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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러 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잡수셨다. 그것을 지금도 기념하기 위하여 개신교에서는 성찬식을 천주교에서는 미사 때 마다 기념하는 순서가 있다. 이 자리에서 떡을 떼시며 떡은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시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한 때 기독교인들은 피를 마시는 사람들이라는 오해도 있었다고 하는데, 웃픈 일이지만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대로, 형식만 보는 관점은 아직도 여전하고, 사람이 살 동안 있을 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먼저 포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한다면, 생물 혹은 식물학자는 고사하고 농부도 아닌 입장에서 포도의 특징을 비교하긴 좀 그렇다. 다만 몇 가지 좀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면 대표적으로 술을 만드는 과일이고, 또 술이 되었을 때 포도 자체보다 가치가 올라간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명제가 아닌가 싶다. 그것은 상할수록 가치가 올라간다는 의미로 본다면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기에 좋은 특성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경에서는 <피는 생명>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피를 마시지 말라고 하셨는데, 물론 피 자체는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내 피를 마시라.’라고 하신 것은 율법을 어기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이 너의 것이 되게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율법의 목적이 예수님이고, 먹는다는 것은 몸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논리로 따져도 그렇다.


떡은 또한 몸이라고 하시면서 먹으라고 하셨다. 피가 생명이라면 몸은 형식이다. 생명이 가진 본성이 형상화되고 그 생명의 본성과 특징과 행동을 표현하는 도구와 같은 존재가 바로 몸이다. 그런 것을 이어서 생각해보면 피와 살을 마시라고 하신 것은 생명과 그 생명의 본성이 너희의 것이 되도록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내용과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이 특을 벗어난 것은 절대로 없다. 그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존재를 표현하시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세상으로 나타내셨다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 표현된 형식이라는 이 법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애플이 만들면 누가 봐도 애플 제품으로 느끼듯, 하나님께서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만든 세상이라는 이 법의 예외가 이 세상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용과 형식>이라는 것은 다소 건조한 표현일 수 있다. 성경에서 이러한 것을 정말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의 예를 들어보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LOGOS)이 예수님이라는 육신이 되었다는 것인데, LOGOS가 ‘계획’, ‘계산’, ‘의도’라는 뜻을 가진 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하나님의 의와 계획이 육신이 되었다는 표현이고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만드셨을 때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든다고 하셨는데 이때 하나님의 형상은 image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만들자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자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 형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체로는 그 존재를 볼 수 없으니 사람이라는 형식이 있는 존재를 만들어서 그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이미지를 알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에게 구원자이신 메시아가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게 하실 의를 가지고 만드셨는데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타락하므로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을 만드신 그 사람의 본질과 목적의 자리를 떠나 죄에 빠졌는데, 사람의 모습을 회복시키시고자 예수님을 보내셨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라고 하신 것 역시 같은 것이다. 구약시대의 성전의 식양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다른 신들의 신전에서 가증 중요한 것인 하나님의 형상이나 조각상은 없다. 왜냐하면 성전의 모든 것, 작은 그릇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성품을, 이미지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성전을, 또한 성전을 구성하고 그 안에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전이기 때문에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육신과 또한 육신을 가진 이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표현 양식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성찬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은 결국은 예수님의 생명과 그 생명으로 인한 삶이 너희의 것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예수님의 피와 살, 곧 생명과 삶이 너희의 것이 되는 방법은 먹는 것이라는 것이다. 먹는다는 것은 그 먹은 것이 몸 안에서 몸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고, 몸 안에서 하나가 되어 몸으로 표현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먹은 것이 몸과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생명의 본성이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염려하므로 키를 자라게 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생각이나 의지나 노력으로 몸의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가 나의 생명이 되는 것은 노력이나 염려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먹은 것이 생명의 법에 따르는 몸의 법에 따라 되는 것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그것이 바로 먹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성찬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소셔 보이신 모든 것에 대한 최종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제자들에게 그간 하신 말씀, 그간 사람들 앞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 그 모든 것을 행하셨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냐 할 때, 그것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너희가 먹는 것, 곧 이때가지 본 예수님의 모든 모습이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 내가 먹었을 때 나와 맞는 음식을 먹음과 같이 너의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바로 이 유월절 마지막 성찬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실존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나, 과학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일으킬 능력이 있으신 분이고, 신이라는 것과 같은 객관적인 사실, 혹은 객관적으로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것을 다른 사람과는 달리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모습과 그 말씀과 삶이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고, 내가 먹어야 할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 예수님의 실존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람 변하는 기적을 맛본 사람이 그깟 바다가 갈라지는 것이 뭐가 대단한 일이겠는가? 갈라진 바다도 원래로 돌아가고 그 위를 걸은 물도 여상하지만 생명이 바뀐 사람은 그 새 생명이 영원한데 그런 기적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 또한 처음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원래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렇게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였다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되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작은 그리스도(christian=a christ)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다.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성찬도 포도주도 피도 살도 떡도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육신을 가진 형식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인 떡과 생명이요 피인 포도주를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듯이 너희도 그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영인 내용을 표현하는 몸 가진 형식이 되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성전과 같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삶이 되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그것이 떡과 포도주를 주신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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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러 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가지셨다. 이 자리에서 몇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가장 먼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것, 그리고 포도주와 떡이 예수님의 피와 살이라는 말씀,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제자들과 다시 포도주를 마실 때까지 다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겠다는 말씀들이다.


먼저 제자들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자. 제자들 중에 가룟인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버렸다. 그렇다고 다른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끝까지 지켰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병정들에게 잡혀가시자 다 도망 가버렸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심문 받으시는 마당을 기웃거렸고, 요한은 십자가 밑에 갔었지만 뭐 일단 시작은 다 도망가 버린 것이다. 그것도 배신이라면 배신이다.


가룟 유다에 대한 기록은 의외로 성경에 많지 않다. 그 몇 번 안 되는 가룟 유다의 말에서 예수님을 부른 호칭을 보면 단 한 번도 <주님>이라고 한 적이 없다. 그냥 그에게 예수님은 선생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주와 선생은 다르다. 주인은 자신의 존재 자체의 운명을 가진 분이고, 선생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알려주는 사람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사 인생을 사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라도 주와 선생은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호칭은 당연히 상대에 대한 의미를 대변하는 것이다. 원수를 대할 때는 “이 죽일 놈!”이라고 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는 뭐…(너무 많다.)


그에게 예수님은 당시 시대적 난관을 해결할 대안으로 그리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인도할 선생이라는 의미는 있었지만 자신의 운명을 쥔 주님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으니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각이나 계산과 다르게 십자가를 지고 죽겠다고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시니 한 마디로 ‘속았다’ 생각하고 팔아 버린 것이다. 마치 기대를 하고 주문한 물건이 형편없을 때 바로 중고시장에 내다 파는 것처럼.


그런 면에서 다른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 배반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같이 자신인가 예수님께 물어봤다는 것이 그렇다. 다 찔리는 게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십자가를 지고 죽겠노라 말씀하시니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나서다가 책망 받은 베드로는 끝내 겟세마네 동산에서 품에 품고 있던 칼을 꺼내어 휘두르면서까지 예수님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도망 가버렸다.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도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 자리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것 역시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모든 제자들의 생각이 다 예수님과는 전혀 달랐었다.


이것은 지금도 그렇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모욕당하는 것을 목숨 걸고 나서서 막으려 한다. 하지만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독하지 못하게 결사항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을 자신이 깨닫는 것에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애지중지하는 것이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자신도 십자가를 지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도 제자가 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다는 것은 신앙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의로움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모르는 자들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의로움을 강제시키고 증명하고 주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의롭지만 의롭지 않은 죄인들의 주장에 자신을 내어줌으로 그 의롭지 않은 죄인들이 의인을 십자가에 달고 보니 그곳이 자신의 자리였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 주님을 모독하느냐?’고 대 들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분이지, 함부로 모독하면 안 되는 고관대작이 아니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베드로가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또 보이시고자 하신 뜻을 자기 안에서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그것을 그때까지는 몰랐다. 이런 제자들의 마음과 생각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


사람이 예수님과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내 팽개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배신이고 배반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가룟 유다와 같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러 가시는데 막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아니었던 것 같이, 신앙이라는 것이 신앙 없는 자들 앞에서 무시당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언제나 더 가지고, 더 밝고, 더 의로운 이들에게 무시당하고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죄인이 되어 십자가와 같이 수치를 당하는 것 같은 상황을 인정할 때, 그 모습을 보고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듯이, 계시가 어둡고 덜 가진 체 자신이 옳다고 주장했던 이들이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가룟 유다의 배반은 결국 어디서 해결하였는가 하는 것에서 다른 제자들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가룟 유다는 제사장들에게 가서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든 예수님과 그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물론 그것은 나타난 것이고 본질은 유다에게 예수님은 그저 선생이었고, 다른 제자들에게는 주님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가룟 유다의 배반은 사뭇 교훈이 되는 사건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구속이 어떤 의미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것이라면 가룟 유다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예를 들어 잘 살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거지가 되면 예수님을 배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왕이 되시기를 바란 유다와 다른 제자들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생 자체의 의미와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제사장으로 섬기는 것은 우리 존재와 생명의 정체성을 알게 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이시다. 존재하고 있는 것에게 존재의 이유를 가진 분이 주님이 아니면 누가 주님이겠는가? 그리고 존재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를 알았는데 그 삶이 어찌 형통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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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말세와 관련된 비유와 말씀을 마치시고 베다니에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 유하시게 되었다. 그때 이미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 한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옥합을 깨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사람들 중에 다른 사람도 아닌 제자들이 그것을 분히 여겼다. 왜냐하면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면 더 좋은데 왜 예수님께서 붓는 것으로 다 소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좀 특이하게 요한복음에도 기록되었는데 다른 복음서 보다 더 상세히 기록되었다. 보통 공관복음이라고 하면 4복음서 중에 요한복음을 제외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말한다. 이 세 복음서는 서로 연관된 내용이 중복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은 사실 좀 다른 관점의 성경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관점에서 기록한 요한 사도가 볼 때 이 사건은 의미가 컸다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은 단순히 제자들의 갈등을 유발시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것을 본 가룟 유다는 이 일과 이 일을 대하는 예수님을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팔아 버리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는 사건이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향유를 예수님께 붓는 일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냐에 따라 너무나 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향유의 양이 한 나드이고 그 가치는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했다. 그것은 300일의 품삯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 매번 먹을 것이나 구하러 다니던 제자들 입장에서 볼 때 눈에 펼쳐진 광경은 쉽게 용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관점은 그 향유가 세상적인 가치 기준에서 판단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때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또한 백성들을 가난과 병에서 구원할 메시아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의 왕이 되실 줄로 믿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아직 모든 것의 가치를 눈에 보이는 것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관점으로 열 받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고 또한 이 일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이면 어디라도 전해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이 여자가 내게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 26:12-13)


기름을 붓는 다는 것은 기름 부음을 받는 사람에게 어떤 신분을 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로 보면 기름 부음을 받는 신분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이 여인에는 예수님이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며 메시아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장사를 위하여 향유를 부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는 것은 기름을 붓는 것과 예수님의 죽으심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정치적인 나라의 왕이 되거나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왕이 되려면 죽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살아야 한다. 제자들의 관점으로는 예수님이 살아서 메시아가 되어야 하지만 예수님은 장사지내시게 됨으로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이 여인이 보여주고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지금이나 그 당시나 그리스도 곧 메시아에 대한 환상은 같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 영웅이고 메시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메시아요 그리스도가 자신이, 사람이 처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고, 지금도 많은 신앙인들이 자기가 살아가는 형편과 모양에 대하여 신앙이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 그렇다. 예수 믿어 복 받는다는 그 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대변한다. 복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는 것에서.


제자들의 관점이 그랬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당시 타락한 모든 것을 바로잡고, 또한 로마의 속국인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까지 속에 칼을 품고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의 모친은 예수님이 왕이 되면 높은 자리를 하나씩 달라고 하고 제자들은 그 소리에 열 받고 한 것이 다 그런 기대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기대에 가장 계산적이었던 제자가 바로 가룟 유다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으러 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어야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된다면서 예수님이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는 일이 온 세상에 전해질 복음이라고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가룟 유다는 정말로 돌아버릴 것 같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결국 예수님이 이때까지 보여준 모든 것이 자기와 생각하던 것과 다르다고 결심하고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팔아버리는 것이다.


앞에서 잠깐 이야기 했듯 지금도 비슷한 일들이 너무 많다.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나 이유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께 자신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며 협박하는 것 그것뿐인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는데, 그 세상 속에 한 사람이 이 세상의 물건과 재화와 세상의 것으로 성공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단 말인가? 그것은 마치 자동차가 주인을 목적지에 데려다 주지는 않고, 자동차에 금칠을 해주면 주인이 영광스러워질 것이라며 떼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그런 관점으로 보면 이 여인의 처사는 기가 차는 것이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은 죽으면 안 되시는 분인데 장사를 위하여 무엇을 한다는 것도 가당치 않은 것이고, 더욱이 그것을 위하여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큰 재물을 그렇게 허무하게 소비한다는 것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 메시아는 제자들의 그런 관점이나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며 교회에 다니는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시고 기름 부음을 받으시는 것은 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죽임을 당할 때 메시아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이 되시는 것을 위한 이 여인의 행동은 복음과 늘 함께 전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기름 부음을 받은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은 복음이다. 그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것에 대하여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는 그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죽으심이 복음이 되고, 죽으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시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의와 뜻과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하여 표현되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이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셨던 모든 것을 보이신 자리가 바로 십자가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하나님의 이미지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대로 사람이 살면 그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스스로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람의 역할이 순종하는 수동에서 증동적인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원래 태초에 사람을 만드실 그 때에 사람의 모습 그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능동적으로 할 수 없는 십자가에 달려 있는 그 모습이 바로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백부장의 고백이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은 이 땅의 왕이 되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이 가진 죄와 어두움인 ‘왜 사는지?’ 모르는 것, ‘왜 존재하는지 모르는 것’을 알려 주셨기에 구원자이신 것이다. 사람이 자기가 왜 사는지 모르므로 어두움에 있어 맹인과 같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문둥병자와 같은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이유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라고 인하여 깨닫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구원자요 그리스도요 메시아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시므로 이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 부은 것이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고, 또한 예수님께서 복음의 주체이시기에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확증하는 기름 부음의 사건의 주인공인 여인의 일이 복음과 함께 전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떼려고 해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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