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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이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사실과 다른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어떤 세계에서 무엇을 사실 혹은 진실인가 하는 것은 기준으로 사실과 진실이 아닌데 그것인양 말하는 것을 거짓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거짓이라는 것도 다 이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아닌데 하나님의 뜻이라 하고 주여, 주여 부르는 것이나, 본질은 외면한 채 겉모습만 번지러한 것 역시 겉과 속이 다른 거짓의 모습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거짓의 본질을 더 깊이 알아본다면, 그것은 본질과 표현된 것이 다른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내용과 형식이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도 잘 만들어진 동물이나 꽃과 같은 생명체 모형을 보면 하는 말이 “진짜 같다!”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 모형이 가짜라는 것이다.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거짓 그리스도 역시 그리스도의 본질인 생명은 없이 그 모양만 아주 잘 만들어진 모형과 같은 존재를 말한다.


이러한 거짓 그리스도는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을 알려면 그 본질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생명의 모형이 가짜인지 아닌지는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존재가 볼 때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 그리스도 역시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거짓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이나 거짓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안목은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 된다.


거짓 그리스도를 구분할 수 있으려면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생명에 관한 것이므로 생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들이라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생명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야 거짓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분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 거짓 그리스도를 구분하는데 어떤 학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거짓 그리스도와 이단을 구분하는 것에 있어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안에 생명이 없을 때 차선책으로 하는 것이다. 정말로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자기 삶을 주관하는 사람은 거짓 그리스도를 구분하기 위하여 노력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길가다가 강아지와 강아지 인형을 구분하는데 학습이 필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무엇이, 어떤 것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나, 여기저기서 다양한 기적을 가지고 이것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에 유혹되지 않는 것이나 같은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따로따로 구분하고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보이면 다른 것은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는 것이 어디 학습이나 연구 때문인가? 그것이 독수리의 본성, 곧 그 안에 있는 생명의 본성 때문이 아닌가?


사람들은 적그리스도, 거짓 그리스도에 미혹될까 두려워하고 경계한다. 하지만 이는 부러워하면 이미 진 것이라는 말과 같이 적그리스도에 대하여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이미 적그리스도에게 진 것이다. 세상에 강아지 인형과 강아지를 구분하지 못할까봐 걱정하고 경계하는 사람이 있기나 하겠는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 적그리스도, 거짓 그리스도를 구분하지 못할 이유도, 또 그것을 이기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단지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심겨지는 것을 위하여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고 계신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거짓 그리스도를 경계하라는 말씀은 거짓 그리스도를 구분하도록 공부하고 경계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이실 십자가의 사건이 너의 사건, 너의 이야기가 되도록 하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사건이 자기 이야기가 되어 자기 안에 생명이 있어 거짓 그리스도를 본능적으로 아는 존재가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재림하시는 일인 것이다. 바로 그 사건,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 안에 재림하시는 사건이 있기 전에 자기가 하나님으로 여기는 가치기준, 그리고 그 가치기준에 따라 자기가 만든 자기의 세상이 다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심령에 재림하시는 일과, 자기가 정말로 모든 것이라고 여겼던 본질이 아닌 세상이요,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만든 세상이 무너지는 사건과, 또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게 되는 안목과, 연구하거나 경계하지 않아도 거짓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본능으로 아는 사건은 모두 같은 사건이라는 것이다. 마치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이는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은 같은 사건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생명이 있으면 그 생명에 맞게 먹고, 자고, 모양이 생기고 하는 모든 것이 아주 여러 가지라도 생명의 본성 그 하나에서 비롯된 것이듯,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기만 하면 다양한 것 같은 이 모든 일이 한가지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멸망은 먼저 자기가 모든 것으로 여기는 세상이 끝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세상이 끝나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인지, 거짓이 무엇인지 다 알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가 알고 자기가 의롭고 선하게 여기던 세상이 끝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은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 깨달음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에 본질이 그 안에 있어 삶이라는 형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본질과 형식이 하나가 된 거짓 없고 가증하지 않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생명이 모든 사람의 본질과 삶의 의미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임을 안다면 그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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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4:15-28 세상의 멸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11. 11:10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가끔 이런 말을 한다. “남자와 여자는 같이 살고 있어도 다른 세상을 산다.”와 같은 말, 또 때로는 “연예인들은 자기들만의 세상이 있다.”와 같은 표현에서 세상이라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삼라만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가치 기준에 의하여 자기가 세운 세상이 다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세상도 그것이다.


천지창조 역시 같은 이치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이 신앙의 기초이고 근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에 관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을 만드셨는지, 그 목적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세계를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우주의 창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의와 세상을 만드신 목적을 알고서 살아가는 안목이 새롭게 열리는 그것이 바로 천지창조인 것이다. 


그때는 남자와 여자가 세상을 보는 것이 다르듯이 같은 세상을 살아도 다른 세상을 사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전에 알지 못하던 세상을 알고서 살아가면서 세상이 자기에게 투영되고, 또 세상을 받아들이는 이전에 없던 가치관으로 인하여 새롭게 생성된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이고, 천국이며, 그런 세계가 열리는 것이 바로 천지창조인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세계가 그렇듯 반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자기만의 세상이 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남자와 여자가 같은 공간과 시대를 살아도 다른 세상을 산다고 하는 것과 같이 다들 자기만의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모든 것이 돈이라는 가치관으로 비쳐지고, 어떤 이들은 명예, 또 어떤 이는 권력과 같은 것으로 세상을 바라봄으로 창조된 자기만의 세계와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세상이 망하고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만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은 물리적인 이 우주 공간 속의 지구가 망하는 것을 예언하시는 목적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만의 세상이 망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만의 세상이 망하고 나면 그때 그 사람에게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주 주관적인 사건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시는 의와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 이 글에서 마태복음에서 또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세상의 종말이라는 것이 이 지구가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든 세상이 망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분명 생소하게 다가올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망하는 세상이 이 삼라만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이 세상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망한다고 할 때 망하고 없어지고 황폐케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세상의 본질을 어디에 두고 있었는지를 가늠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성경에서 세상이 망한다고 하니, 이 지구가 멸망하고 하늘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지구가 세상의 본질인 사람이다. 그러니까 물질과 형식이 본질인 줄 아는 사람이고, 온 천지의 영광을 보여주며 이것을 줄 테니 절하라고 하는 마귀의 시험에 굴복하고 세상이 본질이라고 여기며 절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돈이 전부인 줄 알던 사람이 거지가 되면 세상이 망했다고 한다. 또 명예가 전부인 줄 알았던 사람은 수치를 당하면 세상이 망했다고 한다. 여자에게 순결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에는 순결을 잃으면 자결하도록 한 것은 순결=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런 가치관, 그런 사고방식으로 볼 때, ‘세상이 망한다.’하니 이 지구가 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연히 이 지구가 세상의 본질이고 전부인 사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세상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본질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니심을 아시기에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을 이기신 분이신 것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기껏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망하는 것이나 예언하시려고 십자가 지시기 전 그 아까운 시간을 사용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누구의 세상이 망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세상의 주인인양 살아가다가 때로는 자기가 세상과 자기 삶의 전부라 여기던 것을 잃기도 한다. 재산이나 명예를 다 잃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자기 세상이 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 그 세상이 망하는 사람은 자기가 옳게 여기고 전부라 여긴 세상이 망하고 나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 그들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돈이 전부고 중요한 사람이 거지가 되고 사업이 망했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과 같이 망하기 전과 동일한 세상을 다시 세우기 위하여 세상을 망하게 하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물리적인 세상을 망하게 하시고 다시 이 땅에 같은 세상을 만드실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망시킨다면 다른 것을 세우기 위하심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른 세상은 예수님과 같이 세상을 보는 사람이 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마치 남자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여자가 세상을 보는 관점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돈이나 명예나 자식 사랑과 같은 것이 인생의 의미이고 자기 세상의 전부요 그것이 세상이든 사람이 예수님께서 자기 마음에 오심으로 이 세상을 전혀 다르게 보게 되는 것을 위하여 이전의 자기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즉 본질 아닌 것이 본질인척 하고 있는 것이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즉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그 속에서 어리석게도 그 세상의 가치기준인 돈과 명예와 같은 것이 자기 세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렇게 본질 아닌 것이 자기 안에서 버젓이 본질인양 자리하고 있었던 그 가증한 멸망의 일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사람이어야, 그것이 눈에 보여야만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재림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 자기 세상이 망하는 멸망의 징조라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이 망하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본질인 것이고, 그것을 아는 사람이 약속을 받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어야 실재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것에 대하여 확신이 있는 것이다. 약속이 그 안에 있으니 증거는 절대적이진 않지만 확신은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상이 망한다고 하시는 이유, 하나님께서 세상을 망하게 하시는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세상, 그것이 물리적인 세상이든 아니면 자기가 세상으로 여기는 가치관과 안목이든 그것을 망하게 하시는 것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시 그런 세상을 재건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드시기 위하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가 또 다른 나를 정복하는 것은 그 나라를 자기의 의로 다스리기 위함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가진 자기의 가치관을 망하게 하시는 이유는 당연히 하나님의 의와 가치관이 그 사람을 다스리기 위함이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다스리고자 하시는 그 세상이 깃든 사람은 원래 하나님께서 하나님 당신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지으신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것은 더욱 당연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세상의 멸망을 이야기 하시는 것이 어떻게 물리적 세상의 멸망을 말씀하시는 것이겠는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이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상에 관하여 어떤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인 줄 알고 이 세상이 존재하게 된 이유와 목적을 모르고 외면하며 내용과 목적이 아닌 형식만 중요하게 여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셨던 것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멸망을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말씀하시고자 하신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 지으신 목적을 전하기 위하심이다. 즉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기준과 의로 세우고 정의내린 자기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과 의가 열리는 세계를 맞이하는 세상의 변화를 위하심이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이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물리적인 세상이 천 번 망하고 새롭게 된다 하여도 아무것도 아니다. 즉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의에 관한 것이다.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인생은 이런 것이라고 정의내리며 살아가는 자기 의가 다스리는 자기 세상이 망하고,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인생이 되어 세상과 인생을 보는 가치관이 하나님과 같아지는 그런 안목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이 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보이신 세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면, 어느 때가 될지 알지도 못한 세상의 멸망을 고대하는 것이나, 예수님이 자기 안에 재림하시는 약속이자 본질은 알지 못한 체 막연히 자기 안에 없는 것을 신념으로 의지로 억지로 믿어가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형식 밖에 없는 바리새인 같은 신앙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세상이 망하면 예수님께서 그 심령에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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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4:15-28 큰 환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10. 12:49 Writer : 김홍덕

사람에게 환난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하면 우선 큰 병이 든다거나, 사업이 망하는 것과 같은 것을 생각한다. 한 마디로 욥이 망하는 과정과 같은 것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성경, 그리고 마태복음 24장 이후에 나오는 환난과 재앙은 그런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 환난의 시작은 ,멸망의 가능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는 때> 그때부터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신앙 안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의도와 다르게 존재하거나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망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같이 행동한다. 시간을 알기 위하여 산 시계가 아무리 예뻐도 시간을 알려주지 않으면 이미 망한 것이고, 폐기되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일 뿐인 것과 같은 이야기다.


그런 멸망해야 할 것은 망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버젓이 거룩함, 곧 하나님께서 구분하신 것과 있는 것이 자기 눈에 보이는 사람은 환난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환난은 앞에서 쓴 글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객관적인 사건이 아니라 아주 주관적인 사건이다. 어떤 순간,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아 저것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이구나!’ 이렇게 알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물론 실제로 그런 날이 말씀대로 오겠으나 그것은 약속의 증거이지 본질은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서 땅에 심긴 씨앗이 싹이 나고 나무가 되고 열매가 열리듯 자기 안에서 자라나게 되면 어느 순간 세상에 있는 것, 또 종교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어떤 것을 볼 때, ‘아 저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말하는 것이구나!’ 이렇게 깨닫게 되고,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그냥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환난의 시작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게 되는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기쁨인데 그것이 왜 환난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렇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는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때까지 알고 믿고 본질로 알았던 것이 다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 빨간 약을 먹은 것과 같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환난은 돈이 없어지거나 건강이 상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일도 사람이라는 존재에게는 큰 타격이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인 것은 틀림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최고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겪는 환난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욥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욥이 모든 것이 다 망했고, 친구들이 찾아와서 ‘네가 분명히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어 그렇다.’는 끊임없는 주장에도 굴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는 자신이 하나님과의 마지막 대화를 통하여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말했다는 회개를 하게 된다. 즉 그에게 가장 큰 환난은 하나님을 잘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알고 믿고 사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에게 있어 공통되고 기본이며 가장 큰 환난은 자기 정체성의 상실이다. 이것은 우리가 영화나 책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의 한 예를 든다면 헐리웃에서 나오는 영웅시리즈 영화는 어느 시리즈에서는 반드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을 다루는데 그러한 것에서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증명된다. 그것은 곧 자기 정체성이 상실되는 것 이상의 환난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또 그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 보이면 그 혼란은 이루 말하기 어렵다. 그날 까지 본질로 알았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은 정말로 혼돈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인간의 정체성 자체에 대한 환난이다.(그게 무슨 환난이라고 호들갑이냐 하는 사람은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다.) 비유가 어떨지 모르지만 아이폰을 사용하기 전에 전화기는 그저 삼성이 제일인 줄 알았다. 당시 옵니아폰을 사용하던 나는 아이폰을 처음 접하고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10여 년간 속고 살았구나!’ 


그냥 전화기 하나도 그런데,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 돈에 있는 것으로 여기면 돈을 위해서라면 사람과의 관계도 희생하며 살던 사람이 인생의 본질은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은 정말로 혼돈스러운 것이다. 명예도 그렇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이 주신 본질은 깨닫지 못한 체 그런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 자살하기도 한다. 그게 인생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이다. 사람이 빈 그릇이기에 무엇을 채우는데 여태 채워왔던 것이 담아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부모인 줄 알고 살았던 사람이 실은 자기 부모를 죽인 원수임을 알게 되는 이야기 같은 환난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날이 안식일이나 겨울과 같이 육신에게 제약이 따르는 시절이 아니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이 먹고 살기에 아주 중요한 일이나, 사업상 중요한 계약이나, 아니면 아주 몸이 약하고 아플 때가 아닌 날,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열리기를 바라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야 어떻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면 겉옷을 가지러 돌아가지 말고 빨리 산으로 도망가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보이기 시작하면 도망가듯 말씀을 좇아야 한다. 출애굽 때에도 천사들이 애굽의 처음 난 것을 다 죽이면 바로 떠날 수 있게 허리띠를 동이고 신을 신고, 서서 양을 먹으라고 하셨다. 롯에게도 뒤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계시가 열려서 천지가 창조되듯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안목이 생기면 그 안목을 좇아서 떠나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겪는 가장 큰 일은 자기 정체성이 상실되고, 평생을 수고한 것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자식을 위하여 평생 살았는데 자식이 배반하는 것과 같은 것은 자식이 배반한 것이 큰  일이기도 하지만 자식을 위한 자신의 삶이 허망해 지는 것이 진정한 상처고 환난인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또 인생의 본질에 대하여 자신이 알았던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가 이때까지 본질이라 여겼고, 하나님이라 여겼던 것이 멸망의 가증한 것인데, 자기가 거룩한 하나님과 같이 섬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삶의 가장 큰 환난이다.


이러한 환난은 다시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삶에 한 번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자기 삶에 대한 안목이 열려서 그날까지 본질로 또 하나님이라 알았던 것이 허상이요 형식이며, 자기가 가진 선악에 의하여 만들어진 하나님이요 우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사람은 겉옷, 곧 세상에서 자기 신분과 육신의 먹거리와 같은 일들을 챙기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산)으로 떠나야 한다는 말씀이 이 말씀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예루살렘에 오셔서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 얼마 전인 시점이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 제자들의 심령이 무엇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며, 무엇이 거룩한 것인지 알게 되는 시점이 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모습을 설명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무엇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며, 어떤 것이 인생의 본질이며, 누가 참 하나님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육신의 모든 것은 버려두고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이 지시할 땅(사람의 정체성)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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