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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비유를 마치시고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쳤더니 사람들이 놀라기는 하나 그 말씀의 지혜가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런 것을 물었다는 것에 대하여 선지자가 자기 집과 고향 외는 존경을 받지 못하는 곳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선지자가 고향이나 자기 집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두고 흔히들 목사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가족들 앞에서 목사라는 것을 잘 인정받지 못할 경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라고, 또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일면 맞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 말씀이 단순히 목사라는 신분이 자신의 출신 고향이나 가족들 앞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좀 부족하기 때문이다. 목사라는 직분이 사도나 제자에 비할 것이 못되기도 하지만(특히 현 시대에서는 더더욱)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지자는 천국의 제자, 곧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모든 이들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부모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해서 아브람이 떠났지만 정작 그 아버지인 데라는 함께 갔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떠난 것은 무엇일까? 그것과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고향이나 자기 집과는 같은 개념이다. 즉 이것은 육신으로 가족을 말하거나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보는 가치관을 말하는 것이다. 고향과 집은 하나님의 의를 받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형식인 육신을 받은 곳이다.


고향 사람이나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은 그 일원 중의 한명에 대해서 볼 때 언제나 보아온 고정적인 겉모습을 기준으로 본다. 그런 것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것인데, 바로 그 보편적인 안목으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선지자든 아니든 다 자신이 보는 그 보편적 안목을 벗어나기 힘들다. 지금 예수님을 보는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늘 함께하던 사람의 일원으로 보기 때문에 그 형제와 자매가 자기들과 같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안목은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신 지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자라고, 예수님의 육신이 자라온 과정을 보았다는 것이 더 중요한 사항이라는 것이다. 자신들과 함께 있던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듣기에 놀라운 지혜의 말씀을 하면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도 그런 지혜의 말씀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들은 오히려 놀라운 지혜를 들었지만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자신들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놀라기는 하나 지혜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과정도 비슷하다. 예수님께서 지신을 하나님의 아들이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시는 것을 들으면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서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의 겉모습이 초라하다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죄로 여긴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향 사람들도 자신들과 함께 있던 사람이 놀라운 지혜를 내는 것은 이상하고 격이 맞지 않는다고 배척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이와 비슷하다. 예수님의 고향은 육신으로 갈릴리 지방이나 나사렛이겠지만 영적인 고향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고향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듣고 놀랍기는 하나 예수님의 육신을 보니 그 말씀과 상관이 없고 오히려 그 육신의 모양을 가지고 하나님을 논한다고 배척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지금도 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고향은 교회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초라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 교회의 대표로 내세울 수 있는 그런 신분이나 재력이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우선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교회를 소개할 때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교인들 중에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거론하는 것이 바로 그런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있는 사람들에게 육신의 모양이 초라하고, 또 그 성장과정이나 사회적 역량을 잘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면, '저런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나오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저 꼴로 무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난리냐?'라는 반응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배척을 받으신 것과 같은 모양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교회에 목사라는 절대 권력을 낳는데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 목사를 청빙함에 있어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는 행여 초라할지라도 그 말씀과 신앙고백을 듣고서 그 신앙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자 청빙한 것이 아니라, 목사가 되는 과정에서 어디서 공부를 했고, 또 사회적으로 어떤 유명세를 가지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고, 그 일차적 기준을 서류 심사로 한 다음에 몇 편의 설교만 듣고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내세울만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고향 사람들이나 또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볼 때 도저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또 세리와 창녀들과 밥을 같이 먹는 사람으로 오시고 사신 것은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런 사람 아니 사람이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알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이다. 이 예수님께서 오신 뜻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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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51-52 옛것과 새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6. 7. 22:54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대한 비유의 마지막에는 천국의 서기관은 옛것과 새것을 내어주는 집주인과 같다는 말씀을 하신다. 문맥상으로 보면 뭔가 좀 갑자기 나온 말씀인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를 알아들었는지를 확인하시고 그렇다고 하는 것을 듣고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써서 천국은 옛것과 새것을 내어 주인 집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는 분명한 연관이 있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는 이렇다.

  • 씨 뿌리는 비유
  • 가라지 비유
  • 겨자씨 비유
  • 누룩 비유
  • 밭에 감춰진 보화 비유
  • 진주 장사 비유
  • 그물에 잡힌 물고기 비유
  • 천국 서기관의 비유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은 영어성경에서는 teacher로 나오기도 한다. 즉 천국의 의를 알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서기관이라는 것도 말씀을 옮겨서 적는 사람이라는 것에서 보면 의미가 비슷한 것이라 생각된다. 어쨌거나 천국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천국의 의가 자신의 스승과 같아서 그것을 자신이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천국, 곧 하나님 나라의 의를 전하는 사람은 집 주인이 자기 곳간에서 옛것이나 새것이나 맘대로 내어주는 사람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참 묘한 말씀이다. 외식이라는 관점에서나 율법적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것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에 대하여 항상 '그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앙의 질문들도 해답이 아닌 정답을 요구하는 질문들을 많이 한다.


생각해보면 주인이 자기 곳간에 있는 것을 맘대로 내어주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옛것이든 새것이든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천국의 비밀을 전하는 사람도 집주인이 자기의 것을 옛것, 새것 구분 없이 내어줌과 같이 틀에 메이지 않고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으로만 본다면 구약은 성경책에서 구약전서라고 나누어져 있다고 구약이라는 틀에 가두고, 신약은 또 같은 관점에서 신약이라는 틀에 가두면 옛것과 새것을 구분하여 맘대로 나누어주지 못하는 주인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옛것이든 새것이든 주인이 자신의 곳간의 것을 내어 준다는 것은 그렇게 모은 이유가 어떤 것을 위하여 내어주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곡식이라면 그것은 햅쌀이든 묵은쌀이든 다 목적이 먹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즉 주인이 먹기 위하여 모아둔 곳간의 쌀을 먹는 일을 위하여 어느 것을 내어주든 상관이 없고, 그야말로 주인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대로라는 것은 법이나 룰도 없이 무조건 자기 맘대로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곳간 내용물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천국이라는 곳도 그와 같다, 천국이란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있고, 또 나라의 의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가 된 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러니까 천국을 위하여 사람과 세상을 만드시고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의로 다스려지는 나라를 계획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천국이나 하나님의 의, 그리고 인생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께서 주신 존재의 목적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시는 모든 것은 집 주인이 자기 곳간에 있는 것을 마음대로 내어주듯이 이 세상의 것도 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모든 것을 말씀하시듯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모양이니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는 생명이 그 안에 있어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천국의 제자, 곧 천국의 의가 자신의 의가 된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것은 결국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으면 어떤 모습으로 그 의가 나타나는지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이 그 안에 있어 본성이 나타나듯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의 의가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의 삶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정말로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성경말씀을 보면서 이렇게 행동해야 천국에 간다고 하지 않기를 늘 바란다. 천국에 가는 사람,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삶이 예수님의 비유와 같은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이 천국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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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노라면 필수적으로 누가 천국의 선택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고, 반대로 누가 심판을 받아 들어가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생이 가진 가장 큰 문제인 불확실성과 맞물려서 다양한 형태를 낳는다. 그러니까 어떤 이들은 이런 불확실성이 믿음을 낳고, 어떤 이는 포기하는 방종의 모습을 보이고, 더 나쁘기는 이런 현상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종교성을 띈 집단이나 사람들도 있다. 종말론이 바로 그런 부류이다.


천국에 누가 들어갈 것인지는 사실 분명하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므로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께서 옳다고 여기는 것을 자신도 옳다고 여기고,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여기는 것을 또한 자신도 악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들어가고 속한 나라이다. 한국은 민주주의와 자유경제를 의로 삼고 있고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속한 나라이듯이 말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반대인 사람, 곧 하나님께서 옳다고 여기는 것과는 다른 것을 옳다고 여기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악함과 다른 것을 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쟁점은 오직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논제이다. 동물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모른다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동물이 내세나 다음을 위하여 자신의 본능을 제어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보면 이 천국이라는 것에 대하여는 오직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이 같은 것을 의롭게 또한 옳다 혹은 악하다고 하는지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관점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사람이 사람의 모습과 행동과 삶에 대하여 무엇을 선하게 여기고 무엇을 악하게 여기는지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과 같은가 다른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즉 사람이 사람을 보고 선하고 악하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과 기준이 하나님과 같은지 아닌지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의가 되었는지를 구분하는 것이고, 이 땅에서 그런 의를 가지고 살던 사람이어야 죽어서 하나님의 의로움 안으로 들어가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마치 그물에 가득한 물고기 중에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그렇지 않은 것을 버린다고 하셨는데, 무엇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기준이 분명히 그 어부에게는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볼 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지를 분명하게 하는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 합당하면 천국에 그렇지 않으면 버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천국은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것을 언급하는가 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는 다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것이 설사 교회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천국은 사람이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를 가지고 계신 나라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에 뜻에 대하여 사람과 하나님이 다르게 생각하는 것에 기인한 것이다. 아담도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에 반해 하나님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생각하신 차이에서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을 믿는 것이 행위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또 지금에 이르러서는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여 교회를 크게 짓고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고 하시는 것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하나님과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사람에게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이 무엇이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게 사람에게 보이시고자 하신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이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시고,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기를 바라시는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다 사람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의이고, 또한 천국에 가는 기준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그 기준에서 아무리 주여! 주여! 해 봐도 결국 하나님은 그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을 부족하게 여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을 계속 갈고 닦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훌륭하게 할수록 훌륭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을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그가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었는가 물을 때에 하나님을 믿어서 그렇다고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가 하는 기준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치명적이 문제가 있다. 사람의 원래 모습을 부인하고 그것에서 멀리 갈수록 더 훌륭한 사람이고 하나님 나라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자신의 모습, 곧 사람 본래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긴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고, 또 사람을 단련시킬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날 평지에 모인 사람들이 흙(사람을 흙으로 만들었다.)을 단단하게 해서 하늘에 이르려고 한 생각과 같은 것이며, 죄라는 것이 자기 자리를 떠난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땅에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아담은 벗은 몸이 부끄러워 가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벌거벗겨져서 달리셨고, 바벨탑은 쌓은 사람들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하늘에 닿으려 했지만 예수님은 손과 발에 못 박히셔서 사람의 행위로 하늘에 오르거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시면서 그 부끄럽고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그 모습이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그 모습, 곧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아 죄가 아닌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두 가지 사람에 대한 생각 중에서 어느 것이 하나님의 생각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생각하시는 생각과 같은 선택일 때 그 사람이 바로 진주장수가 바꾼 진주이고, 밭에 감춰진 보화이며, 그 생각이 바로 큰 나무가 되는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그물에서 그릇에 담기는 고기와 같은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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