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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때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심판을 하시되, 왼편과 오른편으로 사람을 나누고 왼편에 있는 이들은 영벌에, 오른편에 있는 이들은 영생에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말씀을 하신다. 왼편과 오른편, 그리고 양과 염소. 영벌에 들어가는 사람은 염소와 같은 사람으로 예수님의 왼편에 선 사람들이고, 양과 같은 사람은 예수님의 오른편에 선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특이한 것은 어느 편에 선 사람도 자신이 어느 쪽에 서게 될 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른편에 선 사람들은 ‘우리가 언제 주를 영접했나이까?’ 반문하고, 왼편에 선 사람은 ‘우리가 언제 주를 외면했나이까?’ 반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반문에 임금 곧 예수님의 대답은 ‘지극히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라는 사람은 키 작은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이가 적은 사람? 도무지 어떤 사람이기에 이들이 영생과 영벌의 기준이 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 정말로 핵심이 아닌가 싶다. 이것은 요즘말로 한다면 ‘을’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세계, 어떤 관계에 있어서 아주 작은 자, 그 세계의 의와 기준에서 가장 작은 존재들을 말하는 것이다.


수학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자는 “0”점 받은 사람이고, 신앙의 세계에서는 신앙 없고 도무지 신앙적인 규례라고는 전혀 지킨 적이 없는 그런 사람, 도덕이라는 세계에서 보면 싸가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 돈의 세계에서는 파산한 사람, 거지와 같은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들에게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것이 영생이냐, 영벌이냐 하는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세계에서 작은 자가 필요로 하는 것, 그것을 대접한 사람은 오른편에, 그것을 외면한 사람은 왼편에 선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러 가시는 길에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그 지극히 작은 자가 필요한 것을 대접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세계에 있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고 하나님을 모르고 모욕한다고 죽여 버린 사건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 모르는 작은 자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목숨을 대접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세계의 지극히 작은 자, 곧 죄인이요 사망 가운데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하나님의 의로서 대접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자들, 그들의 배고픔과 목마름과 나그네 됨은, 모든 인생이 왜 사는지, 자신이 존재하게 된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고, 또한 그것 자체이기에, 예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하셨는지 그 뜻을 사람에게 알게 하신 것이야 말로 모든 배고픔과, 모든 헐벗음과,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의 삶을 해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것은 당연히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에서 의로운 것과 의롭지 않은 것을 가늠하고 심판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세계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같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과 같이 그 사람이 작은 이유, 가지지 못하고 모르는 그 이유의 해갈해 주기 위하여 수고한 삶을 살았는지 아닌지가 심판 날에 예수님의 오른편에 서게 할지 아니면 왼편에 서게 할지 결정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약자에 편에 서는 것을 의롭게 여긴다. 그것을 사회의 정의로까지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은 좀 다르다. 어떤 것에서 다른가 하면, 가진 자로서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는 것과, 가졌지만 도리어 없는 자 보다 낮은 자리에서 낮은 자를 섬기는 것의 차이다. 이것이 뭐가 다른가 싶겠지만, 이것은 아주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수학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수학 교수나 선생님은 배우는 학생들보다 수학에 대하여 더 능통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교수나 교사가 배우는 학생에게 자기가 아는 것을 전해 주는 것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셔야 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가르치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교수나 교사는 그 지위가 언제나 학생보다 위에 있다. 수학이라는 세계에서 항상 큰 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이신 섬김은 다르다.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자신 보다 더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수학으로 친다면 다빈치 이상의 레벨(?) 하지만 그런 비교조차 불가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하여 분명히 아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면서, 하나님의 뜻을 몰라 죄인인 인생들이 주장하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하나님을 모른다며 오히려 죄인이 되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섬김이라 하셨는데 바로 그것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이다.


수학이라는 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설명한다면, 수학박사인 교수가 어린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치는데 학생이 교수를 보고 “네가 수학을 제대로 알기나 하냐?”고 하면서 교수를 해임시켜 버린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다. 그러는데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묵묵히 끌려가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더욱이 마음만 먹었다면 천군천사를 불러서 모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음에도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본성이 그게 아니기에,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생명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이다.


사람들 사회에서 약자를 돌보는 일이 많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것조차 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에 매몰된 사람보다야 백번 나은 것이지만.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예를 들어 무료 급식을 한다고 하자. 그런데 밥을 얻어먹는 사람이 “음식 맛이 왜 이따위냐?”고 행패를 부렸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 하는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아마 실제로 그런 일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졌다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행패를 부리는 사람에게 ‘죄송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수학선생이 아이를 가르치는 마음으로 한다면, ‘굶는 사람 먹여 주려는데 뭐하는 것이냐?’할 것이다. 만약 그런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가진 자로서 봉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졌다는 지위는 놓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것보다 훨씬 심하다. 굶는 사람 법 먹여 주는데 밥이 맛없다고 투정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왜 사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람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 지으신 뜻과 의를 전하려고 예수님을 보내서 그 뜻을 전하는데, ‘네사 무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지랄이냐?’며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하면서 응징하신 것이 아니라, 정말로 죄인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세계에 있어 진정한 소자인 죄인들이 크다고도 표현하기 힘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데 그들의 뜻대로 달리셨다는 것이다. 즉 소자들의 원하는 대로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세계에서 더 알게 되고, 더 밝아지고, 더 가지게 되면 점점 높아진다. 의를 굽히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무료 급식을 하는데 밥 맛 없다고 투정하는 노숙자가 못 마땅하게 보이는 마음 없이 섬기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단 ‘베푸는 자’, ‘더 아는 자’라는 지위는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가진 자로서 봉사하는 것 까지는 해도, 봉사하는 그 자신이 무시당하는 것을 말없이 수용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우리가 언제 주를 외면했습니까?’ 항변하는 사람들도 주님을 공양했다고 했다. 바로 그들의 공양이 가졌다는 것을 유지하고 나눈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공양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했고, 자신이 계획했으며, 자신이 공양할 때에 이것이 주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임금의 말에 자신들의 행적을 기억해 낸 것이다.


반면에 오른편에 선 사람들은 자신들이 언제 주님을 공양했는지 몰랐다. 자기들이 언제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했는지 몰랐다. 그것은 자신들이 대접한 사람들이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과 자신이 차이가 있다고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그렇다보니 자신들이 한 것을 기억조차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이 대접할 때는 그것이 대접이라고 생각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준 것이 아니라, 그냥 그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임금이 이야기 하는 지극히 작은 자와 어떻게 다른지 조차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다. 예수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죄인과 같이 예수님도 죄인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대접한 지극히 작은 작, 하나님의 의 앞에 온전한 죄인들과 예수님의 신분이 같아져 버린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이 오른편에 선 자들은 자신들과 지극히 작은 자와 차이가 없어지는 자리를 순종한 것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한 것이다.


정리해 보면 지극히 작은 자는 가난한 자와 같은 약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포괄적으로 보면 어떤 세계에서 약자다. 지식의 세계에서는 무식한 사람, 경제의 세계에서는 가난한 사람과 같은 존재를 말한다. 하지만 핵심은 하나님 의의 세계에서 지극히 작은 자, 곧 죄인을 말한다. 이 죄인과 자신과 차이를 알지 못하는 것이 곧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한 것이다.


그것은 오른편에 선 자들이 자신이 한 일을 알지 못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이 지극히 작은 자 대접한 것을 몰랐던 것은 그들이 대접한 사람이 지극히 작은 자인 것을  몰랐던 것이고, 또 자기의 행위가 대접하는 것임을 몰랐던 자들이다. 즉 베풀거나 뭐 의미를 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나오는 본성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것이 대접한 것인지, 지극히 작은 자를 대했던 것인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며 보여 주신대로 의인이 죄인이 되는 세계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그것을 특별하게 여지 않는 본성과 같은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 숨 쉬기 위하여, 숨 쉬는 것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어떤 세계에서 나를 죄인 삼아도 그것을 수용함으로 대접하는 것이 본성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이 기억나지 않는 자연스러운 자신의 삶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우편에 서는 양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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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14-30 달란트 비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16. 11:52 Writer : 김홍덕

유명한 달란트 비유다. 이 달란트 비유를 이야기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지금 말세에 관하여, 또 재림에 관하여 또 달란트 비유와 같은 이 말씀들을 하시는 시점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보내시기 위하여 오셨고, 예수님의 유월절은 곧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에 오셔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시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간과하고 이 말씀들을 본다면, 예수님께서 몸으로 다시 오시는 것만 생각하게 되고 멸망을 이 지구가 멸망하는 것으로만 보게 된다. 그것을 그렇게 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대(당시 세대)가 가기 전에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것은 거짓말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거의 마지막 말씀을 거저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살라든가, 아니면 맡은 일에 충성해라는 것과 같은 말씀으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누가 곧 죽을 것을 아는데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의 가장 중요한 것 아닌 것을 논하겠는가?


달란트는 앞에서 한번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의 화폐가치로 볼 때 약 90,000일의 노동자 일당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돈이다. 그러니까 달란트는 개인이 벌거나 갚거나 소유하거나 하는 수준의 돈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얻을 수도 같을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초인간적인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란트를 받았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내어놓을 수 없는 것을 받았다는 것이다.


주인이 세 명의 종에게 다섯, 셋, 한 달란트를 나눠주고 타국에 갔다 와서 그 달란트를 어떻게 하였는지 확인하였는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받은 것과 같은 달란트를 장사하여 남겼는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달란트를 감추어 두었다가 꺼내왔다. 그리고 왜 그렇게 했는가 하면 주인은 능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심지 않아도 거둘 수 있고, 또 헤치지(헤집지) 않아도 모으는 줄로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자 주인은 매우 화가 나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을 내어 쫓아 버렸다.


먼저 이 달란트 비유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장사하다 망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점과 왜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적게 주었는가 하는 것과 같은 것을 가정하고 생각해 본다. 그런데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주고 떠날 때 장사하라고 한 적도, 갔다 와서 회계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이의 판단도 나쁜 것은 아닌데, 그것이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싶다.


이 주인은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셨다는 것은 단순히 재능을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하나님만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하나님만 가진 사람 입장에서 절대적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이다. 이는 달란트가 당시 가치로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가치였던 것과 같이, 스스로 인생에 들어온 것이 아닌 인생의 존재 목적을 말하는 것이다. 인생 그 누도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고 정한 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존재 목적도 스스로 가질 수 없는 달란트와 같은 것이다.

더욱이 이 인생의 정체성이자 존재 목적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내는 형식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이것이 얼마나 큰 달란트를 받은 것인지를 말해준다.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 그 사람의 존재 목적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을 위한 존재라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이 존재를 나타내고 그것을 표현하는 육신을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으로서 가질 수 없는 달란트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창조 목적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정확히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과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면 모양이나 생산지에 무관하게 언제나 사과이듯,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육신으로 나타난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기에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자기 생명이 되면 그 또한 또 하나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이기에 자연스럽게 장사가 되는 것이다. 장사의 기본은 물물교환이다. 지금은 돈과 물건을 바꾼다. 하지만 어쨌든 장사의 기분은 물물교환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그 목숨으로 또 다른 그리스도를 사신 것이다. 그것이 장사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창조의 목적, 인간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신 육신의 삶을 드려서 다시 사람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다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본성 안에 그런 장사, 곧 생명의 분화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을 장사하기 위해서는 감추지 않아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 곧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정체성을 감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처음 감춘 사람이 있는데 바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자신을 찾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으심에도 숨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 이유를 말했는데 그 아담의 말과 한 달란트 받은 이의 변명은 너무나 같다.


“내가 벗었음으로 부끄러워 숨었나이다.” 하는 것과 “주인은 심지 않은 것에서 거두시므로 달란트를 감추었나이다.”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달란트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인의 능력은 심지 않은 것에서 거두고, 헤집고 찾지 않아도 모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주인이 준 달란트는 감추어야 하고, 주인의 신비한 능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한 달란트 받은 이의 논리는 유대인들의 논리와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나사렛에서 어떻게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 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살아가는 나사렛의 거주민과 같이 살아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행위라는 것 속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감추었다.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이가 땅에 묻어 감추었던 것과 같이.


주인이 종에게 준 달란트는 종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이 하나님께 받은 이 육신도 사람이 스스로 가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육신이 인생 스스로 가진 것이 아니기에 이 육신을 주신 목적과 이 육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더더욱 인간이 가진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다 종으로서 받을 수 없는 달란트를 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주인이 종에게 준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 그 자체인 것이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삶을 통하여 자신과 동일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달란트를 가지고 시장에 가서 장사할 때 자기 가진 것을 난전에 내어 보이듯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삶을 감추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육신을 가진 삶이라는 것이 감추고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것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그것을 받은 자로서 그 목적을 또 전하고 낳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처사는 보편적 개념으로 보면 소심하고, 또 어리석은 행동일 수는 있지만 솔직히 악한 행동은 아니다. 횡령을 한 것도 아니고 이자를 얻지 못한 것을 손해로 보지 않는다면 손해를 입힌 것도 아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의 행동을 <게으르고 악한 것>이라고 했다. 왜 그것이 악한가? 그것은 먼저 주인이 준 것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그랬다. 하나님이 주신 육신이 드러나니 부끄럽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처사가, 또 창조가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악한 것이다.


또한 그는 스스로 주인을 판단했다는 것이다. 마치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스스로 판단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같은 메시아를 보내실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치 심지 않은 것을 거두듯 인생 그 이상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분이라는 것은 기적을 행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것(심은 것) 그 이상의 능력으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평범한 육신과 신분을 가져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 죽어버리는 예수님이 메시아일리 없고, 그런 메시아를 보낼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한 달란트 받은 종 역시 유대인과 같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가 악한 종이라는 것이다.



달란트 비유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재능을 주셨다는 한정적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마무리 하고, 가장 중요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앞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삶과 육신의 존재 목적을 설명하시는 십자가를 앞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이 종에게 주었다는 이 달란트는 한낱 재능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셨는데 어떤 이는 자신에게 주신 것을 다 보이고 자신에게 주신 이 육신의 삶을 장사하듯이 투자하여 다시 주인이 주신 것을 얻었고, 어떤 이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삶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육신을 십자가에 버리심으로 다시 그리스도의 생명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깨달은 사람은 얻은 것, 그것이 바로 장사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의 삶, 그리고 이 육신은 다시 주인이 준 달란트를 얻기 위하여 투자할 밑천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육신이 부끄럽고 감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습 그대로를 보이고, 또 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도구로 투자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을 다시 얻는 것에 사용하라고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인생을 주시고, 이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얻는 것에 사용하고 또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라는 천하보다 귀한 목적 안에서 주신 것, 그것이 바로 달란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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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1-13 열 처녀 비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15. 15:38 Writer : 김홍덕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 비유는 유명한 비유이다. 유명하다는 것은 그 만큼 많은 설교가 있고, 또 이 비유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결혼 관습과 같은 것은 많이 연구되고 많이 알려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 비유의 본질은 아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기름이다.


기름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기능과 의미가 있지만 당시나 고대에는 기름이라는 것은 신분을 명하는 의식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기름을 부어서 임명하는 신분은 세 가지였는데 그것은 왕과 제사장과 또 선지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여기서 처녀들이 준비한 기름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 본문을 가지고 많은 설교를 들었다. 그 대부분의 요지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니 신앙생활 잘 하라는 것이었다. 그건 뭐 좋은 이야기 같은데, 문제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공로가 되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기름 부음을 받는 신분들은 공로로 얻는 신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왕이나, 제사장은 혈통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존재가 그 신분의 자격이 되지 나라를 구하는 공로가 있다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기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많이 하고, 또 착하게 살고, 십일조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잘 하고 사는 것이 기름을 채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는 사람과 그것이 하나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십일조가 되었든, 기도가 되었든 그것을 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이기 때문에 하는 것과, 그런 생명의 본성은 없으면서 그것을 해야 천국에 가고, 그것을 하는 것이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군인이라서 군복을 입는 것이지,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말씀하시는 기름은 행위나 공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세상의 그 누구도 언제 올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쉬지 않고 공로를 유지할 수 없고, 또한 더더욱 예수님이 딱 오시는 순간에 신앙적인 모습을 하고 있기도 어렵다. 예수님께서 지구 반대편에 오신다면 어지간하면 자고 있을 텐데 그땐 어떻게 할 것인가 말이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 깨어있으라고 하는 것은 존재가 깨어있는 상태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도 기름을 준비한 처녀나 그렇지 못한 처녀나 조는 것은 매 한가지였다. 하지만 등불에 기름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준비된 존재가 된 것이다. 그것은 사람도 예수님 오실 때 헌금을 내고 있거나, 기도를 하고 있거나, 교회 청소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실 때 예수님 오신 목적에 부합된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몸으로 오신 그 때의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이시기 위하여 오신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오신 것이 초림인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이시기 위함이다. 그 사건이 자기의 사건이 되는 것 그것이 재림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마음에 오실 때 우리의 심령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마음에 오실 때 예수님께서 신랑이라는 존재로서 의미가 있으려면 기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기름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목적에 맞는 정체성을 가진 상태로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예수님께서 신랑 되신 분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신랑으로 또한 그리스도로 자기에게 의미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기름이라는 것은 불을 만나서 빛이 되는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사람은 원래 빛이 없다.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빛과 사람이 만날 때 비로소 등불이 빛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름은 인간의 정체성 그 자체를 유지하고 있는 마음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스스로 인간의 자리를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자리를 자기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기름을 준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 기름이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이 오시면 등불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등잔이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밝혀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려면 하나님 앞에 처녀와 같은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이요 삶의 의미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름을 채운 것이다. 그리고 그랬을 때 신랑이 와서 잔치에 들어가듯이 사람이 자기 존재가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알고자 하는 기름 같은 마음이 있을 때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그것이 온전해 지고 등불이 되고 잔치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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