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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다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말씀하실 때에 예수님의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어머니(세베대의 아내)가 와서 예수님께서 나라를 이루면 자신의 아들들을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하는 일이 있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얼마 되지 않아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시러 가시기 전이다. 이런 시점이 되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실제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예수님의 제자들 뿐 아니라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이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백성들이 환호를 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나의 마시는 잔을 너희가 미실 수 있겠느냐?"고 묻기도 하시는 것이다. 물론 제자들은 호기 좋게 그럴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목숨을 바칠 각오가 있었다는 것일 수는 있지만, 예수님의 정체성은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세베대의 아내이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가진 생각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것에 있다. 예수님을 믿어서 이 땅에서 복 받고, 잘 살고, 아프지 않고, 자식들 시험에 붙기를 바라는 생각들이 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그 혜택을 받기를 원하는 생각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복과 세상 부와 세상 명예의 주인이 바로 이 땅 위의 왕이다. 즉 예수님께 그런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보이는 것들을 주관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고, 그 혜택을 보겠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혜택을 누리는 자격은 당연히 세상적인 가치관인 공로와 소유를 드림의 정도로 가늠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위의 것을 관장하는 왕이 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을 살 동안 건강하고 부유하게 되는 것은 하나의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정체성, 곧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전하러 오신 분이시고, 돈과 명예와 육신이 살면서 필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기 위하여 필요할 때 사용되는 도구와 같은 것이지, 신앙이 좋아서 부자가 된다는 것과 같은 척도나 또 인생의 목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나의 잔>은 각오가 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잔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예수 믿기 위하여 십자가에 발가벗고 못 박히는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선과 악의 기준을 주장할 때 그것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죽이려는 것에 순종하신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 하신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악의 기준으로 살면서 하나님 아는 제자들을 죄인 취급하는 것을 운명으로 알고 살아 갈 수 있는지를 물으시는 것이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 또한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세상의 왕이 되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공로로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 십자가를 얼마나 졌고, 얼마나 무거운 것을 졌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졌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선악 간에 판단하는 사람들이 너를 십자가에 매달려고 할 때 달릴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즉 그럴 수 있는 생명이 있느냐, 그런 본능이 있는 생명이 있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지금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될지를 묻는 청년의 가치관과 같은 가치관으로 예수님이 왕이 되면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를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반문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나라는 천국에서 어디에 앉는지, 어떤 상급을 받는지를 관심을 가지는 나라가 아니라, 그 나라의 의에 맞는 생명이 있는지 아닌지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의 나라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라고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 온전한 사람이 모르는 사람의 주장 아래로 가는 것이 섬기는 것이고 종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또 모욕한다고 죄를 씌우는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것이 바로 섬기는 것이고 종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잔인 것이고, 또 오늘 우리가 마실 잔인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와 같이 예수님이 세운 나라에서 자신의 아들들이 높은 자리에 앉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은, 우선은 높임을 받고자 하는 것이고, 높은 자리가 있고 높임을 받는다는 것은 피라미드와 같은 가치관으로서 세상적인 가치관이며, 그것은 어떤 경쟁에서 이겼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 경쟁은 생명이 아니라 공로와 소유의 드림으로 하는 경쟁을 말하며 그것에서 이긴 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은 경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명은 각 생명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물고기와 새가 하늘 나는 것으로나 물속에서 사는 것으로 경쟁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생명은 그렇지 않다. 생명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체로 모두가 영광스럽고 놀라운 것이지 새와 물고기 중에 어느 것이 잘한다고 상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생명의 본성은 자신이 얼마나 그 생명으로 살았는지, 그 생명으로 얼마나 다른 생명보다 수고했는지를 따지지 않듯이 그냥 자신의 생명의 본성대로 시절에 맞추어 표현할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얼마나 오랫동안 지느냐를 경쟁하거나 얼마나 무거운 것을 지느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은 상황이 되기만 하면 십자가를 지는 생명이냐 아니냐 하는 것 그것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진다는 것, 사람이 자신에게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나를 죄인 삼으려 할 때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것이 어디 감히?'라든가, '사탄아 물러가라!' 같은 푼수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끌려가는 그런 모습이 바로 섬기는 모습이고 종이 되는 모습인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을 더 알고 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영광을 얻는 것이 천국의 법이 아니라 더 알고 더 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것을 모르는 자들이 그것을 알고 누릴 수 있도록 수고하기 위하여 주어진 잔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이 마신 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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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도 백종원 같은 성공이 가능할까?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5. 7. 3. 14:52 Writer : 김홍덕

신드롬 까지는 아니겠지만, 백종원이라는 사람이 많은 채널에서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 그의 성공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요리를 하는 사람으로서 백종원이라는 사람이 가진 가장 큰 특징(적어도 방송에서)은 그 유명세에 비하면 너무 평범한 재료로 또 쉽게 요리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매체에 출연하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부를 축적한 요리사라면 언뜻 생각하기에 좋은 요리의 재료로 일반인들은 구경도 못하는 재료를 쓰거나, 비싸지는 않지만 일반 가정에서 작정하지 않은 다음에서야 사지 않는 그런 재료들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설탕, 파와 같이 어떤 가정이라도 장 볼 때 습관처럼 사는 것들을 가지고 쉽게 누구나 해 먹을 수 있는 요리를 선보인다는 것이다.


게다가 땅콩버터를 가지고 콩국수 국물을 만드는 것과 같이 일반적인 요리 상식에서는 쉽게 접근하지 않는 방식도 맛을 내는 것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음에도 그것에 대한 저항이 없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목적만 추구하다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일들과는 다소 비교가 되는 일이 아닌가 싶다.





그런 백주부(마이리틀 텔레비전에서의 사용 명)는 정작 요리에 대한 자격증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쉐프 밑에서 수련했다거나 한 것도 크게 없는데 티비에 나와서 이렇게 각광을 받는 요리사로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스펙 열풍마저 그의 그런 평범한 요리의 매력에 빠져서 망각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 이 글에서 다루고 싶은 내용인 것이다.


이 블로그는 성경에 대한 것을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백주부의 현상을 한국교회가 또 건방져 보일지 몰라도 오늘날 전 세계 교회가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그것은 교회가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고 가르치고 전하는 것에 엄격한 자격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목사나 장로와 같은 엄격한 자격 기준이 선순환을 일으키기 보다는 엄격한 자격기준에 대한 대중적 기대를 져 버리는 일들이 오히려 많고,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본연의 목적 또한 전혀 충실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사실 성경에는 목사라는 신분은 한번 정도 밖에 언급되지 않은 직분이다. 언급한 횟수로 중요도를 무조건 따질 수는 없지만 '사랑'이라는 단어의 중요도를 언급한 횟수가 많이 뒷받침한다는 것을 보면 또 횟수가 무관하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목사라는 직분이 엄격한 기준이 되었다. 신학교에 가고, 신학대학원을 또 3년간 하고, 그리고 교육전도사 또 전도사(강도사) 등을 몇 년씩 이수하듯 지내고 그리고 또 고시 합격률 보다 낮은 담임목사 청빙을 위하여 애쓰는 이 일련의 엄격한 과정이 정말로 정당한가 하는 것에 정말로 동의하기 힘들다.


목사라는 신분에 크게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그 자격을 취득하는(정말로 취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과정이 정말로 신앙적인가 아니면 신앙으로 채색한 세상에서의 자격 취득 과정인가를 도저히 구분하기 힘들다는 것과, 그렇게 일반인들이 대학가고 취업하는 것과 다를 것 전혀 없는 시스템으로 목사가 되었더라도 성경을 전하는 것이나 잘 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거대 교회를 이루어서 돈과 이성의 문제와 같은 구설수에 오르는 그런 모습이 정말로 제대로 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 교회의 실태에 비추어 볼 때 백종원이라는 사람에게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이 반갑다. 그가 요리 자격증이 넘치도록 있거나, 또한 유명 호텔 주방장 수하에서 수십 년을 배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음식들을 직접 먹어보는 것이 가장 큰 자산이라는 어떤 이의 분석처럼 요리니까, 먹는 것이니까, 그저 많이 먹어보고, 또 누구나 먹는 것이니까 누구나 가까이 있는 재료로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또 맛있게 먹는다는 목적을 위해서는 요리책과 같은 어떤 틀에 갇히지도 않은 그의 요리법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정말로 반가운 것이다.


백종원이라는 사람의 모습은 단순히 방송을 아는 유명한 요리가로서 한정 지을 것은 아닌 것 같다. 컴퓨터는 잘 모르면서 컴퓨터 관련 자격을 가지고 있고 또 취득하려 하고, 입사해서 퇴사할 때 까지 전혀 영어를 사용할 일 없는 부서의 직원을 뽑기 위하여 토익 점수를 요구하는 이 사회에서 그런 것 없이 사람들이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 요리하는 그 본연의 목적 하나만 보이는 그에게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는 것은 아주 긍정적인 현상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바로 그런 모습이 한국교회에서도 있었으면 좋겠다. 목사라는 신분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을 누가 나쁘다고 하겠는가? 다만 목사라는 그 신분이 왜 있느냐 할 때, 그 목적이 온전하게 이루어진다면 굳이 그런 자격이 왜 필요하겠는가 싶은 것이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언제 신학교를 다녀왔는가? 12제자는 서기관도 제사장도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한 복음의 본체인 예수님을 전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사람을 위해서 왔기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마주했던 사람으로서 다가갔을 뿐이었다. 마치 백종원이라는 사람이 좋은 요리를 많이 먹어본 그것으로 음식에 다가갔던 것처럼. 


바로 오늘 우리 교계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이유 없는 무차별적인 스펙 요구 홍수 속에서 별다른 요리관련 스펙 없이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요리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또 누구나 먹는 음식을 누구나 쉽게 해 볼 수 있는 것을 알려주는 백종원 요리사처럼, 교회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이 성경을 시험치고, 스펙 쌓아야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 고백 그 하나로, 사람이 들을 때 그렇다 싶은 고백과 과정을 가진 그 하나로 전하는 것에 열광하는 시절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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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부자가 들어가기 힘들다고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니 제자들은 혼돈스러워졌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좇아 왔는데 그런 자신들은 무엇을 얻을 것인지에 대하여 예수님께 질문을 했고,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잡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8-29)

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나서 이어진 말씀이 바로 포도원 품꾼의 비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들일 사람을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일할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일찍 나간 집 주인과 같다는 것이다. 그 집주인(포도원 주인)은 자신의 밭에서 일하라고 이른 아침, 또 삼시, 또 육시와 구시에 각각 사람을 불러서 일하게 하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한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주니 먼저 온 자들은 더 받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자신들도 동일하게 받자 주인에게 "왜 일은 더 했는데 똑같이 주느냐?" 묻자 주인은 "약속한 대로 주었으니 잘 못한 것이 없다."고 답하였는데, 천국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는 상황은 제자들에게 적잖이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자신들이 무엇을 얻을 것인지 묻는 물음이 그것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그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제자들도 예수님께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지를 물은 부자 청년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3년 가까이 따라 다닌 제자들이 설마 그렇겠는가 싶겠지만,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다음에 직접 만나보고서도 한동안 믿지 못했다. 그러니까 엠마오로 떠나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자 청년과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비단 그들만의 생각이었고 가치관이었을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이 성경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성경을 보는 우리와 상관이 없다면 성경의 이 부분은 째 버리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분명히 우리와 상관이 있는 말씀이기에 오늘까지 전해지고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자 청년의 기본적인 질문은 <"무엇을 하여야?">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공로를 쌓아야 천국에 들어가는지, 또 어떤 공로를 쌓아야 천국에서 개털 모자가 아닌 면류관을 쓰는지가 관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관점은 이방신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이방신의 관점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유일하신 존재의 신이신데 반해 사람이 믿고 만든 모든 이방신은 행위와 소유에 관한 신들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신은 사람이 어떤 공로를 드리는지, 소유를 얼마나 드리는지에 반응하는 신이기 때문에 공로의 크기에 따라서 천국에 가고 못가는 기준이 되고, 또 가서 받을 상급의 크기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모든 가치관은 전부 이방신을 믿는 신앙에 기인한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어떤 공로를 드리는지, 또 소유의 얼마를 드리는지를 살피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것은 신앙의 근간 중의 근간이고 핵심 중의 핵심인데 이것이 다 틀어져 버려서 지금 교회가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라는 것은 행위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는 생명에 종속된 표현이고 결과일 뿐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아담에게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디에 있느냐?" 즉 "너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를 물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에게 무슨 선한 일(Do)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지 묻는 청년에게 "어찌하여"라고 답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청년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우리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나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정말로 예수님을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완전히 알고 있었다면 이 순간에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었을 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답을 한다. 성경에는 그냥 사랑이지만, 원문으로는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아가페의 사랑으로 물었고, 베드로는 필로에(친구간의 사랑) 사랑을 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몰랐다는 것이다. 


잠깐 베드로 사도를 이야기 해 본다면, 그는 정말로 열정과 따뜻함과 간절함이 있었다.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멀리서 보다가 여종이 '너도 그와 한 패'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다. 그것은 자기 살려고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은 왕이 되리라 생각했고 그 많던 기적을 일으키신 자신의 주가 저렇게 아무 힘도 없이 심문 받으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고, 그런 예수님과 자신이 생각했던 예수님이 다른 이유를 모르겠으며, 그렇게 매 맞으시는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울었던 것이다. 단순히 예수님을 모른 체 한 것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실제 그런 비겁한 인물이 아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대를 대상으로 칼을 휘두른 베드로가 자기 살려고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결국은 소유와 공로의 신앙에 서 있다. 천국에 가서 상급을 받고, 영원히 살 건데 기와집에서 살아야겠다는 식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하고, 또 가진 것을 많이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떠하든지 그러려고 노력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수고하지 말고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과 세계 안으로 부르시건만.


신앙은 절대로 수고한 공로에 따라 심판과 상급을 주시지 않는다. 그 객관적 기준이 있기라도 하겠는가? 사람마다 능력과 형편과 모양이 다 다르고 그런 사람들의 차이 또한 하나님이 주셨지만 객관적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주시지는 않았다. 주셨다면 율법이지만 율법은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라고 하셨는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 큰 목적이지, 그것이 천국 가는 객관적 기준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만약 그것이 정말로 객관적 기준이면 그것으로 성공할 인생은 절대로 없다. 누가 살면서 단 한 번도 이성에 대한 욕망이나 거짓말과 같은 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다 지킬 수 있단 말인가?


사실 뭔가 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잘 모른다는 것이다. 불확실하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법을 만드는 것이다. 물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법이 있는가?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법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누구나 다 공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가 야옹하지 않는다고 죽일 것인가? 생명의 법은 이름이 법일 뿐 그건 누구에게도 불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법이 그렇다. 하나님의 법이 바로 생명의 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는 법으로 규정할 것이 없는 분명한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육신과 삶을 규정하거나, 선악 간에 판단하거나, 하나님 만드신 사람으로서의 삶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사는 것 그것뿐이다. 그 삶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바로 그것이 포도원 주인이 삯군에게 약속한 그것이다. 여기에는 누가 얼마를 더 많이 했는지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한 존재인지 아닌지, 그것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주인의 뜻에 따라 포도원의 일을 한 것이냐 아니냐하는 그것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이 땅에서 어떤 공로를 세우는가 하는 것이나, 또 얼마나 많은 소유를 드렸는지 와는 무관하다. 이렇게 말하면 '그래 양이 아니라 드리는 마음이 중요하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도 아니다. 정답은 누가 드리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실 때 뜻하신 목적대로 그 사람이 살고 있느냐가 문제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품꾼에게 약속한 포도원 주인의 약속인 것이다. 몇 시간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포도원의 일꾼이라는 그 자체가 한 데나리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를 드렸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존재로서 살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먼저인가가 중요한 것이나, 누가 얼마나 기여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주인의 목적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 하는 그것이 척도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누가 더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많은 경우 자신이 좋은 신앙이 아닐까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결국 나중이 될까 싶어 염려하기 때문에 이 성경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런 사고 자체가 이미 공로의 크기를 따지는 상대적 가치이고, 또 다른 상대를 이겨야 좋은 것이 되는 피라미드적인 가치관이다.


먼저 된 자라는 것은 하나님을 먼저 알았다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먼저 된 자는 하나님의 존재 목적에 순종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시간 개념으로 보면 먼저라는 기준이 크로노스적[각주:1]인 시간 개념을 가진 사람에서 결국은 카이로스적[각주:2]인 시간 개념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간 개념이 크로노스적이라는 것은 그 가치관이 세상적이고 상대적이며 이원론적이고 피라미드식인 가치관이 가진 시간 개념이다.


그러므로 누가 좋은 신앙인가? 아니면 어떤 신앙이 좋은 신앙인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분량에 충실한 사람이다. 가정에서 망치와 숟가락은 사용빈도와 두는 장소가 전혀 다르다. 그런데 망치가 사용빈도를 기준으로 자신이 숟가락 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부자 청년의 가치관이고,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 많이 하면 천국에 가서 기와집에서 황금 면류관 쓰고 살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같은 가치관이다.


그러나 망치는 망치의 일이 있다. 그것에 충실하면 그것이 먼저 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숟가락이 아무리 자주 사용되어도 누룽지 긁고 있다면 어쩌다 못 박을 때 못 잘 박는 망치보다 못한 것이다. 그게 더 좋은 신앙이라는 것이다. 고린도서에서 바울 사도가 몸의 각 지체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은 달력과 같은 객관적 시간으로 먼저였던 것이 객관적으로 나중 된다는 것이 아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이 될까 염려하는 사람이 바로 객관적인 가치관과 상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가치관은 부자 청년과 같이 '무엇을 하여야?' 라는 생각을 가진 가치관이고, 살 동안 공로를 쌓아야 천국에 가서 잘 산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안목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모든 것을 공로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는 사람은 자기 기준에 하나님을 먼저 알았다고 해도 결국 목적을 깨달은 사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말씀이 뜻하시는 바이다.


  1. 크로노스적인 시간 개념은 12시가 점심시간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2. 카이로스적인 시간 개념은 생명의 시간 개념이다. 그러므로 카이로스로 점심 시간은 12시가 아니라 배고픈 때 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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