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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은 <불확실성>이다. 사람은 내일 자신이 살아 있을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또 반대로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모든 종교가 멸망하지 않는 절대적인 동력이다. 물론 사람이 가진 불확실성은 종교에만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보험과 같이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도 불확실성은 오늘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하게 하는 동력이다.


신앙, 특히 기독교 신앙에서 종말론적 신앙관은 사람이 가진 불확실성이 극대화된 문제일지 모른다. 그러다보니 의외로 그럴 것 같지 않은 지식인들조차 쉽게 빨려 드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더 안다는 것은 불확실성이 더 증폭된 것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1992년 우리나라를 휩쓴 다미선교회의 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종말론적 신앙은 이 시대 혹은 21세기나 세기말적 신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던 그 때도 사람들이 그것을 염려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망할 것이라고 하니 우선 제자들부터 ‘이제 세상이 망하는구나!’ 생각하고 예수님께 그 때가 언제인지 물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세상이 망하는데 그 때를 안다고 그것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세상이 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저변에 깔린 것이 종말론이다. 다만 그것이 언제일지, 특히 자기가 살 동안 그런 일이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 신경을 좀 쓰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은 이 세상이 언젠가는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 틀림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세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니까 망할 것 같은 세상, 그 세상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고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일구었던 것이나, 꿈을 가지고 준비하던 것이 망하면 세상이 무너졌다고 한다. 그것에서 우리는 각 사람은 자기가 정한 세상, 자기가 생각한 어떤 것이 되지 않으면 세상이 망한 것과 같다는 그런 자기들의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먼저 그런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아는 이 물리적인 세상, 현상계인 세상이 있다.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인 이 지구와 그 안에 모인 사람들이 사는 이 지구별, 그 세상이 있다. 종말론적 신앙에서 언젠가는 망할 것이라는 그 세상이 바로 이 세상이다.


그리고 또 하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세상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세계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고 하나님의 법이 세상을 움직이는 기본법이 되는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 천년왕국과 같은 것으로 표현한다. 그 모든 표현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의가 법이고 모든 것인 나라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세상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멸망할 세상, 끝이 올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 단초가 될 것이다. 이것을 구분 못하면 사람들의 불확실성이 이상한 신앙으로 삶을 끌고 가기도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 제자들이 와서 ‘세상의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물은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 망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연고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 망할 것이라고 하니, 예루살렘이 망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망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또 세상이라는 것이 이 물리적인 현상계로 인식(두 가지는 같은 뿌리임)하고 있었던 제자들로서는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끝이 되면 전쟁과 기근이 일어난다는 것과 같은 여러 징조를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세상의 끝이 임할 것이라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들에서 주의 깊게 볼 것은 그런 징조가 끝이 아니라, 세상의 끝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에는 아이러니한 것이 있는데 기독교인들은 빨리 온 지구에 기독교를 전하면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생각하고 힘내자고 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지구 종말을 앞당기자는 소리가 될 수 있고, 또 역설적으로 그렇다고 종말을 막기 위해서 복음 전하는 것을 천천히 하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 되는 것이다.


정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의 끝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면 바로 여기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앞에서 세 가지 세상을 이야기 했었는데 예수님께서 끝이 오리라고 한 세상의 기본은 자기가 세상으로 여기는 세상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세상이 무너진 것과 같다고 여기는 자신의 세계, 자기의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끝이 나야 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어떤 것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망한 것과 같이 여겨진다는 것은 그 일이 자기 뜻대로 되었을 때 제대로 되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뜻대로 되었을 때 의롭고 선하고 바르게 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기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나고 더 크게는 세상이 망한 것과 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일에 대하여 자신의 의지가 반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나라에서 의지가 반영되는 권세를 가진 사람은 왕이다. 그러니까 자신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일에 대하여 자신이 왕인 세상이라는 것이다.


큰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 그 시험에 사활을 거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리고 그는 그 시험만이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해 보자. 이것은 가정 같지만 실제로 이런 사람은 너무나 많다. 그리고 그것은 꼭 시험이 아니라도 그런 일은 공기만큼 많이 있다. 그 사람에게 있어 자신이 시험이 되는 것은 절대 선이다. 자기 기준에 자신이 시험에 합격하면 세상은 자기 것 같고, 세상이 바르게 된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시험에 낙방했다면 세상을 잃은 마음이 들고 세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시험 결과에 대하여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이미 가졌다는 것이다.


가끔씩 뉴스에서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았다고 불을 지르는 것과 같은 일들을 듣는다. 때로는 그 일이 정말로 동정이나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반문한다면 누가 그에게 그가 생각하는 일이 그의 뜻대로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자신과 연관된 세상, 바로 그의 세계의 왕이 된 것이다. 그것도 스스로.


예수님께서는 어떤 이들은 바로 그런 세상이 끝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복음이 자신의 세계 전반에 퍼져서 자신의 모든 세계와 삶이 하나님의 복음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자기가 왕이 되고 자신의 뜻대로 되어야 선한 것이 되는 그런 세계는 끝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계가 끝이 났을 때 비로소 예수님이 자기 마음에 오시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예수님의 재림인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신 것과 무관하지 않다. 아니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세우겠다고 하신 예수님이 그 마음 안에 본성으로 거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 성전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용은 없이 형식만 지키고 무엇이 본질인지 알지 못하며 지은 자신의 세상과 자신의 성전이 무너지면 그 위에 예수님께서 진정한 성전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왜 사는지도 모르면서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랑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사랑하고 치장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 성전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왜 사는지도 모르면서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고 가꾸고 준비하고 열심인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삶이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없이 무너지듯이 끝나버리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의 끝이고 그 끝이 있어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끝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진 가장 큰 불확실성은 사실 미래가 아니다. 실은 왜 사느냐 하는 그 불확실성이다. 매일 눈 뜨고 일어나사 숨을 쉬고 또 하나님 계시지 않는 성전을 날마다 지극 정성을 섬긴 유대인들처럼 왜 사는지도 모르는 자신의 삶을 죽어라 살고, 더 안타까운 것은 왜 사는지도 모르는 그 삶을 살면서 ‘네가 선하니, 내가 선하니’하면서 서로를 정죄하는 자신이 하나님이 된 기준은 또 어찌나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고 사는지 놀랍지만 안타까운 것이다. 바로 그 주장이 세상의 모든 시끄러움과 갈등과 죄의 원인이라는 것을 모른체.


게다가 그 불확실성을 “카더라” 이론에 의지하여 자신의 삶을 맡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이든 불경이든 그 경전이 자기 안에서 확신이 되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생수의 강이 자기 안에서 넘치듯이 말씀에 확신을 가진 것이 아니면서 교회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하니, 또 ‘절에서 그러라.’고 하니 그런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자신이 가진 불확실성이 다 해결되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건 실로 엄청난 도박이다. 죽기 위해서 고층에서 떨어지다가 후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성경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불경과 같다는 것도 아니다. 성경이 정말로 자신의 이야기로 들리는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확실하게 자신의 것이 되었는지, 성경을 읽으면 자기 자서전과 같고 일기 같은지, 나의 모든 모습이 성경에 있는지 전혀 확신하지 못하면서 그저 성경을 학문으로 공부한 사람들의 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 모습이 자기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사람이 되라고 성전을 주신 하나님은 자기 안에 없는데 성전에서 예물을 드리면 모든 것이 해결 된 것으로 여긴 유대인들과 같은 것이다. 또 자신이 성전이 되는 것, 그러니까 자기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너무 귀해서 그것이 금과 같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성전 기물을 금으로 만들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모르니 성전으로 맹세하면 구속력이 없고, 성전 금으로 맹세하면 구속력이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성전,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성전과 예루살렘 성이 상진인 나라요 세계가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 사는지도 모르면서 삶에서 만져지는 것들이 인생의 본질이라 여기면서 그것에 목숨을 걸며 살아가는 그 세계, 자기의 뜻대로 되었을 때 선한 세상이라고 여기는 그 가치관이 주인인 세계, 바로 그것이 무너지고 끝을 맞이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재림, 곧 자기 마음에 예수님이 임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모든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것이다. 십자가를 보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생각이 나고, 자기가 주인인 세상, 자기 가치관이 선이라고 여기는 자기만의 안목과 가치관이 무너지고 성령께서 사람 마음 안에서 예수님의 모든 것이 생각나게 하시고, 그 예수님의 본성이 자신의 모든 삶, 자신의 모든 세계, 곧 온 땅에 복음이 전해질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길목에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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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이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지금으로 치면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의 성전이나 지금의 교회나 신앙의 상징인 것은 차이가 없다. 다니엘에 성전이 있는 곳을 향하여 창을 열고 매일 기도한 것에서 그런 것을 볼 수 있고, 지금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성전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과 생각이 예수님과 달랐다. 아마 이것은 지금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가진 생각과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회가 다르다는 점에서 유대인들의 성전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단순히 그 때 그 말씀으로 볼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오늘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 대한 말씀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신앙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을 책망하시듯 예언하신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정치, 군사적으로 패망하는 것에 관한 예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실 때 예루살렘 성전이 보기에는 성전의 모양을 갖추고 있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제사가 드려지는 등 성전의 기능이 유지되는 것과 같지만, 결정적으로 하나님께서 왜 성전을 지으라고 했는지 그 성전의 존재 목적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말씀하신 것이 핵심이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은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시계가 버려지듯, 존재 목적이 상실된 것이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멸망할 것이라고 하신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성전이라는 것의 기본 개념이라고 할까? 그 정체성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 성전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사람들에게 지으라고 하신 것은 돌로 지은 성전을 잘 지으면 하나님께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그 안에 편하게 계시면서 고기 태우는 냄새나 맡고 계시겠다는 계획을 완성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려 하신 목적과 이유가 무엇이었든가?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 형상은 하나님의 이미지인데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게 하시기 위한 것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흙으로 지어진 육신을 가지고 살면 그 삶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떠 올리게 하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그 존재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하셨고 그것이 생령이 되었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 넣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바울 사도는 우리 몸이 성전이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 안에 넣으신 하나님의 생령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여기는 생명의 본성이라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생명이고 하나님이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돌로 지은 성전이나 이 시대의 화려한 교회에 거하시기 위하여 지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기 원하시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성전을 지으라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에게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지으라고 하면 사람이 그곳이 어디든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실 때 비로소 성전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지으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성전을 지어 놓고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즉 구약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은 제물을 하늘의 불로 태우시는 것으로 나타나셨는데, 이것은 성전이 아무리 멀쩡해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거하실 때 성전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때는 그냥 돌로 지은 건축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아무리 의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멀쩡히 살아 있고 또 기능과 능력이 출중하다 해도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창조하시고 이 땅에 보냈는데 그렇지 못하면 그건 아무리 멀쩡하고 능력 있어도 죽은 것이고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서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이 망하듯이 버려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주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그 안에 없는 인생을 쫓겨날 것이라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즉 버려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이나 사람이나 그 안에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신 목적이나 사람 지으신 목적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건축물과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을 늘 사망 가운데 있는 죽은 인생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전이나 사람이나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하는 짓이 다 죄가 된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예루살렘 성전은 선지자를 죽였고, 하나님의 의가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삶 자체가 모조리 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안에 거해야 하는 정체성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외식하는 자요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신 것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데 겉만 번지러한 성전이나 하나님의 의는 알지 못하면서 율법적인 행실만 화려한 바리새인이나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성전과 유대인들이 다시 회복되려면 예수님이 찬송 받으실 분이요 주의 이름, 곧 하나님의 정체성을 가진 분으로 만나질 때까지는 다시 예수님 곧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안에 있어 육신이 되신 분을 만날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말씀이 아닐까?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그 때 그 말씀이나, 이스라엘에 로마에게 완전히 멸망할 것을 예언하시는 예언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시대라도 이 말씀을 읽고 보고 듣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 사람은 성전이 무너짐과 같이 다 죽은 자와 같다는 것과, 교회 아니라 교회 할애비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거하는 사람이 모여 있지 않다면 그건 그냥 돈 자랑 하는 건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시대 사람들이 정말로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생각도 놀랍도록 똑같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행실을 경건하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 생각했듯이 지금의 사람들도 주일날 돈 쓰지 않고, 새벽기도회 가고 졸더라도 예배에 가면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렇고, 예루살렘 성전을 경건히 여기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교회는 유행가를 부르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는 건물이 아니라고 여기고 또 교회를 화려하고 사람들이 와서 편하고 좋게 여기게 지어 놓으면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똑같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너무나 화려한 건물이었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니 무너졌고, 유대인들의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고 경건하고 도덕적이고 모범적이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있어 그 생명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에 예수님께 늘 책망 받고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듯이, 지금도 교회가 아무리 번듯하고 음향 시설이 좋고 의자가 너무 편하며 화려한 PT 등이 지원하며 성악 전공자들로 가득한 성가대가 노래하고 신학적 스펙으로 충만한 설교자가 설교한다고 해 본들,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고 그런 사람이 모였을 때 교회가 된다는 것을 모르면 모든 것이 거꾸로 된 것이고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하신 말씀의 본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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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 당시에 그 이전 시대의 선지자들을 기리며 비석을 세우고 의인으로 추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에 대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변호하면서 자신들이 만약 자신들이 추모하는 선지자의 시대에 살았었더라면 자신들이 추모하는 이들이 피 흘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럴 리 없다고 잘라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의 그런 생각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미 비유로 당시의 유대인들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잡아 죽이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 21장)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벨의 때부터 선지자 사가랴의 때까지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을 죽인 모든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스스로 강도 바라바 대신에 예수님을 죽여 달라고 하면서 그 책임을 자기들이 지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이 이전에 살았다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외식이나, 본질을 모르는 그들 안목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인 하나님의 법이 다양하게 표현되고 나타난 것 중의 어느 하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어떤 것을 해도 하나님 뜻의 근본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 늘 책망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의 법은 생명의 법이시기 때문에 생명의 본성과 같이 역사하신다. 생명의 법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은 생명이란 그 생명의 본성이 있으면 그 생명이 가진 모든 것이 어떻게든 나타나며,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듯 어떤 상황이나 시절이라도 그 생명이 그 상황과 시절에 맞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는 것이 생명의 법이다.


사실 이건 아주 중요한 것이다. 물론 성경 말씀은 하나씩 떼어내서 묵상하여도 인생을 바꾸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생명의 법이라는 관점으로 표현된 것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또한 만물과 여러 가지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한 생명이 보여주는 모든 것이 그 생명의 본성에 종속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이시는 모든 것도 그와 같이 하나를 이해하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의에 대한 본질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각개전투 하듯이 종교생활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코끼리라는 생명의 본성인 DNA가 있으면 단단한 상아도 있고, 큰 몸도 있고, 풀을 먹는 본성도 있고, 네 다리가 있고, 가는 꼬리가 다 그에서 비롯되어 표현되지만, 생명의 본성 없이 코끼리를 만들거나 표현하려 한다면 상아를 만들 때는 단단한 재료를, 또 몸집을 만들 때는 가죽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이라는 것이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고, 저런 상황에서는 또 다르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렇게 해서 문제가 없으면 또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면 서로 상충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주일 성수를 주장하면서 주일에 쉬지 않는 직장을 다니지 못하게 하려 하니 땅 끝까지 전도하라는 것에 걸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신앙의 교리나 믿는 방식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은 다른 생명이 만난 것과 같은 문제인 것이다. 즉 사자의 몸에 돼지의 심장을 넣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신앙생활이 무지하게 어려워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성경은 한 하나님께서 하나의 생명으로 표현된 것인데 어떻게 그 안에서 서로 상충될 수 있다는 말인가? 생명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조상들과 자신들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그것에서 이미 그들은 생명이라는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조상과 자신들은 기본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그들이 그렇게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그 이전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생각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생명을 모르니 생명을 전한 이들을 죽인 조상이나, 생명을 모르니 조상과 자신들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 까지 같은 것이다.


또한 외식이라는 것도 다른 것이 아니다. 속과 겉이 다른 것이다. 속과 겉이 다르다는 것은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것에 국한된 의미가 아니다. 겉이 속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여주는 모든 신앙적인 모습이 생명이 그 속에 있어서 그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당연한 것은 그들은 생명의 법,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성경 말씀을 보는데 이것을 지키려니 저것이 걸린다고 느껴지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성경이 서로 상충되는 것이 있다고 보이는 시각을 가졌다는 것은 성경을 바라보는 안목에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비롯된 안목이 아니라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신학이나 학문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해결방법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생명이 없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생명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성경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생명이라는 것은 생명의 본성만 있으면 그 생명의 모든 것이 감추려 해도 표현되는 것이듯 생명의 말씀이 그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모든 것이 하지 않으려 아무리 애를 써도 게가 옆으로 걷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없듯이 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말씀은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나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시는 그 생명이 사람 안에 있으면 어기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지킬 수밖에 없는 그런 생명인 것이다. 그 생명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이고, 그것이 있으면 아무리 하나님을 떠나려 해도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며 살게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자신들이 옛날에 살았다면 선지자들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생명을 몰라서 그렇다. 생명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바닷게가 어제는 바로 걸었는데 오늘 옆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알았다면 옛날 선지자를 죽인 그 본성이나 자신들의 본성이 같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들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며, 그랬다면 하나님께서 살아있다 하는 생명을 얻을 것이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만약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상황과 시대에 따라 성경이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하나의 성경이 서로 상충되는 것으로 자기에게 의문이 든다면 자기 안에 하나의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유일하신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에는 만약이라는 것이 없다. 생명은 그냥 그 생명일 뿐이다. 단순한 것 같지만 생명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생명도 이와 같다. 그렇다는 것은 그 생명만 있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을 지키지 않으려 해도 지키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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