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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23-30 부자와 천국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6. 30. 10:4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낙타)가 바늘귀[각주:1]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는 반문이 정말 핵심이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나이까?' 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의 마음에도 부자가 천국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천국이라는 곳은 뭔가 세상에서 유력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제자들의 마음에도 있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은 참 영원한 숙제이고 신앙의 타락이다. 어릴 적 유년 주일학교에서 그렇게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나라'라고 노래 불렀지만 정작 사람이 살다보면 세상에서 뭔가 남다른 경쟁력과 유력함이 있다는 것 = 신앙이 좋다는 것 = 천국에 가깝다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제자들의 생각이었고, 지금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천국관과 교회관이다.


부자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부자는 어떤 것으로든 세상의 법에 따른 경쟁에 이겼다는 것은 어떤 것을 패자로 만든 사람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경쟁에서 이겼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 이상의 훈련이나 능력이 남다르게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자체만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 부자인 것이다. 경쟁의 결과로 돈이든 명예든 승리의 영광이든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자가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소득 수준의 커트라인은 얼마란 말인가? 이건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정말로 조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의 구원자로 오셨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가난함은 육신의 경쟁에 따른 가난함이 아니다. 이것은 심령이 인간의 정체성에 대하여,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하여 갈증이 있고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육신의 경제력이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함을 육신의 경제적 가난함, 경쟁의 패배로 인한 가난함을 보는 것은 결국 부자가 천국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역사적인 문제가 된 공산주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난감해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

라고 하셨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심지어 세상에서 법을 어긴 죄인이라도 다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죄 짓고 흉악한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가겠는가 싶겠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반역 죄인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지은 죄로 인하여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있느냐의 문제일 뿐. 천국은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니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오해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되는데 하나님이 고쳐야 한다고 한다거나, 공부는 하지 않고 하나님이 도우셔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숨겨지듯 만연한 것은 세상의 이치나 법으로 무리가 있는 일,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일을 도모하면서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을 거스르는 일을 하는 것에 기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말은 육신의 행위로는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과 상충되게 사람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 비칠 수 있지만 이것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육신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당연히 어떤 행동이 따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할 일은 해야 하는 것이다. 아프면 병원에 가고,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하고, 또 뭔가 이치에 맞지 않고 나에게 손해가 될 것 같은 세상의 보편적 가치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육신은 그렇게 쓰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과 성경말씀은 지켜서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그 사람 안에 온전히 있으면 지킬 수밖에 없는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모든 말씀과 계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유전자가 있으면 표현되는 양식들이기 때문이다. 독수리의 유전자가 있는 독수리는 하늘을 날고, 고래의 유전자가 있는 고래는 바다 속에서 사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삶의 유전자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은 없으면서 말씀을 문자로 읽고서 그것을 지켜 행하면 의로워진다고 하는 생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행함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고 하신 것이지 아무 것도 안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셔야 한다고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믿음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쫓겨난 것이고,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 것이다. 날지 못하는 새나 육지에 올라온 물고기는 다 죽은 것이듯,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명이 되지 않은 사람은 말씀으로 비롯된 삶과 행함이 나올 수 없으므로 당연히 죽은 것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합당한 사람은 그 마음이 인간의 정체성에 대하여,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에 대하여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마음이 부자면 자신의 정체성을 갈급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신이 안락하면 아무래도 영혼도 안락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뿐이지 부자라고 무조건 천국에 못 간다고 하거나, 또 부자라는 이유로 신앙 없는 죄인 취급하는 것도 다 같은 안목과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천국에 들어가기 힘든 부자의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그 가난함,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만드시고 육신으로 사는 삶을 주셨는지를 알고 싶은 갈망과 그러한 것이 자기 안에 없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이 자신의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구라도 자신이 만든 것이 자신이 만든 목적을 갈망하는데 기쁘지 않겠으며, 자신의 세계로 들이지 않겠는가? 


하나님도 그러하시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 자신의 창조 목적을 갈구하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를 주시는 일로 기뻐하실 것이며, 그 사람은 그 생명으로 인하여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바로 하나님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음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은 마치 천국의 DNA 보안 장치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셔서 그 심령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주심으로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 살아가는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이 천국의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1. 이 바늘귀는 재봉에 사용하는 바늘귀가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의 정식 문이 아닌 개구멍과 같은 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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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인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물었다.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

라고 말씀을 하셨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는 두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선한 일을 왜 묻느냐고 하신 것이고, 또 하나는 청년은 영생을 물었는데 예수님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1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어찌 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라고 반문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당연히 선하신 분이고, 그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 하고, 또한 예수님께 선한 일을 물었는데 좋아하시지 않고 오히려 까칠하게 반문하셨을까 하는 점이 그것이다. 그것은 선에 대한 기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젊은 관원은 선이 행함(Do)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께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에 들어가나요?>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라고 또한 예수님께 선한 일을 묻는 것은 그의 눈에는 예수님이 선한 이유가 예수님의 행위에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기적을 일으키는 행동(Do)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도 어떤 선한 일을 행(Do)을 한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이 청년의 문제만은 아니다. 지금 이 시대의 많은 기독교인들도 이와 같은 생각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다. 교회에 와서는 늘 묻는 것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 아니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느냐?'하는 것을 묻고, 또 강단에서는 그런 것을 설교한다. 그것이 바로 이 부자 청년의 안목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신앙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며 반문 하신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행동은 생명체의 특징이다. 생명이 있어 행동이 나온다. 부자 청년의 눈에 보인 예수님의 모든 선한 행동은 그 행동이 선함의 본질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 선함의 본질이고, 그 선한 생명의 본성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선한 행동인 것이다. 그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잘못된 것을 바로 하시는 본성이 있어 병자를 고치시고, 그 생명이 표현되니 계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생명만 있으면 계명도 지키는 자가 되고, 사람의 모든 영적 치유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자 청년이나 오늘날 교회에 가서 무엇을 해야 복을 받고 천국에 갈 것이며, 어떤 행동을 하지 말아야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인지를 고민하는 모든 사람은 선한 행실과 계명을 지키는 행함의 근본인 그리스도의 생명,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 곧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근심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것으로 고민하는지 교회에 가 보면 알 수 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어릴 적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는 청년에게 그러면 가서 네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를 좇으라고 어딘가 연결점이 부족한 말씀을 하신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의 모든 행함의 집약체가 바로 재물이기 때문이다. 돈이라는 것이 사람의 노력의 가치를 대변하는 대명사(代名詞)이기 때문이다. 즉 그가 부자라는 것은 그가 행위로 쌓은 것이 많고 그것에 선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예수님께서 무엇이 부족한지를 묻는 청년에게 그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사실 그것은 부족한 것이 아니다. 하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지켰다고 예수님께 말한 그 모든 계명들은 생명에서 비롯된 본성의 표현이 아니라, 행동만 따라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재물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좇으라는 것도 그 모든 것이 다 있어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화려하게 그려진 꽃이나 심지어 사진이나 동영상도 향기가 없기에 그것은 꽃그림일수는 있어도 꽃은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탈무드에는 한 부자가 늙어서 얻은 아들이 장성하기 전에 죽게 되자 유언으로 아들에게는 딱 하나의 아버지 재산만 선택할 수 있게 하고 나머지 모든 재산은 한 종에게 다 주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아들이 장성해서 경제력을 행사하려고 보니 모든 재산은 다 한 종에게 주고 자신은 단 하나만 선택할 수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고 그 종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그 종만 있으면 모든 재산이 다 자신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계명도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 하나만 있으면 세상의 모든 계명을 다 지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계명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특성이 나타날 때 보이는 일들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보실 때 그 사람이 선한지 악한지를 보시는 유일한 기준이기에 하나님 한 분만 선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지신 선의 기준만 선한 것이라는 것이다. 행동이 선하다고 선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어린 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어린아이는 행함으로 부모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로서 아들이 되는 것을 표현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의 기준이라는 것이 행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 어떤 아들이 공로로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가? 아들은 생명으로 낳는 것이고, 생명이 아들이 되고, 그 아들의 모든 행동이 다 아버지가 볼 때 선함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는 선의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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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독처하는 것이 보기 좋지 않다고 생각하셔서 아담이 잠들게 한 다음에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셨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남자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가 아니라,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 때문인지 유대인들은 여자를 사람 수에도 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남자는 사람이고, 여자는 그 배필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오히려 말씀 자체로 인하여 이것이 남자와 여자가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 남자 혹은 여자가 아니라 사람 전체이고, 사람이 독처하면 좋지 못하니 배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사람은 육신으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자아다. 그리고 배필은 육신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표현하신 것이다. 즉 어떤 세계에 있어 그 세계의 의는 항상 내용이다. 그리고 그것이 본질이지만 홀로 있어 본질이 의미를 가질 수는 없다. 그 본질을 표현할 표현 양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배필이고 그것이 사람 곧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미지를 표현할 육신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가정의 혈통을 나타내는 성씨는 남자의 성을 따른다. 이는 그 혈통의 정체성을 남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를 만나서 그 혈통의 정체성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아들을 얻는 것이다. 즉 사람이 육신으로 이루는 가정의 혈통 곧 의와 내용은 남자에게 있고, 그 의와 내용인 혈통이 육신을 얻는 것은 여자로 얻는 것이다. 이것이 결혼이다. 그러니까 결혼이라는 것은 남자가 가진 의가 여자로 인하여 표현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기본 줄기가 남자와 여자로 나타난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형상과 이미지와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여자의 격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자기 안에 사람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이 없고, 하나님을 만나야 인생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가 자기 안에 있어서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미지(형상)가 표현되는 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발견되어 삶의 목적과 의가 하나님에 귀속되어 그것을 육신으로 표현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는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남자와 여자는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 씨가 있는 사람 곧 남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원래 창조되는 순간부터 혼자서는 자신의 존재 목적을 모르는 존재이다. 이는 피조물이니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인생이란 항상 여자와 같은 것이다. 곧 씨라고 할 수 있는 인생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모르는 모든 인생은 다 여자이다.


그러므로 결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이라는 육신을 가진 형식으로 표현되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육신으로 혈통의 씨를 가진 남자가 여자를 통하여 아들을 얻는 것으로 예표된 하나님의 법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이혼에 대하여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 주면 이혼할 수 있다고 한 것에 대하여 마음이 완악한 연고로 아내 버림을 허락했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다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거짓말을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완악함, 곧 하나님의 의와 말씀을 자기 맘대로 해석하는 고집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을 주신 목적과 같은 것이다. 율법이 지키라고 주셨다는 것 보다, 그것을 행동으로는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율법을 지키려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심과 같이, 아내를 버리는 것도 아내를 버리기 위한 수단으로 이혼증서의 규례를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생명을 아는 사람은 이혼이라는 것이 할 수 없는 본성을 가졌다는 것이고, 이혼증서가 필요하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의 법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이로 써야 하는 문서를 따르는 사람, 곧 말씀을 행동과 규례로 아는 사람이라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혼증서는 아내를 버려도 되는 증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결혼에 대하여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을 이루라는 것은 단순히 결혼의 법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부모를 떠나는 것이 남자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성경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을 말할 때가 많다.(이는 문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문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인자라고 표현하신 것이나, 창세기 6장에서 사람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 역시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은 아내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은 형식, 곧 육신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육신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육신의 정체성이 같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자신의 몸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담기에 그 육신이 부끄럽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육신의 정체성과 자아 정체성이 하나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혼이다. 예수님께서 이혼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 이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신앙의 갈등은 사람의 육신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이다. 지금 많은 신앙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이 이 육신의 정체성과 사용법을 모른다. 그것이 많은 신앙적 모순과 타락을 낳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한 육신을 선악의 기준을 가진 인생의 안목으로 보면 늘 부정하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을 단련하려 하면 유대인이나 이슬람이나 율법적인 신앙이 되고, 부정한 육신은 가망 없으니 버리려 하면 영지주의나 이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아내와 한 몸을 이루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육신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저버리면 여러 가지 신앙의 모순을 낳게 된다. 육신의 문제, 곧 이 육신의 한계와 육신이 속한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기도로 해결하려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그러니까 좋은 대학 가려면 공부를 해야지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데 기도를 해야만 한다고, 기도하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존재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을 기도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 밀양에서와 같이 살인 해 놓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죄를 사했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사과할 것이 없다고 하는 식의 신앙도 같은 것이다. 육신으로 관련된 것은 육신으로 갚는 것이다. 그게 육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고, 그것이 아내와 한 몸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육신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의와 성품과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사람이 아내와 같은 육신이라는 형식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결혼이라는 사람의 관습의 법을 만드신 것은 단순히 육신으로 남녀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인간이라는 종족을 지속하기 위하심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런 일련의 사람의 관습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 그렇게 한 몸이 되는 것의 그림자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결혼을 하고 이혼을 논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본질과 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하나님의 의가 온전하게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신 것이다. 남편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내와 같고 하나님 앞에 여자와 같은 인생의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과 사람이 아내와 한 몸을 이루었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것이 결혼일진데 이혼이라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연고 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간음은 아내가 자신의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씨를 받아 들이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사람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목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자기 것이 아닌 것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육신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사람이 결혼하고 이혼하는 것에 관해서는 굳이 하나님께서 개별적으로 간섭하지 않으셔도 되게 사람의 본성 안에 두실 것은 두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런 것이나 정리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 그리고 결혼이라는 법을 인생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의가 여자와 같은 육신으로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아들을 얻는 법을 보이심이다.


여자를 성경에서 세지 않는 것은 육신으로 여자를 세지 말고 남자와 다르게 취급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없는 여자는 하나님의 의가 없으므로 하나님의 의를 가진 자를 세는 것에 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병아리를 얻기 위하여 달걀을 세는 사람이 무정란을 세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니까 여자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다.


결혼은 남녀가 가정을 이루는 것을 위함이 본질이 아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격인 육신을 가진 인생이 남편을 만나듯 하나님의 의를 자신이 받아 들여서 그 말씀의 씨가 자신 안에서 생명이 되어 자신의 삶이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게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마치 결혼해서 아들을 얻는 것과 같이 그 생명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 그리고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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