것일 뿐 관심사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형식이 없는 영이신 분이시고, 의(義)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육신이나 이 천지만물도 하나님의 의와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먼저 의와 말씀인 내용이 있고 그것이 사람으로 또한 세상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즉 내용이 형식이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 역시 그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겪는 모든 일과 그 모든 일의 기반이 되는 육신과 세상의 만물들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행동을 잘 관리하고 훈련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은 그 사람의 행동을 나타내는 그 사람의 생각, 즉 그 사람이 가진 의에 대한 기준과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 의와 본성이 바뀌지 않는다면 몇 번은 자신의 행동을 선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율법의 기준과 같이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어기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행동에 대한 규범이 아니다. 그렇다고 행동은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먼저 삶의 모든 행동을 결정하고 나타내는 사람이 가진 의에 대한 기준과 본성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내용이 본질이라는 것을 인지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세상 모든 것을 준다는데도 시험에 빠지지 않으신 것이다. 마귀가 보여준 만물이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모든 세상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라는 내용에서 마귀가 보여준 모든 것이 다 나타난 것인데, 어느 것을 경배하는 것이 선한 것인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인생의 모든 것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사람 지으신 목적이라는 내용이 사람을 통하여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목적과 생명의 정체성이 나의 본성이 되면 성경의 모든 말씀과 같이 나의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있으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자연스럽게 지켜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가진 구조이고, 하나님 말씀의 본질인 것이다. 즉 행동은 버릴 것이 아니라 내용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의미도 그것이다. 내용이 없으니 행동이 없다는 것이다. 호흡이 없으니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용과 형식> 이라는 구조를 알고 성경을 보는 것은 성경을 보는 아주 좋은 관점이다. 성경을 <내용과 형식>이라는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내용을 본질로 본다는 것이다. 신앙 안에서 내용이라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이다. 그리고 인생은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형식인 육신의 삶을 연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 곧 무엇을 의로 여기는지에 대한 관점과 가치가 바뀌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본성이 육신의 모든 삶으로 나타나고 비롯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내용과 형식>이라는 관점으로 성경의 뼈대를 세워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내용이 사람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성경에 어떤 내용들이 있고, 또한 <내용과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이 얼마나 밝아지는지에 대하여 글을 써 가려고 한다. 그리고 이 글은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한 설명에 이를 것이다. 결국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내용이 자기에게 맞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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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신 후에 하늘로 승천하셨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는 마태, 마가복음보다는 누가복음이나 특히 요한복음에 많이 기록되어 있고, 누가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사도행전의 시작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이나 특별한 내용 없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분부가 짧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모든 족속이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모든 성경의 말씀이 그렇지만, 정말로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성경은 무조건 의미만 새기고 문자는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으니 세례를 주면 예수님의 말씀을 준행한 것이라고 하면서 논산 훈련소에서 급수차를 가져다 놓고 세례를 주는 것이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게라도 세례를 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 지킨 것이라고 생각해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을 준행한 것이 되려면 왜 세례를 주라고 했는지, 또한 세례를 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복음을 전한 사람이 세례를 받음으로 어떤 사람, 어떤 존재가 되도록 하는지를 알고 그것에 이르기까지 전할 때 그 사람이 자기가 받은 복음의 증거로 세례를 받고자 하는 고백이 있어 세례를 줄 때 비로소 세례를 주는 것이 되는 것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 (마태복음) 3:13-17 세례를 받으심.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창세기) 천지창조 과정 속의 그리스도 (9)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창세기) 천지창조 셋째 날 (1) - 바다에서 드러난 땅의 의미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 (골로새서) 2:8-15 세례로 죽고 살아남



그렇지 않고 세례라는 의식만 치렀다고 예수님의 분부를 준행한 것이고 여기듯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면 된다고 한다면, 세상 끝날 까지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셨으니, 그렇게 세례를 베풀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세상 끝날 까지 죽지 않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문자의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하신 의도에 있다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다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제자 삼으신 방법대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이신 의와 법이 아닌 것으로 따로 제자를 삼으려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새로운 교주가 되는 것이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라고 하신 것과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모든 것은 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분부한 것,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이고 가르치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사람이 성경을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보고 해석하여 전하는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이시심으로 가르치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은 의를 가지고, 그 의를 전하므로 사람들이 그 의로 인하여 제자로, 또한 세례를 받은 새 생명으로 살게 하라는 말씀이다.


세례는 물에 잠기는 것이다. 말의 어원인 ‘밥티스마’이 그 의미이고, 예식의 모양이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이 물에 한번 들어갔다 나온다고 세례를 받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교회에서 했든 어디서 했든 마찬가지다. 물에 수 천 번 들어갔다가 나와도 세례를 베푸신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례 예식의 방식을 가지고 교단이 갈라졌다는 것은 정말로 우스운 것이다. 세례의 본질이 예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그럴 리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경까지 구분한답시고 침례로 바꾸는 발상은 오히려 경이롭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신 것은 사람이 물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이 당연히 물속에 못살지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사람의 육신이 물에 들어가서 숨을 쉴 수 없어서 그 밖으로 나오는 것은 물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듯,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도 어떤 세계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할 때 구원이 있는 것을 세례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 고백이 주목적이고, 그 증거로 예식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에 들어갔다 오고 세례증서가 있어야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은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계가 아닌 곳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물속에서 살 수 없는 육신이 물에 들어가 보면 물속에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듯이 깨닫고 인정하는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세례를 받은 것이 되는 것이다.


물은 성경에서 많은 부분 말씀으로 의미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의 물은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것이고, 그렇지 않고 사람의 몸이 잠기는 큰물과 바다는 세상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창세기에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섞이어 홍수가 났다고 했는데, 이는 궁창 위의 물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상수도와 같이 사람이 먹는 물, 곧 사람이 먹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말하고, 궁창 아래의 물은 하수도와 바다와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이 모였으나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되는 물, 곧 사람이 자기 정체성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세상의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물에 잠기면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세례는, 사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물이 아니라 세상의 물이나,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것이 섞여진 혼합되고 변질된 것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을 먹거나 그 안에 있으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물속에 잠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셔서 죽게 되심과 같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부활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몸소 보이신 분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런 예수님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이라는 것이고, 예수님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 곧 그 분을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하신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라고 하신 것은 예식으로서 세례나 준다고 제자가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하면 사람들이 세례 받은 고백을 하고 스스로 세례를 받고자 할 것이며, 또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너희가 제자가 되었듯, 너희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를 본 제자들, 그리고 또 그 제자를 본 제자들에게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고, 이러한 일이 세상이 끝날 때 까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제자가 되고, 그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시면서 인간의 정체성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의를 보이심으로 자신들이 그것을 보고 제자가 되었듯이 제자들도 그렇게 십자가를 지듯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어 죽은 자와 같이 되는 것이 인간의 본 모습이라는 것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 살리신 예수님과 같이 그들을 본 사람들의 심령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또 하나의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이들로 거듭나고 부활하는 그런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 지속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전하신 복음의 본질인 것이다. 바로 그것을 마태가 보았고 자기 안에 감동이 있어 기록한 말씀이 바로 마태복음인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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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기독교와 다른 종교가 다르다는 차별적인 기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물론 그 정도로만 여기는 사람들이야 별로 없겠지만, 부활이 가진 의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지금 예수님의 부활이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 그것이다. 단순히 육신이 죽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활한다는 것만 믿고 있다면, ‘화장한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와 같은 기막힌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자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모습을 보였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다 도망갔고, 대제사장들은 행여 예수님께서 살아나실까 하여 무덤을 돌로 막고 또 파수꾼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제자들보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였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에 대하여 가장 기대한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자들이었다.


여자들은 예수님 당시에 사람의 수에도 세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이것은 육신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성경을 문자대로만 본다면, 그러니까 성경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켜 행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기는 신앙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성경을 문자대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여자에 대하여 수에도 세지 않은 것은 여자가 관점이 아니라, 남자가 관점이라서 그렇다. 이 역시 육신으로 남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가문은 남자의 성을 따르는데, 그것은 남자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의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육신의 남자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있는 사람이 육신으로 볼 때 남자와 같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반대로 여자는 아들을 얻는 존재다. 여자는 자신의 성을 바꿀 수 있는 존재이다. 동양에서는 아니지만 서양에서 결혼을 하면 여자의 성이 남자의 성을 따르는 것이 종속된 것 같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여자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지 않지만, 여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바꿀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모두 여자이고, 그리스도 앞에서 신부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바꾸어 낼 수 있는 가능성과 여지와 역량을 가진 존재가 바로 여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을 기대하고 무덤에 갔다는 것은 아주 의미가 있는 말씀이다. 그것은 여자들이 아들을 얻고자 하는 마음과 같이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정체성을 바꿀 수 있는 거듭남과 부활을 소망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 살아가는 목적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되고, 그것이 삶의 의미가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은혜를 입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한 가지를 더 본다면, 여자들이 찾아 간 곳은 무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무덤 근처에도 오지 않았는데, 여자들, 곧 남자를 만나 자신의 정체성이 변해야 하는 간절함이 있는 사람, 즉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궁전이나 성전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다는 것이다.


무덤을 찾아 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는 자리가 무덤이라는 것이다. 이 무덤은 그냥 무덤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고 죽임을 당하여 묻힌 무덤이다. 즉 이 무덤은 그리스도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곳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설명하는 무덤이 바로 예수님의 무덤이다.


그 무덤에 예수님을 만나러 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곳에 있다는 것은 그 장소와 존재가 같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마음은 곧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낸 것이 인정이 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들의 신앙 정체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반면에 제자들은 무덤에 오지 않았다.(나중에 오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장사지낸 것에 동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제사장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그렇게 죽였으니 이건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다.


여자들은 이런 신앙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자 하는 이들은 이런 신앙이 있어야 한다. 즉 세상의 가치관 앞에 자신이 죄인이 되고 죽어 장사지내게 될 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자신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주님은 거룩한 곳에 계시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이들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심판하여야 한다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외면 받고 손가락질 받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세상의 가치관 앞에 죄인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는 거룩한 사람들인데 신앙도 없고, 지옥 갈 죄인들이 자신들에게 도전한다며, 그들의 소리를 듣지 않고 오히려 죄인 취급하고 심판하는 뻔뻔함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런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것이 문제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거룩할 수 없는 거룩한 분인데 세상의 가치관으로 그 분을 죄인 삼을 때 예수님은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시고, 못 박히시고, 죽으셔서 장사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신앙인들은 완전히 그와 반대다. 교회 세습에 대하여 여론이 들끓으면 ‘하나님의 일을 몰라서 그렇다’고 하고, 종교인 과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의 일은 세상일과 다르다’고 한다. 그런 모습은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병들을 물리치는 모습이지 십자가를 지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모습들은 다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들과 같이 자기의 의가 있고,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예수님을 만들어서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십자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이들이 아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데 있다. 여자들이 예수님을 무덤에서 찾으려고 갔는데 정작 예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고, 정말로 부활하셔서 무덤에서 나가시고 천사가 그 자리에서 여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찾아 무덤에 온 여자들의 신앙이 부활신앙으로 바뀌는 것이다. 무덤에서 만나려 한 예수님을 부활한 주님으로 만나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한 예수님과 만난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이 여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을 무덤에서 만나려는 사람, 그 사람이 육신으로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죽음과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나려 한 사람들, 세상의 가치관 앞에 죄인이 되어 죽게 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예수님을 만나려 한 사람들, 그들이 가진 그 마음과 신앙이어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부활이 자기 자신의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 앞에서 여자이고, 그리스도 앞에 신부인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심령이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부활이 자신의 신앙이 되는 것이고,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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