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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예수님보다 자신의 혈육(부모나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이것 또한 많은 신앙인들이 상당히 오해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런 오해가 일어나는 근본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이나 요한일서 4장과 같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라는 것이 사람이 사람에게 육신에 관한 헌신을 기록한 것으로만 보면 사랑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증거이자, 사람에게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먼저 있으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랑,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희생과 헌신의 모양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심령 안에 본성과 생명으로 있어서 그것이 표현될 때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자,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람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다. 생각해보면 젊은 남녀는 서로 끌리고 소위 밝힌다고 말하듯 혈기 왕성할 때는 이성이면 다 좋아할 수 있지만 오직 한명의 이성만을 자신의 짝으로 사귀어 가고 결혼에 이르게 되는 것은 그 한명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서로 스치며 지나가고, 또 서로 얼굴은 보지만 인사도 없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중에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어떤 관계로 인하여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그렇게 부여된 의미로 인하여 서로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 사람의 사랑이고 또한 그것이 삶이다. 그런 연고로 사람이 누군가에게 의미가 없어지면 살아가는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에게도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되고 또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의미를 알게 하는 것, 서로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그리고 인생이기에 살아가는 목적과 이유와 의미를 알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수님보다 부모나 자식을 더 사랑하면 예수님께 합당치 않다고 하시는 것은 헌금보다 부모님 용돈을 더 더리면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이유를 예수님보다 보모나 자식에게 두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또한 독립된 인생으로서 자신의 삶의 의미와 존재의 이유가 다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부모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동양의 유교에서 그런 사상이 강한데,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나의 근원인 부모도 또한 부모가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신의 부모에게 근원을 찾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 부모 역시 근원의 근본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가는 하나의 고리이기에 인생으로서 진정한 삶의 의미가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그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곧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에,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인생의 존재 목적의 표상이고, 육신을 가진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와 이유를 가지신 분이기에 그 목적과 의미를 예수님 안에서 발견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부모나 자식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면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부모나 자식에게서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찾으려 하면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합당하다는 표현이다. 여기서 특이하게 합당(worthy)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아닌 부모나 자식에게서 인생의 의미나 하나님의 사랑을 찾으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될 가치나 자격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의 본질을 모르고 자신의 신념과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선악과를 먹은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육신의 부모를 신앙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외면하는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있노라 하고 그 부모를 또한 자식을 외면하면서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합당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생명의 법을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도 육신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로 표현되듯,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그 육신을 통하여 그것이 표현되게 된다. 사랑이 표현이 된다고 하는 것은 부모나 자식에게 누가 봐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부모와 자식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여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과 같이, 또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자신과 같이 인생의 의미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사랑일진데 부모와 자식 그리고 또한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전하기 위하여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생명의 본성이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부모를 배척하지 않는다. 부모나 자식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며 부모나 자식은 돌보지도 않고 교회만 다니는 것이 예수님께 합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본질은 알지 못하고 모양만 아는 외식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인생의 목적을 아는 것, 또 알게 해 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 그 부모나 자식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것을 아는 사람이 되도록 헌신하고 사랑할 것이고, 또 같은 신앙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생명을 나눈 형제로서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육신의 사랑 표현법으로 대변되는 사랑으로 예수님을 대하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자신의 사랑으로 또한 자기 인생의 목적과 본질로 아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 이유와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기에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예수님 안에서 찾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서 발견하고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인생을 주신 이유를 그 안에서 발견하므로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알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나 자식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그 말씀을 알게 되었다면 예수님과 같이 모든 인생들에게 그것을 알게 하는 사랑의 수고를 감당할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자신의 부모와 자식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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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34-39 검을 주러 왔노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10. 19:19 Writer : 김홍덕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다른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과는 색채가 좀 다르게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목적이 화평이 아니라 검(누가복음에서는 검이 아니라 불을 던지러 왔다고 하심)을 주고 불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많은 기독교인들 특히 성경을 기반으로 이단이 된 사람들이 아주 오해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사람들에게 불화를 일으키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어떤 것인지, 그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이 말씀을 살펴보자. 이 말씀에 갈등을 일으키는 대상이 있다.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게 되면 가족들과 분쟁이 일어난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을 그렇게 읽는다는 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 것이다.


우선 영어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인자(Son of Man)라고 말씀하실 때 Man은 대문자로 쓴다. 하지만 여기서는 man을 쓴다. 이 사람은 마치 노아의 홍수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이라는 표현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없는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 곧 하나님의 의가 없는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 아들이 아닌 여자와 같은 존재들인데,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모든 갈등은 다 여자들 사이의 갈등이다.


하나님의 의가 없는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없는 육신의 아버지와 다툼이 있고, 성씨(하나님의 의)를 이을 수 없는 딸과 같은 인생들이 또한 그렇게 자신을 낳은 어미와 다툼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는 없이 형식들끼리 다투게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그 주변인들이 다툰다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신앙을 가진 사람과 믿지 않는 가족이나 주변인들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곧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 앞에서 딸이 아닌 아들과 같은 이들은 서로 다투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사람들에게 오히려 공회에 서고, 총독과 왕들에게 끌려가서 채찍질을 당하는 것이지, 신앙을 가진 사람이 세상과 다툰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에 대하여 사람들이 비난하면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다고 하고, 핍박 받는다고도 하며, 또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께서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그 자신이 아들이 아니라, 딸이요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의 비난을 받는 것은 교회가 세상과 같은 법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비판을 받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게 여자의 신앙, 곧 형식만 남은 신앙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검을 주고,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하신 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 능동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라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갈등이 일어나는 사람은 의가 없는 자, 하나님 앞에 여자의 격을 가진 사람, 곧 외식하는 사람들이 서로 분쟁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와 하나님의 아들은 그런 격을 가진 이들에게 오히려 끌려갈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으로 인하여 분쟁이 일어난다는 것인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과 같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늘에 닿는 성을 쌓으려 하자 하나님께서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창 11:7)

라고 하시고 사람들의 언어를 혼돈케 하여 그들이 서로 다투다가 흩어지게 된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만 가지고 하늘에 이르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 땅에 내려 오셔서 서로 혼돈스럽고 분쟁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그야말로 사람의 아들이고, 하나님 앞에서 다 여자와 같은 격을 가진 존재들인데, 그들 사이에 혼돈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 영어를 사용하다 불어, 독어, 중국어 이렇게 갈라졌다는 것이 아니다. 서로 주장하고 의롭게 여기는 것이 달라진 것을 말이 달라졌다고 하시는 것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싸우는데 있어 언어는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다 싸우고 분쟁한다. 즉 의가 다르고 무엇을 의로운 것으로, 선한 것으로 여기는지가 달라서 서로 싸우는 것이 사람이다.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도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이 오시므로 심판도 함께 왔다. 즉 의의 기준이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없듯,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분명한 의의 기준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이 땅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내신 의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기준으로 다 심판 가운데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심으로 사람들이 무엇이 의로운 것인지에 대하여 다툼이 생겼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도 사람들은 다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서로 옳다고 주장하고 다툼이 일상이었으나,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그것이 법 없는 세상의 범죄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다툼으로 정의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다툼과 분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 곧 하나님의 의가 없고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인생들이 의는 없이 자신들  스스로가 가진 의로움으로 선과 악을 정하면서 싸우고 분쟁했던 모든 것이 예수님 이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분쟁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분쟁이 된 것이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 오기 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분쟁이 없었겠는가? 그건 늘 있던 것인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분쟁하고 다투는 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신앙 없는 사람들을 심판하고, 또 원하지 않는데 말씀을 전하려 훈계하고, 또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며 협박성 전도를 한다. 그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 없다고, 또 때로 예수 잘 못 믿는다고 시비를 걸고 시쳇말로 씹어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이 다 스스로의 신앙이 여자의 격을 가진 신앙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 뿐이다. 육신으로 여자 같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영이 없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또 분쟁하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능동적으로 자극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지만 그들에게 시비를 거시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신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과의 마찰도 대응이시지 아무 단초도 없이 바리새인들을 찾아가서 검을 주러 왔다는 식으로 시비를 거시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심판이 임하고, 또 분쟁이 생기고, 또 불을 던지신 것은 제자들에게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하심과 같이 예수님께서 너무나 수동적으로, 어떻게 보면 억울하고 또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아들이 왜 그랬나?'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동적인 모습으로 끌려가심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높이 들리셔서 그 모습을 보이심으로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마음에 불이 일어나고, 또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이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또한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일이시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기 때문이다. 즉 모든 심판과 마음이 불 일 듯 하는 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먼저 능동적으로 그것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제자 된 삶은 그냥 끌려가고 수동적인 삶을 살 뿐인데, 그것을 본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고, 스스로 자신이 돌이켜야 한다는 마음이 불 일 듯 일어나는 법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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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고 또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먼저는 예수님의 삶,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있으면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말씀이고, 그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는 이들도 그런 삶, 곧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제자고, 또 사람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핍박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공회에 세우고, 총독들과 왕들이 제자들을 끌고 갈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공회에 제자들을 세운다는 것은 공회의 기준으로 제자들을 보겠다는 것이고, 총독들과 왕들이 끌고 가겠다는 것은 세상의 법으로 볼 때 예수님의 제자, 곧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다는 것은 그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라는 의미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하여 일관되게 큰 그림만 보려 한다. 그러니까 노상 전도를 하고, 해외에 선교사로 가고, 사회적 약자들이 있는 곳에 가서 봉사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만 본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한다는 것은 항상 칭찬 받을 일이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여 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 보상을 바라거나 신념에 바탕을 둔 것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니까 어떤 형태로 복음을 전하고, 어떤 대상에게 전하느냐의 문제는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생명이 그 안에 있는 것이 먼저고, 그 생명이 본성처럼 드러나는 이유로 인하여 살고 있는 자리, 또 전하고 싶은 자리에서 표현해 가는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 기쁜 일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감춰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어둡고, 조용한 곳에서 들은 것이라도 집 위에서 전파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생명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삶의 의미와 정체성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복음을 어디서 들었든, 그것의 크기가 얼마이든 무관하게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강아지가 어리다고 고양이가 아니듯, 생명이란 아무리 어리고 약하고 또 어떤 상황이라도 그 본성을 표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 다음에 몸을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말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니까 누구를 두려워할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감춰진 것이 드러나는 것과 두려워할 대상이 어떤 연관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두려워할 대상은 몸과 영혼을 능치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내용과 형식 전부를 멸할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몸과 영혼을 능히 멸하는 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몸과 영혼을 다 멸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몸은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으로 표현하는 도구요 형식이다. 이것은 사람들끼리도 서로 죽일 수 있다. 전쟁이나 범죄 혹은 교통사고와 같은 사고로도 그럴 수 있다. 인간으로서 그런 것도 두려운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죽일 수는 있어도 영혼을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목적이 있으셨다. 그러니까 지금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다 태어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존재케 하신 신이라고 믿는다면 당연히 태어난 이유와 삶의 의미와 목적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고, 그것은 영이시며 의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그릇이요 성전이요 형식이라는 목적 그것이다.


사람이 그런 목적을 가지고 났다는 것은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그 목적이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그 목적에 충실했는지에 달린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생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목적 실현에 관한 기준에 따라 육신의 장막을 벗는 일이 정해지는 것이다. 어떤 이는 그 목적을 잘 이루어 형식의 수명이 다 하였으므로 육신의 삶을 떠나고, 어떤 이는 하나님의 목적으로 볼 때 더 이상의 가치가 없어서 죽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머리카락도 다 세신 분이라는 표현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즉 우리의 모든 운명은 하나님의 의와 목적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또한 우리의 몸이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몸은 죽여도 영을 죽일 수 없는 존재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만이 영과 몸을 같이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니, 목적 안에서 살았는지 죽었는지에 대한 기준과 그 기준에 따라 몸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안다면 몸 밖에 죽일 수 없는 사람들 앞에서, 그러니까 나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과 총독과 왕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며, 그들 혹은 그들보다 더한 이들 앞에서라도 예수님을 시인, 곧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혹 어둡고 감춰진 곳에서 알게 되었다고 해도 시인하고 집 위에서 외치듯이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시인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과 영혼을 다 멸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과 인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능동적인 외침이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이 블로그의 주제에 가깝다. 왜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하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능동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하나님의 의를 사람이 표현하는 수동적인 관계인데 어떻게 신앙이 능동적인 것이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기적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자신의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객관적이고 실존적으로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시인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데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공회에 서고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가게 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존재 목적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 몸은 죽여도 삶의 존재 목적을 아는 생명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개를 죽일 수는 있어도 고양이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주권을 안다면, 예수님의 정체성을 안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개가 멍멍하고 짖는 것과 같이 너무 당연하게 예수님의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시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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