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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 당시에 그 이전 시대의 선지자들을 기리며 비석을 세우고 의인으로 추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에 대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변호하면서 자신들이 만약 자신들이 추모하는 선지자의 시대에 살았었더라면 자신들이 추모하는 이들이 피 흘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럴 리 없다고 잘라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의 그런 생각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미 비유로 당시의 유대인들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잡아 죽이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 21장)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벨의 때부터 선지자 사가랴의 때까지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을 죽인 모든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스스로 강도 바라바 대신에 예수님을 죽여 달라고 하면서 그 책임을 자기들이 지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이 이전에 살았다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외식이나, 본질을 모르는 그들 안목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인 하나님의 법이 다양하게 표현되고 나타난 것 중의 어느 하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어떤 것을 해도 하나님 뜻의 근본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 늘 책망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의 법은 생명의 법이시기 때문에 생명의 본성과 같이 역사하신다. 생명의 법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은 생명이란 그 생명의 본성이 있으면 그 생명이 가진 모든 것이 어떻게든 나타나며,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듯 어떤 상황이나 시절이라도 그 생명이 그 상황과 시절에 맞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는 것이 생명의 법이다.


사실 이건 아주 중요한 것이다. 물론 성경 말씀은 하나씩 떼어내서 묵상하여도 인생을 바꾸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생명의 법이라는 관점으로 표현된 것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또한 만물과 여러 가지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한 생명이 보여주는 모든 것이 그 생명의 본성에 종속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이시는 모든 것도 그와 같이 하나를 이해하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의에 대한 본질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각개전투 하듯이 종교생활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코끼리라는 생명의 본성인 DNA가 있으면 단단한 상아도 있고, 큰 몸도 있고, 풀을 먹는 본성도 있고, 네 다리가 있고, 가는 꼬리가 다 그에서 비롯되어 표현되지만, 생명의 본성 없이 코끼리를 만들거나 표현하려 한다면 상아를 만들 때는 단단한 재료를, 또 몸집을 만들 때는 가죽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이라는 것이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고, 저런 상황에서는 또 다르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렇게 해서 문제가 없으면 또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면 서로 상충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주일 성수를 주장하면서 주일에 쉬지 않는 직장을 다니지 못하게 하려 하니 땅 끝까지 전도하라는 것에 걸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신앙의 교리나 믿는 방식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은 다른 생명이 만난 것과 같은 문제인 것이다. 즉 사자의 몸에 돼지의 심장을 넣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신앙생활이 무지하게 어려워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성경은 한 하나님께서 하나의 생명으로 표현된 것인데 어떻게 그 안에서 서로 상충될 수 있다는 말인가? 생명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조상들과 자신들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그것에서 이미 그들은 생명이라는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조상과 자신들은 기본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그들이 그렇게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그 이전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생각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생명을 모르니 생명을 전한 이들을 죽인 조상이나, 생명을 모르니 조상과 자신들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 까지 같은 것이다.


또한 외식이라는 것도 다른 것이 아니다. 속과 겉이 다른 것이다. 속과 겉이 다르다는 것은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것에 국한된 의미가 아니다. 겉이 속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여주는 모든 신앙적인 모습이 생명이 그 속에 있어서 그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당연한 것은 그들은 생명의 법,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성경 말씀을 보는데 이것을 지키려니 저것이 걸린다고 느껴지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성경이 서로 상충되는 것이 있다고 보이는 시각을 가졌다는 것은 성경을 바라보는 안목에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비롯된 안목이 아니라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신학이나 학문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해결방법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생명이 없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생명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성경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생명이라는 것은 생명의 본성만 있으면 그 생명의 모든 것이 감추려 해도 표현되는 것이듯 생명의 말씀이 그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모든 것이 하지 않으려 아무리 애를 써도 게가 옆으로 걷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없듯이 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말씀은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나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시는 그 생명이 사람 안에 있으면 어기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지킬 수밖에 없는 그런 생명인 것이다. 그 생명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이고, 그것이 있으면 아무리 하나님을 떠나려 해도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며 살게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자신들이 옛날에 살았다면 선지자들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생명을 몰라서 그렇다. 생명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바닷게가 어제는 바로 걸었는데 오늘 옆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알았다면 옛날 선지자를 죽인 그 본성이나 자신들의 본성이 같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들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며, 그랬다면 하나님께서 살아있다 하는 생명을 얻을 것이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만약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상황과 시대에 따라 성경이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하나의 성경이 서로 상충되는 것으로 자기에게 의문이 든다면 자기 안에 하나의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유일하신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에는 만약이라는 것이 없다. 생명은 그냥 그 생명일 뿐이다. 단순한 것 같지만 생명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생명도 이와 같다. 그렇다는 것은 그 생명만 있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을 지키지 않으려 해도 지키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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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3:25-28 회 칠한 무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4. 16:49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러니까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지도자들을 늘 책망하시고 제자들에게 그들을 따르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렇게 타락했을까? 물론 기득권이라는 계층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부정부패마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의 평균에 비하면 아마도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경건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성전에 예물을 드리는 것이나,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이고 율법이 명시한 각종 규례를 지키는 것에 있어 별다른 타협 없이 지키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이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본다 해도 아주 도덕적인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늘 예수님께 책망을 받고, 그들로서는 같은 자리에 앉기에도 부정한 창녀나 세리보다 늘 못한 존재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


지금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늘 책망하셨다는 성경의 기록을 보면서 ‘얼마나 엉망이었으면 그랬을까?’ 싶겠지만, 성경을 기록하다 ‘여호와’라는 단어만 나오면 목욕하고 붓을 새롭게 하고 의복을 갈아입고서 기록했던 서기관들의 경건한 행동은 오히려 지금의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경건한 그런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것이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당시에 보이신 모습은 지금의 사람들이 예수님이라면 막연히 모든 행실이 경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보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 비해서 행위 규범은 오히려 미치지 못한다고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선 유대인들은 의가 같지 않으면 같이 밥을 먹지 않았는데, 창녀와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그 당시 적어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물을 절기에 맞추어 드리면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행동은 그 시대 사람들의 도덕적인 기준, 또 보편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예수님이라고 하면 화장실도 가지 않았을 것 같은 그런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행동과 종교적 규례를 지키는 것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제사장을 틈만 나면 책망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사람의 행위가 어떠하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의 행동이 아무렇게나 해도 의와 뜻만 잘 지키면 된다는 것은 아니다.(그것을 영지주의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의 겉과 속이 같으냐 아니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까 도적은 도적이라 하고, 경건한 자는 경건하다 하는 것이 의롭다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은 세상과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즉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속이 어떤지를 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행동을 경건하게 유지하려 애를 쓰는 바리새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아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경건하지 못하고 부정한 것이 근본인 존재인가? 하는 문제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근본 모습이 부정한가? 아닌가? 라는 관점이 아니라, 사람의 본 모습을 누가 부정하게 여기느냐의 문제이다. 사람이 가진 여러 가지 마음들, 그 중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자기 안에서 나오는 모습들과 본성들을 누가 나쁜 것으로, 누가 감추어야 할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감추는 것이 경건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였는가 하는 문제가 본질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가 감추고 있지만 누구나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모습들도 다 인간이기 때문에 가진 것이다. 더욱이 그런 것들은 어느 하나 예외 없이 자신이 원해서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감추고 싶은 것을 누가 자기 안에 일부러 두겠는가? 다만 그런 감추고 싶은 모습, 그리고 그것이 드러나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떤 기준과 정의(definition)를 가지고 있고, 그 기준 때문에 그것을 감추기 위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자신이 감추고 싶은 것을 감추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법>인 것이다.


특히 율법이란, 지키면 그렇게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고, 남이 보면 자신을 부정하게 여길 것 같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하여 행동하는 기준, 그것이 바로 율법인 것이다. 그리고 종교적인 율법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세계 밖의 사회도 사람의 마음에 어떤 것이 있든지 행동으로 어떤 기준을 만족하는 모습을 보이면 속사람은 어떻든 간에 그렇지 않은 것으로 공인하기로 서로 정한 것이 바로 사람들의 법인 것이다. 그것을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가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한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을 받은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본성을 감추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자신의 행위로 감추고 싶은 것을 회칠하듯 감춘 것을 두고 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이든 서기관이든 어떤 인간이라도 예수님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과 같은 본체이시기에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시는데, 율법적인 행동을 지켜 행하면서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 한 것, 그것이 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감춘다고 하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볼 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추는 것이다. 아이들이 컴퓨터로 게임을 하다가 엄마나 아빠가 들어오면 화면을 감추는 것은 게임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지, 게임에 져서가 아니듯이, 율법이 정한 행위를 지킴으로 자신들이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을 감추려고 하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자기들이 가진 기준으로 볼 때는 감추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기준,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그 기준으로 창녀와 식사를 같이 하는 예수님을 보면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자기 안에 있어나는 음욕을 부정하게 여겨서 감추려고 온갖 힘을 쏟고 있는데 그 음욕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오히려 매매하는 창녀들과 예수님이 함께 밥을 먹으면서 자신들을 비난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 안에 성욕이 없다면 어떻게 아이를 얻을 수 있겠는가? 


성욕이든 욕심이든 어디에 쓰이고, 그 주신 목적을 알고 그 안에 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마음에 그것이 있다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런 사람의 본성과 마음은 당연히 사람을 지으신 분이 사람 안에 두신 것이다. 그런데, 그것자체를 부정하게 여긴다는 것은 그것을 사람 안에 두신 이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사람 안에 그것을 두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다. 즉 자신이 선하게 여기는 기준에 동의하는 신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을 창세기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고 표현하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이 사람의 모든 본성을 자기의 기준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고 나쁜 것은 감추려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린 아담의 모습과 같이 율법(무화과는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의 나무임)을 지킴으로 자신들이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려 하고, 그것을 선하게 여기는 자신들의 하나님을 따로 만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상인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것은 그 행실 자체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그런 행동에 대하여 가진 가치 기준, 곧 의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나누어서 부정하게 여기는 자신들의 기준이 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무덤에 회칠하듯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감추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기준으로 볼 때 악한 것을 감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했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일부를 감추는 것을 의로 삼는 자신들의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책망은 옛날이야기만은 아니다. 오늘도 누군가가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스스로의 기준으로 부정하게 여기고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종교적인 모습, 도덕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한다면 그 역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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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3:13-24 소경된 인도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3. 11:32 Writer : 김홍덕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 23:16-17)


위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것은 비단 이것 뿐은 아니다. 성경 마태복음 23장은 장 전체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책망하시는 내용이다. 그 중에서 13-24절까지의 내용의 핵심은 아마 <소경된 인도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소위 말하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책망하시는 내용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생각이 정말로 터무니  없는 생각이라는 든다. 옛날 어떤 종파에서는 성전 성수를 담은 컵에 파리가 빠지면 잔이 더러워진 것인지, 아니면 파리가 거룩해 진 것인지를 가지고 논쟁했다고도 하는데 그런 것을 보면 예수님의 책망이 옛날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내용은 지금도 해당이 된다. 예수님께서 지금 책망하시는 것은 맹세에 관한 것이 아니다. 무엇이 본질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경>은 육신의 눈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본질>을 보지 못하는 안목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맹세에 관하여 율법을 해석해 놓은 것으로 들추어내시는 것이다.


성전과 성전의 금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면, 또 제물과 제물을 올리는 제단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면 어떤 것이 본질에 가깝고, 어떤 것이 목적에 더 가까운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맹세를 한다는 것은 그 선택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성전보다는 성전에 있는 금이, 제단보다는 제단 위의 예물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성전이 있기에 성전의 금이 있고, 제사와 제단이 있기에 예물이 있는 것인데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나타난 것이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히 11:3)

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다. 모든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뜻이 형상화 된 것이라는 것이다.


성전에 금을 치장하는 것은 금의 가치로 인함이 아니다. 그것은 성전의 정결하고 귀함이 금으로 표현된 것이다. 성전의 제단에 예물을 바치는 것은 예물이 먼저 있고 예물 때문에 성전에 제단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 곧 인생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로 드려지는 것이 먼저 있었기에 그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예물을 바치는 것이다. 즉 예물의 존재 목적이 예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한 결 같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을 책망하시고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신 것이 결국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그 목적이 먼저 있고, 목적이 표현된 것이다. 그런데 표현된 것을 본질로 알고 그것을 목숨을 다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들도 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옷과 거룩한 행실로 감춘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목적이 안에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는 것이 안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다 아시는데 예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킨다면서 자신들의 부정함을 감추는 것이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은 실존하시지만 형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신 것이다. 그것이 세상과 사람이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사람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질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께서 스스로는 영이시므로 자신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형식으로 세상과 사람을 만드신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모르면 소경이다. 이것을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만드신 이유, 세상과 사람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와 목적을 모르면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왜 있는지, 자신은 왜 사는지를 모르고 살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도 문자 그대로 지키려 하고 왜 그런 말씀을 주셨는지는 생각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맹세에 대하여 책망을 받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그 모습은 지금도 항상 있다. 성전에 금을 사용하는 것은 성전이 가진 귀함이 금으로 표현된 것인데도 성전으로 맹세한 것은 구속력이 없고 금은 구속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표현된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인데, 그것을 몰라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다. 그것처럼 지금은 교회를 크게, 그리고 아름답고 최신식으로 지으면 사람들이 모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데 그것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둘 다 예수님께 책망 받을 일인 것이다.


성전 기물을 금으로 만든 것은 성전과 같이 사람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인생이 금과 같이 귀한 존재라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지, 금이 성전을 대변할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듯이, 교회도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정말로 아름다운 것이라 여길 수 있는 것을 전해줄 수 있다면 굳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면서 까지 크고 화려하게 짓지 않아도 온전하고 하나님께 영광스런 교회가 되는 것인데, 본질을 모르다 보니 교회는 크고 좋게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주객과 선후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성경 말씀을 지키는 것 역시 같다. 모든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본성 없이 행위로만 성경을 지키려 한다고 성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경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지키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서 지키는 것이 아닌 것이다.


흔한 예로 노래방에 가는 것이 죄냐 아니냐 논하기도 하고, 주일 성수하기 힘든 직장을 가지는 것이 가하냐 아니냐 하는 논란도 늘 있다. 그런 논란이 끝을 내지 못하는 것은 노래방에 가는 것이나 직장에 다니는 것은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누가 노래방을 가고, 어떤 직장 이전에 직장에 가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먼저인데 그것을 이야기 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인지만 정해지면 그 사람은 자기 정체성에 맞는 자리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시대의 신앙에 있어서도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안목이 충만하다 싶을 정도로 만연한 가운데 있다. 성경 말씀을 지켜 행하면 존재가 바뀐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그것이다. 행동으로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는 것이다. 성경을 지켜 행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성전을 금보다 더 구속력 있는 맹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이것을 보지 못하는 안목은 전부 소경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지 못하면서 표현된 것에만 밝아서 그것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자는 모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경된 인도자다. 그런 소경된 인도자는 교회에 모인 사람을 하나님 보실 때 화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화려하게 짓는다. 화려하고 영광스럽다는 것이 세상적인 기준과 전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건물이 화려한 것이 아니라, 그 심령에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온전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요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나타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증거를 받은 믿음일 수는 있지만 약속을 받은 믿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증거는 약속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성전의 금은 성전이라는 약속의 증거인 것이다. 더 정확히는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의가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를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금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금이 가장 귀하듯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사람 안에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말씀과 의가 거하는 사람이 가장 귀하다는 것이다. 그 약속과 하나님의 의가 성전 기물을 금으로 만들게 한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제 아무리 종교적으로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도 그냥 소경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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