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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세는 출애굽기 30장에 나온다.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찌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찌며(출 30:13)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받으러 온 이들이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이 왜 세금을 내지 않느냐?' 물으신 것에 대하여 베드로에게 임금이 자기 아들에게 세금을 받느냐고 물으시고 그렇지 않다는 베드로의 대답에 당연히 아들은 그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 하시고, 바다에 가서 낚시한 고기가 한 세겔을 물고 있을 것이니 그것을 예수님과 베드로의 성전세로 내라고 하셨다.


임금의 아들이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세금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세금이라는 것은 함께한 나라의 일을 위하여 내는 것이고, 성전의 세금이라는 것은 성전이 존재하는 목적에 보탬이 되기 위하여 내는 것이 성전세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성전세를 내는 것은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을 전하고자 하시는 일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그 본질이시기 때문에 그런 목적의 세금을 내실 이유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세금을 내셨다. 내신 이유는 <오해 받지 않기 위하여>라고 하셨다. 오해 받지 않기 위함이다? 이것은 뭔가 나약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도 결국은 오해 받지 않기 위하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풀기 위하심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이 성전세와 관련한 오해와는 전혀 다르지만.


이 오해 받지 않기 위함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또 세금을 내시는 모습은 오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정말로 생각해 볼 것이 많은 말씀이고, 또 예수님의 정체성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보는 것과 같이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신분을 가지고 계셨기에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며 군사를 동원한 이들에게 하늘의 천군천사를 불러 무찌르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시지만 십자가에 끌려가신 분이시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적 정체성(물론 그것이 영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육신을 가지신 삶으로 표현되었다.)으로 보면 이 세상에서 괜히 시험을 받거나 심판을 받거나 조롱을 받거나 죄인이 될 이유가 전혀 없는 분이시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이 세상에서 그 분께 시비를 건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런 일은 있었고,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그런 일을 당하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이 이것을 망각한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힘들게 하면 늘 "어디 감히?"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마음으로만 생각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강력하게 그것을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사탄의 생각이라고 지적하거나 또 아니면 하나님을 모르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좀 고상하기는 하지만 그래 몰라서 그러니 불쌍하다며 측은하게 여기는 것 까지 다양한 표현을 한다는 것이다.(측은히 여긴다는 것은 모르는 이를 위하여 측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안 됐다, 고시다는 식의 생각을 말한다.)


신앙이라는 것, 특히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표현하고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를 보여서 압도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다니니까 부자가 되고 세상에서 잘 되어서 유력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부자가 아닌 당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하나님을 믿어라'(이런 것이 미국의 자본주의적 기독교를 낳았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믿지 않는 사람의 어리석음이나 측은함을 대하는 것은 너에게 없는 하나님을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얻게 된 유익을 미끼로 유인하거나, 아니면 그 차이로 차별하고 무시하거나, 아니면 적선하듯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기에 알지 못하는 이를 위하여 수고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해 받지 않기 위하여 살아가는 신앙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인간의 정체성을 이야기 하면 당연히 절벽이다. 그런 사람의 모습을 비난하고 믿는 사람끼리 모여서 '짐승 같은 이들은 복음을 잘 못 알아듣더라.'며 자신은 신앙을 가졌기에 복음을 이해하는 모습에 감사하고 그런 차별을 드러내는 것이 영광이라 서로 나누는 것이 교회 생활이라고 하면 그것은 반쪽이다. 영화 밀양에서 유괴범이 예수 믿었기 때문에 용서를 구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 삶이 영광스러운 것은 맞지만 그렇게 나누라고 영광스러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 예수님을 믿는 그 은혜, 남이 알지 못하는 그 은혜가 영광이 되려면 그것을 알지 못하여 절벽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을 섬기고 그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 지듯 수고함으로 그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삶의 목적을 회복하고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때 받는 영광이 온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이라는 것, 예수님을 믿고 그것으로 인하여 누리는 것은 누리지 못하는 이들과의 상대적 비교에서 영적인 축복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알도록 아는 자가 수고하라고 주신 은혜인 것이다. 그 수고가 열매가 될 때 온전한 영광이요, 그런 수고가 바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이며,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상의 모든 신을 믿는 신앙과 예수님을 믿는 것과의 절대적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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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7:1-20 변화산 사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6. 20. 13:00 Writer : 김홍덕

<변화산 사건>은 변하신 예수님과 함께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났는데 베드로가 그 둘을 위하여 초막을 짓고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자 하늘에서 소리가 나고 그 소리에 놀란 제자들이 엎드리니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 하)

라고 하셔서 눈을 들어보니 예수님만 보이고 엘리야와 모세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탓에 좋은 것은 다 신앙에 결합시키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사람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결합시키면 좋은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산 위에서 자신이 주로 섬기는 예수님 외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게 되니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것이라고 생각해서 예수님께 여기 이런 상태가 너무 좋으니 여기에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살면 좋겠다고 예수님께 건의를 하고 있다.


엘리야는 불의 선지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신비한 기적을 많이 일으킨 선지자다. 갈멜산에 이방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불로 이긴바 되었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엘리야를 데리고 가서 죽지 않은 기적을 보인 선지자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불은 언제나 신비한 것이고, 옛날에 불은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관리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불이란 놀라운 능력 신비한 능력의 상징이고 엘리야는 그런 의미에서 불의 선지자이다.


그리고 모세는 물과 깊은 관련이 있다. 모세라는 이름의 의미도 '물에서 건져낸 자'라는 의미이고, 큰물인 홍해를 능력으로 건넜고, 또 물로 인한 실수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을 겪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모세를 대변하는 것은 십계명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율법의 대명사와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리고 성경에서 물은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모세와 엘리야를 물과 불을 대표하는 선지자라는 것을 언급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계시는 동안 산 아래에 있었던 일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산에 계시는 동안 산 아래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귀신 들린 한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제자들은 그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의 특징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귀신 들려서 물에도 넘어지고 불에도 넘어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귀신 들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의식과 생각을 주관하지 못하고 세상의 것이 사람의 생각과 의식을 주관하는 모든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귀신 들렸다는 것이 단순히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미쳤다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귀신 들렸다는 것은 사람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이 그 사람의 목적이 아니라, 돈이나 명예나 이성이나 권력과 같은 것을 그 의식이 최고로 여기고 좇아가는 모든 인생의 모습이 바로 귀신 들린 것이다. 머리가 빼앗긴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인생들은 물에도 넘어지고 불에도 넘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 아니라 돈을 좇고 명예를 좇는 것과 같이 세상의 것을 좇는 사람은 기적에도 의지하고 또 율법에도 의지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정말로 그렇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알지 못하는 인생은 자신의 삶에 늘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또 어떤 규범으로 자신이 살면 자신이 좇는 것이 자신의 것이 될 것인지 늘 고민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는데 예수님은 계시지 않고 제자들이 있어 그 아이를 고쳐주기를 바랬지만 고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고치지 못한 이유는 제자인 베드로 역시 모세(물)와 엘리야(불)가 다 함께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물에도 넘어지고 불에도 넘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으로는 귀신 들린 것과 같이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잃어버리고서 살아가는 것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 있어서 물과 불에 넘어지듯 모세의 율법과 엘리야의 기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종파에서는 방언을 받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도 한다는데 그런 것이 바로 기적이 없으면 혹은 신비한 체험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고, 그것은 불에 넘어지는 것과 같고, 예수님과 엘리야가 함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많은 신앙 세계에서는 신학적 근거가 없으면 또 안 된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신앙이 학문이 되었다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그렇게 신앙이 학문이 되는 것은 신앙이라는 것이 율법과 같이 규례로 관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생각은 예수님과 모세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인간의 정체성을 알지 못해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물과 같은 규칙과 원칙을 지켜내는 것에 의지하는(넘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특히나 그런 생각은 더 나아가서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적용하는 각종 법칙과 규례들을 도입하고, 오히려 세상에서 운영하는 학습법과 같은 법을 주일학교에 적용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과 같이 여기는 생각마저 하는데 그것은 정말로 신앙에 자신이 없는 것이고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신앙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분명히 알고 있고 그것만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면 교회는 왕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이의 말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만나는 목사인 친구가 한명 있는데, 만나면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교단과 큰 교회의 행태에 대하여 지적을 하게 되는데, 근래에도 만났을 때 교회가 신천지에 오지 말라고 포스트 붙이는 것에 대하여 '그건 너무 자신 없고 창피한 일이 아닌가?' 반문 했더니, 교회의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서, 또 나중에 법적 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너무 어이가 없었다.


교회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분명히 전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을 지으셨기에 가장 사람을 잘 아시는 분으로서 사람에게 말씀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 또 사람이 무엇이며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셨는데, 그 예수님의 정체성만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면 신천지 아니라 어떤 지랄을 하는 이단이 와도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인데, 이것저것 하는 것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분명히 전하고 있지 못하는 것을 실토하는 것이고, 또한 그런 모습은 엘리야와 모세를 예수님과 함께 두려한 베드로와 같고, 그러하기에 물에도 빠지고 불에도 넘어지는 귀신 들린 사람과 같이 신천지나 여타 이단에 빠지는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따라 다니면서 공부하라고 당부하는 것 보다, 부모가 집에서 늘 책을 보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런데 부모로서 그런 모범은 보이지 않으면서 온갖 방법으로 아이를 공부시키려고 학원 보내고 좋은 교재 사고 또 입시 설명회 다니고 해도 아이가 공부를 잘 하지 못하면 어이없게도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데 이러느냐?'며 아이를 붙들고 하소연을 한다. 그런 온갖 수고보다 자신이 집에서 공부하고 책 읽고 있으면 자신도 좋고 아이들에게도 좋은데 그 하나를 안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같다. 예수님 한분만 분명하게 알면 모든 것이 다 족하다. 교회는 그것만 전하면 된다. 뭔가 수련회다 봉사다 뭐다 자질구레한 일들을 한답시고 고생하고 때로 그 일로 다투고 하는 것이 다 어미 게가 자신은 옆으로 걸으면서 새끼는 바로 걸으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아이에게 공부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으면서 온갖 수고하면서 마치 아이를 위하여 삶을 바친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것과 같은 것이며,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과 함께 엘리야와 모세가 있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 17:5)

예수님 한분만 있으면 족하다고, 오직 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의 정체성을 전하면 그것이 전부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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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자신이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을 제자들 중에서 죽기 전에 볼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28)


예수님의 재림, 그리고 그와 연관된 종말론적인 신앙은 종교를 떠나 모든 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이 종말론이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끄는 바탕에는 사람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즉 성경 말씀을 행동 수칙처럼 지키는 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보니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들도 모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혹은 사람이 그 육신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모습으로 오는 것, 그것만이 재림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그 기록된 말씀 자체가 온전히 이루어진다. 바다가 갈라지는 사건이라면 바다가 갈라진 것이고 또 갈라질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다를 가르실 때는 바다를 가르는 것 그것 자체가 목적이라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믿고 지키는 것은 보이는 것을 지키는 것이 그것을 보이게 하는 본질을 지키는 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본질을 지킬 수 있다면 표현은 본질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유전자가 있으면 당연히 보이는 모습과 생각과 행동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사람의 것이고 그것이 사람을 지키는 것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셨으므로 분명히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오시겠다고 하신 본질의 표현으로 어느 시절인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육신을 가진 사람들의 인식 세계 안에서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정말로 억지이고 괴변이다. 이미 우리 할아버지 세대만 해도 보지 못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 하실 때 그 말씀을 듣는 이들 중에서 죽기 전에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볼 자가 있다고 하셨다. 이건 어떻게 된 것인가? 예수님이 틀렸거나 아니면 예수님은 오셨는데 사람들이 알지 못한 것이거나 그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예수님은 틀리지 않는 분이시므로 사람들이 다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이만희나 여타 이단 종교의 교주들로 오셨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을 믿는 것은 한마디로 똘아이일 뿐이다.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보길래 그런 것을 주장하고 믿는지 알 수가 없다.


사람에게 모든 것은 의미에서 시작된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에서 보듯이 이름을 불렀을 때 내게 다가오고 꽃이 되었다고 한 것과 같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주님이고 그리스도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그냥 선지자 중의 한 명일뿐이었고, 가룟유다에게는 그냥 한 스승일 뿐이었으며, 대제사장과 빌라도에게는 신성을 모독하는 자, 또 반역자라는 의미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이 땅에 전하려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지면 그 사람에게 그 마음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자신에게 구주로서 또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 인간인 자신에게 인생의 의미와 목적, 그것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미와 목적을 알게 하시는 그리스도로서 의미가 있어진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을 위하여 오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듣고, 그것을 기록한 말씀을 또 읽고 들을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목적과 의미가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진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을 일컬어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 다음으로 다시 오신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인생으로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뜻과 의를 깨달아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아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그 사람 안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죽기 전에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본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사도들이 나중에 교회를 다시 오신 주님이라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다시 오신 주님이신 것은 교회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 마음에 생명이 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란 그 사람 안에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고, 또 그 생명이 삶을 주관하는 육신이 된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온전히 만났다는 것은 그 만난 사람이 다시 예수님과 같은 성품을 가진 그리스도(a christ)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기에 교회를 만나는 것,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교회로 모이는 사람,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 생명이 또한 예수님의 생명과 같이 된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며, 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은 사람이 아무리 성경을 들고서 만나도 교회가 아니며, 또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의가 자신에게 의로운 것, 옳은 것으로 의미가 있을 때 예수님을 만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문학을 만난다고 하는 것이 인문학에서 길을 찾는 의미인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것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지금 바로 옆에 예수님이 계셔도 예수님이 오신 뜻이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그냥 행인일 뿐이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이 자신의 삶의 의미가 되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뭔가 허전하다. 그 복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과 같은 것이라면 좋은데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언론에서 유명인이 돈을 좇아가는 기사를 보면서 욕하기도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신을 믿고 종교를 가지는 이유까지 모든 것이 육신 사는 동안 잘 먹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삶의 전부인 경우가 많다. 가끔씩은 스스로도 그런 자신을 한탄하면서도.


인생은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당대 세계 최고의 권력이든 재력이든 어떤 것이라도 그건 다 부질없는 것이다. 왜 사느냐고 물을 때에 부자 되려고, 아니면 남부럽지 않게 살려고 아니면 좀 고상하게 꿈을 이루려 살려고 라며 말하지만 그런 것은 다 삶의 본질이 아니다. 삶의 본질은 이 삶을 창조한 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휴대폰의 모든 기능은 생산자가 소비자의 성향에 따라 만든 것이지 그 기능 자체가 본질이 아니다. 사람이 그것은 알면서 이 육신의 삶의 본질을 육신의 어떠함에 두는 것을 두고 소경이라고 또 하나님의 의의 기준으로 볼 때 죽은 것이라고 성경이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덕적, 법률적인 죄악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건 사람이 살면서 어길 수도 있고 지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기면 그 시대와 나라의 법에 따라 책임을 져야 한다. 예수 믿는다고 그런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소리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하여 죽으신 분이 아니기도 하지만, 정작 예수님도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그 시대 사람들이 정한 법에 저촉된다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것을 천사의 힘을 빌려 피하지 않고 담당하셨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자신이 육신으로 시대적인 요구를 충족치 못한 것에 책임지지 않으려 하고 또 그 근거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는 가치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육신을 가진 이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그 육신이 가진 삶이 원래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이 육신으로는 안 된다는 가치관에 의해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보이신 것이 십자가이다. 


그런 십자가의 본질은 외면하고 십자가가 육신의 죄를 이기고 또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는 부적쯤으로 여기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안목과 가치관이 가진 예수님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아는 사람일수는 있지만 다시 오신 예수님도 메시아도 그리스도도 또 주님도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라 그냥 세상에서 잘 살게 해주는 부적으로서의 의미 밖에 없다.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님이 오늘 나에게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전하시는 말씀으로서의 의미로 다가오는 것을 말한다. 즉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만드실 때 두신 뜻과 같이 연약한 이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생명과 사랑을 표현하시기 위함임을 아는 것이 바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의 본질적인 내용은 다 표현되기에 그렇게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서 뜻하신 의미로 다시 오신 예수님은 언젠가는 약속과 같이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게 오실 것이다. 하지만 그 예수님을 보는 것 역시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하나님이 정하신 의미로 만난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런 의미가 없다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인터넷으로 또한 위성으로 생중계를 해도 받아 들일 수 없는 그냥 이슈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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