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52

예수님께서는 말세와 관련된 비유와 말씀을 마치시고 베다니에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 유하시게 되었다. 그때 이미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 한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옥합을 깨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사람들 중에 다른 사람도 아닌 제자들이 그것을 분히 여겼다. 왜냐하면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면 더 좋은데 왜 예수님께서 붓는 것으로 다 소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좀 특이하게 요한복음에도 기록되었는데 다른 복음서 보다 더 상세히 기록되었다. 보통 공관복음이라고 하면 4복음서 중에 요한복음을 제외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말한다. 이 세 복음서는 서로 연관된 내용이 중복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은 사실 좀 다른 관점의 성경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관점에서 기록한 요한 사도가 볼 때 이 사건은 의미가 컸다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은 단순히 제자들의 갈등을 유발시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것을 본 가룟 유다는 이 일과 이 일을 대하는 예수님을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팔아 버리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는 사건이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향유를 예수님께 붓는 일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냐에 따라 너무나 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향유의 양이 한 나드이고 그 가치는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했다. 그것은 300일의 품삯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 매번 먹을 것이나 구하러 다니던 제자들 입장에서 볼 때 눈에 펼쳐진 광경은 쉽게 용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관점은 그 향유가 세상적인 가치 기준에서 판단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때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또한 백성들을 가난과 병에서 구원할 메시아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의 왕이 되실 줄로 믿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아직 모든 것의 가치를 눈에 보이는 것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관점으로 열 받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고 또한 이 일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이면 어디라도 전해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이 여자가 내게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 26:12-13)


기름을 붓는 다는 것은 기름 부음을 받는 사람에게 어떤 신분을 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로 보면 기름 부음을 받는 신분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이 여인에는 예수님이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며 메시아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장사를 위하여 향유를 부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는 것은 기름을 붓는 것과 예수님의 죽으심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정치적인 나라의 왕이 되거나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왕이 되려면 죽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살아야 한다. 제자들의 관점으로는 예수님이 살아서 메시아가 되어야 하지만 예수님은 장사지내시게 됨으로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이 여인이 보여주고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지금이나 그 당시나 그리스도 곧 메시아에 대한 환상은 같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 영웅이고 메시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메시아요 그리스도가 자신이, 사람이 처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고, 지금도 많은 신앙인들이 자기가 살아가는 형편과 모양에 대하여 신앙이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 그렇다. 예수 믿어 복 받는다는 그 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대변한다. 복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는 것에서.


제자들의 관점이 그랬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당시 타락한 모든 것을 바로잡고, 또한 로마의 속국인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까지 속에 칼을 품고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의 모친은 예수님이 왕이 되면 높은 자리를 하나씩 달라고 하고 제자들은 그 소리에 열 받고 한 것이 다 그런 기대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기대에 가장 계산적이었던 제자가 바로 가룟 유다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으러 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어야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된다면서 예수님이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는 일이 온 세상에 전해질 복음이라고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가룟 유다는 정말로 돌아버릴 것 같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결국 예수님이 이때까지 보여준 모든 것이 자기와 생각하던 것과 다르다고 결심하고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팔아버리는 것이다.


앞에서 잠깐 이야기 했듯 지금도 비슷한 일들이 너무 많다.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나 이유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께 자신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며 협박하는 것 그것뿐인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는데, 그 세상 속에 한 사람이 이 세상의 물건과 재화와 세상의 것으로 성공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단 말인가? 그것은 마치 자동차가 주인을 목적지에 데려다 주지는 않고, 자동차에 금칠을 해주면 주인이 영광스러워질 것이라며 떼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그런 관점으로 보면 이 여인의 처사는 기가 차는 것이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은 죽으면 안 되시는 분인데 장사를 위하여 무엇을 한다는 것도 가당치 않은 것이고, 더욱이 그것을 위하여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큰 재물을 그렇게 허무하게 소비한다는 것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 메시아는 제자들의 그런 관점이나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며 교회에 다니는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시고 기름 부음을 받으시는 것은 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죽임을 당할 때 메시아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이 되시는 것을 위한 이 여인의 행동은 복음과 늘 함께 전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기름 부음을 받은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은 복음이다. 그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것에 대하여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는 그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죽으심이 복음이 되고, 죽으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시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의와 뜻과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하여 표현되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이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셨던 모든 것을 보이신 자리가 바로 십자가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하나님의 이미지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대로 사람이 살면 그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스스로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람의 역할이 순종하는 수동에서 증동적인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원래 태초에 사람을 만드실 그 때에 사람의 모습 그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능동적으로 할 수 없는 십자가에 달려 있는 그 모습이 바로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백부장의 고백이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은 이 땅의 왕이 되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이 가진 죄와 어두움인 ‘왜 사는지?’ 모르는 것, ‘왜 존재하는지 모르는 것’을 알려 주셨기에 구원자이신 것이다. 사람이 자기가 왜 사는지 모르므로 어두움에 있어 맹인과 같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문둥병자와 같은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이유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라고 인하여 깨닫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구원자요 그리스도요 메시아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시므로 이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 부은 것이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고, 또한 예수님께서 복음의 주체이시기에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확증하는 기름 부음의 사건의 주인공인 여인의 일이 복음과 함께 전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떼려고 해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때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심판을 하시되, 왼편과 오른편으로 사람을 나누고 왼편에 있는 이들은 영벌에, 오른편에 있는 이들은 영생에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말씀을 하신다. 왼편과 오른편, 그리고 양과 염소. 영벌에 들어가는 사람은 염소와 같은 사람으로 예수님의 왼편에 선 사람들이고, 양과 같은 사람은 예수님의 오른편에 선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특이한 것은 어느 편에 선 사람도 자신이 어느 쪽에 서게 될 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른편에 선 사람들은 ‘우리가 언제 주를 영접했나이까?’ 반문하고, 왼편에 선 사람은 ‘우리가 언제 주를 외면했나이까?’ 반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반문에 임금 곧 예수님의 대답은 ‘지극히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라는 사람은 키 작은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이가 적은 사람? 도무지 어떤 사람이기에 이들이 영생과 영벌의 기준이 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 정말로 핵심이 아닌가 싶다. 이것은 요즘말로 한다면 ‘을’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세계, 어떤 관계에 있어서 아주 작은 자, 그 세계의 의와 기준에서 가장 작은 존재들을 말하는 것이다.


수학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자는 “0”점 받은 사람이고, 신앙의 세계에서는 신앙 없고 도무지 신앙적인 규례라고는 전혀 지킨 적이 없는 그런 사람, 도덕이라는 세계에서 보면 싸가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 돈의 세계에서는 파산한 사람, 거지와 같은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들에게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것이 영생이냐, 영벌이냐 하는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세계에서 작은 자가 필요로 하는 것, 그것을 대접한 사람은 오른편에, 그것을 외면한 사람은 왼편에 선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러 가시는 길에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그 지극히 작은 자가 필요한 것을 대접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세계에 있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고 하나님을 모르고 모욕한다고 죽여 버린 사건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 모르는 작은 자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목숨을 대접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세계의 지극히 작은 자, 곧 죄인이요 사망 가운데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하나님의 의로서 대접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자들, 그들의 배고픔과 목마름과 나그네 됨은, 모든 인생이 왜 사는지, 자신이 존재하게 된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고, 또한 그것 자체이기에, 예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하셨는지 그 뜻을 사람에게 알게 하신 것이야 말로 모든 배고픔과, 모든 헐벗음과,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의 삶을 해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것은 당연히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에서 의로운 것과 의롭지 않은 것을 가늠하고 심판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세계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같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과 같이 그 사람이 작은 이유, 가지지 못하고 모르는 그 이유의 해갈해 주기 위하여 수고한 삶을 살았는지 아닌지가 심판 날에 예수님의 오른편에 서게 할지 아니면 왼편에 서게 할지 결정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약자에 편에 서는 것을 의롭게 여긴다. 그것을 사회의 정의로까지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은 좀 다르다. 어떤 것에서 다른가 하면, 가진 자로서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는 것과, 가졌지만 도리어 없는 자 보다 낮은 자리에서 낮은 자를 섬기는 것의 차이다. 이것이 뭐가 다른가 싶겠지만, 이것은 아주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수학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수학 교수나 선생님은 배우는 학생들보다 수학에 대하여 더 능통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교수나 교사가 배우는 학생에게 자기가 아는 것을 전해 주는 것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셔야 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가르치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교수나 교사는 그 지위가 언제나 학생보다 위에 있다. 수학이라는 세계에서 항상 큰 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이신 섬김은 다르다.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자신 보다 더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수학으로 친다면 다빈치 이상의 레벨(?) 하지만 그런 비교조차 불가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하여 분명히 아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면서, 하나님의 뜻을 몰라 죄인인 인생들이 주장하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하나님을 모른다며 오히려 죄인이 되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섬김이라 하셨는데 바로 그것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이다.


수학이라는 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설명한다면, 수학박사인 교수가 어린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치는데 학생이 교수를 보고 “네가 수학을 제대로 알기나 하냐?”고 하면서 교수를 해임시켜 버린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다. 그러는데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묵묵히 끌려가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더욱이 마음만 먹었다면 천군천사를 불러서 모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음에도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본성이 그게 아니기에,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생명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이다.


사람들 사회에서 약자를 돌보는 일이 많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것조차 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에 매몰된 사람보다야 백번 나은 것이지만.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예를 들어 무료 급식을 한다고 하자. 그런데 밥을 얻어먹는 사람이 “음식 맛이 왜 이따위냐?”고 행패를 부렸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 하는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아마 실제로 그런 일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졌다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행패를 부리는 사람에게 ‘죄송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수학선생이 아이를 가르치는 마음으로 한다면, ‘굶는 사람 먹여 주려는데 뭐하는 것이냐?’할 것이다. 만약 그런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가진 자로서 봉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졌다는 지위는 놓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것보다 훨씬 심하다. 굶는 사람 법 먹여 주는데 밥이 맛없다고 투정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왜 사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람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 지으신 뜻과 의를 전하려고 예수님을 보내서 그 뜻을 전하는데, ‘네사 무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지랄이냐?’며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하면서 응징하신 것이 아니라, 정말로 죄인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세계에 있어 진정한 소자인 죄인들이 크다고도 표현하기 힘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데 그들의 뜻대로 달리셨다는 것이다. 즉 소자들의 원하는 대로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세계에서 더 알게 되고, 더 밝아지고, 더 가지게 되면 점점 높아진다. 의를 굽히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무료 급식을 하는데 밥 맛 없다고 투정하는 노숙자가 못 마땅하게 보이는 마음 없이 섬기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단 ‘베푸는 자’, ‘더 아는 자’라는 지위는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가진 자로서 봉사하는 것 까지는 해도, 봉사하는 그 자신이 무시당하는 것을 말없이 수용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우리가 언제 주를 외면했습니까?’ 항변하는 사람들도 주님을 공양했다고 했다. 바로 그들의 공양이 가졌다는 것을 유지하고 나눈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공양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했고, 자신이 계획했으며, 자신이 공양할 때에 이것이 주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임금의 말에 자신들의 행적을 기억해 낸 것이다.


반면에 오른편에 선 사람들은 자신들이 언제 주님을 공양했는지 몰랐다. 자기들이 언제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했는지 몰랐다. 그것은 자신들이 대접한 사람들이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과 자신이 차이가 있다고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그렇다보니 자신들이 한 것을 기억조차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이 대접할 때는 그것이 대접이라고 생각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준 것이 아니라, 그냥 그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임금이 이야기 하는 지극히 작은 자와 어떻게 다른지 조차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다. 예수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죄인과 같이 예수님도 죄인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대접한 지극히 작은 작, 하나님의 의 앞에 온전한 죄인들과 예수님의 신분이 같아져 버린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이 오른편에 선 자들은 자신들과 지극히 작은 자와 차이가 없어지는 자리를 순종한 것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한 것이다.


정리해 보면 지극히 작은 자는 가난한 자와 같은 약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포괄적으로 보면 어떤 세계에서 약자다. 지식의 세계에서는 무식한 사람, 경제의 세계에서는 가난한 사람과 같은 존재를 말한다. 하지만 핵심은 하나님 의의 세계에서 지극히 작은 자, 곧 죄인을 말한다. 이 죄인과 자신과 차이를 알지 못하는 것이 곧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한 것이다.


그것은 오른편에 선 자들이 자신이 한 일을 알지 못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이 지극히 작은 자 대접한 것을 몰랐던 것은 그들이 대접한 사람이 지극히 작은 자인 것을  몰랐던 것이고, 또 자기의 행위가 대접하는 것임을 몰랐던 자들이다. 즉 베풀거나 뭐 의미를 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나오는 본성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것이 대접한 것인지, 지극히 작은 자를 대했던 것인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며 보여 주신대로 의인이 죄인이 되는 세계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그것을 특별하게 여지 않는 본성과 같은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 숨 쉬기 위하여, 숨 쉬는 것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어떤 세계에서 나를 죄인 삼아도 그것을 수용함으로 대접하는 것이 본성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이 기억나지 않는 자연스러운 자신의 삶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우편에 서는 양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마태복음) 25:14-30 달란트 비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16. 11:52 Writer : 김홍덕

유명한 달란트 비유다. 이 달란트 비유를 이야기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지금 말세에 관하여, 또 재림에 관하여 또 달란트 비유와 같은 이 말씀들을 하시는 시점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보내시기 위하여 오셨고, 예수님의 유월절은 곧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에 오셔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시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간과하고 이 말씀들을 본다면, 예수님께서 몸으로 다시 오시는 것만 생각하게 되고 멸망을 이 지구가 멸망하는 것으로만 보게 된다. 그것을 그렇게 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대(당시 세대)가 가기 전에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것은 거짓말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거의 마지막 말씀을 거저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살라든가, 아니면 맡은 일에 충성해라는 것과 같은 말씀으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누가 곧 죽을 것을 아는데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의 가장 중요한 것 아닌 것을 논하겠는가?


달란트는 앞에서 한번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의 화폐가치로 볼 때 약 90,000일의 노동자 일당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돈이다. 그러니까 달란트는 개인이 벌거나 갚거나 소유하거나 하는 수준의 돈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얻을 수도 같을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초인간적인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란트를 받았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내어놓을 수 없는 것을 받았다는 것이다.


주인이 세 명의 종에게 다섯, 셋, 한 달란트를 나눠주고 타국에 갔다 와서 그 달란트를 어떻게 하였는지 확인하였는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받은 것과 같은 달란트를 장사하여 남겼는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달란트를 감추어 두었다가 꺼내왔다. 그리고 왜 그렇게 했는가 하면 주인은 능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심지 않아도 거둘 수 있고, 또 헤치지(헤집지) 않아도 모으는 줄로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자 주인은 매우 화가 나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을 내어 쫓아 버렸다.


먼저 이 달란트 비유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장사하다 망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점과 왜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적게 주었는가 하는 것과 같은 것을 가정하고 생각해 본다. 그런데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주고 떠날 때 장사하라고 한 적도, 갔다 와서 회계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이의 판단도 나쁜 것은 아닌데, 그것이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싶다.


이 주인은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셨다는 것은 단순히 재능을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하나님만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하나님만 가진 사람 입장에서 절대적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이다. 이는 달란트가 당시 가치로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가치였던 것과 같이, 스스로 인생에 들어온 것이 아닌 인생의 존재 목적을 말하는 것이다. 인생 그 누도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고 정한 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존재 목적도 스스로 가질 수 없는 달란트와 같은 것이다.

더욱이 이 인생의 정체성이자 존재 목적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내는 형식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이것이 얼마나 큰 달란트를 받은 것인지를 말해준다.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 그 사람의 존재 목적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을 위한 존재라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이 존재를 나타내고 그것을 표현하는 육신을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으로서 가질 수 없는 달란트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창조 목적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정확히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과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면 모양이나 생산지에 무관하게 언제나 사과이듯,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육신으로 나타난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기에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자기 생명이 되면 그 또한 또 하나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이기에 자연스럽게 장사가 되는 것이다. 장사의 기본은 물물교환이다. 지금은 돈과 물건을 바꾼다. 하지만 어쨌든 장사의 기분은 물물교환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그 목숨으로 또 다른 그리스도를 사신 것이다. 그것이 장사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창조의 목적, 인간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신 육신의 삶을 드려서 다시 사람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다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본성 안에 그런 장사, 곧 생명의 분화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을 장사하기 위해서는 감추지 않아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 곧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정체성을 감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처음 감춘 사람이 있는데 바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자신을 찾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으심에도 숨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 이유를 말했는데 그 아담의 말과 한 달란트 받은 이의 변명은 너무나 같다.


“내가 벗었음으로 부끄러워 숨었나이다.” 하는 것과 “주인은 심지 않은 것에서 거두시므로 달란트를 감추었나이다.”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달란트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인의 능력은 심지 않은 것에서 거두고, 헤집고 찾지 않아도 모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주인이 준 달란트는 감추어야 하고, 주인의 신비한 능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한 달란트 받은 이의 논리는 유대인들의 논리와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나사렛에서 어떻게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 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살아가는 나사렛의 거주민과 같이 살아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행위라는 것 속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감추었다.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이가 땅에 묻어 감추었던 것과 같이.


주인이 종에게 준 달란트는 종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이 하나님께 받은 이 육신도 사람이 스스로 가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육신이 인생 스스로 가진 것이 아니기에 이 육신을 주신 목적과 이 육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더더욱 인간이 가진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다 종으로서 받을 수 없는 달란트를 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주인이 종에게 준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 그 자체인 것이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삶을 통하여 자신과 동일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달란트를 가지고 시장에 가서 장사할 때 자기 가진 것을 난전에 내어 보이듯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삶을 감추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육신을 가진 삶이라는 것이 감추고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것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그것을 받은 자로서 그 목적을 또 전하고 낳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처사는 보편적 개념으로 보면 소심하고, 또 어리석은 행동일 수는 있지만 솔직히 악한 행동은 아니다. 횡령을 한 것도 아니고 이자를 얻지 못한 것을 손해로 보지 않는다면 손해를 입힌 것도 아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의 행동을 <게으르고 악한 것>이라고 했다. 왜 그것이 악한가? 그것은 먼저 주인이 준 것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그랬다. 하나님이 주신 육신이 드러나니 부끄럽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처사가, 또 창조가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악한 것이다.


또한 그는 스스로 주인을 판단했다는 것이다. 마치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스스로 판단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같은 메시아를 보내실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치 심지 않은 것을 거두듯 인생 그 이상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분이라는 것은 기적을 행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것(심은 것) 그 이상의 능력으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평범한 육신과 신분을 가져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 죽어버리는 예수님이 메시아일리 없고, 그런 메시아를 보낼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한 달란트 받은 종 역시 유대인과 같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가 악한 종이라는 것이다.



달란트 비유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재능을 주셨다는 한정적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마무리 하고, 가장 중요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앞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삶과 육신의 존재 목적을 설명하시는 십자가를 앞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이 종에게 주었다는 이 달란트는 한낱 재능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셨는데 어떤 이는 자신에게 주신 것을 다 보이고 자신에게 주신 이 육신의 삶을 장사하듯이 투자하여 다시 주인이 주신 것을 얻었고, 어떤 이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삶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육신을 십자가에 버리심으로 다시 그리스도의 생명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깨달은 사람은 얻은 것, 그것이 바로 장사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의 삶, 그리고 이 육신은 다시 주인이 준 달란트를 얻기 위하여 투자할 밑천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육신이 부끄럽고 감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습 그대로를 보이고, 또 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도구로 투자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을 다시 얻는 것에 사용하라고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인생을 주시고, 이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얻는 것에 사용하고 또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라는 천하보다 귀한 목적 안에서 주신 것, 그것이 바로 달란트인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