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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란?



책이나 드라마 또는 영화와 같은 것의 의도(본질)은 무엇일까? 심심치 않게 심청전 이야기를 해보는데 심청전에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누구나 알듯이 <효(孝)>다. 하지만 심청전의 내용에 ‘효’라는 말은 거의 없다. 하지만 누구나 심청전을 읽고 나면 그 주제가 ‘효’라는 것을 다 안다. 심청전은 ‘효’를 전하고자 쓴 글이자 책인 것이다. 즉 심청전이라는 책과 그 책을 구성하고 있는 글자와 종이는 형식이고 그 내용은 바로 ‘효’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인 ‘효’는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한 내용이다. 그리고 그것을 전하고자 했다는 것은 심청전을 읽은 사람들이 그 부모에게 효도하기를 바라는 의도가 있었고 그것을 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사람이 자신을 바꾸어내는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설명한다. 작가의 입장에서는 의도를 전하는 것이고,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작가의 의도에 동의하므로 자기 안에 있는 마음들이 작가가 의도한 것을 삶으로 표현해내기 위한 시도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심청전을 읽은 사람은 부모님께 효도하고자 하는 행동을 시도하고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용을 형식으로 표현하고, 형식을 인지하는 사람이 형식을 통하여 내용을 자기 안에 땅에 씨를 심듯 받아들이고 그 씨가 싹이 나고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듯 형식을 통해 받아들인 내용이 다시 자신의 삶이라는 형식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아니 영이신 하나님, 내용이신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시는 그 본성과 법 안에서 창조된 사람과 세상이기에 이 하나님의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이치가 그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는 그 생기를 사람에게 불어 <넣으니> 생령이 되었다고 했고, 타락한 사울을 보고 ‘하나님의 영이 떠났다’고 하셨고, 예수님은 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라는 내용을 받아서 자신의 삶이라는 형식으로 표현하므로 그 삶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의를 통하여 다시 내용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때 삶으로 표현되어 다른 사람이 내용이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을 깨닫게 되는 그 삶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내용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듯 의가 형식으로 표현된 것을 보고 자기 안에 형식으로 표현된 의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시고, 예수님께서 삶과 십자가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심을 보고 자기 마음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뜻이 깨달아지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삶으로 십자가로 보이신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낸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한 것이다. 표현했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것을 인지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이미지가 예수님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비쳐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비쳐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의와 말씀, 곧 내용이 제대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의 마음 안에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 그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도 작가와 독자가 있고, 놋 뱀도 보는 이에게 의미가 있었듯, 하나님의 형상(이미지)을 나타낸 예수님의 십자가 역시 그것을 온전한 하나님의 의로 받아들이는 이가 있어서 의미가 있는 것, 아니 받아들여지는 일이 있어야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인지했다는 것은 성령으로 그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잉태되었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표현되었다는 것은 인지되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것을 <의미>라고 한다. 꽃이라 불렀을 때 꽃이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깨닫는 일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요한 사도가 고백했다는 것은 요한 사도 심령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즉 요한 사도 심령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고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 안에 성령이 계시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이 모든 세상의 법이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 사람과 세상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를 모르면 다른 것도 모르는 것이므로,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본질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것을 본질로 알아서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얻고, 육신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 교회고 그것을 구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본질은 모르고 형식만 아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the Christ)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a christ)가 된다는 것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잉태되신 이가 그리스도이시듯,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자기 안에 그 생명이 자신의 삶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사람 역시 그리스도(a christ)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느냐?’라며.


하지만 이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 같이 되자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본질로 알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 곧 의가 육신이 되신 그러니까 삶으로 표현하신 분이심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도 예수님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본질 곧 자기 삶의 내용이자 생명으로 여기며 살게 된다는 것을 알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 하나의 작은 예수 곧 그리스도인(christian=a christ)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것이 아니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또 하나의 작은 예수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자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의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우리의 삶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사람이다. 즉 삶의 내용이 하나님의 의인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그것은 인생의 본질이자 내용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라는 형식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표현된 것을 보고 자기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을 가진, 육신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깨달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한 것이다.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낳고 또 낳고 하는 것이 영원하듯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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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잉태되심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에 대하여 마태복음에서는 “성령으로 잉태하심”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이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의 육신을 사실대로 표현한 것은 마태복음이고, 그렇게 잉태되심으로 이 당에 우리와 같이 육신을 가지신 분으로 오신 예수님의 의미 곧 내용을 요한복음에서 표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과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내용이 형식으로 되는 과정이 바로 성령의 본분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성령은 바로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이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게 하는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성령을 어려워하고 때로 두려워하는 것은 영이라는 측면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령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분이라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이 하시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영역에 대하여 사람들은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 예를 들어 산을 옮기는 것과 같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의 입장에서 초인적이고, 초자연적이기에 사람이 볼 때 두렵고 놀라운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령의 본업이 아니시다. 성령의 본업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면 그것은 <감동(感動)>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고백을 하게 되는 과정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예수님이다. 사도행전에 예수 이외에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다. 구원받을 이름이라는 것은 구원받을 생명이자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름이란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전한 법이 있다. 그냥 ‘오늘부터 내가 예수 믿는다.’며 작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 신자로 등록한다고 예수 믿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심령 안에 성령으로 잉태되는 생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우리의 심령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성경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나 업적을 객관적 사실로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과 동일한 생명이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게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내 안에서 생명이 되는 일을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시다. 그것이 진정한 기적이다. 사람에게는 어쩌면 산을 옮기는 능력보다 본성이나 성격이 바뀌는 일, 즉 사람이 바뀌는 것이 더 기적이기 때문이다. 산을 옮기는 것이야 애굽의 술사들이 모세의 몇 가지 기적을 따라했듯 포크레인으로 옮길 수도 있지만 사람을 바꾸어내는 것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사람이 바뀌는 것은 사람의 밖의 어떤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고문이나 힘으로 굴복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그런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일은 얻을 수 있어도 마음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 마음 안에서 변화가 있어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 아는 이야기처럼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따뜻하게 하여 스스로 덥다고 여겨 벗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게 사람이 자기 마음을 바꾸는 것에 결정적인 감정이 바로 감동이나. 그 감동이 없으면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어떤 계기로 자기 마음이 바뀔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지, 일요일에 놀던 사람이 교회에 가는 것과 같이 사람 밖의 조건만 바뀐다고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고, 오늘부터 예수 믿노라 선언한다고 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의 절대적인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 마음 안에서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감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감동의 역사가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사람 안에 감동을 주시기 위해서는 사람 안에 어떤 것이 들어가야 한다. 땅이 열매를 내려면 씨가 심겨야 하고, 여자가 아들을 낳으려면 남편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늘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즉 사람이 어떤 것을 자기 안에 받아 들였을 때 그 받아들인 것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를 일으키는 감동의 역사가 바로 성령의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무엇을 받아들일 때 성령의 감동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다. 즉 예수님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모습과 보이신 것을 볼 때, 그 예수님의 모습이 사람 안에 들어와서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삼위일체이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계획대로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시고, 그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이 무엇인지를 보이셨고, 그것을 보는 사람은 그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마음 안에 마치 땅에 씨가 심기듯 심겨지고, 그것이 잉태되어 생명이 되게 하는 감동의 역사를 성령이 일으키시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뜻이며 이미지고 감동이고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이 땅에서 보이신 모습을 읽고 들을 때에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삶으로 표현된 내용인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심겨져서 그것이 다시 자기 삶의 내용이요 본질이 되어 표현됨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사람의 본질이 바뀌도록 예수님이 보이시고, 그 이미지가 사람 안에서 생명으로 잉태되게 하시는 성령이 계심으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자 뜻이 한 사람의 본질이 되고 삶의 내용이자 목적이 되어 삶이란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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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 나타난 것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유명한 말씀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난해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씀은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의미인데, 그러면서 부연하기를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나타난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우리가 눈으로 보고, 또 세상으로 나타난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비롯되었다는 것은 생명으로 본다면 그 생명이 가진 유전정보가 형체를 가진 동물 혹은 식물로 표현되고, 또한 그 생명의 특성을 나타내며, 그 유전적인 본성에 따라 행동하거나 모습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동물이나 식물의 본질은 보이는 그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보이도록, 또 그렇게 행동하도록 하는 유전자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실재로 이제는 많은 부분에서 생물의 유전정보를 활용하고 있다. 드라마를 통해서 많이 접하듯이 과학 수사와 같은 것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렇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유전자는 절대적인 배타성, 즉 유일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는 같은 유전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한 생명의 개체 자체로도 그렇고, 또한 종(種)으로도 그렇다는 것이다. 바로 그 유일한 유전자가 표현됨으로 우리가 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그렇다는 것은 그 생명을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영이신 본성과 품성과 의를 세상으로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게 하신 하나님의 법으로 만들어진 세상이기 때문에 그 세상 역시 어떤 보이지 않는 것이 나타나는 법(法) 아래 있고, 그것을 생물에 관해서 이제 사람들이 유전자라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 것이다. 즉 이 세상은 어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생명으로 치면 DNA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 마네킹이나 박제처럼 껍데기나 형체가 그 생명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외형이 같다고, 외형을 만든다고 그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유전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처럼 이 세상도 눈에 보이게 나타난 것이 본질이 아니라 이 세상으로 표현된 근본이자 본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



그와 같은 법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또한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창세기에서는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하셨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영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숨, 하나님의 영을 내용으로 하는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첫 번째 아담이고, 그 아담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내용으로 할 때 하나님께서 만족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사람에게 만족하시기 위하여 아들을 보내셨는데 그 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이를 두 번째 아담(두 번째 사람, 고전 15장)이라고도 하셨는데, 그 예수님에 대하여 표현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라고 하셨다. 그 표현이나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신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의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의 표현이 있다. 먼저는 로고스(LOGOS) 그리고 뤠마(Rhema) 그리고 케리그마(Kerygma)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상태라고 할까 그렇게 구분이 되는 것이다. 먼저 로고스는 ‘하나님의 의도하심’, ‘계획’, ‘뜻’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표현되지 않고 하나남 안에, 하나님 자체로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뤠마는 로고스가 표현된 것으로 바로 사람으로 나타난 것을 말하는 것이며, 케리그마는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곧 사람이 전하는 말씀을 의미한다.



 로고스(LOGOS)

 하나님의 의도하심’, ‘계획’, ‘뜻’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안에 있는 것

 뤠마(Rhema)

 로고스가 표현된 것으로 바로 사람으로 나타난 것을 말하는 것

 케리그마(Kerygma)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곧 사람이 전하는 말씀 / 사람으로 표현된 말씀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뤠마를 말하며,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사람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을 ‘뤠마’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첫 번째 아담에게 생기 곧 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 만드시고 만족하셨던 그 모습의 본체이시고, 또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인 자신에게 원하시는 정체성을 회복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신 것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의와 뜻이 사람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내용이자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셨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회복하여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내용이 자기 삶이라는 육신을 가진 형식으로 표현해 내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인생의 본질이고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신앙과 믿음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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