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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몇 가지 당부를 하신다. 금이나 은이나 동과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지 말고, 여행을 위한 주머니나 두벌의 옷과 신발 그리고 지팡이를 가지지 말고 하나만 가지고 다니라고 하셨다. 이것은 그냥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청렴하게 다니라는 말씀 같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먼저 여행을 위한 주머니라는 것은 전도하러 가는 것에 있어 다니는 것 그 자체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예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행이 목적이 아니라 전도가 목적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나그네와 같은 것임을 생각해 보면 우리 육신의 삶을 위하여 금과 은과 동을 예비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의 제자들에게 하신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두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신 것은, 옷이라는 것이 신분이고 형식이라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말씀이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두 가지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삶은 온전히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 그것 하나이어야지 다른 것을 옷 입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 그것뿐이고, 전도라는 것이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나타내는 것이기에 전도하는데 두벌의 옷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아니 두벌 옷을 가진다는 것은 오히려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정리해 보면 제자의 삶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 그 자체일 뿐, 그것을 위하여 뭔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돈이 있어야 한다거나, 좋은 교회가 있어야 한다거나, 목사라는 신분(옷)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에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육신을 가진 삶, 이 하나의 옷과 신분이면 족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목사가 아니면 복음이 전해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물론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목사라는 신분이 좋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니면 어렵다고,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좋은 교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두벌 옷,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그 형식 이외에 고상함이나, 예의바름과 같은 것이나, 박사나 교수나 선생, 그리고 때로 정치적으로 높은 신분이 있으면 좋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행 곧 전도를 위하여 주머니를 가지지 말라고 하신 것이 이 모든 것을 대변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천국 복음을 위하여 어떤 주머니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사라는 신분이나 좋은 교회, 좋은 수련원, 교인들이 쉴 수 있는 전원단지나 휴양지, 아니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이나 명성 그런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부 전도(여행)를 위한 주머니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것은 제자로서 살면 가질 수 있는 금과 은, 두벌 옷, 별도의 주머니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가 지금 그런 삶을 사는가?' 할 수 있지만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좋은 교회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생각, 세상에서 성공하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전부 그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7-8)

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만나면 병든 자가 회복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문둥이가 깨끗하게 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이다. 이것은 가서 기적을 행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회복하라고 하신 것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기 전에 다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회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단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 그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단지 육신의 연약함과 육신이 죽고 귀신 들린 것을 살리고 회복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것을 살리고, 하나님이 보실 때 귀신 들린 것을 회복시키고,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문둥이를 고치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회복시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살아 있다 할 수 있는 생명을 가진 자로 회복시키라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회복시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제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심겨져서 그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그 삶을 주관하는 사람이 되게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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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35-10:15 제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4. 14:16 Writer : 김홍덕

마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성경의 문맥으로 보면 제자들을 이때 일시에 부르신 것이라기보다,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 요한 그리고 마태 이렇게 부르신 것이 앞에 있기에 이 부분에서 제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온 성에 두루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다가 무리를 보시고 추수할 일꾼이 없음을 안타까워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서 이방인이나 사마리아가 아닌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고 제자들에게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어 보내셨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0:9-15)

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언뜻 보면 매우 공격적이고, 또 능동적인 말씀으로 보인다. 실제로 신천지와 같이 어리석은 집단은 이 말씀을 그렇게 보고 복음 전하는 것에 대하여 아주 능동적이고 공격적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추수꾼이라는 이상한 신분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에게 가라고 했다고 기존 교회에 보내고 하는데,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멍청하기 짝이 없다.(이 멍청함은 별도로 이야기 하면 좋을 것 같다.)


이 말씀은 기본적으로 능동적인 말씀이 아니다. 아주 수동적이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는 아주 능동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하여는 전하는 제자들의 입장에서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 대하여는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을 저주하거나 심판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나와서 신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하신다. 이것은 너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라는 의미이지, 복음을 전할 때,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라는 협박이나, '예수 그렇게 믿어서 되겠느냐?'며 심판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비단 복음을 전하는 것 뿐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그 결과에 관여하려 하면 온전하지 못한 것이 되는 것이 복음이다. 결과와 결론적인 심판과 같은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성급하거나 조급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 복음이 옳다는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제자의 삶이나, 예수님의 삶이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생각할 때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같은 사람은 다투지 않는다. 절대로. 이것은 성경의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복음이 옳다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죄인 취급하고 심판하고 그러면 지옥 간다고 협박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죄는 사람이 가진 생각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것 역시, 이것 안 믿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하는 사람도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그 사람 너머로 들어가려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가서 복음을 능동적으로 전하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그렇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보여주는 것이었지, 사람에게 작용하거나 강요하거나 협박하거나 심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너희가 나를 버릴 것이라' 했지, '그래서 되겠느냐?' 라는 식의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그냥 십자가로 끌려가시기만 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자신들도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게 되는 제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통하여 가져야 할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그렇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로서 산다는 것, 또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산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을 바로 <제자>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목적이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있거나, 아니면 너희도 기적을 일으킬 때 나와 같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 기적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전하시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 역시 기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문둥병, 중풍, 소경, 맹인, 귀머거리, 귀신 들린 것 그 모두는 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상태가 나타내는 증상이 그렇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런 각종 질병이 보여주는 증상과 같이 비정상적인 관계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면, 그러니까 그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회복된다는 것을 전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를 떠나 자신의 의지와 열정으로 예수 믿지 않으면 안 된다고 협박하고 강퍅하게 하며, 또 심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죄를 짓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다 가서 전하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냥 십자가를 지셨던 것 같이.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나와 같은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는 뭔가를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삶이다. 제자란 그런 것이다. 사람이 언제나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이신 십자가의 도와 같이, 사람이라는 실존이 어떤 것인지를 보이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그것이 제자의 삶이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그 마음에 스스로 찔리고, 스스로 심판하며, 스스로 돌이켜서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잉태하고 거듭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제자가 아니다. 그것은 그냥 예수님을 보고 '주여!, 주여!'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병 고치는 사람일 뿐, 예수님과 상관이 있고, 예수님께서 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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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32-34 귀신 들린 벙어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3. 17:10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벙어리를 고치시는 장면이 기록으로 나온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벙어리가 귀신 들렸다는 것이다. 이건 좀 흔한 예는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즉 귀신 들린 것과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으시니 벙어리가 나았다는 것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귀신이 들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의를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흔히 '미쳤다'고 비아냥 그리는 것은 기본적인 도리를 상실했을 때 그런 소리를 한다. 즉 사람의 기본적인 의와 도리를 상실하면 미쳤다고 하듯이, 귀신 들렸다는 것, 그리고 그 귀신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떠나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지배해야 할 머리에 귀신이 자리하고 있을 때 귀신 들린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머리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앞에서 군대 귀신은 예수님께 돼지에게 자신들이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해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바다로 뛰어 들었다. 즉 귀신의 자리는 바다, 곧 세상이라는 것이다. 바다는 세상의 모든 물이 다 모이는 곳이고, 물은 사람의 목마름을 해갈하는 절대적인 생존 요소이다. 사람의 육신의 목마름이 그러하고, 또한 사람이 스스로의 존재 이유와 의미와 목적에 대한 갈망도 물과 같은 말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물을 찾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닷물은 세상의 모든 물이 다 모여서 넘쳐나지만 그것을 먹으면 갈증이 더하고 결국은 그 갈증으로 죽듯이,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도 세상의 과학과 철학과 학문과 재물과 명예와 같이 넘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갈증을 해갈하려고 하지만 그것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하고 결국은 그 갈증으로 죽게 되는 것이 생수이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이고 죄다.


그러므로 귀신 들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할 사람의 머리, 곧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 같은 세상의 것으로 머리와 생각이 가득차서 그것을 의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을 귀신들린 자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머리가 세상의 것으로 가득 찬 사람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귀신 들린 벙어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귀신 들린 벙어리는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한 사람이 아니라, 오늘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머리와 생각과 의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섞여 있는 바닷물을 마심같이 세상의 과학과 철학과 재물과 명예를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귀신 들린 사람이고 벙어리인 것이다.


그 귀신 들린 것과 벙어리는 어떤 상관인가? 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귀신 들렸다는 것, 자신의 삶의 목적과 가치관을 세상에 두고 있다는 것은 사실 벙어리 정도가 아니라 죽은 것과 같은 인생이기도 하지만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말이라 할 만한 것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기에 벙어리인 것이다.


실재로 성경에서는 세례 요한을 두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고, 예수님은 복음을 전한다고 하고 말씀하신다고 한다. 세례 요한이 누구인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가 아닌가? 그 말은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큰 자라는 말씀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족보는 항상 남자가 아들을 낳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보통의 사회에서도 아들이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으로도 표현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육신으로 남자 여자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이 블로그 전체를 통하여 말한 바 있다.) 여자가 낳았다는 것은 형식에서 비롯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와 같은 형식인 육신의 행함과 소유로 이루려 하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 세계의 최고봉이 바로 세례 요한인데, 그 세례 요한은 복음이나 말씀이 아니라 소리를 외쳤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으로 하나님의 세계에 이르는 세례 요한도 말이 아닌 소리인데, 귀신 들린 자가 하나님을 들으실 수 있는 말을 하는 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귀신 들린 것과 벙어리는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실재로 군대 귀신 들린 자 역시 무덤 사이에서 소리를 지른다고 했다. 벙어리가 다른 것이 아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서 벙어리가 회복 되었다는 것에서 보면 여기서 말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하는 말을 말이라고, 또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하나님이 보실 때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하는 말, 즉 머리에 세상에서 비롯된 것을 추구하는 귀신같은 가치관이 주관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의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서 비롯된 말을 비로소 말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귀신 들린 벙어리를 회복시킨 것이다.


사람은 서로 같은 언어를 구사해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고 할 때가 있는 것도 그것이다. 의도되고 필요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 소리다. 바벨탑을 쌓을 때 말을 다르게 하셨다는 것 역시 그것이다. 언어가 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의가 달라지면 서로의 주장이 달라지고 그 말들이 의가 다르므로 달라지는 것을 말씀 하시는 것이다.


그와 같이 사람이 아무리 언어 구사력이 훌륭해도 사람이 보실 때는 다 소리다. 게다가 그 말들이 세상에서 비롯된 것을 가치 있게 여기고, 의로 여겨서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더 나아가서,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외치는 것은 다 말이 아니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는데, 당연히 그런 말들은 육신은 말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다 벙어리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보실 때 말이 아닌 소리를 외치는 사람이나, 심지어 하나님이 보실 때 말이라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어떻게 고침을 받는가 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나고 나야 비로소 소리가 말이 되고, 귀신 들린 것 같이 세상의 것을 옳다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으시는 말을 하는 것이다. 미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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