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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69-75 베드로의 부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27. 10:3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시는 자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베드로도 있었다. 그런데 그 베드로를 몇 사람이 알아보고는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고발하듯 말하고 나섰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 사실을 부인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에 관한 것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유가 죄인과 한 패라는 것이 들통이 나면 자신도 잡혀가서 매 맞고 죽을까봐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베드로가 그렇게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로 치면 독립운동 단체와 비슷한 열심당원으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까지 그 품속에 칼을 가지고 다닌 사람이다. 독립운동가가 독립운동하다 잡히면 해를 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듯이 베드로도 적어도 그 정도 용기는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왜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고발 앞에 그렇게 무너졌을까? 베드로를 고발하는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이 자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베드로의 부인은 “나는 함께한 사람이 아니다.”가 아니었다. 베드로가 부인한 것은 “저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였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얼굴을 몰라보겠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베드로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빌라도의 뜰에서 심문을 받고 채찍을 맞고 있는 예수님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왜 저러고 있는지 그것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알기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께서 왜 저러고 있는지, 저러고 있는 저 예수님을 자신은 이해할 수 없고, 그런 모습의 예수님은 자신이 모르는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변하면 못 알아본다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육신은 같은 사람인데 전혀 다른 사람일 때 느끼는 그 생소함과 같은 것이다. 베드로는 지난 3년간 자신이 알던 예수님과 전혀 다른 모습의 예수님을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베드로가 알던 예수님은 베드로 맘대로 기대하고, 상상하고, 만들어낸 예수님이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예수님으로 알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에서 우상이라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으신데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형상이 없는 분을 형상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당연히 만드는 사람이 가진 하나님의 이미지대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상인 것이다.


그러니까 3년간 베드로는 예수님 우상을 섬긴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세상 사람들이 잃어버린 사람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는데, 베드로는 자기 맘대로 예수님이 유대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독립시킬 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그렇게 예수 우상을 섬기던 베드로가 자신의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독립은커녕 잡혀서 죽게 된 예수님을 보고 있으니 ‘저 사람은 도무지 무군가?’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스라엘의 독립이라는 명제만 기대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할 수 있는 생명인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려고 오셨는데 베드로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으로 알았던 것은 분명하다. 즉 예수님은 내용인 의와 생명을 전하러 오셨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기적과 형식만 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의 본질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에 관한 성경으로 설교하고 공부하면서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가르치지만 그 내용이 결국 사람의 행위나 소유나 육신에 관한 것이라면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육신의 것이라고 하니 속물처럼 돈이나 밝히는 것이라고 단정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믿어서 복 받겠다는 것,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교회가 세상에서 대우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다 예수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정체성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하나님의 의와 뜻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하나님이 아니다. 놀라운 능력과 기적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이 있다. 사람은 그것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가 짖는 것만큼 쉬운 것이다. 어떤 것이라도 자신의 용도에 맞는 것을 하는 것은 아주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결국 자신이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신다. 그 사랑이라는 단어를 원문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시는 사랑은 처음과 두 번째는 아가페이고, 세 번째는 필로에이다. 반면에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로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처음 두 번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필로에 한 것을 주님이 아시나이다.”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결국 사랑하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확인사살처럼 “그래 네가 정말로 나를 필로에 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에도 베드로는 “그렇다.”고 답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을 아가페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랑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관계의 형성에서부터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의 전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지은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아가페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아는 것은 좀 미흡한 것이다. 아가페 사랑은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고 의미를 가지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필로에는 형제애와 같은 것이다. 형제로서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아가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물음에 “아닙니다.”라고 답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은 예수님에 대하여 잘못 알고 사랑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사랑을 보이셨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주님으로 사랑했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랬다. 아니 우리 모두가 그렇다. 그래서 베드로는 아가페 사랑을 보이시기고 있는 매 맞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것은 죄를 시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고백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그 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새벽이 온 것이다. 즉 새 날이 온 것이다.


새벽이 오기 전에, 닭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니 새벽이 왔다는 것이다. 새로운 날, 이제까지 살아보지 못한 세상이 열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자신은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 나라의 문제를 해결할 주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정작 자신의 육신도 나라도 구하지 못하고 오히려 매 맞고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런 예수님은 자신이 알던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예수님을 다르게 알고 있었노라 고백한 것이다.


이 고백은 배신 같지만 정말로 감동적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고 고백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나 세상에서 성공해보겠다고 세상을 사는 중에 예수님을 만나면 예외 없이 예수님은 자신이 꿈꾸는 것을 이루는 과정 속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세례를 받듯 세상의 가치관에서 죽어나고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잘못알고 있었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형제애로 사랑했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는 과정은 반드시 지나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과정이 없는 이는 예수님의 양을 먹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이들에게 줄 것이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고백은 정말로 감동이고, 그 누구도 그 베드로의 고백의 과정 없이 예수님을 바로 만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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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57-68 예수님의 죄목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26. 11:47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결국 유다에게 팔려서 제사장의 하속들에게 잡혀서 심문을 받으신다. 하지만 예수님의 죄목은 뚜렷하지 않았다. 그들의 법이라는 것이 행동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행동이 죄가 되느냐 하는 것인데, 언뜻 생각하면 바리새인들과 무수히 갈등을 빚은 예수님께서 행동에 관한 죄가 없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이나 생명이 종교적인 행동에 우선한다는 내용을 사람들이 접하면 약속이나 한 듯 반문하는 것이 바로 “그럼 행동을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것이냐?”라든가, “선한 행동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냐?”라며 반문한다. 가끔씩은 어떻게 그렇게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그토록 동일한 우문을 해 오는지 놀랍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주신 복음은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시는 본성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 본성으로 인한 삶을 사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생명이기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그 마음에 있는 것이 표현된 것이다. 거지를 보고 동냥을 하는 행동도 사람 마음 안에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아니면 원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마음이라도 있어야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책망하신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에 있어 그들의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고 할 수 밖에 없어서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의롭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의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증거로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종교적인 행위가 본성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인하여 행동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막상 예수님을 붙잡아 와서 심문하니 예수님의 행동에서 아무런 문제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실로 아이러니한 것이다. 예수님은 늘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의 외식을 책망하셨고, 그런 예수님의 말에 분개한 그들이 예수님을 잡아왔는데 예수님의 행동에 대하여 죄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행위가 더 온전한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행위는 안식일도 어기고, 사람의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죄를 사한다고 하는 등 당시의 유대문화권에서 도저히 수용하기 힘든 예수님의 모습이 반대로 안식일도 지키고 모든 율법을 행위로 지켜내려 힘쓴 이들의 삶보다 더 온전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본성이고 그 본성으로 인한 삶의 모습이 율법을 신념을 가지고 억지로 지키고 범하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의 노력보다 온전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지금도 이것은 같다. 성경말씀을 지켜내기 위하여 힘쓰고 애쓰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 안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있어서 그렇게 사는 것과, 그렇게 행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아무리 바보라도 자기 안에 생명이 있어 그 생명이 표현되는 것과 그것을 모방하고 가공한 것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할 리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개의 유전자를 가지고 강아지로 태어난 개가 개의 모양을 하고 개로 사는 것과, 정교한 기술로 만든 강아지 인형이나 로봇 중에 어느 것이 온전한가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은 율법을 어기는 것 같지만, 율법의 목적이자 본질인 하나님의 생명과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니 그 모든 행동과 삶과 말씀은 설사 거짓말을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몸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니 율법적인 기준에서 예수님의 행동을 책잡으려 하니 책잡을 것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자 심문하는 제사장들은 다급해졌다. 잡아는 왔는데 죄를 물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거짓 증인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인데 그 증인의 증거는 사형의 죄목도 아니고, 더욱이 로마 통치 아래 있는 그들에게는 사형집행권이 없으니 더 큰 죄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그런 거짓 증거나 다른 죄에 대하여는 일절 대답을 않으시니 제사장들은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는 그 말에 예수님께서는 “네가 말하였노라.” 즉 “그렇다.”고 대답을 하신 것이다. 심문하는 그들에게는 횡재와 같은 것이지만 정작 예수님의 대답은 심각한 것이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언제라도 죽일 수 있는 죄목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그것도 나사렛이라는 천한 동네 목수의 아들 주제에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으니.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지은 죄이든 아니든 간에 시인해봤자 사형에 이르지 않는 사소한 송사에는 전혀 대답을 하지 않으시다가 시인하면 죽게 되는 심문에는 시인을 하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성전을 헐면 사흘 안에 짓겠다는 것은 사기는 될 수 있지만 죽을죄는 아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억지긴 하지만 그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는데 답변 않으시다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하니 “그렇다.”라고 답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간단하다. 다만 그 결과 대가가 너무 엄청난 것이어서 문제긴 하지만. 그것은 먼저 정말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지금 예수님의 상황과 같이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 그것을 표현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 없이 노력과 신념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외시하는 자들의 세상의 법으로 죄인이 된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블로그에서는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차비를 대신 내어주듯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하여 대신 벌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인간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그 정체성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께서 사람 만드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 육신 가진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십자가는 인간의 틀(mold)이다. 십자가가 인간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죄목이 무엇인가 하면 “유대인의 왕 예수”이다. 그것이 죄패였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스스로를 유대인의 왕이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심으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무엇이 왕 같은 삶이냐에 대하여 세상의 견해가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본성이신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형틀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사람은 사람이란 존재에 대한 견해가 극명하게 다르다. 특히 하나님과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고 심히 좋았는데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부끄러운 존재였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견해차이다. 문제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사람은 하나님과 다르게 사람을 본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다. 그래서 선악과가 원죄다. 선악과를 먹고 보니 사람이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감추려 한다.


하지만 십자가는 그 부끄러운 것을 드러낸 자리다. 사람이 사람의 정체성을 숨기려 하는 것을 선으로 여기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셨을 때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하신다. 이것을 발가벗고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정말로 무식한 것이다. 분명히 정체성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사람에 대한 가치관이 변했을 때 그가 한 것은 숨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린 것이다. 이것이 성기를 가렸다는 것이 아니다. 무화과는 유대인의 나무다. 즉 율법으로 자신이 볼 때 부끄러운 인간의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그 부끄러운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기에는 부끄러운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다.


그 죄가 있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덮으려 한다. 하나님과 같이 되기에 부족한 부분을 감추려 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과 같이 보이는 것은 모두 대단하고 신령하며 신비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방언을 한다거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을 할 수 있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그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러기를 바라셔서 만드신 것이 아니다.


일본에는 신조라는 야구 선수가 있다. 그는 야구기록이 우수하지는 않지만 온갖 재밌고 다소 기행적인 행동들을 많이 해서 일본의 야구팬들이 좋아한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늘 비판 받는다. 그런 그가 한마디 한 적이 있다. <“(야구의) 기록에 관한 것은 이치로에게 맡기고, 기억은 나에게 맡겨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와 같이 기적과 신비한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대로 살면 되는 것인데 이것을 벗어나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니 모든 것이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묻는 것에 죽는다는 것을 아시면서 “그렇다.”고 하신 것은 제사장과 같이 인간의 연약함이나 감추고 싶은 것을 율법의 행위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사람, 그것을 감추지 않고 사람이 보기에는 부끄러워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을 아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운명이고 본성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러셨다면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이들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 본성이 잡으러 제사장의 하속들을 천사로 물리치지 않음이고, 죽을 줄 알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시인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런 마음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없다고 하는 것에 무리가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는 그런 마음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아무리 하나님 또는 예수님께 “주여! 주여!” 외친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한들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구주시고, 그 생명의 본성으로 살아가길 원한다면 사람의 존재를 죄로 여기지 않는 마음, 그것이 드러나는 것을 악으로 여기지 않는 본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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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때가 되었으니 이제 자고, 쉬라’고 하시고 또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리라’하시면서 가자고 하시면서 동산을 떠나자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 군병들과 함께 와서 예수님을 넘기려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시니 군병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했고, 이때 제자 중의 한명 곧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그 종의 귀를 치유하시고 베드로에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라고 하시면서 베드로를 꾸짖으셨다.(상황의 설명은 요한복음이 더 상세함)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만약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 26:54)

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과 모습은 많은 설교의 제목이 되고, 또 많이 알고 있는 말씀이다. 하지만 이 말씀의 본질을 정말로 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정말로 많이 달랐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이 모습과 말씀을 그렇게 연구하고 또 설교하고 묵상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보이시는 이 모습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이 없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을 보이심이고, 그것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말씀과 모습을 바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지지 않으려 한다. 신앙에 있어서도 지지 않으려 한다. 신앙인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신앙에 관해서는 절대로 굽히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신학생들의 데모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데모라고 말하기도 한다.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이라 자칭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위한 데모를 하니 목숨도 하찮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많은 설교를 통해서 칼을 휘두르는 것과 같이 살지 말자와 같은 말은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순순히 잡혀가시는 모습의 의미를 잘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말씀이 어디를 봐서 칼을 휘두르지 말라는 말씀이 주제이겠는가?


많은 신앙인들이 정말로 착각하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신앙을 지키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신앙인들은 누가 하나님을 욕하면 욱하고, 교회를 비판하면 대항하며, 자신들의 신앙과 다른 것을 주장하는 사회의 단면에 크게 반대의 목소리를 내면서 신앙의 의를 부각시키는 것이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들 살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건 아마 배우기를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가르쳤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잡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주시고 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 비하여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 믿는 신앙을 무시하거나 모독하는 것이 정말로 큰일일까? 그건 확실히 아니다. 그것이 더 큰일이라고 한다면 성경과 신앙에 대하여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때고 지금이고 예수님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더 확실히 알고 있는 이가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더 잘 나타낼 이가 없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분이시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잡혀가시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끌려가시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황을 모면할 방법이 없으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하늘의 천사를 불러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물리치는 것은 정말로 일도 아닌 것인데 그냥 끌려가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제자가 되겠다며 훈련하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하여 몰라서, 또 하나님을 몰라서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 삶을 사는 이들을 책망하듯이, 또 여론이나 교세의 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셔야 선지자들의 글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다. 선지자의 글이 무엇인가? 모든 선지자의 글은 오실 메시아 곧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고 죄를 범하는 군인들과 제사장의 하속들을 심판하듯 하시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a christ) 역시 예수님과 같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비방하고 죄를 짓는 이들을 심판하고 대적하고 물리치려 하고 사회적 여론이나 세를 이용하여 강제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예수님을 말씀을 읽고 듣고 교훈 삼고자 하는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이 없는 이들의 삶에 대하여 때로 그것이 예수님을 결박하듯 신앙을 침해하고 제한하는 상황을 직면했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며 쇳소리 내거나, 서울역 광장에 모여서 집회를 하거나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일로 인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그들의 무지를 지고, 또 제한에 얽매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복음 전하는 일에 매진하다 보니 가정의 경제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 그러자 부인이 견디다 못해 그런 상황에 대하여 불평도 했고 때로는 소위 말하는 바가지를 긁기도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부인이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때로는 부인이 없는 자리에서 다른 교인들에게 자기 부인이 신앙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어쩌면 흔한 상황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은 베드로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칼을 휘둘러 종의 귀를 자른 것이나, 부인을 비난한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바로 많은 신앙인들 특히 열성 넘치는 이들이 범하는 신앙적 오류인 것이다.


사람이 육신을 가졌기 때문이 두 가지를 잘 하기 어렵다.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남들 일하는 시간에 교회 일을 돌보고, 또 복음에 관한 일을 하노라면 당연히 경제적인 경쟁력이 약해질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때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왜 자신을 돌아보지 않느냐며 한탄하거나 심지어 사회적으로 무리수를 두게 되면 방송에 나오는 사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배운다면, 교회 일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다보니 가정을 돌보지 못하여 받는 아내의 불평은 당연한 것으로 알아야 하고, 오히려 그 아내 앞에 죄인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유대인의 법 앞에 예수님이 죄인이었듯, 아내의 법 앞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문제를 자신이 안고 가야하고 또한 해결하기 위하여 수고해야 하는 것이다. 부요하게 사는 것이 금방은 어렵더라도 불평을 해소하기 위하여 몸소 수고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신앙인들이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는 바로 그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을 가졌기에 신앙 없는 이들을 보고 신앙 없다고 비난하고, 책망하고, 대항하고 내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없는 그 법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듯 죄인이 되어 오히려 그들이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눈으로 보고 그 본 것이 자기 마음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감동이 되도록 수고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이고, 그런 삶을 우리에게 전하신 것이 예수님의 삶이다.


그렇게 하면 우선 엄청 어려울 것 같다. 사실 어렵다. 만약에 그렇게 해야 그리스도인의 삶이니까 그렇게 살자고 마음먹고, 신념을 가지고 노력해 본다면 정말로 어려울 것이다. 성경을 읽고 그대로 살아보려고 하는 것이 힘든 이유도 같다. 하지만 누군가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고 자기 마음이 감동이 되어 그 마음 안에 그렇게 살고자 하는 생명이 잉태되고 그 생명의 본성이 자신의 삶이 되면 그것은 오히려 금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볼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죄인이 되어 달리신 모습이, 오늘 자신에게 신앙이 없는 사람, 자신보다 세상의 지식과 능력에 대하여 부족한 이를 책망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듯 짐 진 듯 수고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 하심이라는 것을 그 심령 안에서 깨닫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깨달음을 주시는 분이 성령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를 가지시고, 그 의와 말씀이 예수님으로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그 의를 십자가에서 보이시고, 그 십자가를 볼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우리의 본질과 정체성과 존재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 감동으로 깨닫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하나가 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요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삼위일체고, 그것이 성경의 모든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신앙 없는 이들을 심판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신앙의 문제만이 아니다. 어떤 지식과 업무와 능력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그 어떤 것이라도 사람의 삶이라면 다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직 심령 안에서 그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이 깨달아진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본성으로 표현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삶의 모든 것에 그 모습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되었다면, 삶이, 그 사람의 주변이 시끄러울 수 있겠는가?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지자의 글을 이루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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