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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대화를 하시면서 “내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느니라.(요 8:58)” 하심으로 유대인들을 놀라게 하신 말씀이 있는데, 지금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주가 됨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육신의 족보로 보면 다윗은 말할 것도 없고 아브라함이 예수님보다 훨씬 앞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아닌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것을 인정해도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사시는 시대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보이지도 않는 가마득한 옛날 사람인데 아브라함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라고 하시고 또 모든 유대인들이 왕 중의 왕으로 인정하는 다윗인데 그 다윗에게 예수님께서 주가 되신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건 상식적으로 보면 당연히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이렇게 말이 되지 않는 것을 그저 ‘예수님이니까…’라며 믿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그건 믿음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는데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와 상관이 있는 것이라서 하신 말씀이니 더더욱 그렇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보다 다윗보다 먼저 되고 주가 되시는 것은 육신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가지신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은 아브라함 아니 아담보다 먼저 있었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인생의 본질이기에 다윗 아니라 어떤 위대한 자도 다 그 정체성에 따라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집을 지을 때 완성된 집 보다 집에 대한 설계도나 아니면 집 주인이 생각하는 집의 모양이 먼저인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에 대한 계획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말한다. 즉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해낼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 그 정체성이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보다 그리스도가 먼저인 것이고 그리스도가 주가 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도 그것 때문이다. 사람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예수님 안에 가지고 오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신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육신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실 때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그대로 있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그저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아들 삼으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한 것이 나의 것이 된다는 것, 나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여기시는 성품을 가진 자로 살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지신 정체성이고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 하나님의 의와 뜻은 세상이 만들어질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이유이므로 모든 인생보다 당연히 먼저 있는 것이고, 모든 인생의 주인과 같은 하나님의 의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본체이시니 당연히 아브라함보다 먼저고 다윗의 주인이시며 또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에게 영원한 표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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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34-40 가장 큰 계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7. 27. 14:10 Writer : 김홍덕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서 모여서는 예수님께 자신들도 다소 엉뚱한 질문을 예수님께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느 계명이 큰가?”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질문은 질문 자체로서 아주 멍청한 것이다. 왜냐하면 계명에 크기와 중요도가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계명에 크기와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들이 계명을 지켜보면 지키기 어렵다는 것이 있고, 또 지키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결과가 큰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명이라는 앞의 여러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모양과 내용이 행동 규범 같아서 그것을 몸으로 지켜내면 계명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그렇게 지키려 했고 그런 그들의 생각을 예수님께서는 늘 경계하셨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다는 것은 계명의 본질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명은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이 있으면 삶으로 나타나는 삶의 행동의 모양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이 계명이지 계명을 지킨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계명에 크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신념을 가지고 계명을 지켜보려 하면 어려운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생명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크기가 다르게 여겨지지 않는다. 생명체가 보여주는 행동은 그 생명의 DNA가 있고 살아 있으면 어느 것이 중요하고 어느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한대로 그대로 다 표현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신명기 6:5절의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이 두 말씀이 모든 율법의 전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계명만 있다면 계명의 모든 것이 다 지켜진다는 말씀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생명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어쩌면 이렇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라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더욱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한다고 하면 내 존재의 모든 의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그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의미가 있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존재의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고, 내가 존재하는 목적과 의미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이 이루어진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하나님께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과 자신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그 사람이 인정하고 순종하고 알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살아 있다고 보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계명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정립되면 모든 계명은 자신을 통하여 표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하시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것의 뿌리요 근원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바라시는 모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다. 천하의 어떤 하나님의 계명도 다 이것에 종속된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쟁으로 치면 전쟁을 이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계명을 지키는 것은 전투를 이기는 것이고. 그러니까 전투를 아무리 이겨봤자 전쟁에 지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천하의 모든 계명을 다 지켜도 하나님과 사람의 기본적인 관계,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 가진 삶을 통하여 그 성품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사람이 수용하는 관계가 잘못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고, 또 어려서부터 율법의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쳐도(육신을 가지고 그럴 수는 없지만 그렇다 쳐도)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았다면 서로에게 충성을 다하고 지역 주민에게 최선을 다하여 수고하는 자수하지 않은 간첩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지켜야할 가장 큰 계명은 계명을 지키는 수고와 노력에 따라 크고 작은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것,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서로에게 의미를 가지는 관계를 정립하는 것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계명은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단순히 밥 퍼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밥 퍼주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계명을 논하는 것에 있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다음에 그것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 사람에게 알게 하는 것,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육신의 가난함과 같은 것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생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자신의 몸을 사랑하듯이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을 전하므로 그 사람이 인생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깨닫게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의미가 있어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할 때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오고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니 백부장이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 사건에서 그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뜻과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수고롭게 바치는 것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이미지(형상)가 표현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모든 율법의 뿌리요 DNA요 생명인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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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사두개인들이라는 종교적 파벌이 있었다. 그들의 특징은 성경에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 그 계파의 특징이라고 한다.(사두개파에 대한 상세한 사항들은 신학적 고찰을 참조) 어쨌든 그들의 지론에 따라 예수님께 질문을 한 내용이 마태복음 22장에 나온다. 질문의 내용은 당시 그들의 관습인 계대결혼(繼代結婚)과 부활에 관한 것이었다.


계대결혼이라는 것은 신명기 15장에 언급된 내용으로 형이 후사를 얻지 못하고 죽게 되면 그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서 아들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런 관습이 율법에 의거하여 있었는데 사두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부활이라는 것이 있다면 계대결혼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다 부활하고 난 다음에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마 이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부활의 불합리성을 증명하는 논리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부활이라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는 엘리야(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림)와 엘리사(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림)가 기적을 일으키긴 했지만 성경에 말씀으로 직접적으로 언급된 것은 찾기 어렵지만, 사두개인들이 있었다는 것만 봐도 부활이라는 개념은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많이 논의되는 이야기 거리였던 것은 분명한 것이라 생각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직접적으로 예수님이 부활이라고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는데 그것은 이미 그 당시 사람들에게 부활이라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기도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부활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혹자들은 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르고 우월한 증거로서 다른 종교에는 없는 부활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그것은 일면 아주 좋은 논리이기는 하지만 부활 역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의 개념과 사람들이 스스로 정의하는 부활은 다를 수 있다. 그 증거가 바로 이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서 답변보다 책망을 듣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부활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알려면 당연히 부활이라는 일이 일어난 것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사실 성경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몇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다시 다 죽고 지금은 없고, 또 예수님도 나사로 등을 살리셨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 바울과 베드로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부활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라고만 할 뿐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이 그 기준인 것이다. 그러니까 부활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같을 때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한 것을 볼 때 부활에는 나름의 조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부활은 기본적으로 죽음이 선행되어야만 일어나는 사건이다. 죽지 않았는데 부활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다시 산 것이 다시 죽지 않는 상태가 되었을 때 부활인 것이다. 성경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다시 산 것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어떤 것이 영원히 살았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바로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께 엉뚱한 질문을 했고, 또 책망 받으며 답변을 들어야 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무엇이 부활인지, 무엇이 산 것인지 모르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성경도 하나님도 모르는 것>이라고 일침을 놓으신다. 즉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안다면 자연스럽게 부활도 또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안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잘 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부활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산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 능력을 보여주시는 퍼포먼스로 행하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도, 또한 부활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운명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먼저 예수님의 죽음이 운명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그 잔을 피하고 싶어도 그리 하지 못하심과 말고의 귀를 자르는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으신 한계가 있는 신이 아닌가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한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두신 뜻이 그것이었기에 그것이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듯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하늘의 천군과 천사를 불러서 로마 군인을 물리치고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 유대인들이 바라는 왕이 되실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에게 전하려 하신 하나님의 의가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그 선택적 운명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을 인함이지 능력이 없어서나 하나님께 한계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듯 예수님의 그 죽음이 하나님이 뜻 안에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죽으셨다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유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산 것이며, 몸이 죽었다 해도 살아있다고 하실 수밖에 없는 상태이기에 그 상태에 맞게 하나님께서 조치하신 것이 바로 부활인 거서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존재이기에 몸이 죽어 있어도 살리실 수밖에 없는 존재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낸 상태인 것이다.


사람이 시계를 사는 그 뜻하는 바는 다름이 아니라 시간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다. 시계가 시간을 잘 알려주지 못한다면 모양이 아무리 멀쩡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죽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그 시계에 바라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살았고 죽었고 하는 것은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하는 목적을 이루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육신이 의학적으로 살았다고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 만드신 목적이 그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와 같다면 산 것이고, 그 사람의 육신이 설령 죽어도 그 목적이 온전하다면 살았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하나님의 뜻 뿐 아니라 사람들 세계에서도 고귀한 죽음을 당한 이들의 정신이 오늘 우리에게 살아 있다고 하는 것에서도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인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부활이나 거듭남이나 신앙에 있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다 생명의 세계에 관한 것이다. 부활도 거듭남도 구원도 모두가 어떤 것이 산 것이고 어떤 것이 죽은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대한 기준과 법과 의를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이 모든 것의 결정권은 하나님의 기준이다. 즉 사람이 볼 대 죽은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실 때 산 것은 산 것이고, 사람이 볼 때 살아 있는 것이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것이 있다.


성경에서 많은 말씀에서 사람들에 대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씀을 많이 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육신이 죽었다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는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한다는 것은 그 사망이라는 것이 육신의 죽음과는 다른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즉 사람이 육신으로 살아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상태에서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다고 하는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것과 같은 가치관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가치관으로 큰 바다를 건너듯 옮겨가는 것이 바로 구원의 시작이고 부활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하나님이 보실 때 무엇이 산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단순하게 육신이 다 살아나면 육신의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묻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가치관은 하나님이 가지신 생명과 죽음과 부활의 가치관이 아니라 그저 사람이 생각하는 가치관 그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경도 하나님도 모른다고 하신 것이다.


사실 이 사두개인들의 가치관은 지금도 존재한다. 비록 사두개파는 지금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하지만 부활에 대하여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그 시절의 사두개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두개인과 별반 차이가 없는 부활에 대한 생각은 의외로 기독교 안에도 만연한 상태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그러니까 부활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육신이 나중에 예수님 재림 때 이전과 같이 살아난다고 생각하는 모든 생각이 다 사두개인들의 사고와 같다는 것이다.


이 사두개인들은 부활이라는 것이 육신의 삶에 종속된 가치관으로 보고 있다. 부활 했는데 죽기 전의 육신의 상태와 관계가 멀쩡하고 그것을 어쩔 수 없는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뭣 하러 부활할 것인가? 죽기 전의 상태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한번 했던 것을 다시하기 위하여 부활한다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른 종교에도 없는 그 엄청난 차별이 있는 귀한 은혜의 역사가 고작 이전에 했던 것 다시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 때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 천사와 같이 된다고 하신 것이다. 천사와 같이 된다는 것은 상태에 관한 것이다. 천사는 영적인 존재이고 하나님의 의를 갈등 없이 자연스럽게 나타내는 존재이다. 즉 부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이 된 상태가 된다는 말씀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죽은 자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세계,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세계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거듭남도 부활도 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시다. 산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정체성이 온전히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다고 하는 자들만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의 그들의 하나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육신의 관점에서 보았다. 즉 육신이 죽고 그것이 다시 사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이란 그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세계로 가는 것 그것이 부활이고, 그 세계에 속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안식하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산자의 하나님이요 부활 때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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