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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 (9)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1. 13:45 Writer : 김홍덕

믿음과 행함



믿음과 행함은 같은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이 같으심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표현되고, 성령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삶으로 나타나심과 같은 것이다. 즉 믿음이 있으면 행함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믿는 사람으로서 이러면 안 되지!’ 라며 자신을 제어하거나, ‘예수 믿고 천국에 가려면 이렇게 살아야지.’하면서 의지를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행함은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어릴 적에 1,000일을 작정하고 기도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이어리에 했는지를 체크했었다. 어떤 날은 12시 자정을 넘기기 전에 가까스로 마치 ‘하나님 땡큐!’라는 식사기도 같이 기도하곤 스스로 ‘오늘도 기도를 했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코미디인가? 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으면 살아 숨 쉬며 움직이는 모든 순간이 기도가 된다. 기도라는 것이 그리스도를 구함일진데,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있으면 눈에 보이고, 귀로 듣고, 만지는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를, 또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그 성품을 표현하신 세상을 느낄 수 있다. 내용이 자기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안에서 생수와 같이 넘쳐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애를 써도 힘들기만 했던 일도 하나씩 되어 간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다. 어제는 질 수 없었던 십자가를 오늘은 지게 된다. 어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로 행함으로 내 눈에 거슬리고, 내가 손해 보는 것을 참지 못하던 것이, 오늘은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심 같이 내가 손해보고 다른 사람이 주장하는 의에 대하여 반박하지 않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것을 줄여서 말하면 <섬기는 삶>이다. 그리스도의 삶이고 행함이 있는 삶이 이것이다.


성령의 열매도 그렇다. 열매는 생명에서 나오는 것이다.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신념을 가지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는 사람이니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야 한다며 마음에서 동의는 되지 않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과나무는 뭐라 하지 않아도 배 아닌 사과를 내듯, 성령이 안에 있으면 특별히 노력하거나 의지를 가지지 않아도 성령의 열매를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르면 신앙을 모르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려 하면서 이렇듯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법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의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서 그 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려 한다. 생명의 법은 생명이 있으면 그 생명에서 열매가 나오든 본성으로 인한 행함이 나오든지 하는 것이 생명의 법이다.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시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메기신 존재의 목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형식으로서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을 믿는 이를 생명이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 생명이 있으면 당연히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사람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다.


믿음이 있어 행함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행함이 있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방향성이다. 하나님이 계심으로 우리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존재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본질이신 내용이시며, 또한 사람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어기려 해도 어길 수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있으면 모든 행함은 생명이 자기 본성에 의하여 행동이 나타나듯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이란 그렇게 하나님이라는 인생의 내용이자 본질이 행함 있는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육신이 있고, 육신 가진 삶이 있고,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이것이 믿음과 행함의 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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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 (8)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9. 30. 14:39 Writer : 김홍덕

이유가 있는 사람의 본성



이 글에서 지속적으로 사람이 가진 이 육신과 삶은 하나님의 말씀과 의와 성품을 표현하는 형식이라고 말해왔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과 의와 성품을 표현하는데 쓰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되지 않을 것이 사람에게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불량을 만드신 것이거나, 과품질의 존재를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말씀과 의와 성품을 표현하기에 너무 안성맞춤이라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진 모든 본성, 그것이 사람이 보기에 감추고 싶은 것이든 자랑하고 싶은 것이든 간에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목적에서 비롯된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자신의 존재목적으로 삼고 믿는 사람은 사람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람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의 본성을 고치려고도 하지 않고 지적하고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람의 본성과 씨름하는 것 역시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을 본질로 알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성으로 인한 죄를 이기는 것이 신앙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제와 씨름하는 것이지 대안이 아니다. 원숭이 사냥이 좋은 예다. 원숭이 손만 겨우 들어가는 상자에 과일을 넣어 놓으면 원숭이는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과일을 쥐고 있다가 보니 손이 빠져나오지 못하므로 상자에 잡히는 꼴이 된다고 한다. 그런 원숭이에게 가장 큰 해결책은 상자 안에 있는 것 보다 더 좋은 과일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더 좋은 과일을 잡으려고 상자 안에 과일을 잡은 손을 놓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진 모든 본성도 그렇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습들을 어디에 쓸 것인지 모르면 그것을 고치려 싸우는 것이다. 일생동안. 하지만 사람이 가진 본성이라는 것이 다 이유가 있어 사람 안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 이유와 목적에 맞게 사용하자 하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너무 합당한 것이다. 그것을 알면 자연히 이 인생을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감사함은 이것을 간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즉 육신으로 표현해 낼 인생의 내용, 곧 하나님께서 사람 만드신 목적이 자기 안에 없으면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적어도 인생이 나지 않음보다 살고 있음이 더 감사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십자가로 나타나는 믿음



사람이 사람의 모습을 인정하면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누가 화내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화내는 모습을 부끄러워하고 그것을 신앙이나 훈련으로 이기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화내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못한다. 먼저는 자신은 그것을 이기려고 하고 있는데 마음대로 화를 내니 본전심리가 있어 안 되고, 본질적으로는 자신이 그것을 이기려 했다는 것은 아담이 벗은 자신을 부끄러워했듯 사람이 화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 감추어야 하는 악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 안에 화내는 본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사람이 화내는 것을 심판하지 않는다. 왜 화를 내는지는 관심의 대상일 수 있다. 육신의 문제가 풀리지 않아서, 그러니까 한마디로 세상일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아서 내는 것이거나, 자신 안에 화가 나는 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유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화를 내심과 같은 것인지는 관심이 있을 수 있지만, 단지 화를 내었다는 것 자체로 사람을 심판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렇다는 것을 아니까? 사람이라면 화를 내는 본성이 있다는 것을 아니까?


바로 여기서 십자가가 나오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이 가진 본성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모르면 그 본성대로 살아간다. 자기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은 형식 곧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인 줄로 알고 사는 삶이다. 그리고 그런 삶은 늘 갈등을 일으킨다. 다들 옳다고 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의 존재 목적에 맞게 살지 않다보니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모든 화평이 깨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언어가 혼돈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벨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모습이 안식이 사라진 모습인 것이다. 스스로 만족의 동산인 에덴에서 자신을 쫓아내 버리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런 가치관은 언제나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본질이라는 그 어리석은 가치관 안에서 모든 일에 무엇이 선인지, 어떻게 하면 악한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주장하고 시행한다. 예수님을 심판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가치관이 바로 그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생각하다 보니 초라한 예수님의 모습이 그리스도나 왕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경고했음에도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나타나게 하신 하나님의 의와 말씀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내용을 부인한 것이다. 그 내용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심에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내용을 볼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나이다.(눅 23:34)


그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다 보이시고 못 박혀 돌아가셨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들로 살리신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보이신 사람의 모든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말씀과 의와 성품을 표현해 내는 인생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보면서 사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세우신 목적이 삶의 내용이 되어 삶으로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기준, 곧 자신들이 생각하는 선을 행하여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기준을 가진 이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기준으로 심판한 것이다. 즉 자신들의 능동적인 믿음과 선악의 기준으로 주장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 주장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시고 못 박혀서 돌아가신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이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지고 갈 십자가 곧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주장 앞에 죄인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이 어디 한둘이 아니다. 오가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전부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운전하면서 끼어드는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나타낸 것이다. 아니면 인간에게는 성욕이 있어서 자신이 그것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며 문란한 자신의 삶을 변명하는 것과 같이, 자신이 지금 새치기를 해야 할 정도이고 도로가 막히니 어쩔 수 없다는 자신의 상황과 기준을 관철시킨 것이다. 그러면 새치기를 당한 사람은 유대인의 기준에 의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그것을 용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의인이 죄인의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십자가를 지는 모습인 것이다. 그렇게 하는데 갈등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다들 그렇게 하도록 권장하는 것이 십자가의 삶인가?’라는 반문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끌려 가셨지 스스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다. 즉 모든 차를 양보하는 것이 십자가의 삶이니 다들 끼워주면서 가는 능동적인 모습은 앞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믿음이 아닌 것이다. 나의 의도와 무관하게 당할 때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고, 오른뺨[각주:1]을 맞았을 때 왼뺨을 내어주는 것이다.


믿음이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것이며, 사람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다. 그러한 것을 알고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인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보이신 것이다. 이 십자가를 사람들이 보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고, 삶의 목적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 들어와서 그것이 싹이 나고 생명이 되어 본성으로 표현되는 내용이 되어 삶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믿음의 행함이고, 그 행함이 있는 생명, 그 내용이 있는 행함의 삶을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1. 오른쪽은 의에 관한 것이다. 오른뺨이 맞았다는 것은 내 의가 핍박 받았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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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 (7)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9. 30. 14:35 Writer : 김홍덕

믿음은 수동적인 것


믿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을 사람이 받아들이고 그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정하고 그렇게 되기를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믿음은 아주 수동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믿어야 할 것을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아들이 좋은 대학에 가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번에 좋은 직장에 지원했는데 합격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와 같은 것은 믿어야할 것을 사람이 정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사람이 믿어야할 것을 정하면 하나같이 육신의 삶에 대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교회가 이런 신앙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믿음과 신앙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작금의 믿음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믿음의 본질도, 기도의 본질적인 내용이나 대상도 아니다. 그런 모든 것은 다 사람이 자기 필요에 의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육신의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신념이고, 자기 이익을 위한 믿음이고,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를 취하시는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네가 누구냐?”하는 것을 고백하고 믿으려 하지 않고, ‘사람이 무엇을 할까?’를 고민하고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무엇을 만들 때, ‘어디에 쓸 것인지’를 정하면 자연스럽게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결정이 되는 것이다. 즉 내용이 정해지면, 목적이 정해지면 방법이나 용도 그리고 모양이나 기능 그리고 결과까지 정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만 자기 안에서 정해지면(믿어지면) 나머지는 모든 것이 다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뜻이다. 내용이 믿어지면 형식은 다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사람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거나 만들어서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아주 순종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운명을 믿는 것이다. 그 사람의 운명, 곧 사람의 정체성은 모든 사람이 태어나기 전, 아니 창세전에 정하신 것이다. 사람은 단지 그것만 인정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과 존재의 목적 그것만 믿으면 나머지 모든 것은 다 이루어진다. 이것을 부인할 것이면 성경을 읽을 이유조차 없다. 하물며 믿을 필요야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감추고 싶었던 사람의 본성



사람이 순종해야할 사람의 정체성도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미 태어날 때 가진 사람으로서, 인생으로서 가진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는 것을 고상한 것이라고 하고, 극복하는 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담이 자신을 부끄러워한 것과 같은 것이다.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볼 때, 사람이 가진 식욕이나, 성욕이나, 운전하다 욱하는 것이나, 미워하는 마음과 같은 것들이 다 아담이 감추고 싶어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자신을 이기려고 평생을 수고한다. 하지만 이때까지 아무도 완벽하게 성공한 이가 없다.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시도한 이들 중에서는.


사실 사람은 누구나 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들을 감추려 한다. 그러다보니 그것을 감추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난데없이 ‘그러면 그것을 자랑하란 말이냐?’라고 반문한다. 인정하는 것과 자랑하는 것은 다르다. 사람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랑하는 이가 있다면, 인간을 그래야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성욕이든 식욕이든 남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든 다 표현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미묘한 차이일 수 있다.(말로하기 어려운 구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구나!’ 하는 것과 ‘사람이라서 그렇다 어쩔래?’ 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시인하는 것과 주장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런 연약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과, 사람이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고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 안에 성욕이 있구나!’ 인정하는 것과 아무렇게나 성생활을 하면서 ‘사람이 다 그런 것 아니겠어?’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인정한다면 다음이 있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집행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에게 남은 것은 당연히 자신이 결론을 낸 것에 대한 심판만 남은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한 사람은 다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 연약함이 어떻게 쓰이느냐 하는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수동적인 것이기도 한 것이다. 스스로 모든 것을 집행하는 능동성이 믿음이 아닌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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