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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의 비유와 또 혼인잔치의 비유를 이어서 말씀하시니 이것이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들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 빌미를 찾으려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을 청하셨으나 택함을 받지 못했다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민의식 강한 이스라엘민족의 지도자로 자칭하는 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모욕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말에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는 말이 있는데 이윽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송사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나라를 강제 점령한 로마의 법으로 예수님께 시비를 걸어왔다. 그것이 바로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 것이냐고 함정이 있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이것은 지금도 많이 활용되는 말씀이기도 하고, 또 많은 해석을 들을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신앙인들이 세상일을 회피하고자 할 때 간혹 핑계거리로 삼는 것은 좀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지금 바리새인들과 이런 논쟁을 하고 있는 시점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때이다. 외형적으로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오신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몰랐을 뿐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지금 바리새인들과 논쟁도 하시고 또 제자들과 이전과는 다른 말씀들을 해가고 계신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한 과정을 정리하시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혼인 잔치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결박하여 쫓아내었다는 것은 사실 이전과 다르게 두드러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다르게 비유한다면 그 이전까지는 마치 로마서의 말씀과 같이 오직 의인은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말씀을 하시다가 은근히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을 함께 말씀하시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때까지 말씀으로 전하신 것을 십자가로 직접 보여주시는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 본다.(이것은 좀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줄곧 행함을 책망하시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된다고 말씀하시다가 어떤 면에서 보면 좀 갑자기 의복을 입지 않고 온 것을 책망하시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 그러니까 길에서 불러서 왔으면 된 것이지 왜 의복까지 입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관점과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니 묻겠다.>며 시비를 거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즉 바리새인들의 시비는 '예수, 이때까지 너는 우리가 형식에 치중한 것을 그렇게 나무랐는데 이제 와서 예복을 입으라고 하는 것은 어쩜이냐? 그렇다면 로마의 통치 아래 있는 우리 삶의 외모는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면 시험해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바리새인들의 시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되느냐? 아니면 행함이 있어야 하느냐?">하는 그것이다.


흔히들 전도를 해 보면 사람들은 '예수 이름을 시인하기만 하면 천국 간다면 죽는 순간에 예수님을 시인하면 되지 않느냐?'하는 반문을 하곤 한다. 그러면 많은 경우 기독교인들은 '사람이 죽는 순간을 알 수 없지 않느냐?'며 반문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임종을 난데없이 졸지에 맞이하는 것은 아니기도 한 것을 생각하면 그건 좀 궁색한 답변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믿음과 행함으로 대변되는 문제는 늘 어렵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가장 먼저 뭐가 하나님의 것이고 뭐가 가이사의 것인지 구분하는 것부터 난제다. 다른 무엇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만드셨는데 가이사의 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부터 정의 내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들에게는 뭐가 하나님의 것이냐는 논제가 있고 그것 또한 극복하기 힘들다.(하지만 그것은 신앙 안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을 가지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므로 좀 다르긴 하다.)


이쯤에서 우리는 영화 밀양의 내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엄마인 전도현의 아들을 유괴하여 살인한 살인범이 감옥에서 예수님을 믿었다. 그 사이 아들을 잃은 엄마도 아들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하여 교회에 나갔다. 그리고 큰 용기를 내서 유괴범을 용서하려고 감옥을 찾아갔다. 여기까지는 너무 좋은 내용이다. 그런데……


정작 교도소에서 만난 유괴살인범은 자신은 하나님을 믿고 용서를 받았으므로 자신이 죽인 아들의 엄마에게 용서 받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건 정말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지금 많은 교인들이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즉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시므로 교회에서 용서 받으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가이사와 하나님이 전혀 구분이 없는 것이다.


구분이라는 것은 거룩함이다. 거룩함의 뜻이 원래 그것이다. 즉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용서 받았으므로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에겐 용서 빌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믿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그것을 영화에서 잘 표현한 것이 바로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예배 중에 틀어 버린 장면이다.)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은 무엇이 내용이고 무엇이 형식인지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무엇이 본질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사람이 할 일이냐며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것이다. 정말로 근원적인 것이 있다면 세상에 것을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으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데나리온 동전 하나를 보이시면서 답변을 하신 것이다. 동전에 가이사의 상이 그려져 있었기에 그것을 확인시키고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그 데나리온 하나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으로 구분할 것인가 하는 정말로 어려운 문제가 남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데나리온 자체의 문제나, 세금의 문제나, 세상 물건 중 어떤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어떤 것이 세상의 것인지를 나누는 방법이나 비법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누가 바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쓰는 데나리온은 로마의 황제에게 드려져도 하나님의 것이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은 황소를 하나님께 드려도 세상에게 그러니까 세상의 황제인 가이사에게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은 바칠 것을 구분하라는 것이 아니라 누가 바치느냐의 문제라는 것


예수님께 책망하시는 바리새인들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본질을 오판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생각한 신앙의 본질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규례를 잘 지키느냐 하는 것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신앙의 본질이 형식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형식이라는 것이 안에 내용과 원인이 있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그냥 형식만 지키면 다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 안에는 어떤 부정한 것이 있어도 형식만 온전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들의 생각이 그렇다 보니 그들은 세금을 내는 형식이라는 것에 주목한 것이다. 세금을 내는 형식이 가이사에게 내는 모양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금을 내지 않고 하나님만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들의 그 생각이나 영화 밀양에 나오는 유괴살인범의 가치관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신앙의 오류로서 맥을 같이 하는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외모가 본질이 아니라는 의미이지 외모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슬아슬한 논리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아주 분명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외모가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말씀이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만 온전하면 된다는 이야기 아닌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리나 창녀와 같은 외모가 죄인인 사람들과 어울린 탓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 눈에는 예수님의 논리라면 사람은 창녀와 같이 음란해도 무관하고, 세리와 같이 매국적 행동 양식을 가져도 무관한 것이 아니냐는 논리이다. 그게 바로 유괴살인범의 논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또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모나 형식은 중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겉모양이 고양이라서 고양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중심이자 본질이 DNA가 고양이면 외모는 자연스럽게 고양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법이고, 생명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시니 그 중심과 본질을 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심이 하나님의 사람인 사람은 데나리온을 어디에 사용해도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다. 고양이가 배타고 바다에 간다고 강아지가 되지 않는 것이나, 독사와 양이 같은 물을 먹어도 독이 되고 우유가 되는 것도 같은 논리인 것이다. 그와 같이 반대로 중심에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그가 아무리 행동으로 경건한 모양을 하고 있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며 안식일 마다 황소를 번제로 드린다 해도 그것은 다 세상에 바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중심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드리는 번제의 냄새가 싫어서 누가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까지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것을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 이분법적 가치관의 원조는 선악과인 것은 누누이 이야기 해 온 것이다. 다시 영화 밀양을 이야기 해 본다면, 유괴살인범은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런 사과를 기대하는 세상의 흐름과 사람들의 생각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같이 세상의 것을 어느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어떤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구분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세상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외면하고 터부시하며 배척하게 된다. 그것은 지금도 만연한 신앙의 모습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어떤 일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그런 일들을 가이사의 것으로 구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고 믿는 사람들이 세상의 일부가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를 말이다. 마귀라는 것도 그렇다. 어떻게 생각한다는 것이 마귀가 하나님과 대적이 된다고 생각하고, 아직도 이기지 못해서 세상의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이긴다는 식의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생각이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마귀나, 신앙에서 보면 일면 터부시해야 할 것 같은 것도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욥의 때와 같이 마귀도 부리시고, 또 세상에서 사람들이 큰 죄라고 사람 죽이는 일도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하시는 것이다.(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죽인 사람의 수를 세는 사람도 있다.) 그런 가치관이 하나님을 세상의 주로 믿는 제대로 된 가치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세상의 법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유대인들의 법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그 법에 의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 안 된다며 칼을 휘두른 베드로에게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겠느냐?'하신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생각에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법이 무너질 것 같은 죄악 된 세상의 법과 가치관이 집행되는 것도 절대로 하나님의 섭리 밖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면 엘리야나 엘리사의 기적과 같은 기적으로 다 해결하시고 그것보다 그냥 두는 것이 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인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되면 그냥 두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도 껌 값도 안 되는 기적 하나 베푸시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일면 잘못된 그 일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 속한 세상에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폐하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님도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온전하고 거룩한 뜻이 당시 사람들이 가진 가치 기준에 맞지 않다고 죄를 물을 때 끌려가셨는데,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에게 사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무지 어떤 하나님, 어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가 의아할 뿐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이 중심에 있는지 아닌지를 보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고, 그런 가치관과 심령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그런 사람이 바치고 사용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산제사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 심령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도덕을 무시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적인 모양을 갖추며 살려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애쓰면 자신을 가꾸는 외모요 형식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의 사람, 뭘 해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다 존경할만한 행함이 우러나는 원인인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기에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고 신앙인 것이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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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임금이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열었는데 사람들이 오기 싫어하므로 자기 종들을 보내서 길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에 참여하게 했다. 그런데 그렇게 불려오듯 온 사람 중에 잔치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 임금은 화를 내며 오히려 결박하여 내어 쫓았다는 예수님의 비유가 있다. 이건 예전 가스펠송으로 불렀던 기억이 난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잔치에 갈 수 없소, 장가 가야하고 소도 사야하고…"하던 가스펠송이 바로 이 본문에 나오는 비유의 말씀을 노래로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제법 유명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임금은 나라의 왕이다. 나라의 왕이라는 것은 그 나라가 추구하는 의를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나라에 바라는 모든 바람이 육신으로 대변되는 존재가 바로 왕이다. 그런 왕에게 아들이 있고 또 그 아들이 혼인을 한다는 것은 백성의 모든 의를 가진 왕의 뜻이 다시 육신으로 나타난 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이 결혼한다는 것은 그 의가 지속적으로 육신으로 나타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임금은 그것이 좋은 일이라 생각했기에 잔치를 열었다. 잔치를 열었다는 것은 의가 육신이 되는 사건은 축하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에 속한 백성, 임금으로 표현된 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은 임금이 가진 의가 아들로서 표현되는 것이 자기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잔치 보다 자신의 일과가 더 중요한 것이라며 자신의 일과로 떠나는 이유인 것이다. 한마디로 임금과 백성이 기뻐하는 일이 다른 상황이다.


혼인이라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말이 한 몸을 이룬다고 의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몸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된다고 한다. 그것은 성경에서는 남자는 항상 의와 내용을 가진 존재를 말하고 여자는 형식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이런 것을 이야기할 때 마다 언급하지만 이것은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혼인이라는 것은 형식과 내용이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신랑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혼인잔치를 베풀고 우리를 신부로 부르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우리 육신을 가진 인생들과 하나가 됨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혼인으로 표현한 것이다. 바로 그 혼인으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의가 육신을 가진 우리 인생과 하나가 되는 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고, 또 사람 안에 말씀의 씨가 심겨져서 생명이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이 다 결국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 되는 연합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미지를 사람으로 나타내시려 하신 목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육신을 가진 삶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된 존재라는 것이다. 즉 남자로 늘 비유되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우리 인생과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인생의 존재 목적이고, 그것이 혼인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것이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청하러 간 종을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그러나 임금은 이 혼인잔치가 예비된 것이라고 한다. 즉 이것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람을 만드실 그 때에 이미 예비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계획은 어떤 이라도 잔치에 부르는 그 부름에 응하는 자라면 장가갈 일도 없고, 일할 밭이 없는 사람이라도 갈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포도의 소산을 자기의 시각대로 해석하는 것이나, 임금이 가진 의와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이나 다 같은 존재들이고 같은 이야기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신 잔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혼인 잔치다.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는 잔치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형식을 가진 존재인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잔치를 벌일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가 된 존재인 아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잔치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이시며, 그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과 하나 되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 자신과 같은 이들을 얻기 위하여 잔치를 벌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각과 달랐다. 그들은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다 있다. 자기가 장가가야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의를 가지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것이다. 또 밭에 일하러 가야한다는 것이다. 즉 흙으로 만든 사람을 얻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농부이지 잔치에 청함을 받아야 하는 대상인 인간이 농부가 아니다. 즉 이 둘은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임금이 보낸 종을 죽인 것이다.


그래서 임금, 곧 하나님께서는 장가갈 일도 없고 밭도 없는 이들을 불렀다. 그들은 바로 세리와 죄인들과 같은 이들이다. 즉 자기가 옳다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옳은 것이 없으니 그 옳다는 것의 아들을 얻기 위하여 장가갈 일도 없고, 또 그 자신의 의의 열매를 얻기 위하여 일할 밭도 없는 것이다. 즉 공로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노동의 대명사인 소를 살 일도 없는 사람들이다.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사람과 하나가 되는 잔치에 청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의인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오라해서 갔고, 또 사람 없다 하니 자리를 채워주었는데 그깟 예복이 없다고 결박하여 쫓아내는 것은 적반하장이 아닐까 싶지만 여기는 혼인 잔치다. 즉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자리인 것이다. 즉 생명이 그 안에 있어 그것이 표현된 사람들의 잔치라는 것이다.


군인이라면 자신이 가장 격식을 차릴 자리에 군복을 입고 간다. 즉 자신의 정체성이 표현된 것이다. 그런데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는 잔치 자리에 예복이 없다는 것은 예복으로 표현될 정체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는 행함이 없어 죽은 믿음인 것이다.


사람들은 신앙의 격식을 갖추려 한다. 일요일이면 예배를 드리고 기도할 때면 두 손 모으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그런 것은 교리로 잘 나타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 심령 안에 술 마실 이유가 없어 마시지 않는 것은 속과 겉이 같은 것이지만, 자기 안에 술 마실 이유가 있는데 술을 참고 마시지 않으면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리새인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신앙의 예복이라 할 수 있는 신앙의 관습과 모양과 또 신앙인으로서 경건하고 세상에서 볼 때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은 그렇게 사는 생명이 그 안에 있어서 그렇게 살 때 진실된 것이지, 그렇게 할 때 신앙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참고 억지로 하는 것은 회칠한 무덤이라 책망한 바리새인과 같이 자신들도 다른 사람과 같이 연약하고 악한 것이 있음으로 종교적인 관습으로 자신을 치장한 것과 같은 것이다.


반면에 또 예복이 없다는 것은 그것을 표현할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가 아니라서 '멍멍'하지 못하는 것이다. 군인이라서 군복을 입는 것이지 군복을 입으면 군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가치관도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고, 또한 예복으로 표현해낼 생명이 그 안에 없는 것, 즉 군인이 아닌 것도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이 비유의 말씀이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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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를 주고 타국으로 가서 지내다가 포도원의 소득을 받으려고 종을 보내니 세를 준 농부들이 종을 죽이고 돌로 치고 또 다시 종을 더 많이 보내도 그렇게 하니 포도원 주인이 아들을 보냈는데, 그 악한 농부들은 '아들은 상속자니 죽이고 아예 포도원을 차지하자!'며 아들을 죽였다는 비유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셨다.


이 비유는 당시에 듣는 바리새인들조차 자기들의 이야기인 줄 알 정도로 명확한 내용인데 이 내용이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과 이어져 있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언뜻 생각하기에 두 내용은 쉽게 연관성이 있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악한 농부에 비유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볼 때는 정말로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마치 건축자가 볼 때 전혀 쓸모없을 것 같아서 버린 돌 정도의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사람이었다. 그것을 두고 성경에서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볼 때 예수님은 건축자가 가진 기준으로 볼 때는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돌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기준에 관한 것이다. 건축자는 집을 보기 좋게 짓는 사람인데, 그가 가진 건축의 기준으로 볼 때는 버리는 것이 마땅한 돌이지만 집 주인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건축주 곧 집 주인이 아니면 자기 집에 머릿돌을 정할 사람이 없으므로 건축자가 버린 돌이 머릿돌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당연히 집 주인의 뜻이 아니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주인과 건축자는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과 같이 하나님도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기준을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비단 바리새인 뿐 아니라 지금의 많은 종교지도자들과도 하나님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 이렇게 싸잡아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이나 예수님 당시나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생각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많은 신앙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에 하나님의 능력을 빌리려 하고, 같은 맥락에서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도우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선히 여기신 결과라고 보는 것 등은 다 같은 것이다.


예수님을 경건하게 믿는 것 같아도 그 내용이 그와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신앙의 성공으로 여겨지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는 관점과 같은 것이다. 절대로 다른 것이라고 하고 싶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엄연히 같은 것이다. 바리새인 눈에 예수님이 보잘 것 없이 보인 것은 당시 가치관을 기준으로 볼 때 세상에서 예수님이 너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도원의 주인과 세를 받은 농부들은 포도원의 소득에 대한 가치관이 달랐다. 농부는 자기들의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들을 죽여서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 했지만 엄연히 그것은 포도원 주인의 것이다. 그것과 같이 예수님에 대한 관점도 하나님과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전혀 달랐다. 포도 소산에 대한 가치가 달랐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가치가 달랐다는 것이다. 포도는 그리스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포도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은 다시 포스팅할 예정.)


포도 곧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한 생각이 포도원의 주인과 세를 받은 농부가 달랐듯이 하나님과 바리새인들과 명확하게 달랐다. 종교적인 경건성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오히려 죄인과 창녀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종교적인 관습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수고를 목숨 걸고 하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볼 때 아무리 양보해도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꾸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하니 그들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포도원에서 세를 받은 농부들은 자신들이 수고하여 포도를 얻었기에 그것이 자기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즉 수고의 결과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교적 규례와 관습을 지키는 공로와 행함의 결과로 포도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공로가 그리스도가 되는 근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포도원의 포도는 포도원의 주인이 포도밭을 일으키고 포도를 심었기 때문이지 세를 받은 농부가 수고한 결과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종교적인 규범을 수고하고 지켜내는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라는 의를 가지시고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봐야 하는 것이다. 세상을 만드실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이 바로 포도원 주인이 포도밭을 일구듯 사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기로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자신들은 수고하며 혼신의 힘을 다하여 지키는 종교적, 율법적인 규례를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메시야는 자기들이 목숨을 다해 지켜내고 있는 율법 행위의 공로의 연장선상에 계시는 것이지 예수님과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즉 행위도 공로도 없는 자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를 받은 농부가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들이 포도 곧 그리스도의 세계를 얻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만연한 가치관이다. 공로와 수고가 없고, 교회에서 또 종교적인 업적이 없으면 천국에 갈 수 없거나 간다고 해도 말석에 갈 뿐이라고 생각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행함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성품에 이르지도 못한다. 그리스도의 성품은 생명으로 인하여 표현된 성품이지 행위로 쌓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성품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공로나 업적이나 또 세상에서 유력하지 못한 모양으로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 그 모습은 건축자가 볼 때 아름다운 건축물에 사용할 수 없는 돌과 같이 여기고 버리지만 집주인인 하나님은 그 돌을 모퉁이 머릿돌과 같이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는 관점이 달랐듯이.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다. 그것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이고 의(義)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를 받은 농부들의 수고나 바리새인들이 쌓은 종교적인 공로나 또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성공했다고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인간의 본 모습 그대로에 원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때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인간 그 원래의 모습 그것에 있는 것이다. 포도원의 모든 포도가 포도원 주인이 포도밭을 일굴 때 이미 있었던 것처럼.


세리와 창녀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감추지 않았고, 또한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세상에 다 노출된 존재들이다. 그들은 마치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죄인으로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예수님 앞에서 감추지 않고 나아온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앞에 나가는데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달랐다. 그들도 사람이기에 가진 다양한 본성과 마음들을 종교적인 규례를 지켜내는 것으로 감추었다.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모습으로 성전에 나오고 사람들 앞에 나오고 예수님 앞에 선 것이다. 마치 아담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부끄러움을 감춘 것처럼 그랬다. 그리고 자신들과 같이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은 너무 만연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결국 돌이 자기 머리 위에 떨어지듯 된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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