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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성전에 가서 보니 성전에 많은 매매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것은 제사를 드리려면 제사 드리는 사람이 직접 흠 없고 점 없는 소나 양과 같은 제물을 가지고 와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당시에는 성전에서 직접 제물을 구매할 수 있었는데 특히 비둘기와 같은 작은 제물이 그랬다.


그것은 당시로는 거의 관습으로 고착되었거나 고착화 되는 과정에 있는 일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성전을 강도의 굴로 만드는 것이라고 책망하시고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엎으셨다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을 보는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가뜩이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환영 받은 것도 못마땅한데 그들 눈으로 볼 때 성전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 같은 예수님 때문에 잔뜩 화가 났고, 이에 예수님께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다윗의 자손'이라며 환호하는 소리를 가지고 시비를 걸었다.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시편 8편 2절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답하셨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시 8:2)

이 예수님의 말씀은 다윗의 자손이여 라며 환호한 사람들의 말이 결국 그대로 될 것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정말로 다윗과 같이 왕이 되실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또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침과 같이 왕이 되시고 또 대제사장이 되셨다. 바로 그런 예수님께서 지금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의 상을 엎고 크게 책망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것이 선하심으로 믿는 이들의 눈에서 책망이지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건 거의 난동이나 마찬가지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단순히 행동으로만 사람을 보는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님은 전혀 왕과는 무관한 행동을 하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바로 왕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제사 제물을 파는 상을 엎으시는 것은 사람들이 제사를 의무적인 형식으로 여기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도 하나의 행동 양식과 유대인으로서의 의무적인 예식(형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당연히 행동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리고 그런 기준을 가지고 있는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볼 때 사람들 장사하는 상을 엎어 버리는 예수님의 행동이 어떻게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모습이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자신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이 온전한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행동은 온전한 것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성전에서 짐승을 사고파는 것 때문이 아니다. 단순하게 성전을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장소가 아니라 개인의 이익을 얻는 장소로 삼는 것 자체가 문제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제사를 형식으로 여기는 마음이 문제다. 사람들이 제사를 형식으로 여긴다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행위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용납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이는 것, 형식적인 것, 또한 (선한) 행동이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공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본질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이 육신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게 하려 오신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제사와 또 삶의 목적과 의미의 본질이시다. 제사의 여러 규례가 왜 그런지, 왜 제사를 드리고 그리고 성전이 왜 있는지, 성전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의 본질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신 것도 그것이다. 또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사람의 본질인 존재의 목적 곧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 기도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 바로 기도인 것이다.


또한 성전은 모든 사람의 예표이다.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겠다고 하신 것은 벽돌로 지은 건물에 하나님이 계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구하는 기도를 하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겠다는 것이고, 예수님의 육신이 성전에 비유되었듯 모든 사람이 다 벽돌로 지은 성전과 같이 하나님이 거하시기 원하시는 그릇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할 형체를 가진 존재이듯 성전도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형체를 가진 건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육신 안에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시듯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시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 그것인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의 본질인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삶의 목적이자 내용이자 생명인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제사이고 살아 있는 제사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이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이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로 성전의 본체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짓고 또 그 안에서 제사를 지내라고 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성전과 같이 그 심령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목적이 있어 그것으로 살라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최종적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은 그런 하나님의 의와 뜻은 전부 어디로 가고 형식만 남은 것이다. 제사의 본질인 예수님이 왔는데도 형식을 주장하고 있고,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표현되는 삶의 모양과 행동양식을 내용은 없이, 예수님은 알지 못하면서, 또한 인생에게 주신 하나님의 의와 본질을 구하는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 그저 선한 행동을 구하고 형식으로 제사를 지내기만 하면 된다고 여기기에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성전에서 팔고 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 아니라 모든 만물이 고대하는 분이시다. 그것은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사람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말씀(LOGOS : 뜻)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즉 세상의 모든 만물과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뜻이 자기 존재의 목적이 되는 것을 바란다는 것이다.


성전도 그렇다. 성전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제사를 원하셨는지를 예표하고 제사를 드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즉 성전이 있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먼저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뜻이 먼저 있기에 성전을 지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뜻은 저버리고 형식만 지키려고 하다 보니 성전에 가서 돈을 주고 제물을 사서라도 제사를 드리려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진노하신 이유인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은 사람의 몸과 삶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서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하는 삶이다. 그 뜻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고, 사람은 그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가 되는 것이 제사이고 우리 몸이 성전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의와 뜻을 몸소 보이신 하나님의 본체이자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제사가 오늘날의 예배다. 굳이 제사와 예배의 연관성을 따지지 않더라도 오늘날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는 것은 이 예배 또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또한 어떻게 드리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뜻을 오늘 깨닫는 것이 바로 예배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배는 순서나 격식이나 옷을 어떻게 입느냐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또 몇 시 예배를 드려야 주일을 성수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바보들의 이야기다. 수백억짜리 교회에서 대단하고 화려한 격식의 예배를 드렸다고 주일을 성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교회를 화려하게 건축하고 형식이 혹시 누락되거나 틀리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책임자를 찾고 하는 지금의 모든 형태가 바로 성전에서 짐승을 사고파는 마음과 같은 것이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예배의 본질이고 또한 성전의 본체였듯 오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이 자신의 육신이 되었을 때 비로소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배는 드리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 삶이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시듯 하나님의 뜻이 자기 안에 거함으로 그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는 삶을 사는 것이 예배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없다면 매일 새벽 예배를 평생 드리듯, 주일날 예배는 순서대로 다 드린다 해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일 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소하시듯 장사꾼들을 내치신 것은 성전에서 부정한 짓을 하지 말라거나, 교회에서 장사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정하신 목적이자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이 사람 안에 없으면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안에 있음으로 표현되는 모든 율법의 모양과 제사와 규례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아는 것이 이 말씀의 본질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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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신 최종 목표는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호하면서 맞이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몇 일가지 않아서 오히려 예수님을 강도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마음이 된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호하며 맞이한 것은 제자들의 마음과 그들의 마음이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당시 로마의 속국이었던 이스라엘을 예수님께서 그때까지 보여주신 능력을 가지고 해방시켜 주리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그것을 위하여 보내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 자리 하고 싶었고, 사람들은 병을 고치고 바다 위를 걷는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로마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정치적으로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셨다. 만약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해방자로서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는 것이 아니라 웅장한 마차를 타거나 아니면 정말로 하늘의 천군천사와 함께 입성을 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초라하게도 멍에 매는 짐승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시는 것이다. 그것도 새끼를 타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모습은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들을 섬기러 오셨다고 하신 말씀의 표현이다. 예수님의 정체성,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남에게 대접받고 가르치는 높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멍에 메고서 남을 섬기는 짐승인 나귀를 타신 것이다.(타는 것은 타는 사람의 신분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왕이라면 당연히 황금마차를 탈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전에 예수님을 보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하더니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하는 것도 같은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선함이라는 것은 제사장과 같이 거룩한 옷을 입고, 바리새인들과 같이 금식하고 길에서 서서 기도하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그래서 가난하고 죄인들이 사는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했었다. 그 가치관이 바뀌지 않았기에 예수님을 거저 선지자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관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신앙이 좋고 거룩하다는 것은 단정하게 예배에 참석하고, 선한 말을 하고, 또 세상에서 가능하다면 유력하면 더 좋은 사람이 선하고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단정하게 입는 것과 선한 말을 하는 것과, 세상에서 유력하다는 것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속이 거룩한 생명이어서 그 생명으로 인하여 그러한 것이 표현된 것인지, 아니면 속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행동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해서 신념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선하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생명을 보지 않고,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보통의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거룩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은 사람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선하고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들도 자기 안에 거룩한 것을 표현할 생명이 있어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이 선한 것이고, 그런 행동을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렇게 속에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여기실 생명이 없는데 모양만 거룩한 모양을 하는 것을 외식이라고 하셨고, 또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본질을 보지 못하는 안목을 가지고 있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마음이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하는 마음이나,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것인지 근심하는 마음이나,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마음이나 다 같은 가치관인 것이다. 한마디로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에 예수님을 끼워 맞추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대단히 오해하고 있다. 예수님의 거룩함이 교회의 조명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나, 시험 쳐서 얻은 자격이 없는 사람은 강대상에 올라가지 못한다는 식으로 지키는 거룩함이 예수님의 거룩함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거룩함은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지킨다고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를 화려하게 건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마음속의 기대와 안목과 뿌리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거룩함은 나귀를 타시는 것에 있다. 나귀는 가난한 사람들의 가축이고 멍에를 메는 천한 짐승이다. 제사에도 쓰이지 않는다. 그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환호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마치 예수님은 화장실도 가시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 지금 사람들의 예수님의 거룩함이나 다 예수님의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단언컨대 그것을 안다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면서까지 교회를 화려하게 짓지 않을 것이다.)


멍에를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사람들이 스스로 선함과 악함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듯이 또 자기 맘대로 예수님을 또한 하나님을 정의 내리고 믿는 그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신 분이시다. 죄인이라서 죄인이 아니라 나귀가 멍에를 메듯 사람들이 가진 그 선악의 가치관을 가진 죄, 또 자기 가치관 안에 형상화(우상화)하는 그 죄로 인하여 죄인이 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 앞에서 죄악 된 가치관을 멍에를 메시듯 그 가치관이 처형하는 것에 죄인으로 끌려가신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나귀를 타신 예수님이 왕이 될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니 죽여야겠다고 생각하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힘없이 잡혀가니 강도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 모든 생각의 뿌리는 선한 행동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선은 로마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노라 하면서 자기 자신을 늘 속이려 한다. 마음에는 분이 일어나는데 교회 다니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니까 참으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기지 못하니까 기도한다.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 만드실 그 때에 이미 사람은 화를 내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기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얼마간은 가능하지만 평생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다 아는 것이다.


다만 사람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외국 사람이 한국공항에 내리면 마늘 냄새가 난다고 한다. 만약 마늘 냄새를 이기고 싶다고 이런 저런 노력을 아무리 해 본들 소용이 없다. 단 한 가지 방법은 자신도 마늘을 먹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것처럼 사람이 원래 화가 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면 화를 내는 것일 이길 수 있게 된다.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 감추려고 애를 썼지만 그의 후손인 오늘날의 모든 사람은 다 옷을 입고 있다. 즉 가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있을 때는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부부사이나 가족과 같이 벗은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관계는 서로 벗고 있어도 벗었다는 것을 책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늘을 먹은 것과 같은 것이고, 사람이 원래 화를 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것은 사람들이 가진 멍에를 메시기 위함이다. 사람들이 가진 멍에는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하여 규정하고, 하나님을 맘대로 정의내리는 그것이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힘들다. 그 생각이 육신인 자신의 인생이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어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그 멍에를 나귀와 같이 메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니, 그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더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세상이 가진 가치관,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가치관으로 보면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일 뿐 아니라, 매일 매일을 그 죄에서 책잡히지 않으려 애쓰면 사는 멍에를 매고 있는 인생이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시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존재가 원래 그렇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스스로 끌려가시듯이 인정하는 사람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인 온전한 사람이고, 그것이 산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생명을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것이다. 그것이 부활인 것이고, 영생이고 생명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을 감추고 참아야 거룩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벌거벗은 것을 선악과를 먹은 눈으로 볼 때 부끄럽게 여길 때는 에덴에서 쫓겨났지만 벌거벗은 모습이 자기 모습인줄로 알고 살 때는 에덴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화를 내는 것과 같은 인간의 본성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것을 억제하려 살면 에덴 곧 만족이 없지만, 인생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으며, 또 다른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용서할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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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29-34 맹인을 고치시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7. 4. 12:25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들어가시고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맹인 둘을 만나게 되는데 이 맹인들이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소!!"라며 소리치자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민망히 여겨 그들을 고쳐 주셨다. 이 사건은 어쩌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일주일을 보내시기 전 마지막으로 병을 고치신 사건인지 모른다.


그런데 이 사건 앞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가 큰지를 다투었고, 그 이전에는 부자 청년이 와서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지를 물었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을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마 20:26-28)

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데 맹인이 나타나서 그들을 고치셨다는 것이다. 이 맹인은 예수님께서 '나의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물으셨을 때에 마실 수 있다고 호언한 제자들의 모습과도 같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호기 좋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신 것이 세상에 만물이 있으나 보지 못하는 맹인과 같이,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심이 맹인을 고치시듯 누가 큰지를 따지는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앞에 두고 '무슨 선한 일(Do)을 하여야 구원을 얻을까?' 고민하는 부자 청년과 같이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 예수 믿어 복을 받기 원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생각하고, 교회를 화려하게 지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소유와 공로의 신앙이 눈을 가려 믿노라 하는 예수님의 본 정체를 알지 못하는 오늘날 신앙인들을 고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는 것을 보이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을 자신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는 맹인과 같이 소유와 공로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가치관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뜻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맹인처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섬기고 또 섬기려고 자기 목숨을 내어 주려 함이라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이다. 


세상 사물을 육신의 눈으로 본다고 맹인이 아닌 것이 아니다. 우리가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면 컴맹이라 하고 글을 모르면 문맹이라고 하듯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맹인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맹인들은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리는 들리지만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과 늘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이때까지도 예수님에 대하여 맹인이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그렇다는 것은 지금 이 시대도 예수님을 믿노라 하며 일요일 아침이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정도로 많은 사람이 교회로 몰려들지만 그들이 정말로 예수님의 본 정체성을 아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교회에 가서 무엇을 바라는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교회에 가서 어떻게 하여야(Do)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지를 고민하고 또 그런 설교를 들었다면 다 맹인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는 누구인가를 알려고 하는 것 그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생각하고 그것이 신앙인줄 알지만 그것은 정말로 맹인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뭔가 행동과 힘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말씀만으로 온 세상을 온 우주를 만드셨는데 그런 행동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다. 또 세상을 만드셨는데 이 세상에서 난 것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은 '왜 내가 너를 만들었는지' 그것을 사람들이 알기 바라시는 것 그것뿐인데 부자 청년처럼 자꾸 뭘 할까 고민하고, 제자들처럼 누가 더 많이 했다는 것을 서로 비교하면서 그것으로 천국에서 상급이 달라질까 고민하듯 예수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신앙이 맹인과 같이 보지 못함이고, 보지 못한다는 것은 빛이 없고 인식도 없는 흑암과 혼돈이 가득한 세계에 속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런 신앙은 하나님의 세계가 아직 창조도 되지 않은 세계이고 신앙이며 신앙세계인 것이다.


예수님은 맹인과 같이 예수님을 곁에 두고도 또 만나서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본(本) 뜻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가진 공로와 소유를 드림이 신앙이라 생각하는 눈꺼풀에 씌어 하나님도 자신의 인생도 알지 못하고 또 보고 있는 예수님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을 섬기러 오신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인 것이다.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것이 더 안다고 가르치고 책망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더 안다는 것은 더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공로가 더 있으니, 계시가 더 밝으니 사람을 심판하고 모른다는 것을 지적하고 또 자신의 공로의 우월감을 내세워 높임을 받으려 하는 것이 높거나 큰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높고 크다는 것은 더 가졌기에 가지지 않은 자를 위하여 수고하고, 더 밝기에 어두운 자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이고 계신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신앙을 가졌다면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또 목사에게 의문을 가지면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며 교회에서 얼마나 비난하는가? 하지만 모르면 의심하고 신앙이 없으니 신앙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모르면 모른다고 비난하고 심지어 마귀라고 하고, 또 계시에 설사 어둡다면 어두워 그러거늘 예수님께서 맹인을 민망히 여기심과 같은 마음은 어디에도 없고, 더 알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교회를 이끌어 가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단언컨대 스스로 생각할 때 높은 사람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십자가는 모르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한 가정에 가장이 운동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사람은 언제나 운동을 해야 한다면서 온 가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주중이나 주말이나 개의치 않고 새벽부터 식구들을 깨워서 운동하자면 매일 끌고 나가려 한다고 해 보자. 그러면 아직 운동의 중요성이 몸에 베이지 않은 가족들은 그것이 싫고 가지 않으려 하지 않겠는가? 그때 가장은 자신이 가장이라는 권위와 또 운동을 해서 가족이 건강하기를 바라는 가장으로서의 마음을 무시한다며 화를 내고 가족들을 압박하고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실제로 이런 모습은 TV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 가장이 정말로 가족을 사랑한다면 가족들이 자신을 보고 운동을 하고 싶어지도록 수고해야 하는 것이다. 가족들이 운동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도록 다른 모든 것을 돕고, 또 때로는 자신이 운동해야할 시간에 가족들이 바라는 것을 해 감으로 인하여 가족들이 그것을 보고 그 마음에 감동을 받아 가장과 함께 운동하러 나서게 되는 것, 그것이 섬기는 것이고, 그것이 높임을 받기 위하여 종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사례에서 가장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 운동의 좋은 점이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뜻인 것이다. 그리고 그 뜻은 왜 사는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맹인이 헤매듯이 살고 있는 모든 인생들이 맹인이 보게 됨과 같이 삶의 목적과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소유와 공로를 드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발가벗겨져서 죄인이 되어 매달리셔서 모든 것을 다 보이신 예수님과 같이 인생이라는 것이 원래 지어진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의가 시작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이어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고, 어떤 공로를 받치느냐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과 같이 부끄럽고 세상의 기준으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온전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온전한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보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노라 해도 맹인과 같이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인생들이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심과 같이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목적을 바로 볼 수 있도록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것이다. 그러했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야 사람들이 하나둘씩 맹인이 보게 되듯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로 보는 것, 그것이 맹인이 눈을 뜨듯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공로와 소유를 드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흑암과 같은 신앙에서 빛이신 예수님을 바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더 이상 높을 수 없는 분이, 그 가치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인생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주신 것이다. 그것이 섬기는 것이다. 더 알기에, 온전하기에 그렇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맹인 같은 자들이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정말로 예수님을 알고 영광을 얻고 싶다면 신앙이 더 좋고 계시가 밝다는 착각에 빠져서 어린 사람들에게 대접 받고 그들을 훈계하고 심판하는 높은 자리에 있을 것이 아니라, 더 알기에 그렇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수고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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