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7

사람이 사람과 어울려서 사는 세상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죄를 범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서로에게 꼭 돈이 아니라도 빚을 질 수 있고, 또 의도치 않아도 해를 끼칠 수도 있는 것이 사람 사이의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형제들에게 행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포스트 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보시는 죄와 사람이 생각하는 죄는 엄연히 다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기 때문에 사람을 보실 때 "네가 누구냐?"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니까 한 개인이 하나님 앞에 누구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뜻하신 그 정체성을 가졌는지, 아닌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너는 나의 형상이냐?', '너는 나의 의를 표현할 형식이냐?', '너는 나의 의가 육신이 된 아들이냐?'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모든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느냐 아니냐가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는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준인 것이다.


그 하나님의 기준이 만족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과 관련된 어떤 것도 논쟁할 이유나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불이 오지 않는 전구가 전구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도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전구가 아무리 예쁘고 설사 그것이 세계 최초의 전구라 할지라도 빛이 오지 않는다면 빛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박물관장이라면 몰라도.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정체성의 자리에 없는 인생은 그가 어떤 삶을 살든지, 세상을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혹은 외계인으로부터 구해진 역대 최고의 영웅이라 해도 하나님은 관심을 두실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하나님 만든 세상에서 그게 필요하면 언제든지 만들면 되는 것이지 그것에 감동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관심사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되는 순종의 마음을 가졌는가, 아닌가 하는 것 그것뿐이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에 관한 것이다. 이 사람의 존재 목적은 사람이 스스로 정할 수 없는 것이다. 피조물의 존재 목적이란 창조주가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빚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빚은 인간이 스스로 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일만 달란트 빚을 졌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만 달란트가 사람이 질 수(만들 수) 없는 채무임을 비유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정체성에 관한 빚과 그 정체성을 벗어남으로 하나님 앞에 가치 없는 죄인이 된 것은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빚인 것이다. 즉 인생은 피조물이므로 창조주의 계시가 없으면 스스로 그 존재의 목적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사람과 같이 육신으로 보내셔서 십자가에 들리게 하시고 사람이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만 달란트를 탕감한 주인의 모습인 것이다.


반면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는 사람들의 행동에 관한 것이고, 그 판단 기준은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나라에서는 선한 것이 어떤 나라에서는 악한 것이 되는 것이다. 나라마다 그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과 악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꼭 나라가 달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같은 법을 가지고 검사와 변호사가 보는 관점이 다르고, 같은 정치적 사건을 여당과 야당이 보는 것이 다르다. 다 자기가 가진 선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의 예를 들면서 형제가 죄를 지은 것을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물은 베드로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해 주라고 한 것은 한마디로 사람인 네가 사람의 죄를 심판하지 말고 다 용서하라는 것이다. 일흔 씩 일곱 번이 490번이라는 것으로 보는 것은 정말로 멍청이다. 이는 완전히 용서하라는 것이다. 완전하다는 것은 횟수나 시간이나 상황이나 장소에 따라 용서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용서를 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아주 쉬운 것이 또한 용서일 수 있다. 용서라는 것이 잘못한 것이라 생각한 이후에 그것을 용서해 준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용서하고 말고 할 것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는 것은 사람을 보는 관점을 바꾸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에 대하여 늘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행동을 봤을 때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있으면 그것을 용서해야할 일이 생긴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잘못된 것을 보거나, 특히 자신이 손해를 보면 그것을 용서하기는 매우 힘들다. 그것이 용서하기 힘든 것은 이미 잘못된 것이라고, 나에게 죄를 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런 상태가 되었다면 용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참거나 묻어 두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보았을 때 용서할 일, 곧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 아니라, 수천만 번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보는 관점이 바뀐 사람은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용서할 수 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란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과 같이 사람 스스로가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면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몰라서 헤매는 연고로 짓는 모든 죄는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즉 일만 달란트를 빚진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주인의 몫이라는 것을 아는데 일만 달란트 빚진 것과 같이 인생이 왜 사는지를 몰라서 때로 돈에 의미를 두고 때로 권력을 좇는 사람을 볼 때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의 존재 목적을 몰라서 그것을 감당하지 않아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같은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 죄를 탕감 받았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제는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을 안다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형상은 이미지다. 즉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형상이 없으시기에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시기 위한 어떤 형상이 필요하시기에 그 대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육신이 하나님의 형상과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 영이심을 잊으면 안 된다.


영이신 하나님은 하나님이 어떤 모양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사람의 삶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드신 사람은 사람 스스로가 볼 때는 더럽고 연약한 이 육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육신이 보시기에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만 달란트 빚진 것과 같이 스스로 목적을 알 수 없는 정체성이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목적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니 그 사람이라는 형식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가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려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것이 싫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자신이 자신의 삶의 목적을 정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만 달란트를 갚지 못한 죄에 빠진 사람의 정체성인 것이다. 이것을 오해하면 신앙의 뿌리가 흔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의 목적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각과 의와 목적이 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든 인생은 그렇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정체성인 것을 아는 것이 자기 안에 생명으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그 생명대로 살 것이고, 그 생명은 하나님과 같이 일만 달란트를 탕감하는 본성이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알도록 아들을 보내심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삶이 된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다른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수고하고 희생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 사람이 용서 거리라도 되겠는가?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해서,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해서 돈을 좇느라 죄를 짓고, 명예를 좇느라 죄를 짓는 세상과 사람을 정죄하고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사람인데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오히려 부족한 것이다. 수를 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잘못했다고 보지 않는데 용서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그런 사람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일백 데나리온은 사람이 갚은 수 있고, 사람이 만들 수 있는 빚이다. 그것은 사람이 가진 기준, 사람의 행위에 대한 사람의 선악간의 기준으로 심판한 죄를 말하는 것이다. 이 또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사람의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보지 않는데 그것이 죄로 비칠 리가 없을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것과 같이 용서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것은 몇 번이라도 참고 참으면서 사람을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도무지 사람을 볼 때 용서할 것이 없는 생명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죄인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심으로 아들을 보내심과 같이, 또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을 모른다고 죽이려 한 자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의 주장대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렇듯 이 말씀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본능을 가진 생명이 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보고서 너의 정체성이 나와 같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형제의 죄가 용서할 거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듯 네가 그것을 지고 수용하며 사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특히 이 말씀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옥에 가두었다고 비유하신 것은, 그리스도를 믿노라 하면서 사람을 심판하는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사람을 판단하거나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영원히) 용서하듯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처럼 사랑하며 살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더.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금 1달란트는 은 1달란트의 15배 정도이고, 은 1 달란트는 하루 품삯인 데나리온(드라크마)로 6,000 데나리온 정도라고 한다.(성경에 나오는 단위의 객관적 중량이나 가치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요즘도 휘발유 1리터의 가격이 매일 다르듯이 가치란 그때 그때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 노동자 품삯으로 환산하면 금 1달란트(비유에 나오는 달란트가 금이라고 칠 때)는 90,000일의 품삯인데 그것의 만 배인 일만 달란트를 빚졌다는 것을 (의미 없지만)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9억일(약 246만년)에 해당하는 품삯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한 개인이 질 수 있는 빚이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 탕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이 빚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지으실 때 두신 목적이고 죄는 그 목적을 달성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빛을 밝힐 목적을 가지고 전구를 샀는데 불이 들어오지 않으면 그 전구는 주인의 의도와 목적인 빛을 밝히는 목적을 달성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만 달란트는 자신이 빚을 질 수도 없는 것이고, 또 그것을 갚지 않은 죄를 지었을 때 갚을 수도 없는 것인데,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인생의 목적을 가지지 못함이 일만 달란트를 빚졌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것을 갚지 못하여 주인에게 불려갈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저 버리고 자기가 인생에 대한 목적을 가지지 못하는 존재임에도 스스로 삶의 목적을 정하고 사는 죄를 지었다는 것을 말한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잃어버리고 사는 모든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일만 달란트를 빌릴 수 없듯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스스로 가질 수 없고, 또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을 떠나 스스로 선악 간에 판단하고 사람을 심판하며 살아서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을 떠난 죄에서 일만 달란트를 갚을 수 없듯이 스스로 죄에서 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니시면 인생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인이 이를 용서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사람들의 죄를 사했다는 것이다. 죄를 사했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회복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 진 빚, 곧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목적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을 가진 인생 그것이 의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형식이자 존재로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이셨고, 그것을 보고 자신의 존재 목적을 회복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삶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회복한 사람이 세상(주인의 집 밖에서)에서 만난 자기 동관, 곧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자신에게 빚진 백 데나리온을 갚지 않은 자의 빚을 갚으라고 옥에 가두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정체성 자체가 회복 받은 사람이 지은 갚은 수 있는 빚, 곧 존재의 죄가 아닌 행위로 범한 죄를 심판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존재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의와 생명이 있으면 그 의와 생명으로 인하여 행동이 나오는 세계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죄와 행함의 죄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초인간적인 죄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죄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것을 일만 달란트와 일백 데나리온으로 비유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인생이라는 정체성의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이 행함으로 지은 죄를 심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간첩이라는 신분을 면하게 하여 자유 민주주의 국민으로 사는 시민권을 주었더니 자유가 좀 지나쳐 술 취하여 길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을 패버린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존재의 죄, 인생이 왜 사는지를 알게 되었는데,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겪는 불편함을 심판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셨을까? 시작은 베드로가 와서 '형제를 몇 번 용서할까요?' 물은 것에 대한 답변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죄라고 하면 살인이나 도둑질과 같은 것과 작게는 이웃에게 욕을 하고 교통 법규를 어기고 또 사람을 때리는 것과 같은 것을 생각한다. 그런 것은 물론 죄지만 단언컨대 그런 죄 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시는 절대적인 기준은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기대하신 사람의 삶의 목적이 그 사람에게 있는지 아닌지를 보시는 것, 그것이다.


죄는 하나님이 보시는 죄와 사람이 생각하는 죄가 있다. 하나님은 정체성이 기준이고 사람은 행위가 기준이다. 하나님의 기준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 그 생명으로 사는지가 기준이고, 사람은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판단한 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사안에 대하여 사람들은 의견이 늘 분분한 것이다. 특히나 죄의 경중에 있어서는 자기의 기준에 따라 사람 수 만큼 다양하다.


일만 달란트라는 것은 존재에 관한 것이고, 일백 데나리온은 행위에 관한 것이다. 일만 달란트는 정체성에 관한 죄의 기준이고, 일백 데나리온은 사람의 행위를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하여 판단한 죄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의 정체성이 회복된 사람은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행위를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의 행동은 기준에 따라 늘 죄가 되기도 선이 되기도 한다. 다만 그것을 누가 하느냐의 문제이다. 군인이 전쟁 중에 사람을 죽였느냐? 아니면 설사 흉악한 죄인이라도 복수하듯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하여 사람을 죽였느냐가 다른 것이다. 즉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가 죄의 기준이 아니라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했느냐가 더 본질 적인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이다.


반면에 사람은 늘 행동으로 죄를 범한다. 그런 행함의 죄를 하나님께서 상관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또 법률적으로 정해진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사회와 이 세계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적어도 이 사회에 있는 모든 것 그 어떤 것도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 정도는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중 나는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순종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존재 목적을 주셨는지를 회복하는 것이 본질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죄를 범하거나 사람에게 해를 끼친 것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법에 따라야 한다. 벌을 받고 사과도 하고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 사람에게 행함으로 지은 죄를 사과나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알아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는 사람,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사회가 정한 법에 따른 처벌을 감수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사회의 법과 우리의 머리카락 수 까지도 그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확률은 낮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가졌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가졌다는 것은 십자가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삶은 의인이 죄인의 주장에 따라 죄인이 되는 삶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아는 생명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자기 뜻대로 살아서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또 하나님의 의를 아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또 해를 입히는 것을 감당하는 삶이다. 그런 삶이 일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는 삶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 그리스도의 성품이 자신의 삶의 목적임을 아는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사람에게 해를 끼치겠는가? 일백 데나리온 빚질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육신을 가진 인생이 완벽하지는 않다. 그래서 육신을 가진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가져가는 사람이다. 즉 세상의 법으로 범죄 한 것이나 사람에게 해를 끼친 것은 생명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대로 사죄하고 벌 받고 사과하는 것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특히나 종교인들이 후자를 하나님께 사함 받았다고 안 하려 하니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죄 사함 받은 것은 고사하고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육신은 그러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어디에 쓰셨는가? 죄인들이 의인을 죄인 취급하여 죽이고자 하는 것에 재물로 주신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시끄럽고 또 죄에 대하여 왈가왈부한다. 한 마디로 육신으로 감당하는 것을 회피하려는 것에 신앙을 핑계 삼기 때문이다. 육신을 주신 것은 사람들이 선악의 기준으로 자신을 죄인 삼을 때 죄인 되고, 또 육신이 한 행동(예수님의 경우 유대인 앞에서 한 말과 행위들)에 대한 시대의 법률이 정한 죄를 받는 것에 쓰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도 살리시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할 때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생을 육신으로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사람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엄청난 착각에 빠져 있다.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말하는 죄도 사해 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육신은 어디에 쓰는 것이냐고. 모두가 자신이 지은 것도 시인하지 않고 책임지려 하지 않고 선악과를 먹은 아담처럼 숨기고 속이려 한다. 그래서 세상이 시끄럽다. 기독교인들은 특히나 더 그렇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종교적인 이름으로 사람을 심판한다는 것이다. 이 일만 달란트의 비유를 정말로 제대로 안다면 생각도 못할 일인데도.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일만 달란트 빚진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이 육신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존재로서 사는지를 보이신 십자가를 보고 자신의 삶을 목적을 깨닫는 것은 일만 달란트 곧 자신의 모든 존재의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체성이 회복된 생명으로 사는 사람의 삶은 일백 데나리온 빚진 것과 같이 세상을 살며 자신에게 해를 끼치고 자신에게 또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생명이 그것인데 어떻게 다르게 살겠는가? 인간의 DNA를 가지고 고래처럼 살 수 있겠는가?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두 교회의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두 교회 모두 다른 교회에 비하여 말씀의 계시가 밝고 성도들 간에 친밀도가 아주 돈독하여 그야말로 성도의 교제가 생활인 교회이다. 그 중 A교회는 목사님이 연세가 80이 다 되셨고 B교회는 목사님의 나이가 60에 들어섰다. 어떤 교회나 그렇듯이 교회의 방향과 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 때 두 교회는 그런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달랐다.


A교회는 목사님의 연세가 고령임에도 그 성도를 멀리까지 찾아가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듣고 밤을 새워 대화를 했다. 또 다른 사람이 교회 안에 성경적이지 못한 말들을 하고 다니는 것에 있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또한 성도들이 찾아와서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면 전혀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돌려서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했더니 성도들이 점점 불어나고 또한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점점 하나가 되었다. 특히 특징적인 것은 목사님이 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큰데, 한번은 교회 안에 어떤 다른 의견이 있을 때 목사님께서 어느 한쪽에 동의하는 것 같은 의견을 밝혔던 것을 교회 홈페이지에 공개적으로 사과를 했다.


반대로 B라는 교회는 좀 달랐다. 교회 안에 뭔가 잘못한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있으면 목사님이 그 사람이 없는 사적인 자리에서 성도들보다 먼저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물론 대상이 되는 사람을 찾아가서 대화를 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교회의 지체들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런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여기고, 교회에서 뭔가 잘못하는 것 같은 것이 있다 싶으면 시체에 독수리 모이듯 그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일상을 삼았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 표현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는 사례들이다. 이 두 사례가 이 말씀의 내용을 거의 설명하지 않을까 생각이 될 정도로 비교가 된다. 성도, 곧 형제를 얻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고, 또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 길래 이 말씀과 함께 있는 것일까?


7,80년대 한국교회는 부흥의 시기였고 많은 개척교회들이 이 말씀에 의지하고 또 이 말씀을 많이들 나누고 또 믿었다. 물론 이 말씀이 그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그렇게 믿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단지 그런 이유로 있는 것이 아니고,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정체성이다. 특히나 유대인들은 한국이나 이런 나라와는 좀 다르게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 아이가 자라면서 보이는 성향을 이름으로 나타내었다. 그래서 '바요나(요나의 아들)' '보아너게(우뢰의 아들)'과 같은 이름들이 있었다. 이런 것은 인디언들도 마찬가지였는데 1990년에 개봉된 영화 <늑대와 춤을>에 나오는 인디언들의 이름을 보면, '주먹 쥐고 일어서', '발로 차는 새', '머리에 부는 바람', '열 마리 곰'과 같이 그 사람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을 그 이름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모여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나, 예수님의 이름을 뜻하는 교회라는 간판 아래 모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그 모임에 모인 사람들의 정체성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정체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보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그 모임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자'하고 모여 있으면 예수님이 그 자리에 오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과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서로 보증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그 모임은 당연히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모임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이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형제를 어떻게 대하는 사람인지, 형제를 어떻게 대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사람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 죄를 범하였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 이 말씀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죄가 있으면 멀리 하려 한다. 어떤 이들은 죄가 있거나 힘든 이를 찾아가서 위로하는 자들까지 죄인 취급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남을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죄인이 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죄 지은 형제를 찾아가서 권면하는 것은 죄 지은 자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과 같은 모습이다. 


또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소식이 들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마치 십자가 밑에서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을 듣는 것이 이 땅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한 두 사람을 데리고 우리에게 오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두 세 사람 모이면 그 모임은 당연히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모임이 되는 것이다. 지금 이 말씀은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또한 '죄 지은 형제를 찾아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더 깊이 생각해보면,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우리에게 육신을 주셨으므로 이 육신이 수고하여 찾아 가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그냥 몸만 가는 것이 그 사람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그것도 죄 지은 사람에게 간다는 것은 죄인에게 간다는 것이다. 죄인은 당연히 하나님이 보실 때 죄인이고, 이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죄 지은 형제를 찾아가는 것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깨달을 수 있는 모습으로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두 사람이 같이 간다는 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회복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또한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알게 된 사람이 바로 함께 가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 또한 죄 지은 형제 그 역시 하나님 아들의 모습으로 회복 될 수 있다는 증거로서 함께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그리스도 인하여 회복된 증거인 사람이 함께 했음에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교회, 곧 예수 그리스도 보이신 그 생명을 가진 이들이 모인 공동체로서 증거를 보이고 죄 지은 자가 잃어버린 길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그리고서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깨닫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같이 여기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땅에서 사람이 할 일이기도 하다. 즉 땅에서 매어야 하는 일이 이것이라는 것이다. 죄인을 찾아가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하는 일,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 우리가 매어야할 일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늘의 뜻이기 때문이다. 땅에서 매는 것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것은 그것이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땅에서 매는 일과 하늘에서 매이는 것이 연관이 있기 때문에 땅에서 맬 때 하늘에서도 매이는 것이지 전혀 무관한 것이라면 그럴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뜻은 예수님을 보내시면서 까지 사람에게 보이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죄, 곧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존재의 목적을 떠난 자리에서 돌아오는 것이다. 즉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는 것이다. 왜 사는지 잃어버린 사람에게 길과 자신의 존재 목적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죄인을 찾아 가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함께 한 곳이 교회다. 그리고 그렇게 죄 지은 형제를 찾아가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 곧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고, 그 모임이 바로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