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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의 글 -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만남을 기다리며...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15. 10. 26. 16:59 Writer : 김홍덕

안녕하십니까? 블로그 운영자 김홍덕입니다.


제가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운영한지도 어느새 2년 정도가 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온라인 공간에 말씀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전 세계 어디서나 이 글을 볼 수 있고, 또 얼마나 티스토리라는 서비스가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될지 모르지만 그 동안은 제가 쓴 글이 다소 미흡하더라도 인터넷이라는 개방된 공간에 남겨진다는 점을 감사하게 여기면서 가능하면 하루에 하나 이상의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 쓰고 있는 글은 어디서 카피를 하거나 캡쳐한 것은 아닙니다. 순전히 제가 말씀에 대하여 묵상하면서 올리는 글이며, 또한 살아가면서 세상이 하나님의 법대로 경영되어가고 있다는 (묵상한) 말씀의 증거를 얻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말씀은 누구라도 출처를 밝히지 않고서 성경공부 혹은 설교의 내용으로 사용하셔도 무방합니다. 제가 바란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바라는 바가 있다면 임의로 내용을 변경하지는 말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와 의견이 다르신 것이 있다면 있는대로 이야기 하시고 첨언으로 본인은 생각이 다르며 그 다른 생각을 이야기하시는 형태로 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글들은 말 그대로 온라인 상에 있는 글입니다. 그리고 온라인 중에서도 카페와 같이 그나마 상호 의견을 주고 받는 공간조차 아닌 블로그로 운영되고 있다 보니 저의 글을 독자분들이 읽고 계시는 것이 기본적인 시스템입니다.(항상 카페와 같은 방식으로 바꾸어 볼까 고민하지만 이미 글이 너무 많아서 힘들기도 하고, 카페는 대부분 로그인을 해야 하는 문제들이 있어서 고민입니다.)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신앙이라는 것은 삶이기 때문에 온라인은 신앙을 나누고 공유함에 있어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이 블로그를 읽고 성경에 대한 계시가 밝아지시면 아마 틀림 없이 삶의 모양이 달라질 것이라 믿습니다. 사람이란 마음에 생각하는 바가 달라지면 행동이나 삶이 달라지는 존재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말씀은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삶의 변화, 그리고 이전까지 예수님을 육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깨비 방망이로 여기는 것과 같은 신앙관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신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제가 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목적이자 이유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저의 이 글들이 이론에 그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또 몇명이 되었든 언젠가는 이 블로그를 통하여 말씀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하게 되고 또 더 나아가서 이 말씀으로 인하여 변화된 개인들의 삶을 서로 나누는 날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만남은 꼭 필요하지만 신중하고 또 어떤 분들에게는 부담스러운 만남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자연스러워야 하기에 그러한 만남은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누군가 그런 마음이 들 때 올 수 있는 장은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싶어 조만간 그런 자리를 한번 만들까 준비 중입니다.


더욱이 저는 지방에 거주하고 있고, 이 블로그를 보고서 제게 연락을 주시는 분들은 많은 경우 수도권에 계시고 서울이나 수도권은 지방과는 다르게 이동 거리가 멀고 하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준비해야할 것 같아서 마음으로 준비하고 조금씩 준비를 해가고 있습니다. 준비라고 해 봐야 잘짜 정하고 장소 정하는 정도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글을 올립니다. 아직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장소는 서울 강남역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날짜를 정하게 되면 블로그로 또 메일을 주셨던 분들께는 메일로 알려드리겠습니다. 한가지 첨언하는 것은 초대 메일이나 공지는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울수 있지만 안 오셔도 상관없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이 블로그에 올리는 글과 관련한 저의 생각을 조금 덧붙이고서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위에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말씀은 자유롭게 인용하시고 비판하셔도 무관합니다. 그리고 혹시 이 말씀을 가지고 교회에서나 또 속한 모임에서 말씀을 전하심에 있어 그 독립성은 언제나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이 저의 바람이고 생각입니다. 물론 말씀을 전하시는 분께서 필요해서 저를 부르신다면야 기꺼이 가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독립적으로 말씀을 전하시는 것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하며 그 관계에 관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이 말씀을 가지고 이런 모양으로 살아가면서 겪게되는 일들, 마음들 그러한 것을 나누는 자리를 늘 소망할 뿐 입니다.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모임을 공지한 모양이네요... 모두들 건강하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삶의 생명이 되시기를 기원드리면서.....


김홍덕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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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성경 창세기, 요한복음, 요한1서는 <태초>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 외에도 마태, 마가, 누가 역시 표현은 다르지만 비슷하게 시작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와 같은 말씀의 시작들 역시 어떤 새로운 시작이 있고, 그 시작에 대하여 말씀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요한사도는 그 세계의 시작이 바로 <태초> 곧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시작을 하는 것이다.


이 시작은 하나님의 세계이다. 사람들은 ‘태초’라고 하면 이 물리적인 세상을 먼저 생각한다. 이 물리적인 세상은 어떤 때에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믿으려 한다. 그러나 과학과 상식의 벽에 부딪히곤 한다. 때론 그런 의심이 믿음 없는 것이라 심판하거나 받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세계가 자기 안에 열린 사람은 이 물리적인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로 보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사람의 안목이기 때문이다.


요한사도는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으로 인하여 다른 세계가 시작되는 것, 즉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태초가 있는데 그 태초는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풀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있으면 그 사람에게 이 세상은 이전과 다르게 하나님의 세계로 인식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태초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요한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말씀하시겠다는 것이다. 즉 이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세계임을 볼 수 있는 세계가 열린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시작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것을 아주 쉽게 말한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의미이다. 이것을 더 간략하게 말하면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는 세계,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는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세계이며, 그 세계는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태초에 계신 그 말씀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세계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시작하는 하나님의 세계라는 말씀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 곧 the Christ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그 이미지가 자기 심령 안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잉태되고 생명이 된 또 하나의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인이라고도 하는 a christ를 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또 예수님을 믿는다. 그런데 정말로 왜 믿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 땅에서 살 동안 육신이 겪는 일들에 대한 안위를 얻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바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을, 예수님을 믿는 본질인가 하는 것이다. 그 보다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것과 같은 일은 또 어떤가? 한 평생 남을 위하여 수고하고 봉사하는 것은 어떤가? 그런 것 중에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그런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시작된 일이다. 즉 믿음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사람에게,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는 일에 자신이 순종하겠다는 믿음 그 하나뿐이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순교하거나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자기 삶을 통하여 나타내려고 하다 보니 보이는 삶의 한 모습들이지 그 모습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순교나 기도하는 일이나 봉사하는 일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수단이고 도구이지 그것이 믿음 자체는 아닌 것이다.(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예수 믿어서 일신상의 안위를 보장 받겠다는 것은 예수 미신일 뿐 그런 것은 신앙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삶의 모습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의 삶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 보이는 그런 세계를 사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세계를 사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삶이 시작되는 시점 그때가 태초이고, 그런 삶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사도가 요한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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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과 아이 사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0. 26. 14:39 Writer : 김홍덕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아브라함은 매우 의롭고 선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유대인들에게는 믿음의 조상이니 더 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생각되는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은 아브라함이다. 그 이전, 특히 아브람은 기독교인들이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아브라함과는 다른 사람이다. 이는 아브라함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브람, 아브라함의 정체성의 여정, 그리고 그 삶의 여정은 우리 모든 사람의 신앙 여정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즉 누구라도 신앙을 처음 시작하는 시점의 정체성과 그 신앙이 장성한 다음의 정체성은 다르다. 특히 신앙에 있어 큰 마디를 지난 다음에는 그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때 홍해를 건너기 전과 건넌 후, 요단강을 건너기 전과 후는 전혀 다른 민족이고, 할레를 받기 전의 아브람과 받은 후의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이듯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역시 그 신앙이 생명이 자기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사람과, 그 자리에 이르기 전에 행함으로 의에 이르려고 하는 시절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아니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하여 아브람의 여정을 성경으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신지 얼마 되지 않은 아브람의 여정은 마치 처음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는 여정과 흡사하다. 누구나 이 아브람의 여정을 거쳐서 가나안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땅이 그 소산을 풍족하게 내듯이 흙으로 만들어진 인생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족하게 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창세기 1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셨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성경의 장절로 본다면 금방 부르신 것이다. 그 아브람의 신앙 여정의 시작은 벧엘과 아이성의 사이에서 시작한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아이는 ‘폐허, 절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불렀고, 아브람이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서 시작하는 믿음을 보여주었지만, 처음에는 하나님의 집과 절망 사이에 자기의 자리를 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브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말씀이 오늘 나와 상관이 없다면 이 말씀을 읽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는 것은 성경을 지키며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이 한 성경인데, 구약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고, 신약은 오늘 우리의 행동 가이드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어느 부분을 보고 그것이 나의 이야기, 설사 신앙이 그것에 미치지 못하고 그 말씀을 행동으로 지키면서 살아내는 신앙이라 해도, 그렇게 성경의 한 부분을 보고 있다면 이 아브람의 여정은 오늘 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그대로 살기 원하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람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이후에 하나님의 집도 또한 세상의 절망과 폐허도 아닌 중간에 자기의 장막을 쳤다는 것은 그 자리가 자신에게 좋아 보이는 생명이 아브람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브람의 모습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모든 사람들도 그와 같이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신앙과 세상 그 사이에 자기의 장막 곧 자기의 자리를 둔다는 의미인 것이다. 자리는 곧 자기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다고 바로 베드로나 바울 사도와 같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나도 그렇고 너도 그러하며 아주 계시가 밝은 사람도 그러했고, 지금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사람도 그렇다는 것이다. 신앙은 여정이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도 여정인 것이다. 어디를 향하는 여정인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여정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시대에서는 신앙이 교회로 가는 여정인 것이다. 즉 교회에 적합한 사람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되는 여정인 것이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과 같이 처음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그때 사람들의 모습은 성경에서 많이 나온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라.’고 했을 때 따라 나섰지만 자기 생업과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에 대한 이중적인 삶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이 우리 모든 사람들이 신앙의 여정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세상에서의 자기 삶, 그 사이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브람이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말씀일 수 있다. 그냥 접속어처럼 성경 말씀을 써 가면서 연결고리 역할로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성경일 수 있는데, 아이라는 지명의 뜻이 ‘황폐’한 것이라는 것을 도입해서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의 상태라며 그것이 오늘날 사람들 역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를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비약이 심한 견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의 말씀은 그 어느 하나 버릴 말이 없다는 것을 도입하지 않더라도 이 말씀은 정말로 우리를 안식하게 하는 말씀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나서도 스스로 그렇게 자책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상하거나 신앙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서 그런 연약한 모습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을 삼으셨다는 것이 그것이다.


아브람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자신의 장막을 치는 것에서 하나님이 지시한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내려가기도 하고 그곳에서 아내 사래는 누이라 거짓말하면서 까지 자신을 살려고 하다 빼앗길 뻔도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방식으로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다. 그런 아브람이 결국 하나님 백성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그렇듯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저런 모습들, 감추고 싶은 것들을 행하면서 신앙의 여정을 가는 것이다.


다만 사람이 그것을 보는 관점이 중요하다. 여정의 어느 한 시점을 그 사람 혹은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긴다거나, 아니면 그런 여정을 가는 중에 보이는 이런 저런 모습을 가지고 그 사람을 선악 간에 판단한다거나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저런 모양의 실수를 한 아브람이 결국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아브람의 실수들을 아브라함의 본질로 보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여정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가는 과정에서 아브람이 보여주는 모습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신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래도 무관하다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의 이런 모습이 우리 신앙을 위로한다는 것이다. 즉 이런 모습을 아담이 벗은 몸을 부끄러워했듯이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 가는 과정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말씀이 나와 상관있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각양의 사건들은 그 말씀 자체로서 주는 교훈이 있다. 아브람이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자기 장막을 쳤다는 것을 읽으면, 우리도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우리의 정체성을 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교훈으로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래! 그럼 나는 안 그래야지?’ 그래봤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안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살다보면 어느새 ‘나는 그러지 않아야지!’ 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연약함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사람인 나도 그렇다는 것이고, 사람의 본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브람도 그랬다. 재밌는 것은 아브람과 이삭은 부자가 둘 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자기는 살려고 했다는 것이다. 2대에 걸쳐서. 그런 집안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모습을 보고 ‘저렇게 예수 믿으면 안 되지’라든가 심지어 ‘저렇게 하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할 것이 아닌 것이다. 성경에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그것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면 그 사람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은 신앙의 사람이 될 것이고, ‘나는 저렇게 하지 않아야지.’하면 다른 신앙이 되는 것이다. 그 차이는 사람의 연약함을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인 것이다.


인생이 연약한 것은 자랑할 일은 아니다. ‘나는 그렇다 왜? 어쩔래?’ 이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도 아브람과 같이 어중간한 삶의 모습을 얼마든지 보일 수 있다. 그때 ‘이것이 사람의 모습이구나!’ 이렇게 아는 것이 제대로 본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의 일을 제대로 본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의 연약한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고 인정이 되는 사람은 먼저 겸손하며, 믿음이 수동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이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 아브람이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자기 장막을 친 것이 오늘 자신의 이야기가 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가 그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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