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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2-19 세례 요한의 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14. 16:14 Writer : 김홍덕

세례 요한은 헤롯의 잘못을 지적한 연고로 붙잡혀서 감옥에 갇혀 있는 증에 스스로 의심이 들어서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예수님이 오실 메시야이신지에 대하여 물어보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천하의 세례요한이 어떻게 그것을 의심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다른 면으로 본다면 그런 의심 한번 하지 않고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없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어떤 시대와 세대의 오늘에 읽어도 그것을 대하는 그 사람의 현재 자신의 말씀으로 읽혀지는 것이 가장 제대로 성경을 읽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을 객관적 사실로 보려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그게 무슨 문제겠는가 싶겠지만 그것은 의가 아니라 문자로 성경을 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금 세례 요한이 의심하고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이 오실 메시야이신지를 물어보라고 한 것은 오늘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적어도 마태가 볼 때 신앙의 여정에 있어 누구라도 그런 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것을 전하고자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최고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최고의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표현되듯 그 자아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신념과 율법을 지키려는 행위로 신앙생활을 하는 세계를 말한다. 여자는 성경에서 늘 형식을 나타내는 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신앙이 교회에서 또는 성경을 읽고 그것을 행동으로 지켜내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그것보다 더 온전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세계를 기웃거릴 때는 거의 필연적으로 그 기웃거리는 세계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 더 온전한 세계는 이 블로그에서 말하고 있듯, 하나님의 의가 생명으로 자기 심령 안에 있어서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이 마치 생명이 그 본성을 표현하는 것과 같이 금할 길이 없이 된다는 것을 아는 세계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이전에 정말로 성경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내려는 세계인 행위와 소유의 신앙에서 존재가 먼저 확립되면 그 존재에 맞는 행위가 나타나고 그 존재에 맞는 것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이 세계를 의심하고 경계했는지 모른다. 아마 그것은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곧 율법의 세계에서 가장 큰 자다. 율법의 세계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세계다. 율법이 명하는 어떤 행동규범은 의지로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본성이 그 안에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 본성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그것이 안에 있으신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이신 것이다.


그것에 반해 율법의 세계는 율법에 기록된 것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되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는 치명적인 약점이자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어떤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예외 없이 자신의 행동을 규칙대로 살 수 있는 인생이 없다는 것, 그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천 가지를 평생 잘 지키다가 어느 한 순간 단 하나, 그 작은 한 순간에만 지키지 않거나 지킬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다 어긴 것이 되는 것이다. 야구에는 퍼펙트게임이라는 것이 있다. 투수가 단 한 명의 주자도 내 보내지 않고, 점수도 한 점도 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단 한 명의 주자 그것도 다른 선수의 실수로 주자가 나가기만 해도 퍼펙트는 깨진다. 그리고 그 깨진 게임은 퍼펙트냐 아니냐? 라는 관점에서 보면 점수 100점을 주고 패한 것과 같은 것이듯 율법도 그런 것이다.


그런 세계에 있던 세례 요한으로서는 당시의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는 이들에게 비난을 받는 예수님께서 과연 메시아인지 의심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종교 지도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예수님이 과연 메시아인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타락했다고 하면서도 어떤 신앙에 대하여 검증할 때는 자신이 타락한 교회에서 인정하는지를 따지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런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답하신 것은 어떤 논리나 말씀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증거들을 제시하셨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 11:5)

는 것을 세례 요한하게 가서 이야기 하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고 예수님이 메시아인 증거가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과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생각이 바로 율법적인 생각이다. 세례 요한에게 그렇게 답하신 것에는 세례 요한은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세례 요한이라는 정체성이 예수님의 표현된 모습을 메시아의 정체성으로 보는 세계의 최고봉이라서 그렇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은 육신이 병든 사람을 고치고, 육신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있는 것에 있지 않다. 정작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내려오지도 못했고, 세금도 못 내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런 것이나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린 사람도 다 죽고 없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정체성이라면 오늘 우리는 무슨 상관인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인 증거를 병을 고치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사람 본연의 정체성이 각종 병과 같이 아프고, 또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에 대하여 가난한 것에 대하여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기 때문에 그 메시아의 본성이 입고 오신 육신을 통해서 육신을 가진 자로 대변된 병자들을 고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된 소식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를 찾는 것이라면 왕궁에서 찾으라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이 본질인 자신이 아니라 옷과 같이 자신의 육신이 가진 문제가 귀하게 되는 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세상의 문제이므로 세상의 왕이 사는 왕궁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다른 선지자보다 큰 것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과 예언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니 그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자신이 전하고 외쳤던 모든 것이 실제로 나타나서 증거가 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말 한대로 선진들의 전한 증거의 원천인 약속을 보았고, 그 모든 말씀이 예수님께로 이어지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모든 선지자 보다 나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낳은 자, 곧 육신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려는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과 그런 가치관에 있어서 최고는 세례 요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세례 요한도 천국에서는 작은 소자 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화가가 그린 꽃도 오늘 피었다 지는 향기 나는 작은 꽃 보다 못한 것과 같은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나라의 본질이다. 그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분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심령 안에 있어서 그것이 표현된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법이다. 이 생명이란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생명을 말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행동 규범으로 아는 가치관에 사로 잡혀 있다. 그것은 오네시모와 같이 옥에 갇힌 것과 같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그러니까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늘 애써도 끝나지 않는 한없는 수고에 갇힌 것이다. 그래서 짐이 가벼운 예수님께 가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블로그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관점에 대하여 정말로 본질에서 비롯되는 본성이 바로 언뜻 읽을 때 <행하라.>로 보이는 성경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때로 세례 요한과 같이 그것이 의심스러워도 자신과 세상과 또한 말씀을 잘 살펴보면 왜 성경말씀이 병든 자를 낫게 하는지, 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을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성경은 정말로 생명의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과 또한 생수와 같이 자기 안에 땅에 심겨진 한 알의 씨앗과 같이 심겨지듯 듣고, 그 말씀이 잉태되어 예수님으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본성이요 말씀과 같아서 예수님께서 그 본성을 표현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은 행동 규범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애곡해도 가슴을 치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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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가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 사람이 따라 가야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이 사람도 따라 가야 하는 길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목숨을 버려서 자신은 사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은 형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마치 불을 밝히고 사라지는 초와 같이 이 육신이라는 삶의 장막이자 형식을 소진해가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야 하는 창조 목적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목숨이라는 것은 생명이라는 것과는 좀 다른 것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무생물이나 심지어 사회의 제도와 같은 것에도 살아 있다고 할 때 사용하는 것이고, 목숨은 정말로 단순하게 육신에 한정하는,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다고 하는 것 그것 하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생명은 의도와 목적이 이루어지고 있으면 산 것이고, 목숨은 육신이 숨을 쉬고 있으면 산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목숨을 버리고자 하면 살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자신의 몸 가진 인생을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사용하면 살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의를 지켜내는 것은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이것은 순교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한정된 말씀이 아니라 일상에서 늘 있어야 하는 말씀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이 복음은 순교하는 특별한 상황과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 외에도 그냥 매일 큰 변화가 없을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은 늘 목숨을 버려야 하는 일들로 가득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사람 사이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눈뜨면 일어나는 집에도 가족이라는 구성원이 있어 서로 부딪히며 살아가고, 집을 나와서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제법 많은 이들과 마주치는 것이 보통의 삶이다. 때로 그렇지 않은 날과 세월이 있어도 우리의 삶은 그렇다.


그렇게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다 처음에는 선악과를 먹은 인생들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나 같이 자기가 마주하는 일과 사람에 대하여 어떤 것이 선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이나 법은 물론이고 자신이 살아오면서 자신 만이 경험한 것과 여러 가지 가치 기준에 의하여 누구나 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다 가지고 있다.


사람이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실재로 어떤 부부가 삶은 감자를 찍어 먹는 것이 소금이다 설탕이다 하면서 결국은 이혼을 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 사람은 다들 그렇게 작고 사소한 일에도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자기 생각이 다 있다. 그건 누구나 살면서 자신을 조명해 보면 매 순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순간 상대가 옳다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법과 기준과 그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용납되지 않는 죄인이라 주장하는 그 주장에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가진 세상적인 가치관, 또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그 가치관에 나를 내어 주는 것,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희생이 따른다.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빌라도에게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인하여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 가셨듯이, 우리가 일상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주장이 옳다고 수용하면 그것에 따르는 희생이 수반된다. 어떤 일은 분명히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인데 잘 모르는 사람이 자기가 잘 하고 옳다고 주장하는 대로 두면 많은 경우 일을 그르치고 그렇게 되면 일을 수습하기 위한 수고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희생인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상의 일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유대인과 로마인이 가진 선악의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되신 것이었는데 그렇게 사람이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이유는 다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크게는 나라간의 전쟁이고 작게는 우리가 만나는 일상에서 다른 기준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갈등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삶은 많은 희생과 수고가 따른다. 그것이 사랑이다. 내가 사회적으로 볼 때 선하게 여기는 선한 일을 베푸는 것은 사랑의 변방에 있는 것이고, 자신이 옳다 주장하는 그 주장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기준에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셨고 그것을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 것이라고 하신 것도 바로 그 이유다.


그런 수고와 희생은 필연적으로 육신을 가진 삶을 소모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육신을 가진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서 보이신 길과 같은 생명으로 소진하고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숨은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있어 가장 귀한 것이기에 육신의 모든 가치를 대표하는 것이다. 바로 그 목숨을 버리고자 한다는 것은 육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다른 사람이 옳다고 주장하는 그 주장 앞에.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 산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선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삶을 산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모두가 자기 삶이 옳다고 또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추구하며 사니 세상은 항상 소란하고 갈등이 넘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은 이것이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죄가 만연하다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은 그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선함을 인정받는 것은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일이든 자신에게는 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주장하는 것 그것이 선이라는 것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선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신 것도 그 때문이다.


누군가 딱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정의하라고 한다면 나는 자신의 생각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 자신의 가치관이 선한 것이고 옳은 것이라 주장하는 그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내는 생각과 그로 인한 상황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는 것은 내 생각 아닌 모든 것에 순종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진정한 선함이다. 사람의 육신은 바로 그것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수용하면서 산다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삶을 사는 사람으로 인하여 갈등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평화의 왕인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누가 가다가 휴지를 주우라고 하면 주워야 하는 것인가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 떨어진 휴지를 보고 그냥 가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휴지가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또 세상이 자기에게 준 권세로 그것을 주우라고 요구하면 줍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다.


그렇듯 어떤 일 앞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요구되는 것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이고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살았을 때 십자가에 그렇게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고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삶을 사는 것, 모든 사람 모든 상황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반대로 목숨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육신의 번거로움과 육신의 체면과 자기가 생각하는 의로움에 대한 자존심을 챙기고 얻는 삶이다. 그런 것은 누구나 좋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신앙 안에서 보면 문제가 좀 다르다. 그러니까 길에서 전도하는 사람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그것이 정말로 좋고 선한 것이며 진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맞지만 그것을 그렇게 강제하듯 주장하는 순간 자신의 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려고 예수님을 못 박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존귀한 분이라는 것을 지키려고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바로 그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바로 신앙을 강제로 전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고, 진리는 언젠가 다 대접을 받는다는 것만 알아도 예수님이 진리라는 그 절대성은 결국 다 인정받게 되는 것인데 사람이 그것을 주장하는 순간 유대인과 같이 자신의 선함이 되는 것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나,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시는 말씀이 싫은 사람, 생각지도 않고 있는 사람을 영업하듯이 교회에 데리고 오라는 것이 아니다. 길에 가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잔치를 채우라는 것은 목숨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열심히 살아서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오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삶, 목숨을 버려가는 삶이 주는 성령의 감동이 있게 하라는 말씀이다. 길이라는 것이 인생의 여정이고, 가장 사람을 강하게 권하는 것이 그 마음 안에 스스로 감동하여 움직이게 하는 것이고, 때와 무관한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삶이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많은 신앙인들이 목숨을 버리는 것을 순교라는 특수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아니 지금 내 앞에 벌어진 상황에서 모두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하고, 자신의 목숨과 육신의 평안과 안위를 위하여 추구하는 그 모든 주장 앞에 나를 내어 주어 십자가를 지듯 수고하고 희생하는 사랑으로 사는 것, 그것이 정말로 예수님의 제자요,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어 성경의 모든 말씀을 범하려고 죽어라 애를 써도 항상 지키고 사는 삶이 되는 하나님 세계의 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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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는 무엇인가? 보통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인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런 문제들은 많은 경우 상대적이다. 다른 사람에 비하여 건강이 좋지 않으면 그것이 자기의 십자가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보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면 경제적인 문제가 자기 십자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십자가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다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것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가진 자신의 특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가진 고유한 자신의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 보편성이 있게 말씀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진 자기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는 독립된 자신의 인생, 육신을 가진 삶 그 자체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오라는 것은 육신 가진 너의 삶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는 삶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산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육신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모든 사람이 가진 육신이 바로 자신의 십자가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속한 육신의 삶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이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행위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필리핀인가 어떤 나라에서는 실제로 그런 행사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건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는 관점이 아주 초보적인 결과로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는 관점은 아주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들은 그 명령의 표면적인 실천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의미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아니다. 이는 이 블로그 요한일서에서 다룬바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또 하나의 행동 규범으로 보면 그것은 율법주의가 되고, 반대로 의미만 알면 되지 행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거나 필요 없다고 하면 영지주의가 된다.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성경의 모든 말씀은 마치 생명의 본성 곧 유전자가 그 생명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의 의와 목적이 사람 안에 생명처럼 있으면 그 생명이 가진 본성대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 역시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를 지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여주신 그 의가 사람 안에 생명의 본성으로 자리하고 있으면 예수님과 같이 자기 십자가 곧 육신 가진 삶을 예수님과 같이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명을 나타내는 한 방법으로,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으로 인하여 실재로 십자가를 질 수도 있는 것이다. 베드로처럼.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보는 이런 관점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아무 것도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앞서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사람 안에 하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으로 회복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것이 회복되어 사는 삶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육신을 가진 삶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며,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이며, 그 총화가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육신을 가진 이 삶을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육신을 가진 삶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은 삶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하나님을 모르고 모독했다고 죄인이 되어 사형을 당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삶도 어떤 분야, 또 어떤 일에 마주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 수긍해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삶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일을 마주 했을 때 그 일에 대하여 분명히 잘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이 자기의 생각대로 하려 하는 것을 수용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반드시 문제가 되고 그 문제에 대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는 수고를 감당하여야 한다. 바로 그 수고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은 곤고한 일인 것이다.


이 블로그에 자주 인용하는 정도전과 정몽주의 마지막 대화가 그것이다. 정도전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는 반드시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자기 손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정몽주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면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나라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지켰다. 그것이 자신이 믿는 이상적인 국가에 대하여 자신이 십자가를 진 것이다.


사람들은 작은 일에도 일이 잘못되면 버릇처럼 큰 일 난다고 말한다. 종이컵 하나 사용하는 것도 때로는 '사람이 그래서 되느냐?'는 핀잔을 들을 수 있다. 그 작은 일 하나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모든 일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함에 굴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굴복한다는 것이 바로 죄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일에 대하여 상대가 옳다고, 이긴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기에.


그러면 사람들이 일에 따라서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싶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일 보다 더 급박하고 어이없는 것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 하는데 그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데 끌려 가셨다는 것은 온 인류의 구원하는 일이 망쳐질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예수님의 목숨을 요구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끌려 가셨다.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의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는데도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자기가 생각하는 선함이 아니라고 죽이려고 하는 이 상황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과 로마인들이 자신들이 선하다 주장하는 그 주장 앞에 목숨을 내어 놓으셨다. 온 인류를 구원할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셨다. 그것도 극악무도한 죄인과 같은 사형수가 되어서 말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다. 그것이 육신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다.


그러므로 우리도 살아가면서 사람 사이에서 무엇인 선한가를 다툼에 있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선하다고 주장하고 나는 틀린 사람으로 만드는 것 앞에 나를 항상 내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보다 더 심각하게 나에게 선을 주장하는 일이 죽을 때까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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