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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하늘의 해가 그 빛을 잃었고,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져서 성소와 지성소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무덤이 열리고 많은 성도의 몸이 일어났고 그들이 거룩한 성(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은 다 놀라운 것이지만 그것이 아무리 놀라워도 그런 사건들을 통해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사람인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놀랍긴 하지만 나에겐 의미가 없는 그냥 사실에 불과한 것이 될 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일어난 사건이 나에게 일어나느냐 하니냐 하는 것이 정말로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게 없으면 내가 왜 예수를 믿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는 것과 함께 일어난 일들이 어떤 것인지 볼 필요가 있다. 먼저는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치신 것이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다.(가상에서는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는데 마태복음은 하나만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렸나이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신 것인가? 그리고서 다시 찾으신 것인가?


예수님께서 죽으시게 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정해 놓은 사람의 정체성을 떠나서 살고 있다는 것과, 그런 자리에서 돌아오기를 바라시면서 원래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를 떠난 모든 인생들, 그들의 모습을 보이시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유대인과 로마인의 가치관에서 볼 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세상의 법 앞에서 실패자로 또 죄인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가진 메시아의 개념에 미치지 못하고 로마인이 가진 왕의 모습을 가지지 않으시듯, 우리도 종교적인 경건을 유지하여 의인에 이르려고 하다가 늘 실패하여 죄인이 되고, 세상의 경쟁력에서 언제나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앞에서 패배자로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유대인과 로마인은 그런 모습을 죄인으로 여겨 십자가에 처형하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그런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다른 것이다. 그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라고 인정한다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신 모습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달려서 부르는 “나의 하나님”, 예수님을 버린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가진 자기 하나님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자기 하나님이란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듯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님을 말한다.(그것을 성경은 우상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나의 하나님”은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신분이 죄인인데, 예수님의 신분을 죄인으로 만든 가치관의 하나님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 자기 하나님을 좇는 사람들의 모습을 십자가에서 보이시는 것이다. 그 모습은 죄인이다. 이 죄인이라는 것은 이중성이 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님은 죄인이고,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죄인이라는 것이기도 한 동시에 유대인의 가치관과, 정말로 왕이 되리라 기대한 제자들의 가치관과, 능력과 공로에서 이겨야 왕이 되는 로마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던 인간들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이 공존하는 모습이다.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광야에서 들린 놋 뱀에 비유하시면서 자신이 들려야 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놋은 거울이고 그 거울의 모양은 뱀이었다. 그것을 보는 이는 살았고, 그것을 보지 않은 자는 죽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뱀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는 살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는 죽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 역시 거울이고, 또한 죄인이다.


즉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던 그런 죄인이라는 것을 거울과 같이 비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 기준에 예수님이 죄인이었지만, 달리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 거울과 같이 비춰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가 비춰질 때 그 때, 그 이전에 자신이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던 것, 제자들로 치면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왕이 되리라 믿었던 예수님, 유대인으로 치면 똥도 누지 않을 거룩한 모습을 가진 메시아, 그리고 세상에서 돈이 자기 하나님이었던 사람의 돈, 능력이 최고라며 내 주먹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람의 주먹과 같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외치신 “나의 하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라는 이 외침은 시편 22편 1절의 말씀이기도 하다. 시편 22편의 1-2절은 나의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하고 있고, 3절에 들어가면 영어 성경은 <But>이라고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즉 사람이 스스로 만든 “나의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 곧 구분되는 여호와와는 다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모습은 부끄럽게 여기고 세상적인 것으로 성공하여 인간의 연약함을 감출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스스로 만든 그 하나님, 하지만 그 가치관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고, 또한 그 하나님의 힘의 근원인 머리의 생각이나 손과 발의 행동이나 옷과 같은 신분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것을 보여주신 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 “나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함을 보여주시는 자리에서 외치신 것이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우리 스스로 만든 하나님이요 우상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우리는 놋 뱀을 보는 것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우리 스스로가 만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이 우리를 뱀과 같이 죄인으로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십자가를 바로 아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십자가를 볼 때 자신이 자신만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또한 사람을 규정하고 믿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믿던 하나님, 유대인의 하나님, 로마인의 신과 같은 그 가치관은 오히려 나를 늘 죄인으로 드러나게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십자가가 나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온전한 아들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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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 과정에서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가시관을 씌우고 명패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여 조롱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두 명의 강도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괜한 퍼포먼스가 아니다. 그것은 운명이다. 그리스도라는 운명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또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고자 하는 이의 운명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모습이 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본 받아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가 붙었다. 군병들은 조롱하는 말로 붙였겠지만, 유대인이란 찬송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들의 왕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 찬양을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에 합당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에 합당한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에도 ‘주여! 주여!’한다고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과 같이, 사람들 사이에서도 누군가가 누구를 찬양하는 것과 그 찬양을 받는 사람이 그것을 수용하는 것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신데 소유와 공로에 대하여 구하고 때로 얻었다고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 곧 찬송하는 이들의 왕인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정체성에 맞게,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고 찬양 드리는 자들의 왕이라는 의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위험한 것에서 구하심과, 실수하여 큰 손해를 보는 것을 막을 수 있게 생각나게 하시는 것과 같은 것과, 사업이 잘 되는 것, 건강한 것, 시험에 합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것 역시 하나님께서 모두 주관하시는 것이고, 잘 풀리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본질적인 역학관계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사람의 육신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과, 육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예수님이 대신 벌을 받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기적을 보이셔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문제는 늘 머리에 있고, 손과 발에 있고, 옷에 있다. 즉 늘 생각대로 되지 않고, 몸이 맘대로 되지 않으며, 그런 자신이 드러나지 않도록 좋은 신분을 옷과 같이 갖추려 하는데 잘 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면서 겪는 어려움을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구하는 내용은 절대로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과 같이 건강이나 경제적인 문제나 시험에 합격하는 것과 같은 것에 관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가시관도 녹여버리고 못은 튕겨내 버리고 옷은 제비뽑기로 빼앗기지 않는 아이언맨의 슈트 같은 것이 되는 기적을 보이시고 내려와야 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그런 육신의 문제를 지고 갈 때 인생의 십자가라고 하니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심이 제대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조롱도 받고, 채찍질도 당하고 침 뱉음도 당했다. 사람들은 그런 일을 당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런 억울함이나 분함을 해결하고자 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거나 그런 자리에 처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고 그 노력이 결실을 맺도록 기도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십자가에 함께 달린 두 강도의 요구도 그것이었다. 예수님께 ‘네가 정말 메시아이면 십자가에서 자기를 구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 육신의 문제를 구하는 이들은 다 강도와 같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강도나 제사장이나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육신의 문제를 간과하고 버리는 것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냐 하겠지만 그것은 영지주의다. 육신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가진 심령이 표현되는 도구이다. 즉 육신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질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심령의 정체성에 따라서 육신의 모든 것이 표현되고 종속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심령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면 육신의 문제는 당연히 그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경제적으로 힘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벌 주셔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 마음에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의 정체성이 분명해 지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삶의 결과로서 경제적인 문제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이러한 법을 아는 사람은 결과에 순종하는 마음도 당연히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정체성을 알고,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분명히 아는데 그런 관계에서 하나님께 불평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은 인간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의 정체성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를 보이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가치관 앞에 인간이 서면 다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 가치관은 유대인과 로마의 가치관이다. 유대인의 가치관은 인간의 본질이 형식에 있다는 가치관이고, 로마의 가치관은 공로와 능력의 승자가 독식하는 가치관이다. 


즉 유대인과 로마인은 인생을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린 것 같이 곤고한 것으로 보고, 그 상황에서 가시관을 쓴 듯 생각으로 그런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인간, 손과 발이 못에 박힌 듯 자신의 행위로 구원하지 못하는 인간, 또 옷과 같이 인간의 연약함을 감추는 신분과 고상함이 없는 인간을 죄인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가 죄인의 형틀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달랐다. 원래 인간은 그럴 수 없게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 분이셨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육신의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의 인생과 육신을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인간은 육신이 가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을 십자가와 같은 문제와 짐으로 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신을 만들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존재 목적이 자기 안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진 인생이라는 이 십자가를 어떤 이는 죄인의 틀로 보듯 인생을 부끄럽게 여겨 숨기고 제어하면 할수록 의롭게 보고, 하나님은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요 정체성으로 아는 이를 아들로 여기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정체성이 인정되고, 그 정체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주관하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시듯,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듯,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의 본성이 되어 그 사람의 모든 삶을 주관하게 되고, 그러므로 육신의 삶이 경건하고, 성실한 삶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단순히 차비를 대신 내어주듯, 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오고 가는 모든 세대의 구원이 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에 대하여 듣고 읽을 때에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 자신이 자기 인생을 스스로 만들지 않았으므로 자기가 가진 인생이라는 연약함인 그 십자가가 자기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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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1-26 바라바의 석방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31. 12:0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결국 십자가형을 선고 받으셨다. 그 사이에 가룟 유다는 자신의 죄를 후회하면서 예수님의 몸값을 돌려주려 시도하다 받지 않자 성소에 던져 놓고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은 30은 당신 하인 한명의 몸값 정도라고 하는데, 그와 제사장이 예수님의 몸값을 정한 것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기도 하다. 


한 가지 간단히 짚고 넘어간다면, 유다나 베드로나 아니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배신했는데 왜 가룟 유다만 이렇게 허망하게 끝났을까? 아마도 그것은 그가 생전에도 예수님을 보는 눈이 다른 제자들과 달랐기도 했지만(주라고 부르지 않았던 점에서) 무엇보다 잘못을 회개한 대상이 문제다. 물론 그것은 평소에 예수님을 주라 부르지 않는 자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그의 잘못을 제사장과 해결하려 했고, 다른 제자들은 다시 예수님과 해결하려 했다. 그것은 단순한 행동의 차이가 아니라, 예수님을 보는 관점의 차이로 인하여 다른 행동, 그리고 결과가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가룟 유다가 팔아버린 예수님은 결국 사형을 받게 되신다. 사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얼마든지 예수님께서는 사형을 받지 않으실 수 있음에도 이 길을 택하셨다. 이는 괜히 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운명이라는 것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예수님께서 보이시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야 하는 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유대인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들의 왕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렇다 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죽을죄인가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이들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이들도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과는 다른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다. 예수님과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메시아)의 정체성이 있는데, 예수님은 전혀 그것에 부합되지 않는데 스스로를 그리스도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면서 자신들이 인도하는 백성들을 미혹케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법정에 섰다. 당시 유대인에게는 사형을 시킬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데리고 가서 사형을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빌라도는 아무리 봐도 죽일 죄는 아닌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의 눈에 예수님은 한낱 정신이상자 정도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초라한 꼴로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이 그가 볼 때 어쩌면 우스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자기 아내까지 꿈을 꾸었다며 예수님을 놓아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결단 있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유월절에 사람을 죄인을 하나 석방해주는 규례에 따라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서 선택하라고 했고, 기다렸다는 듯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선택했다.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는 물음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고, 또한 그 피를 자기들이 책임지겠다고 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고 사형을 선고 받는 때는 유월절이다. 이 유월절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오는 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이다. 출애굽 당시 마지막 재앙으로 처음난 모든 것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재앙을 면하기 위해서는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집 안에서 그 양고기를 먹으라고 하셨다. 처음 난 생명을 대신하여 양이 죽은 것이다. 그와 같이 처음 난 사람 곧 아담의 후손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것이다.


유월절의 기원인 출애굽의 때의 어린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만들었다. 모세가 바로왕을 찾아가서 요구한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하나님께 어떤 행동으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애굽에서 종으로 살고 있는데 어떤 자치권이 있다고 그렇게 큰 죄를 짓겠는가? 그들이 구속을 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자리에 있지 않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회복하는 것을 위하여 어린 양이 죽어서 문설주에 피를 뿌린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도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유월절의 어린 양이신 것이 그것이다. 모든 백성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은 벌을 대신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아니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떠나버린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자리를 보여주는 대속이다. 그래서 유월절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대속인 것이다. 바라바가 놓인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죄인들의 대속을 예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사람의 자리를 떠난 모든 인생은 다 바라바와 같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의 대상이 되는 모든 사람은 다 바라바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자신은 바라바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에 자신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자신이 바라바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구속으로 인하여 자신이 석방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시인하면 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착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자리이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성품이 자기 안에 생명이 되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착하게 살고,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품성, 곧 하나님의 형상이 생명이 됨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바라바의 대속으로 또 모든 인생의 대속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괴려고 자기만의 기준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세상일에 선하고 악한 것을 심판하는 자리에서 떠나는 자리, 육신을 가진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을 내용으로 받아서 표현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대속이고,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바라바와 같은 우리 모두를 대속하신 것이다. 그것이 유월절이 나의 사건이 되는 것이고, 내가 바라바와 같이 해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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