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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장 후반에서 예수님은 드디어(?) 자신이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신다. 그 말씀을 하시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각오를 다지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며 호통을 치신다. 성경의 사건으로만 보면 바로 앞에서 큰 칭찬을 받은 베드로인데도.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임을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렇게 되면 안 된다며 예수님을 만류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의 의도를 사단의 생각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왜 사탄의 생각이고,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베드로의 말은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고 또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 말씀의 뜻은 모른 체 그것을 형식으로 지켜내기만 하려는 외식하는 이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받고 죽게 된다는데 그것을 말리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오늘날 신앙인들 중에 예수님의 생각과는 달리 베드로의 생각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베드로의 모습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예수 믿는다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을 대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교회에 가려는데 막거나 방해하는 가족을 사탄이라 하고, 또 성경의 진리를 모르는 이들이 신앙 가진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고 그들을 짐승 같다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다 이 베드로의 생각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을 지키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신앙생활을 위하여 직장을 옮기거나 떠나는 것은 물론이고, 심심치 않게 가족을 등지기도 한다. 그들의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에게 직장의 요구나 가족의 요구사항은 자신이 가진 신앙, 자신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고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물리치거나 그것에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거나 고난당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을 막아선 베드로의 생각이 그것이다.


그런 신앙인들의 모습은 언뜻 굉장히 투철하고 신앙심이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일단 신념이고 무엇보다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 그러니까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있어 자신이 가진 신앙이 고난을 받고, 죽어져 나가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임에도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신앙에 고난을 주거나 헤치려고 하는 것을 사탄의 계략이라고 오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상당한 문제가 있다. 우선 사회적으로 이해를 받기 힘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그 아들을 죽일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을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을 모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자극적일지 모르지만 아주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생각을 사탄의 생각이라고 하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블로그에서는 십자가에 대하여 많은 내용이 있다. 무엇이 십자가를 지는 것인가 할 때, 그것은 더 온전한 의를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모르는 이가 의를 알지 못한다고 핍박하고 죽이려 하는 심판 앞에서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십자가라고 수 없이 말해오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생의 절체절명의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늘 있는 문제라고 수 없이 포스팅을 해 왔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도를 아는 것이 신앙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늘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난다. 그런 주장이 내가 아는 것보다 더 제대로 된 것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것이 아닐 때가 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흥분하고 네가 아는 것이 온전치 않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일깨우려 한다. 특히 신앙에 있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인간의 절대적인 정체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주장하는 주장 앞에 서면 너무나 당연하게 그것이 아니라고 반론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베드로의 모습인 것이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같이 그런 주장 앞에서는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한다. 이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주장이 내가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하고, 더욱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나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면 더 의기충천하여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한다. 그런데 세상은 바로 그런 모습으로 인하여 시끄럽고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모른다. 그래서 그런 주장을 짓누를 논리나 힘이 있으면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한다. 목사라는 지위 같은 것으로. 그러나 그것이 안 된다 싶으면 직장을 떠나고 가족을 등지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사탄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온전치 못한 의와 생각, 내가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 생각을 주장하는 그 주장 앞에 지는 것이다. 그것이 죽고자 하는 자가 산다고 할 때 죽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잘 못하는 사람에게 핸들을 맡긴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운전을 더 잘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와 수고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는 것이고, 그것이 핍박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 '사람은 이래야 한다.'고 주장하고 요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뜻을 아는 사람이 수용하면 정말로 힘들다. 인생이 돈이 전부가 아닌데도 돈에 대하여 스트레스 받아야하고 또 벌기 위해 수고해야 하며, 교회에 가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남들 쉴 때 수고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께서 채찍을 맞으심과 같이 우리 육신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십자가의 법을 온전히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조금 안다 싶으면 그것을 모르고 신앙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심판하며 정죄하고 그들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인하여 신앙생활에 지장을 받게 된다면 그것을 사탄의 생각이라 하며 정죄한다. 하지만 그런 신앙인들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만류하는 베드로의 모습이고, 십자가를 벗어 던지는 모습인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예수님도 하나님도 성경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을 알고서 살아가는 삶은 원래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들로 인하여 피곤한 게 정상이다. 그런 피곤함이 없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그 피곤함의 결과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백부장이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은 고백을 낳게 하는 것이다. 그런 수고가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그런 고백을 들을 때 감동이 영광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고백을 낳게 하는 이가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이 법과 구조를 알고 경험하는 삶은 육신은 피곤하나 그 영은 영광스럽고 늘 기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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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13-20 베드로의 신앙고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6. 17. 15:59 Writer : 김홍덕

요즈음은 보기 힘들지만 90년대 초만 해도 물고기 모양을 차 뒤에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것은 물고기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익투스(ἰχθύς)라는 단어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단어들 첫 스펠을 모은 것과 같아서 이 베드로의 고백은 익투스로 상징되었고, 이것은 더 나아가서 기독교가 핍박 받던 시절 기독교인들의 상징과 암호이기도 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마 16:16)


이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셨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사람들이 이르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또 더러는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에 대한 베드로의 답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정확히 알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가 아는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사실은 믿노라 하면)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 또 예수님을 믿으면 이 땅에 살 동안 복 받는다는 것 그것이 믿음과 관련된 정의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결과와 효과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무엇이 믿음이냐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다.


베드로의 고백이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 고백 자체로도 중요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그 고백의 과정,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물으신 물음과 어우러졌을 때 제대로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누구로 아느냐?> 하는 문제이고, 그것을 좀 어렵게 말하면 <나와 예수님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 그것이다.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 믿음의 내용이라고 하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어 보인다. 더욱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베드로가 고백하는 그 순간, 예수님을 주로, 또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이 신앙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고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고백이 예수님이 칭찬해마지 않았던 것은 지금 이 시대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고 있으면서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눈에 또 그 당시의 사람들 눈에 한낱 가난한 목수의 아들인 한 남자, 가끔씩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것은 선지자들도 한 것이기에 사람들이 선지자라고는 할 수 있는 그냥 그런 한 사람, 또 한편으로는 세금도 내지 않고, 율법도 무시로 어기며, 가난한 사람, 죄인 그리고 창녀와 세리와 밥을 먹는 그런 한 사람을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선지자나 세례 요한이라고 했던 것은 그들 마음에 예수님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볼 때 성경에 대하여 놀라운 말씀을 하시는 것이나 때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그들 사회와 역사 속에서 많은 선지자들이 보였던 것이고, 그리고 세례 요한도 천국의 복음을 전파했기에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은 선지자로 보였기는 했지만 예수님이 주나 메시아(그리스도)로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인식하는 대로 사람을 대한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그 사람이 어떤 의미인지, 그것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실제로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늘 '선생이여'라고는 불렀을 뿐 <주>로 부르는 경우가 없었다. 그와 같이 유대인들에게도 예수님은 선지자로서의 의미는 있었지만 그리스도로서의 의미는 없었던 것이다. 만약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여겼다면 절대로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란 메시아를 말하는 것이니까…


그런 이유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먼저 주라 칭하고 또한 그 자신의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한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베드로의 마음과 같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정체와 본질 역시 그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 말씀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와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블로그의 제목을 <성경은 나의 이야기다.(Bible become My story!)>라고 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한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예수님은 나에게 그리스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예수님이 누구냐에 따라서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지금 당신이 말하는 예수님이 죄인들과 밥 먹고, 창녀와 매국노 같은 세리와 놀고 때로 성경말씀을 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면 그를 주로 또 그리스도로 또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신에게 의미가 있을 것인가 묻는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또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은 그런 예수님을 보고서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기에 예수님이 보실 때 너무 귀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세상적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육신의 연약하고 고상하지 않은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했을 때, 그럴 수 있는 사람의 고백이 바로 베드로의 고백인 것이다. 그러니까 좋은 옷을 입지 않고, 또한 신학박사가 아니고, 또 교회에 많은 헌금을 한 것도 아니고, 또 때로는 고상하지도 않고 도덕적으로 존경받지 못할만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는 지금 신학(신앙이 왜 학문이 되었는지 알 수도 없지만)적으로 많은 공부를 하고, 또 잘 차려입고 또 훌륭한 조명과 음향시설을 갖춘 높은 강대상에서 자신의 신앙고백이 아닌 성경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또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존경받는 방법으로 변질시킨 설교를 하는 사람을 보면서 '주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일상에 찌들어서 살아가는 중산층 이하의 삶을 살면서 때로 법도 어길 수밖에 없고, 또 때로는 욕도 하는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거나 또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면 용납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시대의 가치관이 그렇다는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의미도 모르는 것이고, 그런 고백을 상징하는 것을 차에 붙이거나 자신의 종교의 대표성으로 표시할 자격이나 믿음이나 신앙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한낱 목수의 아들이고 때로 세금도 못내는 가난한 예수님을 보면서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제대로 안다면 교황이 왜 있으며, 교회를 왜 화려하게 지을 것이며, 또 목사를 청빙하는데 왜 학력을 보겠는가? 그러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 어우러져 사는 거저 평범한 사람, 신학을 몰라도, 높고 좋은 강대상에 오르지 못해도, 또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영광이라고 할 것이 전혀 없고 성공이라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을 그리스도와 같이 대하고, 또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 또 그 중에 어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면 그리스도의 성품을 이미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베드로의 고백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고, 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 주변에 있는 그런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나 베드로 눈에 또 당시 유대인들 눈에 비친 예수님이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메시아로 자신에게 의미가 있음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졌다는 것은 제사장의 화려한 옷을 입은 것도, 로마 황제의 옷을 입은 것도 아니라 베드로와 유대인들의 눈을 볼 때 자신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예수님의 모습 그대로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고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사도가 되고 또한 예수님과 같은 세계의 사람이 된 것이다.


오늘, 우리 평범한 인생들, 피라미드의 하층에 있고, 상대를 이겨야 승자가 되는 세상의 법에서 패자와 죄인이 된 사람들, 그런 인생들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을 표현하는 아들이요 그리스도가 되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면 사는 꼴은 그러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대하듯 할 수 있다면 베드로의 고백이 자신의 고백이 된 사람이지만, 그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신앙을 가졌다면, 또 신학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단언컨대 베드로의 고백은 그들의 고백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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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명을 또 사천명을 억이시고 또 바다 위로 걸으신 것이 알려질 만큼 알려져서 인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흐리면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표적은 구분할 줄 모르는가 하시면서 보여줄 것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다시 말씀하셨다.


유대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표적, 그러니까 어떤 표적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보였을 때 하나님이 하셨다고 할 수 있는 것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런 요구를 하는 자들이 하늘을 보고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은 알면서 예수님을 보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기적을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다.


그리고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교훈하시자, 때 맞춰 떡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룩을 말씀하시는 것이 그것에 대한 말씀인 줄로 알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말씀하신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직접 살면서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하고 그 주인공이기도 했던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이상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 그들이 예수님께 기적을 요구하는 마음과 상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있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기적을 요구하는 마음과 같은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던 누룩 같은 마음은 어떤 것일까?


사람들에게 하늘은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일으키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복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사람의 존재 이유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듯 하늘은 사람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을 주관하는 곳이 하늘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예수님께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보이면 믿겠다는 시험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생각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인 것이다.


그리고 이 생각이 치명적인 것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세계 안에 그런 생각이 늘 있었고, 또 지금도 있고, 장차 올 신앙들 안에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이 글을 보는 사람이 사는 시대가 객관적 시간으로 서기 몇 년이라도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경계한 누룩과 같은 생각은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시대에도 있는 생각이라는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경계하신 것이다.


그 생각은 선악과를 먹을 때 그때부터 있던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자신의 벗은 모습이 부끄럽게 생각했던 그 시점부터 모든 인생들은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 부끄러움과 부끄러움의 근원인 육신이라는 것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또 육신이 보여주는 연약함과 고상하지 못한 것들을 제어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런 생각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인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바벨탑을 쌓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내려와 봐!'하며 놀린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사람이 사람 그 자체로서 보이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지 않는다. 보통의 인간,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워했고 또한 자신들이 집 밖에 나가서 들키지 않고 싶은 인간 본연의 모습과 능력으로 보일 수 있는 일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능력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모습은 하나님을 믿는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가 화장실에서의 모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겠는가? 그런 것을 감추고 싶은 사람은 그런 모습으로 표현되는 사람으로서는 하나님께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기적으로 보지도 않고, 그런 모든 것을 상쇄할 만한 기적들, 물 위를 걷는다거나, 암 환자를 한 순간에 회복시킨다거나 하는 것과 같은 것(그런 기적들은 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의를 전하기 위한 과정이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의 본질이 아님에도)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생각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기적을 구하는 생각이고 그들의 누룩인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들이 오늘날 교회에서 교회를 화려하게 지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교회에서 대통령이 나오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역사하는 교회라고 생각하며, 또한 그런 생각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감추고 싶은 것을 다 잊게 만들 정도로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모든 생각들이 바로 지금도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시대의 교회가 부풀어 오른 것은 많은 부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으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그것이 비판적 시각이 아니라 지금 이 글에서 말하는 시각으로 보인다면 정말로 복음적인 관점을 가진 안목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만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경계하라고 하시니 그 말씀이 그 시대의 말씀으로만 보는 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틀림없이 성경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결국 어떤 것이든 지키지 못하는 것이 분명히 있음에도) 예수님의 기적을 눈으로 보고 말씀을 직접 들은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이상할 것이 없을지는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또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의는 그런 안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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