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7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시고는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 손 마른 사람이 있었고 이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송사 곧 책잡으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되는지 시험하듯이 질문을 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건져내는데 사람이 양보다 귀하다고 하시면서 그 병든 손을 고치셨다.


이 일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 것인지에 대하여 의논을 했다고 한다. 사실 출애굽기 31장에 나오는 말씀에는 안식일에 일을 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양을 구하는 것은 엄연히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지만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것을 용인하는 해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 '양도 구하는데 사람이랴?'는 반문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하여 안식일에 대하여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것은 여러 신학적인 고증이 있는 내용으로 알고 있음.) 하지만 단순히 안식일에 양을 구하는 것에 대한 해석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시비를 거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외면하고서 그것을 지키려는 어떤 노력도 사실은 다 자의적인 해석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을 모르면서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마치 해적이 자기들끼리의 치안 유지를 위하여 여러 가지로 자체적인 원칙을 만들어 다들 목숨을 걸고 그것을 지키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해적은 해적이라는 신분으로 숨 쉬는 것 그것 자체가 위법인데 그 안에서 법을 아무리 잘 지켜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상태에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되는지에 대하여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안식하는 날이 되도록 하나님이 자신을 볼 때 안식하는 마음이 드는 상태가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질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안식하고 만족하시는 사람의 상태는 손이 마른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손이 온전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만족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은 육신의 손을 한정하는 것으로 보면 그것도 유대인의 시각과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성전이다. 성전이라는 곳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안식하는 집과 같은 곳이라는 의미이다. 그 성전에 손 마른 사람 곧 아픈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안식하지 못하고 계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손 마른 사람의 손이 오른손이라고 상세히 말씀하고 있는데, 오른손은 의로운 손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표현하심에 있어 하나님의 왼손으로라는 표현은 없다. 언제나 의로운 오른손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오른손은 의를 표현하는 손이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오른손으로 하는 것이 의롭다거나, 선하게 여기는 것을 오른손으로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밥은 오른손으로 먹고 화장실에서는 왼손을 사용하는 것이 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왼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의로운 오른손이라고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오른손, 왼손의 일을 구분하라고 하시거나, 오른손으로 하는 일만 의롭게 여기겠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나가다보니 사람들이 외식하듯, 즉 내용은 모르고 형식만 지키려 하는 것이 삶의 저변에 폭넓게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이런 생각들이 각종 미신과 징크스와 같은 것을 낳는다. 그런 모든 생각들이 알고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을 외식하는 자라고 하시고, 안식일에 양을 구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지금도 다 해당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손은 사람이 가진 생각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대표적인 사람의 신체이다. 손과 발이라는 것은 사람의 행동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 박히신 것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자신의 행위나 행동으로 죄인 된 자신을 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손이 말랐다는 것은 행동이 말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손이 말랐다는 것은 손으로 표현할 의가 말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손에 공급해줄 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없기 때문에 의를 표현할 행동이 메말랐다는 말씀인 것이다. 한마디로 의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상태가 바로 손 마른 자와 같다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사람이 성전에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성전에 하나님의 의가 없어서 표현할 것이 없어 메마른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은 사람들의 상태가 있다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를 따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해보면 지금도 많은 교회에서 주일날 돈 쓰고 일하는 문제에 대하여 정리가 되지 않은 것은 다 손 마른 사람의 상태와 그 신앙 상태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안식일이든 주일이든 그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은 오른손 마른 자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것이 없는 사람이고 상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안식일의 목적도 의미도 모르니까 그런 것을 고민하고 또 나름 신학적인 견해라며 가르치기도 하지만 정작 가르치는대로 자신도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상황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은 어떤 날을 쉬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을 보면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그런 상태가 되라는 말씀이다. 즉 그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성품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지은 사람으로서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식하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창조의 과정이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만드시고 나니 하나님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으셔서 안식하신 것이다. 프로스포츠 리그에서 우승을 했는데 그때는 쉴 뿐 더 이상 일(경기)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향한 목적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고 또 안식에 대하여 정확한 의미와 목적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토요일인지 주일인지, 아니면 그날 어떤 행동까지 가능한지를 따진다는 것은 다 성전에 있는 오른손 마른 사람과 같을 뿐이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우리가 다 그런 사람이었는데, 오른손 마른 자가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았듯, 우리도 그렇게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의가 없어 행동이 마른 사람의 회복,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안식이기 때문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마태복음) 12:1-8 안식일의 주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19. 16:48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다가 이삭을 잘라 먹었는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하는 일을 했다고 예수님께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답변을 하셨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율법에 기록된 것인데 그것을 어겼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는데,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과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스스로를 말씀하신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특히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 율법이라는 것은 목숨을 걸기도 하는 일인데 그 앞에서 그들이 평생을 노력하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시는 것이나, 범하면 죽을 수도 있는 안식일을 범하는 것도 모자라서 스스로를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들이 지키던 것을 파괴 하는듯한 말씀과 행적을 보이신 것을 두고 기득권과 매너리즘에 빠진 계층에 대한 각성을 추구하는 혁명적인 계몽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기도 하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단순하게 잘못을 지적하고 기득권에 도전하는 사회운동적인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정치나 문화가 잘못되었다는 것에 지적하고 또 반항하고 심지어 투쟁하는 모습도 늘 있지만, 그런 것들과 예수님께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보이신 모습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일부 해방신학론자들의 사상과 같이 사회 계층의 평준화나, 종교적 기반의 기득권과 그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 형식적인 면에서만 봐도,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외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체험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아는 것은 쉽고, 또 그 곤고함에 외치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단순한 것일 뿐이다. 정말로 제대로 한다면 뭔가 대안을 제시하고, 그 대안을 사람들이 따라할 수 있는 감동을 주는 것이 제대로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율법이나 안식일이나 그것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주신 것이 아니다. 도로교통법에서 신호 위반을 하는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한다고 되어 있다고, 신호 위반하는 사람을 잘 단속하여 벌금을 부과하는 것이 도로교통법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법과 무관하게 도로에서는 신호를 지켜서 안전하게 운행하도록 하는 것이 도로교통법의 목적이듯, 율법과 안식일도 그와 같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실 때 여섯 째 날에 사람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이 너무나 보시기에 좋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의 모든 목적이 이루어졌기에 더 이상은 창조하시지 않아도 되는 결과물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것이 그 유래다.


그러니까 안식일이라는 것이 크로노스의 시간 곧 달력의 날짜로 6일은 일하고 하루를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 사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것이 안식이고, 그런 날을 맞이했을 때 안식일이 되는 것이지, 신호위반 벌금을 잘 부과하는 것이 도로교통법을 지키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날짜로 7일째가 되었다고 안식해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고, 또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으신 분이신데, 날짜로 하루 이틀 세어서 7일 째 되는 날은 쉬시는 그런 틀에 갇히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달력을 넘기는 시간은 사람에게나 의미가 있지 하나님의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 즉 때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12시가 점심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은 배고플 때 밥을 먹는다는 그 <때>를 시간으로 여기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일은 날짜로 7일째라거나,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라거나, 아니면 일요일이라거나 하는 것은 마치 벌금을 잘 부과하면 도로교통법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안식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지, 그 <때>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안식하실 수 있으면 내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정말로 제대로 읽었다면 이게 정상인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일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처음에 아담을 만드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너무 잘 이루어져서 그 사람을 볼 때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바로 그 때의 아담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온전한 상태, 온전한 정체성,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요 아들이시기에 예수님은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존재이시기에 요일이나 절기에 무관하게 언제나 안식일을 지키시고 계시는 분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안전하게 운행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도로교통법을 온전히 지키고 있고, 도로교통법의 목적이 육신이 된 삶을 살고 있는 도로교통법의 진정한 주인인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은 토요일이 안식일이라고 주장할 것도 아니고, 일요일 곧 주일에는 돈을 쓰면 안 된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되었는지, 그러니까 자신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 되었는지 그것을 고민하고 그것을 알려고 하고 그렇게 되려고 애쓰는 것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안식일이 토요일이냐 주일이냐의 문제도 아니고, 주일에 돈을 쓰거나 일을 하면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서 안식을 누리고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되었는지 아닌지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이 안식할만하고 보시기에 좋다는 것은 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고 설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을 아는 십자가의 삶을 일상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또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셨듯이.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너무 어려워하고 힘들어 한다. 주일이면 하루 종일 교회에서 수고하고 돌아오는 것도 힘들고, 때로는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을 때 감사절이라도 돌아오면 헌금 부담에 힘들어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아닌 것이긴 하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힘들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또 기쁨으로 그것을 감당하면서 가는 것이라고 말을 한다. 특히 강단 위에서 그런 말을 많이 이야기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다르다. 힘들지만 따라 오려 하면 내가 힘을 주겠다거나, 아니면 그렇게 힘든 것을 견뎌내야 천국에서 상급이 크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그 자체가 가벼운 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차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예수님은 분명히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고 하셨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 자체의 무게도 무게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사형수라는 짐을 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멍에와 짐은 가벼운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가벼운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으면 인생의 짐이 가벼워진다고 해석하고 그렇게 전하고 또 믿기도 한다.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인생의 짐이 가벼워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따라 다른 의미이다. 만약에 그것이 경제적으로 편리해지고 이 세상에서 사는 육신의 문제가 쉽게 풀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육신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데,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세상에서 성공한단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아닌 자신만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일 뿐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잘 생각해보면 참 쉬운 것일 수 있다. 망치는 망치로 사는 것이 가장 쉽다. 망치로 고기를 썰려고 한다면 그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와 같이 사람도 사람이 지어진 목적대로 그 본연의 창조된 목적대로 살면 그것은 쉬운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또 십자가에 죄인으로 못 박히신 것은 우리가 그것을 따라하고 어렵고 어렵게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사람이 보고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깨닫게 하시는 것을 위하여 지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그 전하고자 하신 것을 깨달아 알게 되면 그것이 자신이 십자를 지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대신지지 않아도 십자가를 지신 목적을 알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바라시는 바이다. 그래서 그것이 진정한 은혜고 사랑인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은 어떤 것인가? (이것에 대하여는 이 블로그에서 지속적으로 이야기 해 온 것이다.) 우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된 이유를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우리 삶의 많은 것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되신 이유를 다르게 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신 이유이다.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신 이유는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제사장도 아니고 귀한 것이 나올 수 없는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율법도 범하고 세리와 죄인과 창녀와 어울리던 주제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엄연히 유대 땅을 다스리는 로마의 권력 앞에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율법을 몸으로 다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절기를 지키며 길에 서서 큰 소리로 기도하여야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런 기준으로 볼 때 죄인인 사람들과 실컷 어울리면서 그런 것을 지키려는 자신들을 비난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죄인이 되셨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백성들은 이때까지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로마에서 해방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는데 끌려가는 죄인이 되어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로마의 총독 앞에서 선언하심으로 죄인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보면 스스로 그렇게 죄인이 되신 것은, 먼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은 바리새인과 같이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려하는 기준으로 보면 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주일 성수만 몸으로 지켜내려 해도 평생을 지키는 것은 어렵다. 즉 언젠가는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는 교리 앞에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의 정체성을 보이신 것이다.


또한 로마의 총독 앞에서 죄인이 되신 것은 사람은 누구나 세상의 기준에서 적어도 한번은 패자가 된다. 그 뿐 아니라 죄와 빚이 같은 의미라고 볼 때, 그 이유가 집을 사는 것이든 병든 부모님 때문이든 한번쯤은 빚진 사람이 되기 마련인데, 그렇게 죄인이 된다. 나면서부터 부자인 사람도 어떤 세계에서는 한번은 다 패자가 된다. 그것이 연애든, 부자 순위든, 아니면 세상의 명예나 권력 앞에서든 그 어떤 세상의 기준에도 예외 없이 승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라는 것을 또한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은 다 그렇게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즉 십자가는 인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자리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죄인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그때까지 그렇게 밥 먹듯 행하시던 기적은 오간데 없고 무력하게 그냥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이신다.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율법이나 교리를 범하는 죄인이 되고, 또 세상에서 패자나 빚진 자가 되었을 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머리에 쓰신 가시관은 우리의 생각으로 우리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의 행동으로 우리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고, 발가벗겨진 것은 옷과 같이 세상에서 얻어서 우리의 모습을 감추어주던 신분이나 지위도 우리를 죄인 되시듯 우리가 죄인 될 때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멍에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우리 앞에서 우리의 모습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고, 세상의 왕이 될 수 없다고 할 때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선의 기준을 주장할 때에 그것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심문하던 유대인들처럼 작은 일에도 '이렇게 하는 것이 맞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런 주장 앞에서 주장하는 이의 뜻대로 하는 것은 힘들다. 때로는 그렇게 하면 더 큰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 큰일을 수습하느라 더 많은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 바로 그런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반대로 그것에 맞서서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반문하고 주장하고 심지어 가르치려 하면 그것이 바로 다툼이 된다. 그러나 사람 안에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로 다툴 이유가 없다. 도로에서 앞질러 가는 차를 보면 화를 내는 것은 자신에 대한 쓸데없는 가치 부여다. 내가 그 사람보다 늦게 가면 안 되는 이유가 보통의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굳이 앞질러 가는 사람은 살다보면 어떨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아닌데 그냥 자신이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려고 그렇게 하는 것은 도로에 자신의 의를 펼치는 것이다. 바로 그런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인간의 본성이다. 반면에 어쩔 수 없이 급한 일이 있어 그렇게 가는 사람은 빨리 감으로 발생하는 것을 감수한다. 하지만 자신이 운전을 잘한다는 것을 보이려던 사람은 교통 딱지를 받으면 억울해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이 부탁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 거절하는 변명을 찾고 또 다음에 만나서 미안해하는 것 보다 쉬운 일이고, 또 남에게 부탁하는 것 보다는 자신이 수고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다. 굳이 이유도 없이 내가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려고 빨리 가는 것 보다, 알맞게 가는 것이 더 쉬운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를 알고 사는 것이 훨씬 쉬운 길이라는 것이다.


의외로 사람은 이것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사는 것 보다, 그런 주장을 수용하면서 사는 것이 쉽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감동을 받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도 예수님의 멍에, 곧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일상을 살아가는 것에 있다. 바람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이 그것이다. 스스로 벗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 더 쉬운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미지가 표현될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세상을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경영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 세상에 살면서 일어나는 일 앞에 사람은 순종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망치가 못 박는데 사용되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그렇지 않고 세상에 일어나는 일과, 또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과 삶에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면서 사는 능동적인 삶을 사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신의 방법으로 바꾸려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바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다. 그들은 망치로 고기를 쓸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그런 것을 위하여 지어진 것이 아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