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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32-39 사천명을 먹이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6. 16. 16:37 Writer : 김홍덕

처음 성경을 읽었을 때 이 사천명을 먹이신 기적과 오병이어는 같은 사건인줄로 안적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왜 두 번씩 비슷한 사건이 기록되었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두 사건이 같다고 착각하는 것 보다, 비슷한 사건이 두 번 기록되었다는 것이 더 의문스러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4,000명을 먹이신 기적과 오병이어는 우선 상황이 다르다. 오병이어는 날이 저물고 장소도 비어 있는 들이었다고 되어 있다. 유대인들에게 하루는 날이 저물 때부터 다음날 날이 저물 때까지이다. 그러니까 지금 보통의 사람들에게 시작은 아침이지만 유대인들에게 날이 저물었다는 것은 한 날이 가고 새 날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오병이어에는 날이 저물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죽고 난 다음, 그러니까 사람들의 신앙의 여정이 율법적인 것을 좇던 신앙에서 그것이 떠나고 난 빈들과 같은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므로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 새로운 날은 예수님께서 떡과 고기를 축사하시고 나누어주시는 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먹은 사람들에게 시작되는 새로운 시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반대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몸을 먹는 것이라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육체를 먹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몸으로 보이신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한 개인의 신앙에 있어 예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기 시작하는 날은 분명히 새로운 날이다. 그것을 고린도서에서는 구원의 날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한다.(이것을 달력의 날짜로 알아야 한다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다.) 신앙의 여정에서 율법적인 신앙, 곧 말씀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생명의 세계를 알게 되는 순간이 시작되면 날이 바뀌는 것이다. 즉 다른 날이라는 것이고, 그렇게 날이 바뀌는 것을 유대인들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로 표현하는 것이다.(창세기에서도 그렇게 창조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오병이어에서는 먹고 남은 것, 곧 그것을 먹은 결과 12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이다. 앞에서 오병이어를 포스팅 할 때 밝힌 바와 같이 12는 나라를 의미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교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병이어는 한 개인의 신앙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라의 신앙이 되는 그 풍족함에 대한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죽고 난 다음에 이어진 이야기이고, 빈 들이고, 또 날이 저물고, 또 회복을 의미하는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그 회복된 이들이 교회를 이룬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떡 일곱 개로 4,000명을 먹이신 것은 우선 배경이 좀 다르다. 이 기적은 우선 사람들이 사흘을 굶었다고 되어 있다. 그들이 굶게 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느라 그렇게 된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을 듣고 함께 하느라 사흘이 지나도록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사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는 것이다.


오병이어는 회복을 의미하는 다섯 개로 영원한 회복을 의미하는 오천 명을 먹이셨고, 칠병이어에서는 완전을 의미하는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시고 또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잠깐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면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셨다면, 일곱 개면 칠천 명을 먹여야 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람이 4,000명뿐이라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남은 것도 12광주리 보다 작았으니. 하지만 이건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5"는 회복이다. 대희년이 50년마다 돌아오는 것도 그렇고 오순절이 그렇다. 반면에 "7"은 온전함이고, "4"는 늘 인간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인간의 생각이 처리되는 기간으로 40일, 40년 이런 세월을 보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40일 금식 기도가 그렇고, 모세가 40년 광야 생활을 한 것이 그렇고,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종살이 한 것이 그렇다.


반면에 "3"은 늘 하나님을 나타내는 숫자다. 삼위일체가 그렇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세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도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이라는 의미라는 것이 그렇다. 그리고 "7"은 안식이다. 안식한다는 것은 더 이상 할 것이 없는 온전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이 칠병이어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과 함께한 무리가 돌아가는 길에 길에서 기진할 것을 걱정하신다는 말씀이 있다. 길이라는 것은 여정이다. 성경이 우리의 삶을 나그네 길이라고도 하는데 나그네가 곧 길 위를 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흘 동안 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길을 가는 길에 지칠까 염려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고 염려하신 것과도 비슷하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그 염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인생을 가는 여정에서 지치지 않기 위하여 먹을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사천명이기도 하다. "4"는 사람이고, 그것이 영원을 나타내는 천명으로 표현된 것은 사람이란 그렇다는 것이다.


삼일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는 시간이라는 것이 일정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도 인간이라는 이 운명을 부족한 것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이 육신 가진 삶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까지 시간을 사흘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흘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병 고치는 기적을 함께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길로 돌아간다는 것은 또 다시 각자의 삶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과 같이 그들 하나하나도 각자의 세계에서 다시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나타내어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므로 그들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일곱 개의 떡, 곧 예수 그리스도로 안식할 수 있는 양식을 더하여 주신다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이다.


사실 성경을 이렇게 숫자의 의미를 가지고 해석해 가는 것은 이해가 쉬운 것은 아니다. 먼저는 숫자에 대한 개념이 나라마다 다르기도 하고, 또한 이런 접근법은 대단히 알레고리칼하게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숫자의 개념이 아니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다시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여정을 알거나 또한 그렇게 살아간다면 이 말씀과 같이 숫자가 되었든 아니면 또 다른 것이든 그 여정을 설명하기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렇게 이것이든 저것이든 천국의 비밀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천국 서기관의 비유이기도 하다.)


분명히 오병이어는 신앙의 전환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시고, 12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그렇게 회복된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칠병이어는 예수님과 함께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사람(4,000명)이라는 그 삶이 온전해지는 7개의 떡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7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그 삶이 온전해졌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 말씀의 진행 과정은 사람의 신앙 여정을 설명한다. 마태복음도 세례요한이 죽고 난 다음에 그 내용이 많이 달라지고 예수님의 활동도 달라지며 예수님과 유대인의 갈등도 첨예화 된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의 신앙도 예수님이 나심을 기록한 마태복음의 처음과 같이 자신 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의 세계가 열리기 시작하면서 자라가는 과정이 이 마태복음의 진행 여정과 비슷할 것이다. 적어도 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그 정도는 누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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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공관복음을 통 털어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크다.>고 칭찬한 사람이 두 사람이 있다. 물론 특별히 믿음이 크다고 한 것이 예수님의 다른 칭찬과 아주 특별한 차별성이 없을 수도 있지만 저자가 보는 관점에서 그것은 강조하고 싶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마가복음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나오는 이 가나안 여인과 종이 중풍에 걸렸을 때 예수님께서 가시려고 하자 말씀만으로 치료해달라고 한 백부장(마 8장), 이 두 사람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그 믿음을 더 칭찬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자신도 남 밑에 있기도 하고 또 자기 수하에도 사람이 있어 그 사람에게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온다면서 예수님께서도 말씀만 하시면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고, 이 가나안 여인은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분명하게 인정하는 모습이 기록되었는데 그 두 모습은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아주 분명하고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말씀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심판 날에는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하겠다.'고 할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구분이 어려운 것 같고, 어떻게 해야 예수님께서 심판 날에 나를 아시는 것이 될지가 궁금하고 의문스러울 수 있지만 정작 믿음이라는 것은 너무 간단한 것이다.


믿음에 대하여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가장 큰 오류는 신념과 헛갈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뭔가에 대하여 자신이 능동적이고 또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믿으려 애쓰고 또는 이루려고 자신의 의지와 마음을 강력하게 표현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은 다 신념과 자신의 의지일 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믿음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떤 것일까? 믿음은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 믿음은 아주 순종적인 것이다. 이사 가는 날 아침에 그 집의 어린 아이가 자신을 데려가지 않을까 싶어 노심초사하거나 자신이 이 집의 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또는 같이 이사 가겠다며 부모에게 그 믿음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 그냥 가만히 있거나 아니면 이사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자기 놀고 싶은 것을 하며 노는 아이의 마음이 정말로 그 부모를 믿는 믿음이라 할 수 있다.


믿음은 정말로 수동적인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사울에게 사무엘이 한 이야기인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것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정말로 순종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사를 드린다는 것, 수양의 기름을 태워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정말로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믿음과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제물로 또 제사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능동적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라고 해서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제사의 형식을 받고 싶어서 제사를 드리라고 한 것이 아니다.(그런 하나님의 마음은 미가서와 같은 여러 선지서에서 말씀하시고 계신다.) 제사의 결국은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에 제사의 완결인데,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살아 있는 체로 드린다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을 불살라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것에 허용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 숨 쉬는 동안 이 육신의 살아있는 삶을 하나님께서 그 의지대로 사용하실 수 있게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이 몸을 통하여 그 의를 온전히 드러내실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 바로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순종적인 마음인지 알 수 있다.


예전 유머지만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와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고 일어서서 가는 그 뒤통수에 하나님께서 "야! 나도 말 좀 하자."라고 하신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사람들은 하나님을 들으려 하지 않고 마냥 하나님께 뭔가 해 드리려 하고, 또 뭔가 보이려 한다. 그나마 뭔가 받으려고 하는 것이라고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육신의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한 것들뿐이다.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자신과의 상관성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 그대로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알지 못한다고 하실 것이다.(그러고 보면 눈치는 있는 셈일 수도 있다.)


믿음의 어원이  Pi'stis이다. 그리고 이는 충성을 의미하는 Pistos와 어원이 같다. 다만 방향이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를 충성되게 여기신다고 할 때 Pistos를 사용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Pi'stis를 사용한다. 즉 이것은 누가 일방적으로 믿고 충성하는 관계가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가 형성됨으로 인하여 생기는 마음인 것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하나님이 정하신 관계가 성립되면 자연스럽게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되고, 하나님은 사람을 충성스럽게 여긴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 가나안(수로보니게) 여인은 언뜻 보면 예수님께 능동적으로 찾아 왔다는 것에서 수동적인 믿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이 이런 것에 수동적이냐 능동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수동적인 것이라는 것을 잘못 이해하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된다. 예를 들어 물에 빠진 생쥐가 자신이 물에 빠진 상황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생쥐가 순종해야 하는 가장 먼저는 생명으로서 가진 생존 본능,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대학시절 친구의 어머니이자 대학부 지도교사였던 권사님께서 아주 기도를 열심히 하셨다. 그런데 가슴이 점점 커지면서 고통을 받는 병이 생겼는데 하나님께서 고쳐주신다며 끝내 병원에 가지 않으시고 돌아가셨다. 그 상황의 모든 것이 잘못된 믿음이라 하기는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순종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가나안 여인에게 있어 순종의 모습은 먼저 자신이 인생으로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운명에 순종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메시야, 자신들이 그려낸 메시야를 만나려고는 했지만 정작 인생으로서 하나님께서 보이시고 보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만나야 하는 운명에는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먼저 그것에 순종한 것이다.


그리고 이 여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지 않았다. 이는 선악과를 먹고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과 같이 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숨은 아담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녀는 이방인으로서 구원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그 당시의 모든 종교적 가치관 안에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 그리스도 곧 메시아를 만나기에는 부끄러운 이방 여인이라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즉 자신의 모습을 아담과 달리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 믿음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순종하지 않는 것은 성경말씀과 반대로 살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역사 이래로 늘 인간에게 불순종한다고 한탄하시는 것은 인간이라는 이 육신을 가진 삶에 대한 가치관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에 부족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지켜 행하여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불순종하는 것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육신을 가진 인생 그 자체가 하나님이 보실 때 온전한 목적이었음에도 사람들은 자꾸 이것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순종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육신을 가진 삶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과 또 이 육신을 가진 이 삶이 하나님의 그 목적에 너무 온전한 존재라는 것,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순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라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행하여야 그 부족함이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의 목적이 그 삶 안에 있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소경이라고 하시는 것이고, 그런 논리로 사람을 이끄는 이들을 소경이 소경을 이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자신이 이방인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 같은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 가나안 여인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는 개와 같다고 자신을 여겼지만 그런 자신조차도 예수님을 만나야 귀신 들린 딸이 나을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과 같이. (귀신들렸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리해야 할 사람의 의식이 빼앗겼다는 것이다. 게다가 딸이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모든 인생이 여자와 딸과 같은 존재이기에 딸이 귀신 들렸다는 것은 인생이 하나님을 잃어 버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인생의 의식의 원래 주인인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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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때로 어떤 것에 매몰되어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곤 한다. 그런 경우에 대하여 많은 경우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본다."고 하거나 "전투는 이기고 전쟁은 진다."는 것과 같은 표현을 한다. 또한 단체 스포츠의 경우 개인적인 업적이 팀 성적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보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지속적으로 교훈을 주시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잊고 율법 자체를 지키는 것에만 매몰되어 버린 것을 늘 말씀하셨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이 생명과 같은 것으로서 그 마음 안에 생명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면 그 생명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보이는 삶의 태도들이 바로 율법으로 기록된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조문으로 표현된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시작한 것이다. 즉 생명은 모르고 그 모양만 지키려 하다 보니 그 모든 율법이 지향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간 정체성의 본질인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그 분을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장로의 유전에 대하여 시비를 걸어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시는 말씀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드린바 되었다고 하면 부모에게 드릴 귀한 것을 드리지 않아도 좋다고 율법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예수님도 육신의 부모를 부인하는 것과 같은 말씀을 몇 번 하셨는데 그것과 이것은 좀 다른 이야기다. 그러니까 같은 말이라도 예수님이 하시면 다른 의미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다른 말씀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누가 나의 부모이냐?"라고 반문하셨던 것은 그리스도의 의, 곧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반문이다. 즉 그것은 육신의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생명이 된 사람들 안에 임하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바로 진정한 부모, 곧 우리 인생의 정체성의 뿌리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지금 이 말씀은 크게 보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신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큰 의미로 보면 사람이 자신이 인지할 수 있는 사회적 상황과 또 자신이 세상에 들어온 과정인 혈연 등으로 얽힌 자신의 삶에 대하여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하여 명확한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흔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하는 문제로 보기도 한다. 얼핏 이것은 좀 거리가 있는 논제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에게 그 부모는 육신에 관하여는 근원이기는 하지만 사람이라는 종족 안에 속하여서 the human으로서의 정체성을 부모가 가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것은 많은 이단들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이단들 심지어 교회들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명분이라면 육신의 부모를 등지는 것과 같이 엄연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일부를 외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심지어 그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찬양하기 까지 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그런 상황과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는 상황은 거의 같은 것이다. 즉 교회나 신앙은 지키려하나 하나님의 뜻은 모른다는 것이다. 즉 나무(신앙과 교회 생활)는 보지만 숲(하나님의 의와 뜻을 아는 것)은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모순된 관점을 가진 이들이 볼 때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것인지로 가늠하는 어리석음이 신앙이기 때문에, 손을 씻고 먹지 않으면 더러운 것이 사람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는 그 마음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더러워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즉 심령에 하나님께서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면 숨 쉬는 순간마다 다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간첩이 아무리 의롭게 살고 지역사회에 공헌을 해도 간첩이라는 그것 하나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은 하면할수록 죄가 늘어날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듯이, 사람이 하나님의 의는 심령 안에 없는데 그가 율법을 지켜 행하면 행할수록 죄는 늘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이유와 이 세상에 처한 자신의 모습이과 환경이 하나님의 뜻 아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체 교회에 가고 하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드렸으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입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즉 그들은 손을 씻어서 깨끗한 것을 입으로 먹을지는 모르지만 안에는 더러운 것이 있을 뿐이고 그런 모습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도, 또 인생을 둘러싼 모든 삶의 환경의 의미도 모르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런 모습은 지금도 많다. 교회생활, 신앙생활이라는 명목 하에 육신의 부모가 신앙이 없으면 무시하고, 또한 교회 밖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짐승 같다고 까지 하면서 무시하는 모습은 감춰진 것 같지만 실제로 많은 신앙인들의 가치관에 깔려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복음을 종 된 모습으로 섬기면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적선하듯 나눠주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것은 그 행위 자체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하는 이유, 곧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 더 문제다.


사람 육신을 가진 것은 이 육신이라는 형식이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내용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형식이 속한 세상과 사회 역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곳이고, 관중이고, 또 그림을 그려낼 도화지나 배경과 같은 곳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은 분명히 죄악 되고 하나님 보실 때 벌레 같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벌레로 규정하는 것이나 죄인임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품성과 생명과 이미지(형상)을 나타내기 위하여 예비 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 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것에 대하여 잘못 생각한다. 먼저는 인간이라는 정체성과 삶의 목적을 잘못 알고 있다. 즉 인생이라는 것이 이대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므로 지속적으로 갈고 닦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처음이고 개인적인 문제라면, 이 인생이 속한 세상이 죄악이 만연해서 그 안에서 나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야할 장소가 세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과 엮이는 것을 신앙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일면 맞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육신을 주시고 또 그 육신을 세상에 속하게 하신 이유를 안다면 세상의 일부이고 또한 자신이 육신이라서 연결된 부모와 사회적 현실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정하고 부인하며 항쟁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몰라서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 시비를 건 유대인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때 유대인들과 생각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그런 것을 보면 성경말씀은 특정 시대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고 놀랍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것이 단순히 육신의 부모에게 귀한 것을 드리는 것이라는 문제로 본 것이다. 마치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하지만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이 허락한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만나고 엮인 부모님과 또한 세상의 여러 가지 법과 질서도 다 하나님의 목적 아래 있다는 것을 알라는 말씀이고, 그렇게 육신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심령은 그 안에서 내는 것이 다 부정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조문의 모양을 지켜내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을 가진 자가 되라는 의미고,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것은 육신의 부모를 주신 뜻이 이 육신을 세상에 속하게 하신 이유를 알면 부모도 공경하고 하나님도 공경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심이다. 그러니까 속, 곧 사람의 속에 그런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있으면 율법을 행위의 모양으로 지키는 것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를 아는 생명에서 비롯된 그의 삶이 사람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삶을 살아내는 사람에게 세상의 법과 또 세상의 부모와 모든 사회적 상황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도화지와 같은 것임을 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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