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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공관복음을 통 털어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크다.>고 칭찬한 사람이 두 사람이 있다. 물론 특별히 믿음이 크다고 한 것이 예수님의 다른 칭찬과 아주 특별한 차별성이 없을 수도 있지만 저자가 보는 관점에서 그것은 강조하고 싶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마가복음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나오는 이 가나안 여인과 종이 중풍에 걸렸을 때 예수님께서 가시려고 하자 말씀만으로 치료해달라고 한 백부장(마 8장), 이 두 사람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그 믿음을 더 칭찬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자신도 남 밑에 있기도 하고 또 자기 수하에도 사람이 있어 그 사람에게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온다면서 예수님께서도 말씀만 하시면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고, 이 가나안 여인은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분명하게 인정하는 모습이 기록되었는데 그 두 모습은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아주 분명하고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말씀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심판 날에는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하겠다.'고 할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구분이 어려운 것 같고, 어떻게 해야 예수님께서 심판 날에 나를 아시는 것이 될지가 궁금하고 의문스러울 수 있지만 정작 믿음이라는 것은 너무 간단한 것이다.


믿음에 대하여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가장 큰 오류는 신념과 헛갈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뭔가에 대하여 자신이 능동적이고 또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믿으려 애쓰고 또는 이루려고 자신의 의지와 마음을 강력하게 표현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은 다 신념과 자신의 의지일 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믿음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떤 것일까? 믿음은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 믿음은 아주 순종적인 것이다. 이사 가는 날 아침에 그 집의 어린 아이가 자신을 데려가지 않을까 싶어 노심초사하거나 자신이 이 집의 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또는 같이 이사 가겠다며 부모에게 그 믿음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 그냥 가만히 있거나 아니면 이사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자기 놀고 싶은 것을 하며 노는 아이의 마음이 정말로 그 부모를 믿는 믿음이라 할 수 있다.


믿음은 정말로 수동적인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사울에게 사무엘이 한 이야기인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것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정말로 순종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사를 드린다는 것, 수양의 기름을 태워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정말로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믿음과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제물로 또 제사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능동적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라고 해서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제사의 형식을 받고 싶어서 제사를 드리라고 한 것이 아니다.(그런 하나님의 마음은 미가서와 같은 여러 선지서에서 말씀하시고 계신다.) 제사의 결국은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에 제사의 완결인데,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살아 있는 체로 드린다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을 불살라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것에 허용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 숨 쉬는 동안 이 육신의 살아있는 삶을 하나님께서 그 의지대로 사용하실 수 있게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이 몸을 통하여 그 의를 온전히 드러내실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 바로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순종적인 마음인지 알 수 있다.


예전 유머지만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와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고 일어서서 가는 그 뒤통수에 하나님께서 "야! 나도 말 좀 하자."라고 하신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사람들은 하나님을 들으려 하지 않고 마냥 하나님께 뭔가 해 드리려 하고, 또 뭔가 보이려 한다. 그나마 뭔가 받으려고 하는 것이라고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육신의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한 것들뿐이다.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자신과의 상관성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 그대로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알지 못한다고 하실 것이다.(그러고 보면 눈치는 있는 셈일 수도 있다.)


믿음의 어원이  Pi'stis이다. 그리고 이는 충성을 의미하는 Pistos와 어원이 같다. 다만 방향이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를 충성되게 여기신다고 할 때 Pistos를 사용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Pi'stis를 사용한다. 즉 이것은 누가 일방적으로 믿고 충성하는 관계가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가 형성됨으로 인하여 생기는 마음인 것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하나님이 정하신 관계가 성립되면 자연스럽게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되고, 하나님은 사람을 충성스럽게 여긴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 가나안(수로보니게) 여인은 언뜻 보면 예수님께 능동적으로 찾아 왔다는 것에서 수동적인 믿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이 이런 것에 수동적이냐 능동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수동적인 것이라는 것을 잘못 이해하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된다. 예를 들어 물에 빠진 생쥐가 자신이 물에 빠진 상황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생쥐가 순종해야 하는 가장 먼저는 생명으로서 가진 생존 본능,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대학시절 친구의 어머니이자 대학부 지도교사였던 권사님께서 아주 기도를 열심히 하셨다. 그런데 가슴이 점점 커지면서 고통을 받는 병이 생겼는데 하나님께서 고쳐주신다며 끝내 병원에 가지 않으시고 돌아가셨다. 그 상황의 모든 것이 잘못된 믿음이라 하기는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순종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가나안 여인에게 있어 순종의 모습은 먼저 자신이 인생으로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운명에 순종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메시야, 자신들이 그려낸 메시야를 만나려고는 했지만 정작 인생으로서 하나님께서 보이시고 보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만나야 하는 운명에는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먼저 그것에 순종한 것이다.


그리고 이 여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지 않았다. 이는 선악과를 먹고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과 같이 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숨은 아담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녀는 이방인으로서 구원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그 당시의 모든 종교적 가치관 안에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 그리스도 곧 메시아를 만나기에는 부끄러운 이방 여인이라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즉 자신의 모습을 아담과 달리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 믿음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순종하지 않는 것은 성경말씀과 반대로 살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역사 이래로 늘 인간에게 불순종한다고 한탄하시는 것은 인간이라는 이 육신을 가진 삶에 대한 가치관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에 부족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지켜 행하여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불순종하는 것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육신을 가진 인생 그 자체가 하나님이 보실 때 온전한 목적이었음에도 사람들은 자꾸 이것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순종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육신을 가진 삶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과 또 이 육신을 가진 이 삶이 하나님의 그 목적에 너무 온전한 존재라는 것,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순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라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행하여야 그 부족함이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의 목적이 그 삶 안에 있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소경이라고 하시는 것이고, 그런 논리로 사람을 이끄는 이들을 소경이 소경을 이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자신이 이방인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 같은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 가나안 여인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는 개와 같다고 자신을 여겼지만 그런 자신조차도 예수님을 만나야 귀신 들린 딸이 나을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과 같이. (귀신들렸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리해야 할 사람의 의식이 빼앗겼다는 것이다. 게다가 딸이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모든 인생이 여자와 딸과 같은 존재이기에 딸이 귀신 들렸다는 것은 인생이 하나님을 잃어 버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인생의 의식의 원래 주인인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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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때로 어떤 것에 매몰되어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곤 한다. 그런 경우에 대하여 많은 경우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본다."고 하거나 "전투는 이기고 전쟁은 진다."는 것과 같은 표현을 한다. 또한 단체 스포츠의 경우 개인적인 업적이 팀 성적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보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지속적으로 교훈을 주시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잊고 율법 자체를 지키는 것에만 매몰되어 버린 것을 늘 말씀하셨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이 생명과 같은 것으로서 그 마음 안에 생명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면 그 생명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보이는 삶의 태도들이 바로 율법으로 기록된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조문으로 표현된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시작한 것이다. 즉 생명은 모르고 그 모양만 지키려 하다 보니 그 모든 율법이 지향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간 정체성의 본질인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그 분을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장로의 유전에 대하여 시비를 걸어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시는 말씀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드린바 되었다고 하면 부모에게 드릴 귀한 것을 드리지 않아도 좋다고 율법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예수님도 육신의 부모를 부인하는 것과 같은 말씀을 몇 번 하셨는데 그것과 이것은 좀 다른 이야기다. 그러니까 같은 말이라도 예수님이 하시면 다른 의미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다른 말씀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누가 나의 부모이냐?"라고 반문하셨던 것은 그리스도의 의, 곧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반문이다. 즉 그것은 육신의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생명이 된 사람들 안에 임하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바로 진정한 부모, 곧 우리 인생의 정체성의 뿌리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지금 이 말씀은 크게 보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신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큰 의미로 보면 사람이 자신이 인지할 수 있는 사회적 상황과 또 자신이 세상에 들어온 과정인 혈연 등으로 얽힌 자신의 삶에 대하여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하여 명확한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흔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하는 문제로 보기도 한다. 얼핏 이것은 좀 거리가 있는 논제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에게 그 부모는 육신에 관하여는 근원이기는 하지만 사람이라는 종족 안에 속하여서 the human으로서의 정체성을 부모가 가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것은 많은 이단들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이단들 심지어 교회들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명분이라면 육신의 부모를 등지는 것과 같이 엄연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일부를 외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심지어 그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찬양하기 까지 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그런 상황과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는 상황은 거의 같은 것이다. 즉 교회나 신앙은 지키려하나 하나님의 뜻은 모른다는 것이다. 즉 나무(신앙과 교회 생활)는 보지만 숲(하나님의 의와 뜻을 아는 것)은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모순된 관점을 가진 이들이 볼 때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것인지로 가늠하는 어리석음이 신앙이기 때문에, 손을 씻고 먹지 않으면 더러운 것이 사람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는 그 마음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더러워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즉 심령에 하나님께서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면 숨 쉬는 순간마다 다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간첩이 아무리 의롭게 살고 지역사회에 공헌을 해도 간첩이라는 그것 하나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은 하면할수록 죄가 늘어날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듯이, 사람이 하나님의 의는 심령 안에 없는데 그가 율법을 지켜 행하면 행할수록 죄는 늘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이유와 이 세상에 처한 자신의 모습이과 환경이 하나님의 뜻 아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체 교회에 가고 하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드렸으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입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즉 그들은 손을 씻어서 깨끗한 것을 입으로 먹을지는 모르지만 안에는 더러운 것이 있을 뿐이고 그런 모습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도, 또 인생을 둘러싼 모든 삶의 환경의 의미도 모르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런 모습은 지금도 많다. 교회생활, 신앙생활이라는 명목 하에 육신의 부모가 신앙이 없으면 무시하고, 또한 교회 밖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짐승 같다고 까지 하면서 무시하는 모습은 감춰진 것 같지만 실제로 많은 신앙인들의 가치관에 깔려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복음을 종 된 모습으로 섬기면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적선하듯 나눠주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것은 그 행위 자체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하는 이유, 곧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 더 문제다.


사람 육신을 가진 것은 이 육신이라는 형식이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내용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형식이 속한 세상과 사회 역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곳이고, 관중이고, 또 그림을 그려낼 도화지나 배경과 같은 곳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은 분명히 죄악 되고 하나님 보실 때 벌레 같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벌레로 규정하는 것이나 죄인임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품성과 생명과 이미지(형상)을 나타내기 위하여 예비 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 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것에 대하여 잘못 생각한다. 먼저는 인간이라는 정체성과 삶의 목적을 잘못 알고 있다. 즉 인생이라는 것이 이대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므로 지속적으로 갈고 닦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처음이고 개인적인 문제라면, 이 인생이 속한 세상이 죄악이 만연해서 그 안에서 나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야할 장소가 세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과 엮이는 것을 신앙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일면 맞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육신을 주시고 또 그 육신을 세상에 속하게 하신 이유를 안다면 세상의 일부이고 또한 자신이 육신이라서 연결된 부모와 사회적 현실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정하고 부인하며 항쟁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몰라서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 시비를 건 유대인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때 유대인들과 생각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그런 것을 보면 성경말씀은 특정 시대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고 놀랍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것이 단순히 육신의 부모에게 귀한 것을 드리는 것이라는 문제로 본 것이다. 마치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하지만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이 허락한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만나고 엮인 부모님과 또한 세상의 여러 가지 법과 질서도 다 하나님의 목적 아래 있다는 것을 알라는 말씀이고, 그렇게 육신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심령은 그 안에서 내는 것이 다 부정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조문의 모양을 지켜내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을 가진 자가 되라는 의미고,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것은 육신의 부모를 주신 뜻이 이 육신을 세상에 속하게 하신 이유를 알면 부모도 공경하고 하나님도 공경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심이다. 그러니까 속, 곧 사람의 속에 그런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있으면 율법을 행위의 모양으로 지키는 것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를 아는 생명에서 비롯된 그의 삶이 사람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삶을 살아내는 사람에게 세상의 법과 또 세상의 부모와 모든 사회적 상황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도화지와 같은 것임을 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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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1-20 장로의 유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6. 13. 13:10 Writer : 김홍덕

유대인들의 장로들의 유전에는 먹을 때에 손을 씻고서 먹으라는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제자들이 비위생적으로(?) 그냥 먹은 일이 있었는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를 가지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어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다고 반론을 제기 하셨다.


이것을 그냥 사람들 사이에서 "너 왜 그러는데?" 했을 때, "너도 그때 그러지 않았냐?"하는 어떻게 보면 유치하지만 보편적인 시비 같지만 이건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에 이어서 사람이 입으로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으로 인하여 더러워진다고 하신 말씀 때문이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생각하는 장로의 유전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선하게 혹은 악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비해, 예수님께서는 사람 안에 어떤 것이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선한지 악한지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차이가 있다. 즉 방향성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생명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그 존재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그 생명을 알아보지만, 생명이 아닌 가공되고 제조되는 것들은 밖에서 안으로 형성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 심겨져서 생명이 되어 그 사람을 통하여 표현됨으로 알 수 있는 것이고, 바리새인들의 생각인 율법적인 가치관은 사람의 행동을 규범 아래 두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차이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ㅇ이에 끊이지 않는 쟁점이었다.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또 사두개인 등 당시 종교적인 열심을 가진 모든 유대인들의 가치관은 그 색깔만 다를 뿐 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악한 것이 정해진다고 믿었다. 다만 그들이 계파를 달리한 것은 그 행동이 무엇이며 또한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여 지킬 것인지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지금 이들이 예수님께서 시비를 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손을 씻고 먹어야 한다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사람이 부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는 손을 씻고 먹으라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율법 전반으로 보면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은 다 어떤 행동의 결과가 사람을 정하게 또는 부정하게 한다고 믿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정체성을 사람 밖에서 안으로 형성해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다.


율법이라는 것이 괜히 하나님께서 사람이 지키기 어려운 것을 제시하시고 사람이 그것을 지켜내는 정도를 보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를 보시려고 주신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라도 범하면 아무 소용없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율법을 지킴으로 선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무엇을 이루어내는 것으로 의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생각을 해야 한다. 적어도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사람이라면 이건 큰 의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으니 사람의 능력과 한계를 분명히 아실 텐데 어째서 사람이 지키지 못할 것을 주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test)하시기 위함인가?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인간인 이상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로교통법이나 세법을 생각해보면, 범칙금을 잘 부과하고 또 세금 체납자의 재산을 잘 몰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위반을 하고 범칙금을 내지 않았다고, 탈세를 했는데 처벌 받지 않았다고 법을 지킨 것 역시 아니다. 이것은 누가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법이나 교통법이 범칙금을 부과하고 재산환수를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율법도 마찬가지다.


율법은 교통법이 범칙금을 부과하듯 그 법이 명시한 것을 지킨다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통법의 목적은 범칙금 부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주행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듯, 율법은 그것을 지켜내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다른 방향성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안에 생명의 본성과 같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가는 모든 모습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지만, 목적이 없이 그것을 지키는 것에 매몰된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사람의 정체성이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면 뭘 해도 다 부정하고 더럽다는 것이다. 손을 씻든 그렇지 않든 그건 무관하다는 것이다. 즉 범칙금을 부과 받았든지 아진지가 교통법의 준수 여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영혼, 의롭고 선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그것은 동일한 마음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아니 핵심이다. 하나님의 법은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져서 그것이 생명이 되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면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도 다 온전한 것이다. 아들로 난 자가 행동에 따라 종이 되지는 않듯이.


신앙은 어떤 행동이 핵심이 아니다. 행동은 정체성의 표현이고 종속된 것이며 결과이고 다음 문제다. 그래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 안에 있으면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하나님의 법대로 산다. 개로 태어나면 개로 사는 법을 가르칠 이유가 없는 것이 같은 이유 아닌가?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도 또한 같은 것이다.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면 그 사람은 더러운 것을 내어놓을 방법이 없다. 그게 가능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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