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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퓨 굿맨(A Few Good Man)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5. 10. 23. 21:15 Writer : 김홍덕

어퓨굿맨 이라는 영화가 있다. 1992년 영화로서 법정 드라마다. 특히나 이 영화는 미션임파서블로 잘 알려진 톰 크루즈, 데비 무어, 잭 니콜슨, 케빈 베이컨 등 대단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의 연기 향연도 볼만하고, 그 스토리의 전개가 너무 훌륭하기 때문에 아마 이만한 법정 드라마 영화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가 좋은 것은 마지막에 죠셉 대령(잭 니콜슨)을 심문하는 과정과, 재판이 끝나면서 피고였던 도슨 일병(볼브강 보디슨 분)의 몇마디 대사에 함축된 주제, 곧 이 영화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의 본질 자체가 아주 훌륭하다는 것이다.(물론 영화의 주제는 사람마다 받아 들이는 차이가 있기도 하다. 다만 필자의 입장에서 정리해 보는 것이다.)





(영화의 내용은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생략)


이 글에서는 도슨 일병이 그 부하가 일부 유죄 판결을 받은 것에 억울해 하는 후임 사병에게 하는 말을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명령을 따르다 사람이 죽게 되었으므로 살인은 무죄지만 해병으로서의 직무 유기는 유죄라는 판결로 명예를 위하여 목숨도 바친다는 그들에게 불명예 제대가 선고되자 도슨 일병의 후임 사병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고 대령이 명령을 내린 것을 자백했는데 왜 유죄냐?' 억울해 하자 도슨 일병이 이렇게 말한다.

아니 유죄가 맞아,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위하여 싸울 수 없는 이들을 위하여 싸우지 않았어. 라고


이 말을 의미 있게 새겨보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한 번 비춰 보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그리고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법 이상의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마치 이 영화에서 조셉 대령 혹은 해병의 신념과 같은. 그래서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하는(안 하는) 사람들을 마구 심판하기도 한다. 신앙이 없는사람,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그래서 사회에서 개독교라 비판을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도슨 일병은 해병의 명예를 위해서 명령에 따라 코드레드를 훈련을 따라 오지 못하는 사병에게 행했고 그 결과 그 사병이 죽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이 명령에 따른 것이므로 죄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치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것이 당연하고 오히려 그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군인은 군인 아닌 약한 이들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하여 있는 존재들이다. 그것을 위하여 군대에 신념이 명예가 그리고 명령이 있는 것이다. 그런 군인이 약한 사병을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 유죄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 도슨 일병은 평소에 연약한 동료들을 생각하는 사병으로 나온다. 벌을 받고 있는 사병에게 명령을 어기고 음식물을 주었다가 진급에 누락되고 근무 평점을 최저로 받기도 했다. 바로 그런 희생이 진정한 희생이다.


신앙이라는 것도 결국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이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인들이 사람을 외면한다? 그것도 신앙이 없다는 이유로? 그런 모습이 바로 이 영화가 말하는 "유죄"인 것이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은 국민보다 강하기 때문에 나라를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안전한 사람이 군인이라고 하기고 하는 것이 그 때문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것도 그 신앙 안에서 신앙생활, 남들이 하지 못하는 영적체험, 혹은 남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계시를 알고 누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런 모든 것은 그것을 모르는 사람, 자신보다 신앙이 여린 사람을 위하여 그것을 사용하고 수고하는 것이 그런 은혜와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그렇게 신앙이 없는 이들을 위하여 수고하다 손해를 입게 되어도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도슨 일병이 벌 받아 굶주린 사병에게 음식을 준 죄로 진급하지 못한 손해를 본 것과 같이 말이다.


많은 신앙인들 그리고 교회가 이것을 모른다. 그래서 교회만 크게 짓고, 또 모여서 자기들끼리 신앙 생활 하면서 사람 없는 곳에 모여서는 신앙 없는 이들과 자신들의 삶이 다르다는 것에서 자부심 썩인 감사를 나누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줘도 못 알아 듣는 걸 어떻 하라고?'. ' 이 복음을 모르면 벌레 같다'고 말한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묻는다. 

그렇게 당신들보다 신앙이 없는 이들을 위하여 당신이 손해보면서, 또 죄인이 되기 까지 그들을 위하여 일흔번씩 일곱번씩 수고해 본 적이 있느냐?

라고, 

그게 아니라면 제 아무리 계시에 밝고 신비한 능력을 행하는 신앙의 모습이 있다해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길에서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한 바리새인과 뭐가 다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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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을 부르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0. 23. 10:39 Writer : 김홍덕

창세기는 어떻게 보면 크게 3부로 나눌 수 있다. 천지창조에서 바벨탑까지, 그리고 아브라함, 마지막으로 야곱 이렇게. 이 블로그에서는 창세기 1부에 해당하는 바벨탑까지 다루었다. 그리고 이제 2부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에서 야곱 이전까지의 말씀을 나누어볼까 한다.


창세기 2부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에 관한 말씀은 12장에서 시작한다. 물론 11장 마지막에 아브라함에 대한 족보가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본격적인 이야기는 12장부터이다. 그리고 12장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람’이다. 물론 이는 같은 육신, 같은 사람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의 뜻은 ‘위대함의 아버지’라는 의미이고, 아브라함(17장 이후)은 ‘생명의 아버지’라는 뜻도 그렇고, 할례를 받았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또한 명확한 구분이 있다.


아브람을 부르시는 사건은 모두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 살던 곳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부르심에서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아브람이 살던 곳은 갈대아 우르라는 곳인데 그 뜻은 ‘강 사이의 땅’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의미는 여러 가지 설이 있음.) 그 곳은 당시에 우상숭배가 많았던 곳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동네가 나빠서 그곳을 떠나라고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지역이 우상숭배가 많아서 아브람을 그곳에서 불러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곳에서는 아브람을 복 주실 수 없기 때문에 불러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이신 하나님을 그렇게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고향 땅에서 잘 살고 있는 아브람을 떠나게 하신 것인가?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게 되는 가나안 땅이 사실 그렇게 비옥한 땅도 아니고 토질로만 보면 오히려 아브람의 고향 땅이 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데 왜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신 것일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과 아브람의 이름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답을 알고 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아브람을 통하여 표현된 것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말씀하실 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다. 이 본토, 아브람의 고향은 아브람에게 ‘위대함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준 곳이다. 그리고 더 위로 가면 그 고향은 바로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의 고향이다. 그렇게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이 아브람에게 ‘위대함의 아비’가 되라고 이름을 아브람이라고 붙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떠나라고 한 곳은 갈대아 우르라는 지명을 가진 땅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위대함을 좇는 너의 본 바탕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아브람에게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이 아브람의 이야기가 오늘 나와 상관이 없다면 뭐 하러 성경을 읽고 있겠는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 잘 들으면 부자가 되기 때문인가? 그게 아니면 도무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설사 그렇다고 쳐도 아브람이 나중에 아브라함으로서 부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것은 그 육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그 삶으로 표현했기 때문이지,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행동에 보상을 하신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브람의 말씀(아니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오늘 나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경이 책으로 만들어지고 또 여러 말로 번역되어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본토이자 아비의 집이 다 위대함을 좇는 자리였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또 자기들의 믿음을 통하여 흩어짐을 면하려고 바벨탑을 쌓은 것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런 자리에서 떠나라는 말씀을 아브람을 통하여 표현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있는 위대함을 좇는 본토는 어디인가? 이것 또한 지번(地番)이 있는 땅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의 정체성과 가치관에 관한 것이다. 사람이 바로 흙으로 지어진 땅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아브람의 본토 아비집이라고 하신 사람들이 있는 땅을 말하는 것이다. 즉 아브람의 본토이자 사람들이 떠나야 할 자리는 바로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위대해지려는 마음,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이 뭐 위대한 것을 좇았는가 싶겠지만, 사람 마음에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은 스스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결정하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어떤 것에 대하여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의 일인데 사람들이 지금 그러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시작된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것이고, 그 마음이 절정에 이른 것이 바로 바벨탑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선과 악에 대하여 판단하는 마음은 일상이다. 하루를 살면서 어떤 일에 화가 난 것을 돌아보면 그 어느 하나 예외 없이 ‘그것이 이렇게 되어야 옳은 것이지, 그렇게 돼서는 안 되지’ 하는 것과 ‘그래서 되겠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둘 다 어떻게 되는 것이 선한 것이라는 기준이 사람 안에 있어서 생긴 마음인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사람이 사람과 겪는 모든 갈등의 원인이고, 세상이 시끄러운 유일한 근본 원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 자리를 떠나라고 하시는 것이다. 스스로 선과 악을 가지고 사람과 세상을 판단하는 자리, 그리고 그렇게 남과 세상을 판단함으로 스스로 높아지고 위대해지는 자리, 그 조상으로부터 유전된 그 정체성, 그 가치관에서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곧 사람의 자리로 가라는 것이다.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위대함의 아비라는 이름을 위대함을 좇는 부모들로부터 받은 아브람을 부르셔서 하나님께서 땅 곧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의 자리로 이끄심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의를 나타내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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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시작하는 신앙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22. 15:52 Writer : 김홍덕

이 글의 목적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주관자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의 본질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가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인생을 주관하신다고 할 때, ‘과연 인생의 무엇을 주관하시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신앙이 흐트러진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살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주관하시는 주권의 본질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주관하시는 주권의 가장 본질은 창조에 있다.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생각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왜 만드셨는가?”하는 그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여기에 본질이 있는 것이다. 즉 만든 이유를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관하시는 것이다. 목적이 있어 만드셨다면 그 목적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동을 위하여 사람이 자동차를 만들었기 때문에 자동차에 연료를 채워주는 것이지, 자동차에 연료를 채우기 위하여 자동차를 만든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그것이 사람 안에 있느냐? 아니냐? 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새 생명이 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창세기가 시작되는 것이고, 그 생명이 장성하여 삶을 주관하므로 나타나는 그 사람의 모든 행동과 살아가는 모양과 생각과 말이 어떠한지를 기록한 것이 성경인 것이다. 즉 내용인 하나님의 의가 형식인 사람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 외에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향성은 없다.


만약 이 글을 읽는 순간까지 신앙이라는 것은 어렵고, 성경이 이해하기 어려우며, 사는 것이 힘들다고 여겼다면 그것은 방향이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성경을 읽고서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하면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갈 것이라고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아무 문제가 없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신앙적 가치관과 안목은 늘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 가치관은 늘 ‘이렇게 해도 괜찮은가?’하는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고, 성경은 생명의 말씀인데, 생명이 ‘숨 쉬어도 되는가?’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숨 안 쉬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서 숨을 참아보려 해도 스스로 숨을 참아서 죽을 수도 없는 것이 생명이다. 그것이 그런 것은 생명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 생명이 몸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과 같이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말씀이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어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적어도 스스로 그것을 그치게 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죽일 수는 있어도 주님을 부인하게는 할 수 없는 것이 믿음이고 신앙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고서 정말로 말씀대로 살고 싶다면 먼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생명이 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정말로 믿음을 체험하고 싶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생명이 되면 성경의 모든 것이 내 삶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 가장 크다. 죽은 사람 살려 본들 다 죽었지 않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의가 내 생명이 되어 그것 삶으로 나타나면, 이 육신의 장막을 벗어도 그 속에 있던 의는 영원하다. 왜냐하면 그 의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이고 하나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 의가 육신을 입고 살 동안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니 당연히 그것은 하나님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작에 대하여 의심할 필요는 없다. 모든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다. 사람이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마치 땅에 씨가 심기는 것과 같다. 땅에 씨를 심은 농부가 그 씨가 열매 맺기까지 최선을 다하여 돌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명이 되기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는 사람은 그 말씀이 생명이 되기까지 뿌린 이도 기르는 이도 다 최선을 다한다. 뿌린 이나 기르는 이가 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그것이다. 농부가 씨 뿌린 이유가 그 씨가 열매를 맺는 것뿐임과 같은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자꾸 하려 한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마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면 살아 있는 생명이 그 생명을 끊임없이 표현하듯 쉬지 않고 하나님을 나타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당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를 해야겠다고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외식하는 신앙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고, 예레미야와 같이 하지 않으려 해도 마음이 불붙는 것 같이 견딜 수 없다면 당신 안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보다 스스로가 가장 잘 아는 것이다. 최면 걸듯이 속이지 않는다면.


인생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이고 도구다. 그러니까 육신의 삶과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그 분의 뜻이 본질이고 내용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문제에 관하여 기도하고, 살아가면서 화를 당하지 않기를 바라고, 또 세상에서 성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결과에 대한 부러움을 사기 원했다면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살아온 것이다. 그러한 것은 어떤 모양이라도 될 수 있다. 내용이 표현되는 것은 너무 다양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동을 위한 자동차의 모양과 크기가 다 다른 것이 그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의가 인생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말씀에 어떻게 하라고 하신 것은 그 행동 자체를 원하심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하는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다. 이것을 착각하거나 외면하면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진정한 신앙을 원한다면, 그런데 오늘까지 성경을 지켜 행함으로 내 영혼의 정체성을 죽음에서 천국으로 바꾸려 했다면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 내 영혼이 먼저 은총을 입고 하나님 아들의 생명으로 거듭나면 성경의 모든 말씀도, 삶의 모든 필요도, 그리고 삶의 목적과 의미도 다 이루어질 것이다. 아니 그것을 금할 방법이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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