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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1-13 열 처녀 비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15. 15:38 Writer : 김홍덕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 비유는 유명한 비유이다. 유명하다는 것은 그 만큼 많은 설교가 있고, 또 이 비유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결혼 관습과 같은 것은 많이 연구되고 많이 알려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 비유의 본질은 아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기름이다.


기름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기능과 의미가 있지만 당시나 고대에는 기름이라는 것은 신분을 명하는 의식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기름을 부어서 임명하는 신분은 세 가지였는데 그것은 왕과 제사장과 또 선지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여기서 처녀들이 준비한 기름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 본문을 가지고 많은 설교를 들었다. 그 대부분의 요지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니 신앙생활 잘 하라는 것이었다. 그건 뭐 좋은 이야기 같은데, 문제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공로가 되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기름 부음을 받는 신분들은 공로로 얻는 신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왕이나, 제사장은 혈통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존재가 그 신분의 자격이 되지 나라를 구하는 공로가 있다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기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많이 하고, 또 착하게 살고, 십일조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잘 하고 사는 것이 기름을 채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는 사람과 그것이 하나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십일조가 되었든, 기도가 되었든 그것을 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이기 때문에 하는 것과, 그런 생명의 본성은 없으면서 그것을 해야 천국에 가고, 그것을 하는 것이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군인이라서 군복을 입는 것이지,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말씀하시는 기름은 행위나 공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세상의 그 누구도 언제 올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쉬지 않고 공로를 유지할 수 없고, 또한 더더욱 예수님이 딱 오시는 순간에 신앙적인 모습을 하고 있기도 어렵다. 예수님께서 지구 반대편에 오신다면 어지간하면 자고 있을 텐데 그땐 어떻게 할 것인가 말이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 깨어있으라고 하는 것은 존재가 깨어있는 상태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도 기름을 준비한 처녀나 그렇지 못한 처녀나 조는 것은 매 한가지였다. 하지만 등불에 기름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준비된 존재가 된 것이다. 그것은 사람도 예수님 오실 때 헌금을 내고 있거나, 기도를 하고 있거나, 교회 청소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실 때 예수님 오신 목적에 부합된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몸으로 오신 그 때의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이시기 위하여 오신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오신 것이 초림인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이시기 위함이다. 그 사건이 자기의 사건이 되는 것 그것이 재림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마음에 오실 때 우리의 심령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마음에 오실 때 예수님께서 신랑이라는 존재로서 의미가 있으려면 기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기름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목적에 맞는 정체성을 가진 상태로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예수님께서 신랑 되신 분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신랑으로 또한 그리스도로 자기에게 의미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기름이라는 것은 불을 만나서 빛이 되는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사람은 원래 빛이 없다.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빛과 사람이 만날 때 비로소 등불이 빛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름은 인간의 정체성 그 자체를 유지하고 있는 마음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스스로 인간의 자리를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자리를 자기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기름을 준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 기름이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이 오시면 등불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등잔이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밝혀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려면 하나님 앞에 처녀와 같은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이요 삶의 의미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름을 채운 것이다. 그리고 그랬을 때 신랑이 와서 잔치에 들어가듯이 사람이 자기 존재가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알고자 하는 기름 같은 마음이 있을 때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그것이 온전해 지고 등불이 되고 잔치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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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가 다시 오는 것을 예비하라고 하셨다. 그 날은 노아의 때와 같고, 두 사람이 밭을 갈다가 한 사람만, 두 사람이 맷돌 갈다가 한 사람만 인자가 오시는 것을 맞이하는 자리로 데려갈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예비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재림은 징조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무화과의 잎이 연해지고 가지가 무성하면 여름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듯이 징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가기 전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서 이 세대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시던 그 시절의 시대를 말한다. 달력, 곧 크로노스적인 시간으로 2,00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지 2,000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노라하면서 아직도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다고 믿고 있으면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이 과연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천지는 없어질 수 있어도 예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단편적으로 본다면 지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첫째 아직 자기 심령에 온전한 예수님의 생명이 임하지 않은 사람이고, 둘째 모든 가치관이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세계는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세계이므로, 사람의 심령에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재림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재림, 즉 정말로 사람의 육신의 눈으로 오시는 주님을 보는 날도 오겠지만, 그것 역시 그 마음에 내용이 있는, 예수님의 재림과 생명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유의미한 것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심판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나의 삶의 이유와 존재 목적으로 다시 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재림이 없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다 소용없는 것이다. 이건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강아지 인형을 아무리 실제 같이 만들어본들 그게 살아있는 강아지 같겠는가? 그것이 그럴 수 없듯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과 그것이 삶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을 전하러 오신 그것이 자기 안에 없는데 금식을 하면 무슨 소용이며,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친들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예수님의 재림은 사람의 심령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이 임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임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징조가 있다. 사람이 열심히 살지만 어느 날 왜 사는지 의문스러워지는 날이 온다. 이것은 반드시 인생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흔히들 사는 일이 이상하게 안 풀리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사로 부르신 것이라고 생각해서 신학교에 입학하기도 하는데, 그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신학이 공부하고 싶고 목사가 되는 일에 어떻게 육신의 먹고 사는 일이 안되니 목사가 되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지 정말로 어이가 없다. 왜냐하면 먹고 사는 문제가 잘 되지 않으면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 사고방식은 먹고 사는 문제가 얼마나 삶의 목적이고 본질로 여기면 그렇겠는가 싶기 때문이다. 정말로 신학을 하고 싶다면,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신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마음의 도움을 위해서라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면 결국은 먹고 사는 한 방편일 뿐이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위하여 목회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도 뭐 그리 장한 일은 아니다. 복음은 그렇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듯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주고 그것이 사람 마음 안에서 생명이 싹이 되듯 전해져야 하는 것이지, 목사라는 신분을 기반으로 사람에게 주입식으로 전하는 복음은 결국 강아지를 낳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잠깐 딴 데로 갔었는데, 예수님의 재림의 징조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자신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었던 것이 망하는 일이다. 그것이 해가 어두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본질이라 여겼던 것들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곧 예수님께서 자기 심령에 오실 징조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징조는 아무 이유 없이 오는 것은 아니다. 즉 그런 징조가 올만한 원인이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인생의 본질이 새롭게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금 예수님의 이런 모든 말씀은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과정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즉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텐데 그것을 보면 인자가 재림할 것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심문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자 다 도망 가버렸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과 자기가 무슨 상관이지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그들이 믿었던 세상이 망한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그들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규정했던 그 세상, 그것이 망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금 징조를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인데 그것이 징조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는 것을 보면 제자들 너희 마음에 가지고 있는 너희의 세상이 망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한 너희 마음 안에 하나님 아닌 세상의 임금으로서의 예수님이 계셨던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즉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이 그것임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성경의 모든 말씀은 단 한 가지의 주제이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성품이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표현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사람이 깨닫고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요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것이고 성경의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그것을 전하셨다. 그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다시 오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그 목적이 사람 안에 자기의 의미로 다시 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재림의 내용이고 본질이다. 그것이 언젠가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의 징조는 자신이 그것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알려면 십자가가 온전한 의미로 자기에게 임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버스 차비 대신 내어 주듯이 내 죄를 대신 십자가에서 갚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는 세상과 자리에서 떠난 것임을 알도록 원래 자리,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셨던 그 모습을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보이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자기의 것으로 비춰지기 시작하면 자기가 그날까지 전부로 여겼던 세상은 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재림의 전정한 징조는 십자가와 그 십자가가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뜻하신 의미로 다가오는 것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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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시고 이어서 세상이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하셨다. 역사적으로 보면 실제로 예루살렘은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역사적인 사건으로 현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은 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해도 그 일을 예언하시려고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결국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 멸망하는 예루살렘과 무너지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을 구출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그런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믿으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이 세상의 종말이라고 믿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참 막막하다. 예수님의 구원이 망하는 예루살렘에서 사람의 육신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 또한 세상의 종말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실제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 망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께서 본질로 여기시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상징되던 본질은 없고 형식만 남은 신앙이 무너진 것이 성전의 멸망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의 본성이 행동으로 표현되듯 본질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바로 이렇게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멸망은 언젠가는 이 세상이 망할지도 모른다. 그것에 관해서는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고 중요한 것은 세상이 망해야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예수님의 승천을 보는 사람 중에도 예수님의 재림을 볼 사람이 있다고 하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 재림의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세상의 멸망이라는 것은 이 현상계가 망하는 것이 그 말씀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므로 몇 회에 걸쳐서 글을 올렸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망한다는 세상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재림은 또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위해서는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 그 세상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심령을 가진 사람이 가진 세상이다. 같은 날을 살아도 다른 세상을 산다고 하는 말과 같이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세상이 있다. ‘그것만이 내 세상’과 같은 노랫말 역시 같은 개념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 바로 그 안목과 가치관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의와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바로 그 세상이 망해야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심령에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멸망과 예수님 재림에 대한 말씀의 본질이다.


사람이 자기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신앙이 없어도 다 아는 것이다. 삶은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는 사람과 소금에 찍어 먹는 사람은 다른 세상에 산다. 한 사람은 삶은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어야 옳은 세상이라 여기고 다른 사람은 소금에 찍어 먹어야 바른 세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 다르니까 그 다른 생각을 한 부부는 이혼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삶은 감자를 무엇에 찍어 먹느냐로 부부가 이혼을 했다고 하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하루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한 사람 모두 어떤 사람과 겪은 모든 갈등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내 생각에는 말이야…>라고 하는 자기 기준이 서로 충돌했기 때문이다. 그 충돌이 강하고 약하고, 또 어떤 이는 그런 충돌에 있어 사회적인 훈련과 교육과 개인의 성격 등을 힘입어 크게 충돌하지 않기도 할 뿐 모두가 그런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바로 그 기준, 자기가 볼 때 세상은, 또는 사람은 아니면 어떤 일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가치기준, 그것이 자기만의 세상을 만든다. 바로 그 세상이 망해야 예수님께서 그 사람 심령 안에 재림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세상에서 그 사람은 왕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왕이냐 하면 옳고 그름의 기준을 가진 이가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왕이 있는 나라에 왕이신 예수님께서 오시려면 그 왕이 망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람이 자기의 선한 기준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선하다 악하다 판단하는 것이 바로 자기 세상이다. 그 세상이 서로 충돌하는 것이 바로 사람 간의 다툼이고 나라 간의 전쟁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세상 안에서 자기가 왕이요 하나님이다. 그러니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져야 할 세상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뿌리가 바로 선악과인 것이다. 즉 사람이 선과 악을 먹었다는 것은 사람이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 기준으로 인하여 자기만의 세상, 자기만의 선악의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자기 세상이 건설된 것이다. 바로 그 세상이 멸망할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그 사람 심령 안에 오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승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예수님께서 한 사람의 심령 안에 다시 오시게 되면, 그 사람이 이때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다 무너진다. 자신이 세상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자신이 삶의 의미라고 여기며 목숨이라도 바쳐서 얻으려고 한 것들이 다 무너지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과 의미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모든 빛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빛이 비취는 것이다.


빛이라는 것은 인식이다. 인식이라는 것은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자기의 원대로 사용하여 자신의 의(義) 안으로 물건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즉 빛이 없으면 어떤 것도 자기에게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어두운 방의 선풍기나 책상이나 어떤 것도 빛이 없으면 그것을 자기 목적과 의도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컴퓨터에 어두운 컴맹은 컴퓨터를 자기 의지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컴퓨터에 대한 인식 곧 빛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원래대로의 인식,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창조하실 때의 목적과 의미와 본질이 인식되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될 때 비로소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하셨던 대로 인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빛이다.


그 빛의 상징이 태양과 달과 별이다. 이런 것이 어두워지고 빛을 잃고 떨어진다는 것은 자기 세상에서 자기 기준으로 인식하던 모든 기준이 다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무너짐이고 그것이 회개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것이고, 그것이 해가 어두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영광스런 존재로 인식되는 시작이고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는 것,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이요 의로 믿어지는 것이며, 그 때 말씀이 나팔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바로 이 사건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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