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5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월절 만찬을 가진 그날 밤에 너희 모두가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자 베드로 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을 한다. 하지만 이미 예수님께서는 만찬에서 누군가 배신할 것이라 하자 모두들 자신인가 궁금해 한 것에서 보듯이 다들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요한복음 17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돌 던질만한 정도 떨어진 곳에서 기도하셨고, 요한도 졸고 있었는데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과 같이 그렇게 상세히 기도 내용을 기록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그것을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요한이 예수님께서 가신 이후에 자기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마음과 같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도를 적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면서 들은 것을 그렇게 기억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 17장, 아니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는 읽노라면 소름이 돋는 그런 말씀이다. 그런 방대하고 놀라운 내용을 마태복음의 순서에 따르면 26장 35절과 36절 사이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잠시 요한복음 14장의 시작을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라는 말씀이다. 모두가 배반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 앞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근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생업을 버려두고 좇았던 스승이고 주님으로 여긴 분이 그렇게 따랐던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버릴 것이라.’하는데 이것이 근심하지 않을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더욱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버릴 것임을 알면서 그들에게 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이제 곧 다 버리고 도망가 버릴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너희는 나보다 큰일을 할 것이라고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다. 이러한 것을 연결해서 보면 이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막장 드라마라면 또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건 정말로 중요한 신앙의 척도이고 법이다. 이것을 안다는 것은 정말로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버스 차비를 대신 내어 주듯, 혹은 지은 죄에 대하여 벌을 대신 받아 주는 그런 분이 예수님이신가?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속하신 전부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다음에는 그런 죄가 없어야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었는데도 아직도 사람들은 죄 가운데 있고, 모든 교회나 또 다른 종교에서 자신의 죄를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신앙이 잘못되었거나 예수님의 죽음이 별 효력이 없다는 말일 뿐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이 지구상에 포도는 하나뿐이다. 포도라는 과일이 두 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위키 백과나 백과사전에 포도를 검색하면 포도, 포도, 포도 이렇게 여러 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포도는 단 하나고 그 안에 거봉포도, 청포도 뭐시기 뭐시기 포도 이렇게 나오는 것이다. 모든 포도가 다 포도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은 the Grape라는 말씀이다. 그냥 포도라는 생명체 그것 자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지>라고 하신 것은 그 포도의 생명을 가진 포도나무 개체라는 것이다. (포도는 가지 자체가 나무라고 할 수 있기도 하다.) 청포도든 거봉포도든 다 포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 곧 the Christ이고, 가지인 우리는 a christ라는 의미다. 포도가 세상에 하나이듯, 그리스도도 하나이지만, 포도가 세상에 많듯 그리스도(a christ)도 많은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성경을 모르는 것이다. 단언코.


그렇다면, 지금 배신하는 제자와 그 배신을 뒤로 하고 배신하는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지시는 예수님이 포도나무와 포도나무의 가지와 같은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배신 때리고 도망가는 제자나 그런 제자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이 같은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의 내용이다. 그 기도의 내용은 요한복음에 나오는데,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가 다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농부요, 그리스도는 포도나무며, 우리는 그 가지인 것도 바로 이것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이 배신하는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렇구나!’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분명히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는 곧 자신을 배신할 제자들과 예수님이 하나라는 것을 감사하시고, 또 곧 자기를 버리고 떠날 제자들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셨다고 감사하시는 내용이다.(요 17장) 이것은 아주 중요한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왜 중요한 포인트인가 하면, 배신하는 것과 같은 행동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을 보통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람 배신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냥 이웃이나 원수도 아니고 자신의 주님을 배신하는 사람과 예수님이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사람을 배신한다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것은 사람이라서 그런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배신의 일 뿐 아니다. 운전하다 욕한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은 운전을 하지 않은 사람 외에는 없다고 할 수 있고, 살면서 ‘저런 인간 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뉴스만 봐도 그런 마음이 드니까…


그런 모든 것은 다 사람이라서 그렇다. 사람이라서 배신도 하고, 욕도 하고, 남을 미워하기도 하고, 이성을 보고 성적인 생각도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인간, 그런 사람과 예수님이 하나라는 것을 기도하시는 것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과 달리 그런 인간의 모습을 감추려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그런 인간의 모습을 부끄러워한 아담과 같이, 또한 율법의 행위로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회 칠한 제사장과 바리새인, 그리고 서기관과 같이.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람과 하나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과 같은 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모습이 바로 배신하는 인간의 그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감추려했던 모든 것이 다 제거된 상태가 바로 십자가에 달린 모습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모습은 일단 죄인이다. 반면에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의인이 되려 한다. 또한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과 자신이 다 드러나는 것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감추려 한다. 머리에서 나오는 지혜로, 그리고 손과 발의 행동으로, 또 옷과 같이 신분과 경력 등으로 자신을 감추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으로 사람이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보이셨다. 그래서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고, 손과 발에는 못이 박히셨고, 발가벗겨졌다. 그 모든 수치와 고통의 총체적인 목적은 인간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신 것은 사람이 머리의 생각과 손과 발의 행동과 또 옷과 같은 고상함과 신분과 명예와 같은 것으로 자신을 가릴 때 온전한 사람이고, 그래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의 법에 의한 것이다. 그 법으로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죄인이 되는 것이 사람의 원래 정체성이란 것을 보여주신 것이 십자가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누구나 세상의 법으로는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제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행위가 자신들을 심판했다. 자신들은 배신하면 안 된다는 의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배신하는 자신들의 모습이 부끄러워 도망갔고, 베드로는 먼발치에서 그런 자신의 모습에 죄책감을 어떻게 해 보려 예수님을 몰래 보려 했다. 그러니까 그들이 가진 스스로의 의가 그들 스스로를 심판하고 도망가는 죄인을 만들었다. 마치 유대인의 가치기준과 법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었던 것과 같이.


사람은 누구나 세상의 기준, 그리고 자기 안에 있는 의의 기준에 의하여 늘 심판 받는다. 그 모습이 바로 세상의 기준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십자가 밑의 백부장은 로마의 법이 못 박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볼 때 예수님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제자들도 자기가 가진 의로 자신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도망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과 만나는 모습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제자들은 계속 도망가고 예수님은 계속 그들을 따라다녔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스스로를 심판하여 예수님 앞에서 면목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원래 그런 것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그것을 알게 하는 것 때문이었다는 것을 계속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배신하고 스스로 심판하는 모습이나 세상의 기준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예수님이 하나라고 기도하신 것은 모든 인생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했던, 이 땅에 오신 목적과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그 목적과 배신하고 도망가는 제자들의 모습이 하나라는 것이다. 다만 제자들이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인간의 본질로 보는지, 아니면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같이 부끄럽게 여기는지의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습으로 달리시니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제자들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겨서 도망을 간 것이다.


신앙은 결국 사람의 본질을 인정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은 자기가 원치 않고 부끄러운 모습이 너무 많다. 그렇게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한다는 것, 그것은 그 원치 않는 것이 자기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느냐? 아니면 그것을 죄로 여기느냐? 하는 것이 신앙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얼마나 감동이고, 왜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는지, 왜 하나인지, 분명해지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러 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잡수셨다. 그것을 지금도 기념하기 위하여 개신교에서는 성찬식을 천주교에서는 미사 때 마다 기념하는 순서가 있다. 이 자리에서 떡을 떼시며 떡은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시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한 때 기독교인들은 피를 마시는 사람들이라는 오해도 있었다고 하는데, 웃픈 일이지만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대로, 형식만 보는 관점은 아직도 여전하고, 사람이 살 동안 있을 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먼저 포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한다면, 생물 혹은 식물학자는 고사하고 농부도 아닌 입장에서 포도의 특징을 비교하긴 좀 그렇다. 다만 몇 가지 좀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면 대표적으로 술을 만드는 과일이고, 또 술이 되었을 때 포도 자체보다 가치가 올라간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명제가 아닌가 싶다. 그것은 상할수록 가치가 올라간다는 의미로 본다면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기에 좋은 특성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경에서는 <피는 생명>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피를 마시지 말라고 하셨는데, 물론 피 자체는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내 피를 마시라.’라고 하신 것은 율법을 어기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이 너의 것이 되게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율법의 목적이 예수님이고, 먹는다는 것은 몸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논리로 따져도 그렇다.


떡은 또한 몸이라고 하시면서 먹으라고 하셨다. 피가 생명이라면 몸은 형식이다. 생명이 가진 본성이 형상화되고 그 생명의 본성과 특징과 행동을 표현하는 도구와 같은 존재가 바로 몸이다. 그런 것을 이어서 생각해보면 피와 살을 마시라고 하신 것은 생명과 그 생명의 본성이 너희의 것이 되도록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내용과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이 특을 벗어난 것은 절대로 없다. 그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존재를 표현하시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세상으로 나타내셨다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 표현된 형식이라는 이 법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애플이 만들면 누가 봐도 애플 제품으로 느끼듯, 하나님께서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만든 세상이라는 이 법의 예외가 이 세상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용과 형식>이라는 것은 다소 건조한 표현일 수 있다. 성경에서 이러한 것을 정말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의 예를 들어보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LOGOS)이 예수님이라는 육신이 되었다는 것인데, LOGOS가 ‘계획’, ‘계산’, ‘의도’라는 뜻을 가진 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하나님의 의와 계획이 육신이 되었다는 표현이고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만드셨을 때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든다고 하셨는데 이때 하나님의 형상은 image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만들자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자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 형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체로는 그 존재를 볼 수 없으니 사람이라는 형식이 있는 존재를 만들어서 그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이미지를 알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에게 구원자이신 메시아가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게 하실 의를 가지고 만드셨는데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타락하므로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을 만드신 그 사람의 본질과 목적의 자리를 떠나 죄에 빠졌는데, 사람의 모습을 회복시키시고자 예수님을 보내셨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라고 하신 것 역시 같은 것이다. 구약시대의 성전의 식양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다른 신들의 신전에서 가증 중요한 것인 하나님의 형상이나 조각상은 없다. 왜냐하면 성전의 모든 것, 작은 그릇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성품을, 이미지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성전을, 또한 성전을 구성하고 그 안에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전이기 때문에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육신과 또한 육신을 가진 이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표현 양식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성찬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은 결국은 예수님의 생명과 그 생명으로 인한 삶이 너희의 것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예수님의 피와 살, 곧 생명과 삶이 너희의 것이 되는 방법은 먹는 것이라는 것이다. 먹는다는 것은 그 먹은 것이 몸 안에서 몸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고, 몸 안에서 하나가 되어 몸으로 표현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먹은 것이 몸과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생명의 본성이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염려하므로 키를 자라게 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생각이나 의지나 노력으로 몸의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가 나의 생명이 되는 것은 노력이나 염려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먹은 것이 생명의 법에 따르는 몸의 법에 따라 되는 것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그것이 바로 먹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성찬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소셔 보이신 모든 것에 대한 최종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제자들에게 그간 하신 말씀, 그간 사람들 앞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 그 모든 것을 행하셨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냐 할 때, 그것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너희가 먹는 것, 곧 이때가지 본 예수님의 모든 모습이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 내가 먹었을 때 나와 맞는 음식을 먹음과 같이 너의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바로 이 유월절 마지막 성찬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실존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나, 과학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일으킬 능력이 있으신 분이고, 신이라는 것과 같은 객관적인 사실, 혹은 객관적으로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것을 다른 사람과는 달리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모습과 그 말씀과 삶이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고, 내가 먹어야 할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 예수님의 실존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람 변하는 기적을 맛본 사람이 그깟 바다가 갈라지는 것이 뭐가 대단한 일이겠는가? 갈라진 바다도 원래로 돌아가고 그 위를 걸은 물도 여상하지만 생명이 바뀐 사람은 그 새 생명이 영원한데 그런 기적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 또한 처음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원래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렇게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였다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되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작은 그리스도(christian=a christ)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다.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성찬도 포도주도 피도 살도 떡도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육신을 가진 형식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인 떡과 생명이요 피인 포도주를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듯이 너희도 그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영인 내용을 표현하는 몸 가진 형식이 되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성전과 같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삶이 되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그것이 떡과 포도주를 주신 의미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러 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가지셨다. 이 자리에서 몇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가장 먼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것, 그리고 포도주와 떡이 예수님의 피와 살이라는 말씀,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제자들과 다시 포도주를 마실 때까지 다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겠다는 말씀들이다.


먼저 제자들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자. 제자들 중에 가룟인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버렸다. 그렇다고 다른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끝까지 지켰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병정들에게 잡혀가시자 다 도망 가버렸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심문 받으시는 마당을 기웃거렸고, 요한은 십자가 밑에 갔었지만 뭐 일단 시작은 다 도망가 버린 것이다. 그것도 배신이라면 배신이다.


가룟 유다에 대한 기록은 의외로 성경에 많지 않다. 그 몇 번 안 되는 가룟 유다의 말에서 예수님을 부른 호칭을 보면 단 한 번도 <주님>이라고 한 적이 없다. 그냥 그에게 예수님은 선생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주와 선생은 다르다. 주인은 자신의 존재 자체의 운명을 가진 분이고, 선생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알려주는 사람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사 인생을 사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라도 주와 선생은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호칭은 당연히 상대에 대한 의미를 대변하는 것이다. 원수를 대할 때는 “이 죽일 놈!”이라고 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는 뭐…(너무 많다.)


그에게 예수님은 당시 시대적 난관을 해결할 대안으로 그리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인도할 선생이라는 의미는 있었지만 자신의 운명을 쥔 주님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으니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각이나 계산과 다르게 십자가를 지고 죽겠다고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시니 한 마디로 ‘속았다’ 생각하고 팔아 버린 것이다. 마치 기대를 하고 주문한 물건이 형편없을 때 바로 중고시장에 내다 파는 것처럼.


그런 면에서 다른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 배반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같이 자신인가 예수님께 물어봤다는 것이 그렇다. 다 찔리는 게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십자가를 지고 죽겠노라 말씀하시니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나서다가 책망 받은 베드로는 끝내 겟세마네 동산에서 품에 품고 있던 칼을 꺼내어 휘두르면서까지 예수님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도망 가버렸다.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도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 자리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것 역시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모든 제자들의 생각이 다 예수님과는 전혀 달랐었다.


이것은 지금도 그렇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모욕당하는 것을 목숨 걸고 나서서 막으려 한다. 하지만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독하지 못하게 결사항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을 자신이 깨닫는 것에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애지중지하는 것이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자신도 십자가를 지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도 제자가 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다는 것은 신앙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의로움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모르는 자들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의로움을 강제시키고 증명하고 주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의롭지만 의롭지 않은 죄인들의 주장에 자신을 내어줌으로 그 의롭지 않은 죄인들이 의인을 십자가에 달고 보니 그곳이 자신의 자리였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 주님을 모독하느냐?’고 대 들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분이지, 함부로 모독하면 안 되는 고관대작이 아니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베드로가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또 보이시고자 하신 뜻을 자기 안에서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그것을 그때까지는 몰랐다. 이런 제자들의 마음과 생각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


사람이 예수님과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내 팽개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배신이고 배반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가룟 유다와 같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러 가시는데 막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아니었던 것 같이, 신앙이라는 것이 신앙 없는 자들 앞에서 무시당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언제나 더 가지고, 더 밝고, 더 의로운 이들에게 무시당하고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죄인이 되어 십자가와 같이 수치를 당하는 것 같은 상황을 인정할 때, 그 모습을 보고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듯이, 계시가 어둡고 덜 가진 체 자신이 옳다고 주장했던 이들이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가룟 유다의 배반은 결국 어디서 해결하였는가 하는 것에서 다른 제자들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가룟 유다는 제사장들에게 가서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든 예수님과 그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물론 그것은 나타난 것이고 본질은 유다에게 예수님은 그저 선생이었고, 다른 제자들에게는 주님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가룟 유다의 배반은 사뭇 교훈이 되는 사건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구속이 어떤 의미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것이라면 가룟 유다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예를 들어 잘 살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거지가 되면 예수님을 배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왕이 되시기를 바란 유다와 다른 제자들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생 자체의 의미와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제사장으로 섬기는 것은 우리 존재와 생명의 정체성을 알게 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이시다. 존재하고 있는 것에게 존재의 이유를 가진 분이 주님이 아니면 누가 주님이겠는가? 그리고 존재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를 알았는데 그 삶이 어찌 형통하지 않겠는가?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