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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여러 고을에서 복음을 전하셨는데도 회개치 않는 것을 보시고 그들보다 오히려 그 당시 상업적으로 발달한 두로와 시돈과 같은 세상적인 고을들이 오히려 더 하나님께 회개하기 쉽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틀에 갇힌 것이 그렇지 않은 것 보다 더 하나님을 외면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표면적으로는 로마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며, 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사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또한 인류의 타락도 마찬가지이다.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에덴동산에서 도망을 가려는 계획을 꾸미거나 하나님과 한번 싸워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려다가 타락을 했다는 것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프레임 안에 있는 사람이 오히려 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늘 계시면서 복음을 전한 동네이다. 그것은 다른 고을에 비해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것이나 말씀을 더 많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사야 선지자가 망하리라 한 두로와 시돈과 같은 이방인의 도시보다 회개치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의 본질을 몰랐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끔씩 만약 지금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구름타고 오시고, 그 모습을 인터넷으로 또 위성으로 생중계 한다면 사람들이 믿을까 생각해보는데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사람들은 자기 몸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결국은 자기 안에 있는 기준으로 해석하고 그것에 의하여 채색된 것만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의 뉴스나 사건을 객관적으로 전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 객관적으로 보도되어도 보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과 진보적인 사람은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늘에서 구름타고 오시는 것을 생중계해도 어떤 이는 조작이라 할 것이고, 어떤 이는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할 것이고, 또 극단적인 다른 종교는 죽이려 들 것이다. 그건 일어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이 된다.


사람들의 그런 습성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가버나움과 벳새다의 사람들도 많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 어떤 이는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그렇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발을 씻기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베드로와 같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까지 품속에 칼을 품고 다녔고, 요한과 야고보의 아버지는 또 다른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지금도 동일하다. 지금의 교회가 또 신앙이 그리고 세상이 그렇게 하나의 일에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의결기구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조직은 의결기구가 있다. 심지어 교회에도 당회나 노회나 총회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을 정리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결기구에 권한을 주어 때로 다른 생각이 있는 사람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사람들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으로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기적과 말씀을 어떻게 보는지, 또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까 가버나움과 벳새다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기적을 많이 봐서 그것을 객관적인 사실로서 믿으려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다고 책망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믿고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말씀을 그대로 지킬 수 없다. 적어도 한국에 사는 사람은 정확하게 계산된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어렵다. 세전, 세후 어느 것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년말정산 후에 세금을 더 낸다면 또 어쩔 것이며, 직장 동료에게 얻어먹은 커피는 어쩔 것인가? 그런데도 말씀을 객관적으로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편의적이다. 그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겠다는 것에 불과하고, 그렇다는 것은 말씀을 결국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의 사실이라도 다들 다르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교단이 생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 한분이 이 땅에 오셨는데 예수님 믿는 교리와 믿음이 왜 그렇게 많은가? 이런 모든 모순의 뿌리는 다 선악과에 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스스로 정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는 서로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이 맞다 주장하면서 다툼과 분쟁과 갈등과 죄악이 넘치는 것이다. 


가버나움과 벳새다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라서 회개치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이고, 무엇보다 실존의 예수님을 보고 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 고을이 회개치 않았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이시는 기적의 본질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처럼.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 환호하는 것이나, 예수님께서 그런 권능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예수님께 그런 권능이 있어도 자신과 예수님이 상관없으면 그런 권능도 자신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기적이나 실존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의가 자신의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는 것, 그것이다. 오신 목적을 알고 믿는데 하물며 그 실존과 능력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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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의 시작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과연 메시아이신지에 대한 회의가 들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확인하는 것에 관한 말씀으로 시작했다. 그래서 19절까지는 세례요한의 그 의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답을 하시는 말씀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답의 가장 마지막을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옳다 함을 얻느니라.>라고 마무리하고 계신 것이다.


사실 세례요한의 의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답을 하시는 시작도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을 세례요한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시작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은 몸에 어떤 문신 같은 것이 있거나 머리가 빛나거나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가지고 답변을 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하여 생각할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것을 함축하면 <행함과 믿음>이라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행동 가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말씀이다. 즉 병이 고쳐지는 것은 표현된 현상이고 예수님이 그 원인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에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외식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그것을 그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서 종교적 지도층에 있던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책망하시고 교훈하시는 것으로 그냥 쉽게 생각하지만 그게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신앙에 큰 전환이 생길 수 있는 문제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 그리고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내용, 어떤 생명이 사람 안에 있으면 그 생명과 내용으로 인하여 육신이라는 형식을 가진 사람의 삶이 그 생명의 본성을 표현하는 행동과 삶과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을 따라서 하려하고 그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냥 그 말씀을 지키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선함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용과 본질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을 지키는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도로교통법을 어기면 벌금을 부과한다. 그러면 도로교통법이 벌금을 부과하기 위한 법인가? 도로교통법이 교통신호를 어기면 벌금을 부과하는 것은 벌금을 부과하기 위한 법이 아니라 국민들의 안전을 위한 법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벌금을 잘 부과하면 도로교통법을 준수하는 것인지를 생각한다면 그건 얼마나 한심하고 어리석은 것인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을 들은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자기들이 심지어 목숨을 바쳐가면서 지키려는 그 율법의 내용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피리 불 듯이 말씀하셔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말씀하시기를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옳다 함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언뜻 상관이 좀 없어 보이기도 하겠지만, 행함이라는 것은 그런 행동을 하게 하는 원인이 있고, 그것을 아는 것이 지혜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지혜라는 것은 원인을 볼 수 있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피리 소리가 들리면, 또 애곡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 원인과 의미를 아는 것, 그것이 지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지혜가 있다는 것은 원인에서 비롯되는, 즉 생명에서부터 나오는 행함이 있고 그런 법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옳다함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하시는 것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비밀이라고 하시는 말씀들이 다 이것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과 사람 지으신 목적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지혜고, 그것을 아는 것이 같은 생명을 가진 것이고, 그것을 아는 것이 피리 소리의 의미를 아는 것이며, 그것을 아는 것이 외식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세 번째 시험도 그것이다. 무엇을 본질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지, 육신이 말씀을 지켜내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것이다.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의가 먼저 있고, 그것이 표현된 것이기에 표현된 것을 믿고 지키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무엇이 그렇게 나타난바 되었는지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말씀으로 말미암았다는 것,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바울의 말씀 역시 그것이다. 또한 농부와 씨로 표현된 모든 성경의 말씀도, 씨가 자라서 생명이 되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이 가지고 있는 구조, 곧 법칙이 이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세대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던 그 세대와 다를 바가 없다.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행위 규범으로서 지켜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다 외식하는 것에 가깝고,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므로 그 생명이 있으면 모든 말씀은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잉태되어 나기만 하면 사람으로 살아가는 육신의 모든 기관과 또한 그 육신으로 살아가는 모든 방법과 행위와 모양을 본능으로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바로 그 하나님의 생명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만 있으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아무리 범하려고 애를 써도 다 지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사자를 죽일 수는 있어도 호랑이로 만들 수 없듯,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삶이라는 것은 성경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을 가치 있게 하는 것만 신경 쓰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방법론이기 때문에 어떻게 표현해도 무방한 것이다. 


즉 생명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은 일정하게 규율로 정해진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에 율법적인 세계에서는 반드시 정해진 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을 때만 일렬로 걸어간 것과 같이. 그것이 광야의 세계고, 그것이 율법의 세계다. 바로 그 세계의 최고가 세례요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이라도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율법이다. 반대로 그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생명의 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그 행함으로 옳다 인정받는 것은, 지혜가 있다는 것은 그 행함이 원인이 있는 행함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생명의 본성이 있어 그 생명이 표현되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옳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구조가 하나님께서 생명이 되시고 사람으로 그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지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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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계시던 그 당시에 대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세대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것이 그 시대의 사람들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하여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유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먹지 않으니 귀신 들렸다고 하고, 예수님이 와서 먹으니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반응 없는 세대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병으로 본다면 문둥병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 계실 때, 그 세대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그 때가 그랬다면 지금은 더하면 더한 것이다. 종교를 떠나서 주변의 일에 무관심한 것으로 가늠한다고 해도, 오죽하면 고독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의 세대이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특정 시대 현상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는 것은 해야 할 일,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길 가다가 피리 소리가 들리면 사람이 춤을 추어야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의미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말씀은 다 자신과 상관이 있는 피리소리, 또한 애곡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세대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떤 것이 제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목적 안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사람이 바로 그런 상태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 아무 것도 먹지 않으니 귀신들렸다 하고, 예수님이 오셔서 먹고 마시니 먹는 것을 탐하고 죄인들과 친구가 되었다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상황에 따라 다른 말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엄밀하게 보면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다른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어떤 성경의 말씀이라도 자신의 말씀으로 듣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서 생명이 될 수 있는 반면에, 성경을 객관적인 사실로서 연구하는 사람은 학문적 성과나 믿기 힘든 기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는 가치는 있겠지만, 적어도 그 사람에게 성경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귀가 없는 경우는 드물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귀 있는 자는 사람 몸의 한 기관으로서의 귀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 즉 예수님의 말씀과 자신이 상관이 있는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암호라는 것이 있는데, 평범한 말이지만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거나, 아니면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는 귀가 있는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을 암호라고 한다. 한국 사람에게 숫자 4는 많은 경우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아서인지 나쁜 숫자로 인식된다. 즉 숫자 4가 좋지 않은 수로 들린다는 것은 한국인의 귀라는 말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말씀도 그와 같다. 한국인이 아니라도 숫자 4는 다 인식한다. 객관적인 인식은 다 한다는 것이다. 성경도 문자만 알면 다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마치 숫자 4를 수로 인식해도 한국인과 서양 사람들은 다르게 느끼듯이 성경을 읽고 그것을 객관적인 사실로 받고 믿는 것과 그것이 자신에게 마치 한국인에게 숫자 4가 가진 의미가 주관적으로 전달되듯이 성경을 듣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귀가 없는 이들은 마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것과 같이 예수님이 말씀을 하셔도 귀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귀가 없다는 것, 그것은 성경도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도 왜 주셨는지 목적과 본질적인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것이기에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 유대인들에게는 성경에서 오리라 한 엘리야가 와도 모르고, 하나님이 약속한 예수님이 와도 못 박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온 인류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그 세대를 가리켜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의 오신지 카이로스 시간 개념으로 2,000년이 넘은 이 시대도 사람들은 귀가 없는 경우가 많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모른 체 그냥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성경의 기적들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여기고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도 신념을 동원해 가면서 믿으려고 한다. 그런 관점은 다 귀가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천지에 널려 있고, 밤이면 온 하늘이 교회의 빨간 십자가 네온으로 넘쳐나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것과 같이 그 많은 교회와 하나님의 말씀들이 말씀을 주신 본질을 외면 한 체 객관적인 사실로 믿으려 하고, 무엇보다 신앙을 힘입어 이 땅에 사는 동안 복 받고 성공하는 삶을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읽고 듣고 믿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자신이 상관이 있는 관계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슬픈 일이 생기면 같이 슬픈 그런 관계가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런 관계가 아닌데 하나님을 믿노라 하고,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은 들 결국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TV에 나오는 유명인을 알고 그 사람이 어떤 야에서 유능하다는 것을 믿는 것과 그 사람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마치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과 예수님과 자신이 상관이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 관계가 없으면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성경을 객관적인 사실로 믿는 것도 성경을 믿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믿기 어려운 어떤 것을 믿는 것에는 신념보다는 학문적인 연구로 인한 증명이 더 효과적이다. 아마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신앙도 학문이 되어 신학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그 문자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하지 말라는 말을 강하게 이야기 할 때, ‘그거 하면 죽을 줄 알아라.’라고 말한다. 그것이 죽이겠다는 말이 아니듯, 성경에 나오는 말씀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분명히 문자로 표현된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의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의다. 그런데 그 의를 알려고 하지 않고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으려 하는 것, 그리고 그 문자가 기록한 것을 사실로 입증하고 신념으로라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사람에게 어떤 믿음을 요구하시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세례 요한을 보고는 금식한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은 먹는다고 비난하는 것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의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라도 성경의 의를 모르면 성경의 내용이 서로 상충되기도 하고, 자신으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연구할 문제가 아니다. 신념이 더 필요한 문제도 아니다. 그리고 보지 않고 믿어야 하는 믿음이 없는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기록하신 분과 보는 것과 가치관과 생각과 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같다면 성경이 온통 거짓말이라도 알아들을 사람 곧 귀가 있는 사람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성경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셨기에 그 한계를 확실히 알고 계시는 사람에게 사람이 들어야 하는 말씀을 사람이 모르게 하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의와 가치관이 아직 다른 문제이지 믿음이나 신학적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즉 예수님과의 관계가 피리를 불 때 춤을 출 수 있는 상관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성이 믿음이고 생명이다. 같은 생명은 그 생명의 고유한 행동을 이해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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