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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 (6)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9. 30. 10:29 Writer : 김홍덕

거짓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죄, 잘못된 것 중에 어쩌면 가장 약한 것(?)이 거짓말일지 모른다. 물론 거짓말도 내용에 따라서는 엄청난 것이 될 수 있지만, 거짓말이 다소 가벼운 범죄로 인식되는 것은 아마도 우리 생활 속에 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는 공식적으로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만우절이라는 날도 있을 정도니까. 그런데 성경에서는 의외로 거짓(말)을 좀 심각하게 다룬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거짓을 행하는 것을 엄청 싫어하시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거짓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말하거나 꾸미는 것을 말한다. 그런 관점에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거짓은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당시의 유대인들)을 보고 외식하는 자라고 하셨다. 율법을 지키는 행동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그들) 안에서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표현된 모습이 아니라, 율법에 기록된 것을 지켜내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마음 안에 있는 것과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행동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이 있다.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 하나님을 믿는 것,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서 땅에 심긴 씨가 나무가 되고 열매가 되듯 생명이 되어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 안에서 행동으로 비롯되는 것이 아닌데 행동으로, 삶으로, 절기로, 규례로 지켜내는 것은 다 거짓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정말로 싫어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겉과 속이 같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좋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사람이 어떤 표현을 해야 하는지를 아시기 때문이다. 기계를 설계하고 만든 사람은 기계가 어떤 동작을 해야 하는지 꿰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기계를 설계하고 제작한 사람은 조그만 한 오작동에도 ‘그거 이상한데…’하는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사람의 삶이 어떤 모양이어야 하는지 아시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거짓으로 보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식욕을 사람에게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먹지 않고 기도하면 신앙이 좋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먹고 싶은 본능을 주시고 그 본능으로 인하여 생명을 이어가게 하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금하고 기도하면 좋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다. 참고는 금식기도는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먹어서 하나님께서 그릇과 같은 사람 안에 들어가실 수 없게 되었을 때 비워내는 것이지 육신이 살아가면서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금식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간절함 때문에 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금식기도는 한 마디로 협박인 것이다. 좀 귀엽게 봐 준다고 해도 장난감 안 사주면 밥 안 먹겠다고 떼쓰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뜻하신 모양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이나 속박이 아니다. 자유라는 것이 마음대로 사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원초적인 이야기지만 물고기가 물 밖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실현할 수 있어야 자유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대로 사는 것은 절대로 구속이나 억압이 아니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핸드폰이 전화하는데 쓰이지 않고 못 박는데 쓰인다면 그게 얼마나 불행한 것이겠는가?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살 때 거짓 없는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신실한 사람>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자리를 버린 것이다. 그래서 죄(罪)인 것이다. 죄가 ‘자리를 벗어났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죄는 또한 빚(debt)이다. 지으신 이가 메겨놓은 목적을 이행할 빚이 있는데 그것을 살지 않아서 빚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메겨놓으신 사람의 목적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의 내용이 되시고, 사람은 그것을 표현하므로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의 이미지가 나타나도록 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시기 위한 존재인 것이다. 바로 이 자리를 벗어버린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것은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기 때문이다. 광야에 들린 놋, 곧 거울이 죄의 표상인 뱀이었듯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모습은 우리 모든 인생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부끄러워한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서 사람의 모습을 심판해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부정하게 심판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사람 스스로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과 다른 모습이 된 것이다. 거짓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존재의 목적이 상실되면 거짓된 존재가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의 모습을 싫어하실 뿐 아니라, 그런 사람은 죽은 존재라고 보시는 것이다.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시계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믿어야 할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되지 않을 때,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위장(거짓된 모습)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원래의 목적이 자신의 모습이고, 본연의 정체성이며,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믿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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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 (5)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9. 29. 12:37 Writer : 김홍덕

행함은 믿음의 표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모두가 알듯이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과정과 삶과 보이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계획이고, 말씀이라는 것이다. 말씀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모든 삶이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것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고 뜻임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사람에 대한 목적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이다. 모든 형식은 내용만 갖추어지면 그에 맞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동차는 주인이 가고자 하는 장소나 일이 생기면 가게 되고, 그릇은 담을 재료가 생기면 사용된다. 그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사람 만드신 목적만 알면 사람의 숨 쉬는 것에서 죽는 순간까지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대로 사용된다. 즉 삶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은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 목적이 자신의 존재 이유라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것이 사람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 안에 있을 때 생명이 된다. 그것이 생명인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와 같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계가 시간을 알려주고 있으면 살아 있고, 아무리 멀쩡해도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면 죽었다고 하는 것은 시계의 주인이 시계에 기대하고 의도한 목적을 기준으로 살았고 죽은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사람 역시 하나님 앞에서 마찬가지기 때문에 사람 안에 살아 있는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사람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이 사람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을 믿음으로 인한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믿음과 행함이 다른 것이겠는가? 다만 여기에는 엄연한 순서가 있을 뿐이다. 믿음과 행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믿음이 먼저이다. 사람으로 태어남이 있어야 사람으로서의 행동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먼저 계시고 사람이 그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신의 운명이고 정체성이며 자신이 살아야 할 본분임을 믿는 것이고, 행함은 그 믿음이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바로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믿음을 오해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의롭게 되고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경찰이라서 경찰차를 타는 것이고, 경찰복을 입는 것이다. 경찰이 아닌데 경찰차를 탄다는 것은 대게의 경우 범죄자이고, 더욱이 경찰이 아니면서 경찰복을 입고 경찰행세를 하는 것은 엄연한 범죄이다. 그렇듯이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운명은 믿지 않으면서, 성경의 있는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내는 것은 다 죄다. 그것은 나라에 투항하지 않은 간첩의 사회봉사활동과 같은 것이다. 그런 삶은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과 신념


많은 사람들은 믿음과 신념을 혼돈 한다. 믿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반면에 신념은 잘 되지 않는 것을 시도하는 의지이다. 아들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고 또한 자기 스스로의 의지가 필요 없지만, 사장이나 대통령이나, 장군이 되는 것은 신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노력의 결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는데 신념을 가진다. 자신이 하나님께 보인 충성스런 행동에 하나님께서 답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 착각한다. 그건 분명한 착각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신념과 착각하는 것은 사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신앙을 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수고한 것에 대하여 늘 보답이 있고, 또 수고한 사람은 보답을 기대하듯, 하나님도 그러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맘대로 하나님을 정의 내린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세상적인 가치관과 같이 수고한 공로에 보답하는 신은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이방신이지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공로와 수고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 아니라, “너는 누구냐?”가 제일 관심사이신 분이다. 누구인지만 알면 행동은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가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이것은 어느 장소에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이 무엇이냐?’라고 하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 가끔씩 변절한 사람을 대하면서 ‘네가 누군지 모르겠다.’라든가, ‘너는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다.’와 같은 말이 있다. 이것은 사람의 정체성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전에 알던 그 사람의 자리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상대를 느끼면 그 상대의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의 본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열심히 수고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게 받으시고 천국에서 살게 해 주실 거야’라고 믿거나, 믿음이 그런 것이라며 ‘믿는다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지’라고 가르치는 것은 다 경찰도 아닌데 경찰복을 입고 경찰 노릇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것을 <선지자 노릇>이라고 하셨다. 이런 모든 것은 다 존재의 하나님께 공로와 소유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소유와 공로를 드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두루미에게 접시에 담은 산해진미를 주는 것이고, 또 어떻게 보면 아버지 지갑에서 돈을 훔쳐서 아버지께 선물을 드리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수고하는 육신도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 소산을 하나님께 자기의 것이라고 드리는 것이 가당하겠는가? 그것이 또한 가인의 교훈이기도 한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생명이 되어 그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어떤 신념도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가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뿐이다. 그것을 깨닫게 되면 세상과 육신이라는 형식을 본질로 알고 산 자신의 죄를 스스로 고백하게 될 수밖에 없다. 방향이 바뀌었는데 그것은 인정하지 않고 되겠는가? 믿음으로 인한 행함은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고, 신념으로 인한 행함은 형식을 바꾸어 내용을 바꾸려 하는 것인데, 과연 어느 것이 온전한 것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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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 (4)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9. 28. 15:35 Writer : 김홍덕

믿음의 본질



사람들은 삶을 힘겨워한다. 사람에게 있어 어려운 일은 오직 하나다. 사람 사는 세상에 어려운 일이 어떻게 하나겠는가 싶겠지만 정말로 하나뿐이다. 그것은 <내 맘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이 살만한 사람은 자기 맘대로 되는 일이 많은 사람이고,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 일이 자기 맘대로, 자기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 외에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힘든 일은 없다. 세상이 자기 맘대로 된다면 힘들 이유도 없다.


이것은 명료한 정리 같지만, 여기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먼저는 사람들이 뭔가를 자기 맘대로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기계를 만들었을 때, 그 부품 중의 하나가 만든 사람의 의도와 다르게 자기 맘대로 작동하면 그것을 고장이라고 한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자기 스스로 어떤 뜻과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려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죄다. 그러니까 사람이 인생을 힘들어하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인생을 지으신 이의 뜻이 아닌 자기 맘대로 살려고 하니 힘든 것이다.


그런데, 아니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구원을 받으려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믿는 것이 신앙일 텐데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해결해주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하나님은 그렇게 해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 신앙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간첩들이 나라에 투항은 하지 않으면서 자신들끼리의 돕는 것을 우정이라고, 신뢰라고 하고, 그렇게 하면서 자신들의 결속을 위하여 나라에다가 예산을 청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상에는 순리라는 것이 있다. 자기에게 맞는 일을 하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동차에 달린 브레이크도 그렇다. 브레이크는 이동하기 위한 자동차를 서게 하는 기능으로 역기능 같아 보이지만 그것 역시 이동을 위한 순기능이다. 자기 역할을 하면 모든 것은 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사람들이 열심히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사는 게 뭐지?’라고 반문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존재하게 하신 이의 뜻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한 마디로 순리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겪게 되는 삶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고,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뜻에 순종하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육신의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다. 내세에 대한 믿음 역시 알고 보면 육신의 문제다. 육신이 살면서 가장 크게 고민하는 불확실성,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셨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단연코 말하지만 사람이 삶을 불확실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창세기 1장 1절도 시작되지 않은 삶이다. 그것이 바로 흑암이고 혼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이류를 가지고 계심을 믿는 것이다.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알면 삶의 문제는 명료해지는 것이다. 불확실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인생의 불확실성이 사라진다는 것 그것은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의 이유를 알면, 그 이유대로 살 것이기 때문이다.


망치로 고기를 집어 먹으려고 하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런데 망치로 고기를 먹을 수 없으니 하나님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지금의 믿음이고 신앙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렇게도 힘든 것이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믿음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말씀이 심령 안에서 생명이 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지키지 않으려 해도 지킬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그렇게 되겠느냐?’ 반문하고 욕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향해서 ‘나사렛에서 어떻게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너 같은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냐?’라며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의 모습과 같은 것이라는 것도 모른 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과, 그것을 나에게 알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고, 그렇게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보이심을 깨닫고, 그것을 보았을 때, 자신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보이심과 같이 자신의 삶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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