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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1-14 길 잃은 한 마리 양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6. 22. 16:31 Writer : 김홍덕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길 잃은 한 마리 양에 대한 말씀은 제자들이 천국에서 큰 자가 누구인지를 묻는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 있다는 것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시는 내용의 줄기는 사실상,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다."는 답변이라 봐도 무방하다. 누가 큰지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상대적 기준이 있다는 것이고, 그 상대적 기준의 평가 대상은 어떤 공로와 드림이 있었느냐 이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로 보지 않으면 다 그런 안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답변의 내용 안에 길 잃은 한 마리 양에 대한 말씀이 있다는 것은 이 한 마리, 아흔 아홉 마리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작은 값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세상적인 가치로 볼 때 99라는 숫자로 가치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양이 한 마리냐 아흔 아홉 마리냐 하는 것이 비교의 대상이고, 숫자로서 그 가치를 비교하는 것이다. 즉 살아 있는 내 어린 양이라는 생명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와 아흔 아홉로 비교하는 시각이 바로 천국에서 누가 큰 사람인지를 따지는 시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당연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예를 하나 들어보자. 교회라고 하는 신앙 공동체가 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교회 안에는 신앙이 어린 사람도 있고, 어리다기보다 뭐랄까 교회가 가는 것과 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경우가 있다.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이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말씀을 적용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많은 경우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교회가 가는 방향과 같지 않은 사람을 내치려 한다. 명분은 이렇다. 교회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바로 천국에서 누가 더 큰지를 따지는 가치관에서 비롯된 판단이다. 교회가 신앙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교회 전체를 포기할 수 있는 마음으로 그 사람을 찾는 것(섬기고 깨닫도록 수고하는 것)을 선택하는 마음이 바로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이다.


아마 이렇게 말을 해 간다면 정말 어려운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것이 자명하다. 교회가 크면 클수록 또 스스로 말씀의 계시에 밝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더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다. 하지만 교회는 교회의 방향과 맞지 않아 보이는 그 한 사람을 얻고자 수고하는 그 수고와 희생으로 인하여 교회가 온전해지는 것이지, 그 사람을 내치고서 잘 하는 사람만 가는 것이 교회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더욱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막아선 베드로의 마음이 바로 아흔 아홉 마리를 지키려는 마음이고, 베드로의 생각과는 달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뜻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것과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아 보인 베드로의 마음이나, 한 마리 때문에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그 한 마리를 찾으러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나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의 신앙에서도 또 교회가 가는 모습에서도 아주 중요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 말씀이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살고자 하는 죽을 것이라는 것과도 같은 말씀인 것이다. 천국에서 누가 클까? 걱정하는 것, 어떤 신앙이 좋은 것일까? 생각하는 것에는 함정이 있다. 세상적인 가치기준에서 비롯되었다는 함정이 있다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 하나님의 뜻과 천국의 의와 법은, 가르치는 대로 따라 오지 않고 제 맘대로 가다가 길을 잃어버린 그 문제아를 찾기 위하여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찾아 나서는 것과 같은 마음이다. 그것이 어린 아이의 모든 요청을 수용해 가는 어른의 마음과 수고와 사랑과 같은 것이고, 세상적인 기준에 따라 99가 1보다 크다는 상대 비교가 아닌 하나든 아흔 아홉이든 다 양이라는 다 양이라는 것 그 하나로 인하여 그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것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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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1-14 실족케 하는 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6. 22. 15:1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는 누가 큰지를 묻는 제자들에게 답변을 하시면서 어린아이와 같은 소자를 영접하는 것이 큰 자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실족케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하신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실족하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소자를 영접하지 않는 것이 바로 실족케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린 아이와 같이 신앙이 어리고, 또 어떤 세계에 대하여 신입생처럼 배우는 이를 위하여 수고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더 알고 장성했다는 것을 빌미로 대접받으려는 모든 생각과 행위가 소자를 실족케 한다는 것이다.


실족한다는 것은 결국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실족하게 하는 것은 어린 아이가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신앙이 어린 사람이 장성한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한다는 것,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생명, 자신보다 의에 대하여 또 어떤 세계에 대하여 밝지 않은 자가 보고서 스스로 알게 되기까지 수고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그 세계에 대하여 더 크다는 것만 늘 보이려 가르치고 심판하고 징계하는 대접만 받은 사람은 결국은 그렇지 않은 천국의 법을 배우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천국의 의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존재 목적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실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이것은 신앙에 있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교훈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실족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천국에서 진정한 의미의 큰 자로서의 모습으로 대할 것인지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많은 신앙인들, 특히 신앙에 대하여 어떤 직분을 가졌거나 영적인 능력이 있다거나 계시가 밝다는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람의 신앙이 좋은 신앙인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실족하게 하는 사람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교단에든 강도권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명문화되고 제도화 된 교단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아무나 설교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명문화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교회가 강도권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설교할 수 있는 자격, 심지어 강대상에 올라갈 수 있는 자격, 또 교회의 어떤 봉사를 위해서는 장립집사 이상이어야 한다는 식의 자격제한이 있다. 이런 모든 것은 다 천국의 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특정한 사람만 한다는 것은 다르게 보면 그에 따른 특권이고 대접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은 일방적이라 자신이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계층만 그런 대접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어린 사람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어린 자들로부터 대접을 받겠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 누가 큰지를 묻는 의도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소자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업신여긴다는 것이 면상에서 무시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장벽을 제도로 두는 것도 분명히 업신여기는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것이므로 그런 것은 다 빼어 버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빼 버린다는 것은 그 보이지 않는 제도로 받는 혜택 곧 대접을 다 버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버리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그것을 고집하다 지옥에 가는 것 보다 나은 것이기 때문이다.


손이나 발이나 눈이 소자를 실족케 하는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신앙에 대하여 먼저 알고(눈 곧 안목), 또 더 드리고 수고할 능력(손과 발)이 있다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은 소자를 위하여 수고하는 능력이나 안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적선하듯 가르치고, 지위나 일에 차별을 두는 것과 같이 대접을 받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소자는 어린 아이 또 죄인과 세리와 같이 신앙적으로 도무지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또 제사장과 같이 하나님 앞에 입는 옷부터 다르게 차이가 있어 그들과 밥도 같이 먹을 수 없는 제도로서 업신여김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말씀하시기도 한 것이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하셨을까?


그런데 지금도 이것은 마찬 가지다. 옛날 박정희 대통령이 어릴 적에 고무신 신고 다니던 더러운 발로 교회 마루에 돌아다닌다고 꾸중을 듣고는 교회를 멀리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그런 것이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거룩함이 그 거룩함의 기준으로 볼 때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대접을 받는 것을 위함이라면 다 실족케 하는 것이고, 천국에서는 아주 작은 자이며, 누가 큰지를 따지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신앙을 보는 사람일 뿐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실족케 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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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여러 복음서에서 천국에서 누가 큰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에서는 누가 큰 사람인지를 알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런 생각은 지극히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크고 작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피라미드를 세우는 가치관이고, 또 얼마나 인간이 본성을 넘어서도록 스스로를 제어했는지에 대한 상대적 평가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치관의 대표적인 표현이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와 같은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어떤 사람의 신앙이 더 좋은 신앙인지 질문을 받기도 한다. 그럴 때면 늘 같은 대답을 한다. "자기 그릇만큼 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신앙"이라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 다르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 사람의 역량이 다르기 때문이다. 역량이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의 색깔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신 그릇, 곧 기대하는 바에 맞게 살면 그것이 가장 좋은 신앙인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고린도서에서 바울 사도가 몸의 신체와 교회의 여러 직분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 누가 큰 사람인지를 묻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천국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상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것에 대하여 답변을 하셨는데 그 답은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이가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고 답변을 하셨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어른 앞에서 어리다고 겸손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는 자기를 표현함에 있어 그 생명의 본성 이외의 다른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린 아이는 자신이 어떤 공로에 대한 대가를 바라듯이 부모나 어른에게 뭔가를 요구하지 않고 그냥 자신이 가지고 싶다는 것을 표현할 뿐이다. 어린 아이가 때로 부모에게 자신이 수고하면 어떻게 해 달라고 하기는 하지만 그러다가도 정말로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보면 그 순간에는 자신의 공로가 어떻고 또 상대적인 차이를 내세우면서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지고 싶은 마음 그대로를 표현한다. 즉 자신의 본성대로 행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어떤 사람을 애기 같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 어떤 사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적인 관습이나 문화에 종속되지 않은 행동을 할 때 그런 표현을 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세상 물 덜 먹은 것을 말할 때 어린 아이 같다고 한다. 바로 그런 기준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준이다. 즉 어린 아이와 같다는 것은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기준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인정받기 원하고, 또 다른 사람을 보는 것과 같은 안목이나 가치관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질문만 놓고 보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답변은 "그런 질문 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다."라고 답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천국에서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왜 제자들이나 사람들이 그것에 관심을 가지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괜히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제자들이나 지금 이 시대에 신앙을 가진 사람이나 같은 생각이다. 그것은 큰 자는 곧 대접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대접을 받고자 한다는 것은 자신을 어떤 기준에 의하여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치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세상이 가진 피라미드적인 가치관(상대적 존재 비교를 하는)과 또한 얼마나 인간의 본성을 감추기 위하여 노력하고 공로를 세웠는지 하는 것과 또한 그와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수고하고 공로를 세우고 또 소유를 드렸는지를 따지고 그것에 맞게 천국에서 대접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의 차이가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어떻게 하면 더 큰 사람이 되고, 그런 차이에 따라 당연히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법은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접을 하는지에 달린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천국은 누가 더 대접을 받는 큰 사람이냐를 논하는 곳이 아니라 어떤 사람을 영접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 곧 누가 더 큰지도 따지지 않고, 세상의 공로나 소유의 드림과 같은 것의 차이에 따른 다른 대접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을 영접하는 사람의 나라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지 않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이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가치관과 다르기 때문에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것은 아주 힘든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끔씩 어린 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부에게 이야기하기를 "아기는 아프지 않고 편찮다."라고 말해주곤 한다. 한마디로 아이는 늘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한다는 것은 자신이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어리고 모르고 미숙하며 어리석은 생각과 가치관을 받드는 것이 바로 천국의 법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법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을 모욕했다고 십자가에 못 박는 것에 순순히 끌려가셨다는 것이 바로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면 신앙이 어린 사람을 사뭇 가르치려 하고, 또 실수하고 때로 죄를 범하는 것을 심판을 하고자 하기는 해도 어린 아이를 키우듯, 또 그 응석을 받아 주듯, 또 기저귀 갈아주듯 신앙이 어린 사람이 저지른 실수를 감당해 가면서 살려 고는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시대에도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것을 예수님께 묻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큰 사람이라는 것은 어린 아이와 같은 이들과 다르게 대접을 받고 또 어린 아이를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 것만 생각하지만, 아이는 실제로 어른이 가르치는 것 같지만 받들고 영접하듯이 하지 않으면 온전한 교육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천국에서는 자신보다 어린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지 않는 사람을 어른, 곧 큰 사람이라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천국의 법은 십자가의 법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온전한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에 의하여 죄인이 되셔서 죽으신 법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큰 자 곧 어른의 모습이다. 그리고 신앙의 장성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신앙이 자라면 대접을 받고, 무엇보다 강도권과 같이 큰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주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무엇이 큰 사람이고 어떤 것이 장성한 신앙인지 모르는 것이며, 무엇보다 천국의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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