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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리고 누구나 남을 부리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랍비 곧 선생이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형제이고 선생은 유일한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하시면서.


그리스도라는 것은 하나의 정체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온전히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렇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라도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삶을 산다면 그 또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안에서 선뜻 수용하기에 민감한 부분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고? 그럼 이단이지?’라며.


하지만 사람이 그리스도가 될 것이 아니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실 이유가 없다. 물론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모든 사람의 표상이고 기준이다. 그래서 영어로 표시할 때는 the Christ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모든 인생은 또한 그리스도(a christ)이다.


이것은 신앙적 타락이나 변질이 아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신격화와 같은 이단 논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온전한 복음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요 제사장과 같은 삶이되기를 바라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사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은 하나님의 그 뜻(LOGOS)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이다. 즉 육신을 가진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창조 목적을 육신으로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몸소 오셔서 그것을 보이신 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이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이단 논리가 아니라 진정한 복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유일한 지도자인 것이다. 지도자란 따르는 사람에게 바른 것을 제시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하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이기 때문에 그것을 좇는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에게 하나 밖에 없는 지도자인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고, 자기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고 따라가야 할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 지도자이신 그리스도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도자와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진 분이신 것을 예수님께서 전하셨고 또 보이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지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도자', '선생', 그러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가진 선생이나 지도자가 되지 말고, 오직 너희 삶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지도록 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정말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도자의 정체성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지도자나 선생은 결국은 대접을 받고 가르친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의 앞에 있다는 것에 조금만 심취하면 따라오지 못하거나 알아듣지 못한다 싶을 때 훈계나 질책하기도 한다. 만약 그리스도의 정체성도 그렇고 예수님도 그런 지도자였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눈만 뜨면 예수님께 혼났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순간까지, 아니 부활하셔서 변화된 몸을 보이셨음에도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온전히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책망보다는 몸소 보이심으로 제자들의 마음 안에서 그들이 본 예수님의 모습과 들은 말씀이 땅에 심긴 씨앗이 싹이 나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깨달아지도록 기다리고 몸소 보이시는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의 바로 그런 모습이 남을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고자 한다면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바라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다면 모든 사람이 지향해야 하는 모습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가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람을 섬기는 존재이고, 또 반면에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이 섬기고 따라야 할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모든 사람의 지도자이고, 그리스도의 성품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예수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모른다고) 사형을 당하셨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의 단면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예를 들어 목사와 성경에 대하여 논쟁하다 목사로부터 모르겠다는 말을 들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 것 같은가? 정말로 목사가 성경에 대하여 다 알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건 목사는 성경을 잘 아는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이라는 것이 무너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회칠한 무덤 같은 논리이다. 말은 그럴 듯하지만 무덤과 같이 죽고 의미 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사라는 신분은 성경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 취급 받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그 성경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가장 잘 알면서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라는 것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나 모순인가?


그것은 비단 목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누구라도 하나님에 대하여 아노라 하면 하나님을 모른다는 심판으로 죽어 나가는 모습을 수용할 마음으로 사람을 섬기지 않는다면 다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단 받는 랍비와 예수님께서 듣지 말라고 하는 선생이라는 칭함을 받는 사람일 뿐 그리스도의 제자나, 성경을 가르치는 온전한 선생의 모습은 전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발을 씻어 주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 나를 맡기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횡단보도에서 내려서 있는 할머니가 있었다. 유모차처럼 생긴 보행 보조기를 손에 잡고 힘들게 서 있었다. 그런데 횡단보도 밑에 내려서 계셨기 때문에 차가 지나갈 때 불편했다. 그때 어떤 차는 조심스럽게 속도를 죽이고 맞은편에 차가 오는지 살피면서 피해갔다. 그런데 어떤 차는 큰소리로 경적을 오래 울리면서 빠르게 할머니 앞을 지나갔다. 왜 그런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이 자기가 편하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수용하는 것의 차이다. 조심스레 지나간 차는 남을 섬기는 것이다. 반면에 경적을 울린 차는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칭함을 받지 말라는 선생의 모습이 그것이다.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해보면 별게 아니다. 다만 자존심 상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지 못하는 분함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게 산을 옮기고 바다를 가르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인데 다만 내가 생각할 때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딱 그것 하나로 인해서 그러고 싶지 않고, 그러면 안 되고, 그러면 내가 불편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선악과다. 내가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화평과 안식이 없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옳고 그런 것 중에 가장 큰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이들이 예수님께 주장하고 결박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순종하신 분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즉 선악과를 먹고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생이란 예수님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므로 예수님을 죽은 자 중에서 살리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육신 가진 예수님께서 보이신 섬기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육신을 주신 것은 바로 그런 것에 쓰라고 주신 것이다.


더 알고, 더 밝은 것은 무식하고 어두운 자들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같이 내어주고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의미 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한 것 외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내 보이는 것이 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섬기는 그리스도, 그 정체성은 더 알기에 죄인이 되고 모르는 이들을 섬기는 것, 그것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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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대화를 하시면서 “내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느니라.(요 8:58)” 하심으로 유대인들을 놀라게 하신 말씀이 있는데, 지금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주가 됨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육신의 족보로 보면 다윗은 말할 것도 없고 아브라함이 예수님보다 훨씬 앞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아닌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것을 인정해도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사시는 시대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보이지도 않는 가마득한 옛날 사람인데 아브라함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라고 하시고 또 모든 유대인들이 왕 중의 왕으로 인정하는 다윗인데 그 다윗에게 예수님께서 주가 되신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건 상식적으로 보면 당연히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이렇게 말이 되지 않는 것을 그저 ‘예수님이니까…’라며 믿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그건 믿음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는데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와 상관이 있는 것이라서 하신 말씀이니 더더욱 그렇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보다 다윗보다 먼저 되고 주가 되시는 것은 육신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가지신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은 아브라함 아니 아담보다 먼저 있었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인생의 본질이기에 다윗 아니라 어떤 위대한 자도 다 그 정체성에 따라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집을 지을 때 완성된 집 보다 집에 대한 설계도나 아니면 집 주인이 생각하는 집의 모양이 먼저인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에 대한 계획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말한다. 즉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해낼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 그 정체성이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보다 그리스도가 먼저인 것이고 그리스도가 주가 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도 그것 때문이다. 사람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예수님 안에 가지고 오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신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육신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실 때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그대로 있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그저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아들 삼으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한 것이 나의 것이 된다는 것, 나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여기시는 성품을 가진 자로 살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지신 정체성이고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 하나님의 의와 뜻은 세상이 만들어질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이유이므로 모든 인생보다 당연히 먼저 있는 것이고, 모든 인생의 주인과 같은 하나님의 의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본체이시니 당연히 아브라함보다 먼저고 다윗의 주인이시며 또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에게 영원한 표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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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34-40 가장 큰 계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7. 27. 14:10 Writer : 김홍덕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서 모여서는 예수님께 자신들도 다소 엉뚱한 질문을 예수님께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느 계명이 큰가?”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질문은 질문 자체로서 아주 멍청한 것이다. 왜냐하면 계명에 크기와 중요도가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계명에 크기와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들이 계명을 지켜보면 지키기 어렵다는 것이 있고, 또 지키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결과가 큰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명이라는 앞의 여러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모양과 내용이 행동 규범 같아서 그것을 몸으로 지켜내면 계명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그렇게 지키려 했고 그런 그들의 생각을 예수님께서는 늘 경계하셨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다는 것은 계명의 본질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명은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이 있으면 삶으로 나타나는 삶의 행동의 모양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이 계명이지 계명을 지킨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계명에 크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신념을 가지고 계명을 지켜보려 하면 어려운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생명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크기가 다르게 여겨지지 않는다. 생명체가 보여주는 행동은 그 생명의 DNA가 있고 살아 있으면 어느 것이 중요하고 어느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한대로 그대로 다 표현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신명기 6:5절의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이 두 말씀이 모든 율법의 전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계명만 있다면 계명의 모든 것이 다 지켜진다는 말씀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생명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어쩌면 이렇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라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더욱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한다고 하면 내 존재의 모든 의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그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의미가 있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존재의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고, 내가 존재하는 목적과 의미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이 이루어진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하나님께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과 자신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그 사람이 인정하고 순종하고 알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살아 있다고 보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계명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정립되면 모든 계명은 자신을 통하여 표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하시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것의 뿌리요 근원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바라시는 모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다. 천하의 어떤 하나님의 계명도 다 이것에 종속된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쟁으로 치면 전쟁을 이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계명을 지키는 것은 전투를 이기는 것이고. 그러니까 전투를 아무리 이겨봤자 전쟁에 지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천하의 모든 계명을 다 지켜도 하나님과 사람의 기본적인 관계,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 가진 삶을 통하여 그 성품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사람이 수용하는 관계가 잘못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고, 또 어려서부터 율법의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쳐도(육신을 가지고 그럴 수는 없지만 그렇다 쳐도)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았다면 서로에게 충성을 다하고 지역 주민에게 최선을 다하여 수고하는 자수하지 않은 간첩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지켜야할 가장 큰 계명은 계명을 지키는 수고와 노력에 따라 크고 작은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것,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서로에게 의미를 가지는 관계를 정립하는 것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계명은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단순히 밥 퍼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밥 퍼주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계명을 논하는 것에 있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다음에 그것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 사람에게 알게 하는 것,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육신의 가난함과 같은 것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생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자신의 몸을 사랑하듯이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을 전하므로 그 사람이 인생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깨닫게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의미가 있어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할 때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오고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니 백부장이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 사건에서 그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뜻과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수고롭게 바치는 것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이미지(형상)가 표현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모든 율법의 뿌리요 DNA요 생명인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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