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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이 요나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귀신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내용은 귀신이 사람에게 나갔다가 물 없는 곳을 찾지 못해서 다시 돌아와서 보니 원래 있던 사람의 속이 깨끗하게 소제되어 있어 자신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한 세대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재밌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우선은 귀신이 사람에게 나가서 찾은 것이 물이 없는 메마른 땅을 찾았다는 것이다. 어떤 생물이라도 나그네와 같이 되었고 방황할 때에 가장 먼저 찾아야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인데, 역시 신분이 귀신이라 그런지 물이 없는 곳을 찾으러 다녔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큰 의문은 아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늘 자신을 채우려 한다. 어떤 사람은 돈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를 추구한다. 하지만 모든 인생이 추구하는 것이 있다면 자신의 삶에 대한 존재의 이유와 의미다. 그러니까 삶의 목적과 정체성에 대한 갈증이 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잊거나 일부러 잊으려 하면서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돈이나 명예와 같은 것으로 그것을 채우려 한다. 즉 사람의 존재 목적이 돈이나 명예에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추구 욕구와 물은 관련이 있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듯, 사람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그 갈증에 대하여 채우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이 가진 그 갈증을 해갈하는 것이라고 성경을 통하여 늘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물은 사람의 정체성을 해갈하는 것이다. 다만 물은 상수와 하수도와 같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먹어야 하는 것이 있고, 반면에 먹지 못할 것이 있다. 바다는 물이 넘쳐나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그래서 바다는 늘 세상을 의미한다. 물이라는 것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사람이 가진 정체성의 갈증을 채울 수 있어 보이지만, 세상의 돈과 명예는 마치 바닷물을 마신 것과 같이 해갈되는 것은커녕 더 목마르고 결국은 죽게 만드는 것이다. 또 바다는 세상의 모든 하수들이 함께 모인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다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물이 넘쳐나는 세상에 비유된다.


어쨌든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즉 귀신은 그것이 없는 곳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한 세대 또한 그런 것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악한 세대가 찾는 표적을 보여주어서 금방은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만, 결국은 물을 멀리하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을 꺼리는 귀신같은 마음이 그 안에 가득찰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귀신은 devil이 아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귀신은 unclean sprit이라고 킹제임스 버전에 나온다. 깨끗하다는 것은 상태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깨끗한 행주라고 하는 것이 사용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주로서의 목적에 사용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여기서 말씀하시는 귀신 들린 자는 사람의 존재 목적이 정신을 주관하는 사람이 아니라, 귀신에게 정신을 빼앗기듯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보고 악한 세대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사람과 하나님을 정의 내리는 세대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연약한 육신을 만드시고 그 상태를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너무 좋은 존재라고 여겼지만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이 육신의 연약함이 아니라 표적을 일으키듯 육신의 연약함은 감추고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악하다고 하신 것이다.


바로 그런 상태가 깨끗하지 못한 심령, 곧 귀신 들린 자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외식하는 것과 귀신 들린 것과 깨끗하지 못한 것과, 사람 이상의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며 그것을 구하는 악한 세대나 다 같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오늘날로 본다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의 연약함을 잘 다스리고 감출 수 있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시는 생각도 같은 것이다.


그렇게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는 것이나, 귀신이 물 없는 곳을 찾는 것은 같은 본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물은 사람에게 육신을 가진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이 바로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말씀이 사람이 가진 정체성을 해갈하는 물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귀신은 그런 물을 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물은 악한 세대가 구하는 표적과는 반대의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면 이 귀신 들렸던 사람과 같이 점점 더 심해질 뿐이다. 이는 마치 바닷물을 마신 것과 같아서 더 갈하여지고 더 목말라서 마시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더 악화되듯 한다는 것을 일곱 귀신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악한 세대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서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것을 두고 성령의 일로 보지 않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일로 보았던 가치관을 가진 세대가 아닌가? 그 세대가 바라는 것은 사람이 가진 연약함을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가 부끄러워 몸을 가렸던 아담과 같이 감추고 그것을 이기고 극복한 표적을 구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세대인 것이다.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성령을 훼방하는 세대이고, 그런 세대는 우선 기적을 본다 해도 바닷물을 마신 것과 같이 더 그런 것만 요구할 뿐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것 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을 회복시키는 역사로 인한 성령의 감동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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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2:38-46 요나의 표적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25. 14:17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언제나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에 열광한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할 수 없는 일을 기대하고 무엇을 만드는 사람이 없듯이 하나님도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이라는 존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정하고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죄라는 것이 있다. 죄가 자기 자리를 떠난 것이라는 의미라는 것을 보면, 사람이 정해진 것은 하지 않고, 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좋은 신앙이라 하고,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하는 것, 그것이 죄다.


악한 세대가 구하는 표적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악하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 이상의 것을 할 때 선하고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가치관을 가진 세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으로만 보면 사람은 이 육신을 가지고 율법의 주신 목적을 아는 것이 아니라, 율법 자체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한데, 그것을 지키면 선하고 지키지 못하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진 세대가 바로 악한 세대라는 것이다.


사람이 만족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대하여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표적을 구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안식하지 못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표적을 구한다. 즉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 사람으로서 자신의 한계와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 이상의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의 모습을 부인하고 그 이상을 구하는 세대가 악한 세대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기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부인하고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는 것 앞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것 외에는 사람에게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사람이 기대해야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에 기대해야할 표적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에 따라서 무엇이 기적인지가 좀 다를 것이다.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기적이 아닐 것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신 것은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변화는 죽은 자를 살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 그대로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믿고 그렇게 살기로 마음을 먹는 변화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탈 인간, 초인적인 인간, 불가능에 도전하는 인간만이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스스로 생각할 때 자랑 할 것 보다 감추고 싶은 것이 더 많아 보이는 이 육신을 가진 삶,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어떤 악한 세대가 바라는 기적이라도 일으켜서 내려오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셨을 때와 지금의 모습이 다르지 않다. 진화론이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성경에 사람의 모양이 달라졌다는 기록은 없다.(단지 수명이 짧아졌을 뿐.) 심지어 선악과를 먹음으로 신체에 다른 변화가 일어난 것도 없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던 그 사람과 지금의 사람은 같다는 것이다. 다만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부끄럽게 여길 뿐.


사람이 스스로의 모습을 감추고, 혼자서 하는 일이 들통 나는 것을 난감해하고, 감추기 위하여 옷을 입고 사회적으로 여러 신분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또한 능력을 덧입히는 것은 다 원래의 모습에 불만이 있어서이다. 그래서 그 불만스런 모습 이상의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기적이라 하고 늘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기를 바라고, 또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악한 세대가 구하는 표적이다.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져서 못 박히셨다.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신 것이다. 육신이 벗었다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벌거벗은 듯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사람의 모습 그대로가 악한 세대가 표적을 원하는 가치관으로 볼 때 전혀 기적을 일으킬 수 없는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또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신을 주장하셨기 때문에 발가벗겨져서 죽으신 것이다.


그것이 요나의 표적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와 모습이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이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난 것과 같이,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도 도리 수 없고, 유대인의 왕도 될 수 없는 사람의 원래 모습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언함으로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시려고 삼일 만에 살리신 것, 그것이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볼 때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사람 그 자체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진정한 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볼 때 절대로 안 되는 일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볼 때, 육신을 가진 이 인생은 하나님의 아들은 고사하고 사회적으로 살아가기에도 부족한 존재인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만한 기적이 어디에 있겠는가?


정말로 기적은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사람이 육신 가진 삶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생의 온 힘을 쏟다가 그것이 아니라 원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기적이고,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이라고 말씀하신 십자가의 기적이고, 그것이 바로 탕자의 비유 그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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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씀하시는 악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악>과는 좀 다르다. 그렇다는 것은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어떤 것을 악한 것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일반적인 견해에서 보듯 살인과 절도와 같은 것이 악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악함의 뿌리가 있으니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악하다고 하신 것은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때 그것을 들은 서기관들이 하나님 외에 사람이 죄를 사한다는 것이 참담하다고 생각한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악한 생각>이라고 하셨다.


사람들 사회에 있는 많은 죄악들의 원인에 대하여 성경은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물론 직설적으로 그렇게 표현된 곳은 찾기 어렵다.) 사람이 스스로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이나 삶의 모습을 보고 악하다고 생각하고, 또 그것이 개선되지 않으면 화가 나고 그것이 장성하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가 모든 죄의 근원인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나름의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용납하시는 사람이 되려면,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제사를 드리고 안식일에는 숨도 쉬지 않듯 가만히 있어야 하고, 이러한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는 밥도 같이 먹어서는 안 된다는 선과 악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 그런 그들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 아니 누구라도 사람의 죄를 사하거나 귀신들린 자를 고치는 것이 용납될 수 없었다.


악한 세대라는 것은 바로 그런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대를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일을 판단하는 세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예수님계시든 0 혹은 1세기나 지금의 21세기를 특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실 때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이 불가하고, 사람이 귀신들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자를 고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대는 다 악한 세대인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은 부족하고 연약하다. 육신의 기능도 동물들에 비하여 부족한 것이 많고, 또 자연 앞에서 무력한 모습이기도 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통제하지도 못할 때가 많은 그런 연약한 존재이다. 그리고 그런 연약함으로 인하여 사람은 그것을 감추고 자신은 남과 달리 그렇지 않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추한 일들을 꾸미고 행하는 그런 부정한 존재이다.


그렇다보니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이 육신을 가진 삶으로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사람이 가진 갖은 연약함을 감추고 숨기기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한다. 우선 옷을 입고, 또한 화장을 한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면 화장실에 가야만 하는 인간의 모습은 감추고, 공부한 것, 사회적으로 자신이 이룩한 것,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경쟁력이 있는 것을 자신의 모습으로 내 민다. 그러니까 자신은 연약함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모든 행동의 조상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다. 아담이 선과 악에 대한 스스로의 기준이 생기고 나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그 벗은 모습을 감추어야 할 것이라고 하신 적이 없음에도 그것을 감추어야 했던 단 하나의 변화는 선악과를 먹은 것, 그것이었다. 즉 선과 악에 대한 기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그 기준으로 보니 자신의 모습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바로 그 아담의 생각과, 인자가 죄 사하는 권세가 없다고 생각하는 서기관의 생각과, 귀신 들려 보지도 듣지도 못함과 같이 세상에 자신의 생각을 빼앗겨서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이를 고치는 것을 오히려 귀신의 힘으로 고친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의 생각과, 오늘날 세상에서 성공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래도 사람이 이 정도는 되어야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본이 된다는 각양의 기준을 제시하는 생각은 다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치관이 옳다고 인정받는 세대, 그 세대가 바로 악한 세대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대는 늘 표적을 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능력 그 이상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연약함을 감추거나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나 기적을 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고상해지려하고 더 똑똑해지려 한다. 세상의 철학과 과학이라는 것이 그렇게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 욕구로 가득한 세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감출 수 있는 기적인 것이다.


지금도 이 시대에는 사람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영웅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른다. 어벤저스라는 영화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에 사람들이 빠져드는 것이 바로 악한 세대가 바라는 표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물론 영화는 오락 그 자체일 뿐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그런 기대가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이 하늘을 날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히어로가 되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은 그렇지 못한 이 육신을 극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구체화 한 것이 바로 무화과 나뭇잎이다.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것이다.(무화과는 이스라엘의 나무이므로) 율법은 사람의 행동에 대한 규례이다. 즉 사람이 가진 연약함을 감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명시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연약함을 감추는 것은 그 연약함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고 선악과를 먹은 가치관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악하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잘 관리하면 인간의 연약함이 가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담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표적은 다른 게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표적은 오직 사람의 능력 밖의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아주 오만한 기대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분명한 한계 안에 두신 것은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 분명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의 범주 밖의 일을 일으키면 신앙이 좋다고 하거나, 그러면 믿겠다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사람의 범주 밖의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다.


사람의 능력 밖은 모두 하나님의 영역이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데, 그 중에서 사람을 만드실 때는 그 주권 중에 사람으로 표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고, 그 외의 영역은 또 하나님의 생각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위를 쪼개는 바람과 같은 위대함은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만나면 사람은 다 죽을 수밖에 없다. 바위를 쪼개는 판에 사람이 견딜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세대의 사람들이 구하는 표적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 그것이다. 사람이 가진 연약함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사람들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으로 자신을 치장한다. 또한 종교적인 규례를 지키려 한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알면 다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은 목적을 알고 살면 세상에 있는 사회적 요구를 십자가 지듯 할 것이고, 종교적인 규례는 범하려 해도 율법이 완성되듯,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 되듯 지켜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기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요나는 그다지 착한 선지자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인생의 모습을 대변한다. 하나님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 곧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살다가 요나가 바다에 빠지듯 세상에 삼켜져 있다가 돌이킴으로 삼일 만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은 모든 인생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바다 곧 세상의 법에 삼켜져서 십자가를 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란 자신의 생각대로 살다가 어느 순간 세상의 가치고나 앞에 먹히듯 죄인이 되는 자신을 알고 원래 사람의 자리인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표적 중의 표적이고, 기적 중의 기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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