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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9. 18. 13:43 Writer : 김홍덕

왜 아버지와 아들인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삼으신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영이신 하나님, 형체가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리고 왜 아들인가? 딸은 없는가? 또 아들은 있는데 어머니는 왜 없는가? 같은 의문들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아주 초보적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또 명확하지 않은 것들이다.


어떤 일은 볼 때는 정확한 관점이 있어야 한다. 봐야할 것을 보지 않으면 이상하고 의문스럽지만, 정확한 관점에서 본다면 전혀 이상하지 않고 너무 자연스럽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인치 나사와 미리 나사가 있는데, 그것은 아무리 끼워 넣으려 해도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왜 아버지인지, 왜 어머니는 없는지, 또 왜 딸이 아니라 아들인지도 이와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어떤 절대적인 관계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아버지가 있다. 누가 아버지인지 전혀 모른다고 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뿐 아니라 아버지의 성격이나 또한 신체적은 유전도 있어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하게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아버지 뭐 하시노?”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단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아버지의 존재 유무를 따지지 않고 하는 질문이고, 아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아버지의 성품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묻는 질문인 것이다.


즉 아들은 아버지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고, 또 아버지의 성품을 나타내는 형식인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아들은 아버지가 가진 본성이나 의라는 무형의 내용이 아들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가진 의가 아들이라는 생명이 같은 존재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는 사람인데 아들은 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듯이 아버지가 가진 의가 같은 생명을 가졌고 형식을 가진 아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혈통으로 아들이 아니어도 자신이 가진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 제자와 같은 이들 중에서 자신이 의도한 것을 잘 표현하는 이들을 보고 아들이라 칭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가진 생각을 형식으로 실존으로 표현해내는 존재가 바로 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씀’은 LOGOS이다. 이 LOGOS는 ‘계획하다’, ‘뜻하다’와 같은 의미의 어원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든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냄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이미지(형상)를 나타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 첫 열매가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와 법을 나타내면 아들이 되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와 법이 표현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법이 아니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떤 것도 그렇게 될 수 있는 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8:15, 8:23, 9:4)에서는 ‘양자’라는 이해를 돕는 표현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법은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삼으시는 법 어디에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라는 것이 있는가? 다만 남자와 아버지라는 것은 혈통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의라는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사람으로 알게 하시기 위하여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에서 비롯된 것이지, 육신으로 남자라는 것과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들이라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의를 그렇게 표현하신 것일 뿐이다.



어머니 하나님? 그건 본질을 모르는 소리



하나님이 왜 남자냐? 여자 없이 어떻게 아들을 낳느냐? 하는 의문은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이지 의미 있는 질문이나 의문은 아니다. 남자와 여자,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사람의 세계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셨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이미지를 나타내려 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들이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사람의 모양은 본질이 아니라, 사람이 그렇게 창조되고 관계를 또한 혈통을 이어가는 본성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그 의를 표현하셨기 때문이지 그 모양과 사람의 관계들이 본질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자 정체성의 본질인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육신을 가진 삶이 온전히 하나가 될 때 온전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인생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는 알지 못하고 표현된 것만을 본질로 보다보니 엉뚱하게 ‘어머니 하나님’이라든가, ‘왜 딸은 없느냐?’ 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문을 가졌다가 그 해답으로 ‘어머니 하나님’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받으신 세 번째 시험을 전혀 이기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그런 의문을 가진 것만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어머니 하나님과 같은 표현으로 믿지 않고 그냥 아버지 하나님으로 부른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겪는 문제의 해결에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 역시 신앙의 본질을 육신의 문제에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고 해도 그것은 본질을 모르는 것이라는 것에서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의에 관한 것이다. 육신은 그 의가 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의를 알지 못하면서 표현된 육신의 상태만으로 보는 것은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천하 만물을 보여주는 사탄을 경배하고 절을 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이 그것이다. 무엇이 본질인지 모른다면? 또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는다면, 어머니 하나님을 믿는 이들을 이단이라 비난하는 것도 웃기는 것이다. 어차피 본질을 모르는 것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심판 날에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신 “주여! 주여!” 외친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이 가진 삶의 본질이자 내용이라는 것을 믿고 받아  들이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릇을 채우는 것과 같고 성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본질로,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순종한다는 것은 육신의 문제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육신은 본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표현되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육신의 행동을 바르게 하므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본질이 되고 본성이 되므로 육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되는 하나님의 의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자기의 기준이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에 대한 기준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또한 다들 그것을 믿는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는 것이다. 교단 회의에서 싸우거나, 교회가 분열이 일어날 때 보면 정말 가관이다. 서로 자신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고 상대를 마귀라고 몰아붙인다. 그리고는 결국 세상의 법정에 가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정말로 상식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세상의 모든 다툼의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이것 외에 세상에서 다투는 이유는 절대로 없다. 그것은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그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의 바탕에서 나오는 생각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해도 결국은 선악과를 먹은 생각이다. 그것이 교회를 위하는 것이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든, 영적 전쟁이라 하든 뭐라고 해도 다 선악과를 먹은 원죄의 열매일 뿐이다. 뿌리가 사과나무인데 배가 열리겠는가? 그런 생각이 표현되는 것은 그 아버지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선악과이고,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생각이 아버지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의가 삶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람의 본 모습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신 뜻과 의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모습을 가진 사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내게 하는 본성이 바로 하나님의 의다. 이 의(義)는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를 말한다. 이것은 사람이 가진 원래의 모습이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모습이고, 또한 사람이 가진 연약함이나 부족함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한다는 것을 대단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은 사람이 가진 정체성을 부인하고 더 나은 곳, 자기가 생각하는 더 나은 정체성으로 가려는 생각, 그것이다. 사람은 자손을 얻기 위하여 성욕이 있는데 이것을 목적과 본성에 무관하게 일괄된 욕구나 악으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식욕이 없으면 죽는데도 먹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먹으면서 기도하는 것보다 무조건 나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생각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본성은 악한 것이니 더 나은 것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벽돌을 쌓아서 하늘에 이르려고 한 것이다. 인간이 가진 본성을 넘어 하늘에 이르면 모든 인생이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즉 사람이 가진 연약한 본성과 욕망을 가지고는 하나님께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생각이 바로 선악과를 먹고서 본 인간의 정체성이 부끄럽게 여겨졌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사람들이 그렇게 떠나려고 한 인간의 육신을 가진 모습, 그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육신을 가진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 즉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가진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온전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그렇게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의 모습,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강한 것에는 사랑이 없다. 강하고 위대한 것은 부럽고 열광할 수는 있지만 사랑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연약함이 있어야 사랑이 있다. 위급을 피할 수 있는 주력을 가지고 도망가는 사람에게 사랑이 느껴지겠는가?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달리지 못하는 사람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사랑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신 것이 바로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다. 바위를 쪼개는 바람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사람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하지만 연약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미세한 음성은 사람이 들을 수 있기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의를 나타내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 의가 삶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위대하고 놀라운 것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의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남루한 목수의 아들을 보니 어느 한 구석 경건하고 위대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니 죽여 버린 것이다. 즉 인간의 연약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니 죽였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그 의 앞에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며, 그것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성공하고 위대해질수록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오히려 그렇게 위대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의요 영광이며 아들이 된다는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되는 의가 하나님의 의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사람의 부족함을 뛰어 넘어 위대해져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는 모습,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 삶으로 표현해 내는 본성을 가진 이가 바로 하나님의 의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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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 (5)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9. 17. 14:57 Writer : 김홍덕

남자와 여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을 때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것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선택지 중에서 어떤 선택을 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두 개의 성(性)이 아니라 영화에서처럼 세 개의 성(性)이 있어야 생식이 되도록 하실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즉 영이신 하나님은 내용으로 그리고 그 내용을 표현할 형식으로 세상과 사람을 만드셔서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그 본성을 나타내신 사람을 만들다보니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본성을 따라 남자는 명분을, 여자는 형식과 꾸미는 것에 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의 기능이나 역할 혹은 능력의 비교나 우월을 가리는 근거는 아니다. 목적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남자 아니면 여자다. 즉 누구나 내용과 형식 중 하나의 역할로서 다른 하나가 있어야 하는 절대적인 본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것 그것이 남자와 여자로 사람이 구성된 목적이다. 영이신 하나님이 세상으로 표현된 것이 하나님의 본성이기에 그 본성이 표현되고 비롯된 사람의 구성도 같은 뿌리에 있기에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성을 가늠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나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요 이미지가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양대 전자 회사인 삼성과 엘지를 놓고 보면 두 개의 회사가 만든 제품을 보면서 ‘삼성스럽고, 엘지스럽다’ 고도 한다. 꼭 어떤 것이라고 집어 말하는 전문가도 있지만, 굳이 전문가가 아니어도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회사의 경영철학과 제품에 대한 철학이 제품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 두 회사는 광고도 다르다. 삼성은 삼성의 제품을 사용하는 것은 어떤 자부심을 주는 것처럼 광고하고, 엘지는 편리하고 실용적이며 친근하다는 이미지의 광고를 한다. ‘사랑해요 LG’, ‘삼성이 만들면 다릅니다.’와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즉 삼성이나 엘지가 가지고 있는 무형의 경영철학이나 제품철학이 제품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형상이다. 그것이 바로 이미지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자동차는 “이동”이라는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이고, 시계는 “시간을 알고 싶은 마음”이 표현된 형식이다. 모든 그릇은 그릇 자체로 의미가 없고, 그 안에 목적하는 것이 담길 때 의미가 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내용과 형식이다.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법이 세상의 기본법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이 내용이신 하나님을 표현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 법아래서 창조된 세상, 그리고 그 세상이 만들고 조합해 내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이 법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어떤 세포도 그 사람의 DNA를 벗어 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것은 사람은 사람을 보면 하나님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시계를 보면 사람이 시간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 사람을 만드셨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이고 이를 남자라고 한다. 그런 사람이 혼자 있으면 좋지 못하다고 하셨다. 즉 내용이 내용으로만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내용은 반드시 형식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혼해서 살면서 이 법을 알면 의외로 결혼 생활이 풍요롭다. 원리를 알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 절대적인 결핍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마치 그릇과 같은 것이다. 남자에게는 여자로 채울 그릇의 빈 공간이 있고, 여자에게는 반대로 남자로 채워야할 빈 공간이 있다. 그것은 형식 없는 내용이 의미 없고, 내용 없는 형식 또한 의미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녹일 물질이 있으면 뭐하겠는가? 담을 그릇이 없는데, 모든 인류를 배불리 먹게 할 아이디어가 표현되지 않고 머리에만 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또한 이동이라는 내용을 이행하지 못하는 자동차는 그저 고물일 뿐이다. 그와 같이 내용은 형식을, 형식은 내용과 하나 되어야 하는 절대적인 결핍이자 운명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 남자나 여자로 살면서 이성에 대하여 느끼고 경험함으로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법, 곧 영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이라는 형식, 세상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신 비밀을 알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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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 (4)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9. 14. 14:14 Writer : 김홍덕

간음과 우상숭배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서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상대와 관계를 가지는 것을 간음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간음을 성경에 많이 언급하셨다. 사람들이 간음한 것을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신 것이다. 호세아와 같은 성경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신을 사람이 섬기는 것, 하나님의 의가 아닌 것을 자신의 의로 삼는 것은, 마치 혼인한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이와 성적인 관계를 가진 것과 같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식과정은 여자가 남자로부터 유전자를 몸 안에 받아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낳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혼을 통하여 자신들의 짝을 정하고 남자는 정한 여자에게서 자녀를 얻고, 여자는 정한 남자의 유전자를 자기 몸 안에 받아서 남자의 혈통을 가진 아이를 얻는다. 바로 이렇게 서로가 정한 짝이 아닌 상대와 관계를 가지게 되면 그것을 간음이라고 한다. 바로 이러한 간음을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길 때의 모습과 같은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은 육신의 여자가 남자의 씨를 받아서 아이를 잉태하듯이 하나님의 의를 들음으로 그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이 마치 아들이 아버지의 존재를 증명하고 성품을 표현하듯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고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인데 그렇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고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아닌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것이 마치 자기가 정한 남자가 아닌 다른 남자의 씨와 유전자를 자신의 몸 안에 받아들이는 여자와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서 여인과 같다. 호세아서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장가를 드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남성을 가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하나님의 의를 듣고 그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으로 거듭남이 여인이 남편으로부터 유전자를 받아서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러한 관계를 설명하기는 말씀인 것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내용을 표현해 내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으면 마치 여자가 남편을 두고 간음한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마치 휘발유를 넣어야 하는 자동차에 경유를 넣는 것과도 같고, 인치 너트에 미리 볼트를 넣는 것과 같아서 모든 것을 다 파괴하는 것과 같다. 즉 내용과 형식은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형식은 그 내용의 가진 정체성과 표현하고자 하는 목적에 적합한 형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형식은 또한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내용을 수용하여야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와 다른 존재가 되었다. 바로 선악과를 먹고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한 것이다. 즉 사람이 내용의 본질이 되려 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신의 삶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스스로 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낳은 결과는 자신이 되기로 한 사람의 존재 목적을 기준으로 무엇이 선한 것인지 무엇이 악한 것인지를 자기가 결정을 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형식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스스로 정의했다는 것이다. 형식이 내용을 스스로 정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문제들이 생겨났다. 먼저 사람(아담)이 자신의 모습을 보니 자기가 스스로 부여한 삶의 의미를 달성하기에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운 모습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무엇이 선한 것인지에 대하여 가인과 아벨처럼 서로 의견이 달랐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과도 의견이 달랐다. 그러자 서로를 미워하고 심지어 죽이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은 서로가 같은 것에 대하여 서로 다른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므로 흩어질 것을 알고 그것을 막으려고 탑을 쌓으려 했지만 이미 서로의 말이 달라졌다. 선과 악의 기준이 다르니 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동상이몽과 같은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상태를 하나님께서 언어가 달라지는 것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사람들은 막무가내가 되었다. 사람의 딸들(세상의 것)을 자기의 아내 곧 자신을 표현할 형식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도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간음이고 우상숭배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지으셨다. 그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마음을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려 하신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그 자체도 중요한 관점이지만 사람은 위대하거나 강함을 보이기 위하여 지은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사람은 바위를 쪼개는 바람이나, 돌을 태워 버리는 강함에서 하나님을 만나거나 그런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미세한 음성 가운데서 하나님을 들을 수 있고, 연약함을 돕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된 사람의 정체성을 버리고 자신이 수용할 수 없는 내용을 담다 보니, 그 내용이 가진 기준에 자신의 모습이 턱 없이 부족하게 보이는 것이다. 잠을 자지 않고 기도해야 좋은 신앙이 된다고 하니 그렇게 해 보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되지 않으면 자신의 신앙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삶은 감자를 먹는데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이 선하다는 생각과 설탕에 찍어 먹는 것이 선하다는 생각이 만나니 부부가 이혼하는 것이다. 자기 기준이 생긴 것이다. 즉 사람이라는 이 하나님을 표현할 형식의 정체성과 의미를 스스로 정한 것이다. 마치 결혼한 여자가 남편 아닌 남자의 유전자를 자기 몸속에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셨을 때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즉 사람은 스스로 보기에 늘 부족해 보이는 이 육신을 가진 삶이 부족해 보이고 연약해 보이고 심지어 추해 보이기까지 하여 스스로 그것을 감추려고 온갖 노력을 하지만 하나님은 원래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다. 그러니까 사람의 그런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보기 좋은 것이고 온전한 것이고 강한 것이다. 약할 때 강함 주시는 것은 약할 때 갑자기 강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약함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강한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스스로가 볼 때 연약해 보이는 이 모습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시기에 가장 합당하게 여기시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부정하고 다른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고,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진다는 것이다. 강한 것,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과 같은 것이 자신의 남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과 다른 것이다. 즉 자기 남편이 아닌 것이다.


수가성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남편을 데리고 오라 했을 때 여인이 남편이 없다 했고,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으나 네 남편이 아니고, 지금 있는 자도 아니라’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수가성 여인은 목이 말랐다. 마치 세상의 돈이나 명예를 끝없이 좇는 사람과 같이.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네 속에서 생수가 넘쳐날 것이다”라고 하셨다. 즉 사람이 여인에 정해진 남편과 하나 되듯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존재 목적을 자신의 내용으로 순종하면 살면서 정체성에 대한 갈증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내용은 하나님의 의다. 그것은 결혼한 여자의 남편과 같은 것이다.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을 이루듯 사람이라는 육신을 가진 존재는 영이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형식으로서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즉 하나님의 의와 말씀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또한 자신이 가진 형식의 내용으로 순종할 때 갈증도 없고 만족하고 행복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의 모습 그 자체를 벗어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를 순종하는 것,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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