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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1-20 장로의 유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6. 13. 13:10 Writer : 김홍덕

유대인들의 장로들의 유전에는 먹을 때에 손을 씻고서 먹으라는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제자들이 비위생적으로(?) 그냥 먹은 일이 있었는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를 가지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어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다고 반론을 제기 하셨다.


이것을 그냥 사람들 사이에서 "너 왜 그러는데?" 했을 때, "너도 그때 그러지 않았냐?"하는 어떻게 보면 유치하지만 보편적인 시비 같지만 이건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에 이어서 사람이 입으로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으로 인하여 더러워진다고 하신 말씀 때문이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생각하는 장로의 유전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선하게 혹은 악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비해, 예수님께서는 사람 안에 어떤 것이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선한지 악한지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차이가 있다. 즉 방향성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생명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그 존재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그 생명을 알아보지만, 생명이 아닌 가공되고 제조되는 것들은 밖에서 안으로 형성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 심겨져서 생명이 되어 그 사람을 통하여 표현됨으로 알 수 있는 것이고, 바리새인들의 생각인 율법적인 가치관은 사람의 행동을 규범 아래 두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차이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ㅇ이에 끊이지 않는 쟁점이었다.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또 사두개인 등 당시 종교적인 열심을 가진 모든 유대인들의 가치관은 그 색깔만 다를 뿐 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악한 것이 정해진다고 믿었다. 다만 그들이 계파를 달리한 것은 그 행동이 무엇이며 또한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여 지킬 것인지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지금 이들이 예수님께서 시비를 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손을 씻고 먹어야 한다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사람이 부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는 손을 씻고 먹으라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율법 전반으로 보면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은 다 어떤 행동의 결과가 사람을 정하게 또는 부정하게 한다고 믿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정체성을 사람 밖에서 안으로 형성해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다.


율법이라는 것이 괜히 하나님께서 사람이 지키기 어려운 것을 제시하시고 사람이 그것을 지켜내는 정도를 보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를 보시려고 주신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라도 범하면 아무 소용없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율법을 지킴으로 선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무엇을 이루어내는 것으로 의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생각을 해야 한다. 적어도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사람이라면 이건 큰 의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으니 사람의 능력과 한계를 분명히 아실 텐데 어째서 사람이 지키지 못할 것을 주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test)하시기 위함인가?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인간인 이상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로교통법이나 세법을 생각해보면, 범칙금을 잘 부과하고 또 세금 체납자의 재산을 잘 몰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위반을 하고 범칙금을 내지 않았다고, 탈세를 했는데 처벌 받지 않았다고 법을 지킨 것 역시 아니다. 이것은 누가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법이나 교통법이 범칙금을 부과하고 재산환수를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율법도 마찬가지다.


율법은 교통법이 범칙금을 부과하듯 그 법이 명시한 것을 지킨다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통법의 목적은 범칙금 부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주행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듯, 율법은 그것을 지켜내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다른 방향성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안에 생명의 본성과 같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가는 모든 모습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지만, 목적이 없이 그것을 지키는 것에 매몰된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사람의 정체성이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면 뭘 해도 다 부정하고 더럽다는 것이다. 손을 씻든 그렇지 않든 그건 무관하다는 것이다. 즉 범칙금을 부과 받았든지 아진지가 교통법의 준수 여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영혼, 의롭고 선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그것은 동일한 마음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아니 핵심이다. 하나님의 법은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져서 그것이 생명이 되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면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도 다 온전한 것이다. 아들로 난 자가 행동에 따라 종이 되지는 않듯이.


신앙은 어떤 행동이 핵심이 아니다. 행동은 정체성의 표현이고 종속된 것이며 결과이고 다음 문제다. 그래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 안에 있으면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하나님의 법대로 산다. 개로 태어나면 개로 사는 법을 가르칠 이유가 없는 것이 같은 이유 아닌가?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도 또한 같은 것이다.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면 그 사람은 더러운 것을 내어놓을 방법이 없다. 그게 가능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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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22-33 물 위로 걸으시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6. 12. 10:20 Writer : 김홍덕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바다 건너로 가시기로 하고 먼저 제자들을 재촉하여 건너가게 하시고 혼자 계시다가 뒤 늦게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로 가셨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건너신 것은 많은 경우 예수님의 대표적인 기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놀라운 기적을 왜 일으키신 것인가? 하나님의 아들은 이 정도 기적은 일으킬 수 있다, 혹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한 것인가?(만약 그렇다면 물 위로 걸을 수 없는 사람은 지금 당장 예수 믿는 것 포기해야 한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언제나 배경처럼 이야기 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기적은 그 기적 자체가 본질이 아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이 기적을 일으켜야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그것을 보이신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또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본질을 모르면 기적을 아무리 믿어도 소용없는 것이다.


바다는 늘 세상을 의미한다. 더욱이 밤바다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빛이 없는 세상을 말한다. 그것 외에 특별히 그것의 의미를 찾기도 어렵다. 그 바다 위를 걸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그 바다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시는 것이다. 성경에서 비늘 없는 물고기, 지느러미 없는 고기를 부정하다고 하는 것도, 비늘로 바다와 구분(거룩이란 구분되다는 뜻)되지 않고, 또 방향성(지느러미)이 없는 것이 부정하다고 하심도 그것 때문이다. 


즉 사람이 세상에 살지만 그 세상과 구분되고, 이 바다 같은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밤바다를 항해하듯 왜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연히 바다, 곧 물 위를 걸으실 수밖에 없는 분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는 인생은 바다를 밟고 다니듯 세상을 이긴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와~ !! 대단하다."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것을 성경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하신 것은 오늘 내가 그것을 읽고 들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사람의 정체성을 회복해야겠다는 생각과 그 믿음이 있으면 밤바다와 같이 왜 사는지도 모르면 세상을 버티듯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다 위를 걷듯이 세상을 이기며 산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예수님의 기적을 믿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서 말하기를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말했던 것이 그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바다 같은 세상을 이기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것을 믿었을 때 예수님과 같이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또한 그렇게 성경을 보고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좀 가다가 예수님이 아닌 바다의 풍랑을 보니 두려워하여 바다에 빠지게 된다. 이건 어쩌면 설명도 필요 없는 당연한 말씀이다. 사람들이 이단 종교나, 종말론과 같은 것에 현혹되는 것이나, 또한 미래를 대비하여 돈을 모으는 것과 같은 본성은 삶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사람이 가진 이 불확실성은 간악한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늘 미끼가 되는 본성이다. 심지어 종교도 많은 부분에서 이것을 미끼로 하고 있다. 사후 세계의 불확실성 그것을 미끼로 한다. 미끼로 삼는 간악한 사람들 자신들조차 모르는 불확실성을 가지고 사람을 현혹하는 것이다.


밤바다에 배를 타고 건너는 모습이야 말로 불확실성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풍랑이 일어 위태하게 된 것은 불확실성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이상한 일들 그리고 위협적인 일들 앞에서 사람들이 가진 불확실성은 두려움이 된다. 그게 바로 지금 제자들이 탄 배의 모습이고 제자들의 마음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마음은 배 안에 있거나 또 예수님을 보고 물 위를 걷듯 살다가도 불연 듯 자신을 삼킬 수 있는 두려움이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은 그것이 바로 믿음이 적은 것이라고 하셨다. 또 그것을 의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즉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두려워하는 것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면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돈이 없으면 불안한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예수님을 의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돈 있다고 안 죽는다면 돈이 없음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의미가 있겠지만 그건 아니지 않는가?


사람이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분명하면 세상의 풍랑은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두려울 것이 없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바다가 잠잠해졌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배는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마음 안에 온전히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 분명해지면 세상은 잠잠해지는 것이다. 세상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듯 하나님 아들의 발아래 있고, 또 마음 안에 하나님의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에게는 잠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이다. 이건 누려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소름 돋는 기쁨이다. 세상을 이긴 기쁨이 얼마나 대단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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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13-21 오병이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6. 10. 19:27 Writer : 김홍덕

'4복음서에 모두 다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은?' 성경퀴즈대회에 참석해 봤다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문제일지 모른다. 그 답은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시고도 12 광주리에 남은 예수님의 기적을 말하는 것이다. 복음서를 기록한 모든 저자들이 이것을 공통으로 기록했다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이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전하기 위하여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눈에 이것은 정말로 사람들이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인지 공감하는 것이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마태복음으로만 본다면 13장까지 세례 요한이 살아 있었다. 물론 그가 막바지에는 감옥에 있었고 신앙적인 활동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14장 1-12절에 세례 요한이 죽는 일을 기록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마태복음을 둘로 나눈다면 13장까지와 14장부터로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는 것은 한 사람의 신앙 여정에 있어서도 마음 안에 세례 요한의 신앙이 남아 있던 시절과 그것이 죽고 없어진 삶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따로 배를 타고 가셔서 빈들에 계시니 사람들이 모였다고 했다. 빈 들은 원래 세례 요한이 있던 처소이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있었기 때문이다. 광야에 세례 요한이 있었는데 죽고 나니 빈 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와 같이 사람들의 마음 안에도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 믿던 신앙으로 살다가 세례 요한의 신앙을 떠나고 나면 그 마음이 빈들과 같이 비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 곧 세례 요한의 신앙이 있던 사람들의 빈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새롭게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빈들로 가셨다고, 또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시는 빈들로 모여들었다고 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 보는 것이 알레고리칼 할 수 있지만 자기 마음에 그런 과정을 거친 사람은 이 말씀이 그것이라는 것을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말씀이다.


즉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다가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그 신앙을 떠나게 된다. 그건 필연적이다. 사람이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행위로 도 소유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이것이 로마서 3장의 말씀이기도 하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바로 그 마음 안에서 세례 요한이 죽고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모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병을 고치셨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모든 증상들, 귀신 들린 것과 같이 머리의 의가 빼앗겨서 신음하는 사람, 중풍병자처럼 하나님의 의를 알지만 그것이 삶이 되지 않는 사람, 또 문둥병과 같이 하나님을 깨닫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도록 고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숫자적인 관점에서 보면 성경에서 "5"는 늘 회복에 관한 숫자이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7번 돌아오고 그 다음에 오는 50년째 희년에는 모든 종들도 해방되고 또 빚도 다 탕감되며 팔았던 땅도 다 원래 주인의 것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규례이다. 그래서 5는 모든 것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들에서 먹을 것이 없는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것은 세례 요한의 신앙 곧 율법적인 신앙을 떠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양식으로 회복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숫자 1,000은 유대인들에게 영원성의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천년 왕국이다. 영원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양식을 먹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회복, 곧 사람의 정체성이 회복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이 오병이어의 사건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고 했다. 성경에서 5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고, 2는 항상 보증에 관한 것이다. 즉 너나 나나 같다는 것이고, 너와 내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문둥병이 나음을 받을 때 비둘기 두 마리를 잡아서 하나는 드리고 하나는 놓아 주는 것이다. 놓아주는 것과 드려지는 것은 같은 것이기도 하고, 하나가 놓아졌기에 하나가 드려지고, 하나가 드려졌기에 놓아주는 것이 있는 것을 말한다. 세례 요한이 떠나고 예수님이 그 자리에 오심을 말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날이 저물었을 때에 제자들이 와서 먹는 것을 논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고을에 들어가서 먹을 것을 사먹게 하면 좋겠다고 예수님께 건의를 했는데, 그것은 날이 저물었고 또 빈들이라 먹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오랫동안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과 전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과 같은 육신의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수가성 우물가에서도 같은 이유로 그랬던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사람들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무엇에 축사한다는 것은 그것과 축사하는 사람이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번제를 드릴 때 번제를 드리는 사람이 번제물의 머리에 축사하듯 손을 대는 것이고, 또 예수님께서 성찬식 때 축사하시고 떡은 예수님의 몸이라고, 또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라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지금 이 빈들에 모인 사람들에게 먹을 것은 예수님이지 고을에 가서 사 먹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오병이어는 세례 요한의 신앙에서 떠난 사람, 아니 오히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을 가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양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시는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리떡과 물고기에게 성찬식과 같이 축사하심으로 자신을 사람들에게 먹이신 것이고, 그 음식이 바로 회복과 보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람들의 양식으로 주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사람이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그 먹은 것이 자신이 되는 것을 말한다. 연어가 알래스카로 가서 죽는 것은 바다의 미네랄을 땅으로 옮기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즉 바다의 미네랄이 땅에 사는 짐승들의 몸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사람이 먹는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사람들에게 주셨다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과 같아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오병이어는 세례 요한의 신앙에서 떠난 사람들에게는 고을에 가서 먹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보이신 기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사람들이 양식으로 먹고 나면 오히려 그 양식이 12광주리에 남는다는 것이다.


12는 왕국과 나라를 상징한다. 열두 진주문, 열두 사도, 열두 지파가 다 그렇다. 즉 세례 요한의 신앙을 떠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양식으로 삼아서 회복되고 보증하게 되면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로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모였을 때 비로소 교회가 된다는 것이고, 그것만이 교회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병이어 사건은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나 적은 것을 기적적으로 널려서 사람들을 기아에서 구하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여정에서 세례 요한의 때를 지나서 날이 저물 듯 신앙의 안목이 어두워지고 또 주리듯 심령이 가난해진 사람들이 먹을 것, 곧 자기 정체성으로 삼을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시는 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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