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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 과정에서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가시관을 씌우고 명패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여 조롱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두 명의 강도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괜한 퍼포먼스가 아니다. 그것은 운명이다. 그리스도라는 운명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또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고자 하는 이의 운명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모습이 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본 받아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가 붙었다. 군병들은 조롱하는 말로 붙였겠지만, 유대인이란 찬송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들의 왕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 찬양을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에 합당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에 합당한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에도 ‘주여! 주여!’한다고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과 같이, 사람들 사이에서도 누군가가 누구를 찬양하는 것과 그 찬양을 받는 사람이 그것을 수용하는 것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신데 소유와 공로에 대하여 구하고 때로 얻었다고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 곧 찬송하는 이들의 왕인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정체성에 맞게,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고 찬양 드리는 자들의 왕이라는 의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위험한 것에서 구하심과, 실수하여 큰 손해를 보는 것을 막을 수 있게 생각나게 하시는 것과 같은 것과, 사업이 잘 되는 것, 건강한 것, 시험에 합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것 역시 하나님께서 모두 주관하시는 것이고, 잘 풀리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본질적인 역학관계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사람의 육신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과, 육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예수님이 대신 벌을 받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기적을 보이셔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문제는 늘 머리에 있고, 손과 발에 있고, 옷에 있다. 즉 늘 생각대로 되지 않고, 몸이 맘대로 되지 않으며, 그런 자신이 드러나지 않도록 좋은 신분을 옷과 같이 갖추려 하는데 잘 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면서 겪는 어려움을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구하는 내용은 절대로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과 같이 건강이나 경제적인 문제나 시험에 합격하는 것과 같은 것에 관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가시관도 녹여버리고 못은 튕겨내 버리고 옷은 제비뽑기로 빼앗기지 않는 아이언맨의 슈트 같은 것이 되는 기적을 보이시고 내려와야 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그런 육신의 문제를 지고 갈 때 인생의 십자가라고 하니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심이 제대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조롱도 받고, 채찍질도 당하고 침 뱉음도 당했다. 사람들은 그런 일을 당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런 억울함이나 분함을 해결하고자 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거나 그런 자리에 처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고 그 노력이 결실을 맺도록 기도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십자가에 함께 달린 두 강도의 요구도 그것이었다. 예수님께 ‘네가 정말 메시아이면 십자가에서 자기를 구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 육신의 문제를 구하는 이들은 다 강도와 같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강도나 제사장이나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육신의 문제를 간과하고 버리는 것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냐 하겠지만 그것은 영지주의다. 육신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가진 심령이 표현되는 도구이다. 즉 육신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질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심령의 정체성에 따라서 육신의 모든 것이 표현되고 종속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심령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면 육신의 문제는 당연히 그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경제적으로 힘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벌 주셔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 마음에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의 정체성이 분명해 지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삶의 결과로서 경제적인 문제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이러한 법을 아는 사람은 결과에 순종하는 마음도 당연히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정체성을 알고,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분명히 아는데 그런 관계에서 하나님께 불평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은 인간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의 정체성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를 보이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가치관 앞에 인간이 서면 다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 가치관은 유대인과 로마의 가치관이다. 유대인의 가치관은 인간의 본질이 형식에 있다는 가치관이고, 로마의 가치관은 공로와 능력의 승자가 독식하는 가치관이다. 


즉 유대인과 로마인은 인생을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린 것 같이 곤고한 것으로 보고, 그 상황에서 가시관을 쓴 듯 생각으로 그런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인간, 손과 발이 못에 박힌 듯 자신의 행위로 구원하지 못하는 인간, 또 옷과 같이 인간의 연약함을 감추는 신분과 고상함이 없는 인간을 죄인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가 죄인의 형틀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달랐다. 원래 인간은 그럴 수 없게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 분이셨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육신의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의 인생과 육신을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인간은 육신이 가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을 십자가와 같은 문제와 짐으로 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신을 만들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존재 목적이 자기 안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진 인생이라는 이 십자가를 어떤 이는 죄인의 틀로 보듯 인생을 부끄럽게 여겨 숨기고 제어하면 할수록 의롭게 보고, 하나님은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요 정체성으로 아는 이를 아들로 여기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정체성이 인정되고, 그 정체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주관하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시듯,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듯,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의 본성이 되어 그 사람의 모든 삶을 주관하게 되고, 그러므로 육신의 삶이 경건하고, 성실한 삶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단순히 차비를 대신 내어주듯, 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오고 가는 모든 세대의 구원이 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에 대하여 듣고 읽을 때에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 자신이 자기 인생을 스스로 만들지 않았으므로 자기가 가진 인생이라는 연약함인 그 십자가가 자기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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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1-26 바라바의 석방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31. 12:0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결국 십자가형을 선고 받으셨다. 그 사이에 가룟 유다는 자신의 죄를 후회하면서 예수님의 몸값을 돌려주려 시도하다 받지 않자 성소에 던져 놓고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은 30은 당신 하인 한명의 몸값 정도라고 하는데, 그와 제사장이 예수님의 몸값을 정한 것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기도 하다. 


한 가지 간단히 짚고 넘어간다면, 유다나 베드로나 아니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배신했는데 왜 가룟 유다만 이렇게 허망하게 끝났을까? 아마도 그것은 그가 생전에도 예수님을 보는 눈이 다른 제자들과 달랐기도 했지만(주라고 부르지 않았던 점에서) 무엇보다 잘못을 회개한 대상이 문제다. 물론 그것은 평소에 예수님을 주라 부르지 않는 자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그의 잘못을 제사장과 해결하려 했고, 다른 제자들은 다시 예수님과 해결하려 했다. 그것은 단순한 행동의 차이가 아니라, 예수님을 보는 관점의 차이로 인하여 다른 행동, 그리고 결과가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가룟 유다가 팔아버린 예수님은 결국 사형을 받게 되신다. 사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얼마든지 예수님께서는 사형을 받지 않으실 수 있음에도 이 길을 택하셨다. 이는 괜히 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운명이라는 것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예수님께서 보이시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야 하는 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유대인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들의 왕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렇다 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죽을죄인가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이들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이들도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과는 다른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다. 예수님과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메시아)의 정체성이 있는데, 예수님은 전혀 그것에 부합되지 않는데 스스로를 그리스도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면서 자신들이 인도하는 백성들을 미혹케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법정에 섰다. 당시 유대인에게는 사형을 시킬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데리고 가서 사형을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빌라도는 아무리 봐도 죽일 죄는 아닌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의 눈에 예수님은 한낱 정신이상자 정도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초라한 꼴로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이 그가 볼 때 어쩌면 우스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자기 아내까지 꿈을 꾸었다며 예수님을 놓아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결단 있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유월절에 사람을 죄인을 하나 석방해주는 규례에 따라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서 선택하라고 했고, 기다렸다는 듯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선택했다.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는 물음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고, 또한 그 피를 자기들이 책임지겠다고 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고 사형을 선고 받는 때는 유월절이다. 이 유월절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오는 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이다. 출애굽 당시 마지막 재앙으로 처음난 모든 것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재앙을 면하기 위해서는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집 안에서 그 양고기를 먹으라고 하셨다. 처음 난 생명을 대신하여 양이 죽은 것이다. 그와 같이 처음 난 사람 곧 아담의 후손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것이다.


유월절의 기원인 출애굽의 때의 어린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만들었다. 모세가 바로왕을 찾아가서 요구한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하나님께 어떤 행동으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애굽에서 종으로 살고 있는데 어떤 자치권이 있다고 그렇게 큰 죄를 짓겠는가? 그들이 구속을 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자리에 있지 않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회복하는 것을 위하여 어린 양이 죽어서 문설주에 피를 뿌린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도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유월절의 어린 양이신 것이 그것이다. 모든 백성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은 벌을 대신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아니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떠나버린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자리를 보여주는 대속이다. 그래서 유월절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대속인 것이다. 바라바가 놓인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죄인들의 대속을 예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사람의 자리를 떠난 모든 인생은 다 바라바와 같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의 대상이 되는 모든 사람은 다 바라바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자신은 바라바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에 자신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자신이 바라바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구속으로 인하여 자신이 석방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시인하면 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착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자리이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성품이 자기 안에 생명이 되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착하게 살고,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품성, 곧 하나님의 형상이 생명이 됨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바라바의 대속으로 또 모든 인생의 대속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괴려고 자기만의 기준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세상일에 선하고 악한 것을 심판하는 자리에서 떠나는 자리, 육신을 가진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을 내용으로 받아서 표현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대속이고,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바라바와 같은 우리 모두를 대속하신 것이다. 그것이 유월절이 나의 사건이 되는 것이고, 내가 바라바와 같이 해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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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69-75 베드로의 부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27. 10:3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시는 자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베드로도 있었다. 그런데 그 베드로를 몇 사람이 알아보고는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고발하듯 말하고 나섰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 사실을 부인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에 관한 것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유가 죄인과 한 패라는 것이 들통이 나면 자신도 잡혀가서 매 맞고 죽을까봐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베드로가 그렇게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로 치면 독립운동 단체와 비슷한 열심당원으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까지 그 품속에 칼을 가지고 다닌 사람이다. 독립운동가가 독립운동하다 잡히면 해를 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듯이 베드로도 적어도 그 정도 용기는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왜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고발 앞에 그렇게 무너졌을까? 베드로를 고발하는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이 자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베드로의 부인은 “나는 함께한 사람이 아니다.”가 아니었다. 베드로가 부인한 것은 “저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였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얼굴을 몰라보겠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베드로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빌라도의 뜰에서 심문을 받고 채찍을 맞고 있는 예수님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왜 저러고 있는지 그것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알기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께서 왜 저러고 있는지, 저러고 있는 저 예수님을 자신은 이해할 수 없고, 그런 모습의 예수님은 자신이 모르는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변하면 못 알아본다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육신은 같은 사람인데 전혀 다른 사람일 때 느끼는 그 생소함과 같은 것이다. 베드로는 지난 3년간 자신이 알던 예수님과 전혀 다른 모습의 예수님을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베드로가 알던 예수님은 베드로 맘대로 기대하고, 상상하고, 만들어낸 예수님이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예수님으로 알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에서 우상이라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으신데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형상이 없는 분을 형상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당연히 만드는 사람이 가진 하나님의 이미지대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상인 것이다.


그러니까 3년간 베드로는 예수님 우상을 섬긴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세상 사람들이 잃어버린 사람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는데, 베드로는 자기 맘대로 예수님이 유대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독립시킬 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그렇게 예수 우상을 섬기던 베드로가 자신의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독립은커녕 잡혀서 죽게 된 예수님을 보고 있으니 ‘저 사람은 도무지 무군가?’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스라엘의 독립이라는 명제만 기대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할 수 있는 생명인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려고 오셨는데 베드로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으로 알았던 것은 분명하다. 즉 예수님은 내용인 의와 생명을 전하러 오셨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기적과 형식만 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의 본질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에 관한 성경으로 설교하고 공부하면서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가르치지만 그 내용이 결국 사람의 행위나 소유나 육신에 관한 것이라면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육신의 것이라고 하니 속물처럼 돈이나 밝히는 것이라고 단정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믿어서 복 받겠다는 것,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교회가 세상에서 대우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다 예수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정체성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하나님의 의와 뜻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하나님이 아니다. 놀라운 능력과 기적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이 있다. 사람은 그것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가 짖는 것만큼 쉬운 것이다. 어떤 것이라도 자신의 용도에 맞는 것을 하는 것은 아주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결국 자신이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신다. 그 사랑이라는 단어를 원문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시는 사랑은 처음과 두 번째는 아가페이고, 세 번째는 필로에이다. 반면에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로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처음 두 번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필로에 한 것을 주님이 아시나이다.”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결국 사랑하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확인사살처럼 “그래 네가 정말로 나를 필로에 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에도 베드로는 “그렇다.”고 답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을 아가페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랑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관계의 형성에서부터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의 전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지은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아가페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아는 것은 좀 미흡한 것이다. 아가페 사랑은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고 의미를 가지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필로에는 형제애와 같은 것이다. 형제로서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아가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물음에 “아닙니다.”라고 답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은 예수님에 대하여 잘못 알고 사랑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사랑을 보이셨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주님으로 사랑했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랬다. 아니 우리 모두가 그렇다. 그래서 베드로는 아가페 사랑을 보이시기고 있는 매 맞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것은 죄를 시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고백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그 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새벽이 온 것이다. 즉 새 날이 온 것이다.


새벽이 오기 전에, 닭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니 새벽이 왔다는 것이다. 새로운 날, 이제까지 살아보지 못한 세상이 열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자신은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 나라의 문제를 해결할 주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정작 자신의 육신도 나라도 구하지 못하고 오히려 매 맞고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런 예수님은 자신이 알던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예수님을 다르게 알고 있었노라 고백한 것이다.


이 고백은 배신 같지만 정말로 감동적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고 고백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나 세상에서 성공해보겠다고 세상을 사는 중에 예수님을 만나면 예외 없이 예수님은 자신이 꿈꾸는 것을 이루는 과정 속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세례를 받듯 세상의 가치관에서 죽어나고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잘못알고 있었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형제애로 사랑했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는 과정은 반드시 지나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과정이 없는 이는 예수님의 양을 먹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이들에게 줄 것이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고백은 정말로 감동이고, 그 누구도 그 베드로의 고백의 과정 없이 예수님을 바로 만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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