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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51-52 옛것과 새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6. 7. 22:54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대한 비유의 마지막에는 천국의 서기관은 옛것과 새것을 내어주는 집주인과 같다는 말씀을 하신다. 문맥상으로 보면 뭔가 좀 갑자기 나온 말씀인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를 알아들었는지를 확인하시고 그렇다고 하는 것을 듣고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써서 천국은 옛것과 새것을 내어 주인 집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는 분명한 연관이 있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는 이렇다.

  • 씨 뿌리는 비유
  • 가라지 비유
  • 겨자씨 비유
  • 누룩 비유
  • 밭에 감춰진 보화 비유
  • 진주 장사 비유
  • 그물에 잡힌 물고기 비유
  • 천국 서기관의 비유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은 영어성경에서는 teacher로 나오기도 한다. 즉 천국의 의를 알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서기관이라는 것도 말씀을 옮겨서 적는 사람이라는 것에서 보면 의미가 비슷한 것이라 생각된다. 어쨌거나 천국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천국의 의가 자신의 스승과 같아서 그것을 자신이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천국, 곧 하나님 나라의 의를 전하는 사람은 집 주인이 자기 곳간에서 옛것이나 새것이나 맘대로 내어주는 사람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참 묘한 말씀이다. 외식이라는 관점에서나 율법적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것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에 대하여 항상 '그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앙의 질문들도 해답이 아닌 정답을 요구하는 질문들을 많이 한다.


생각해보면 주인이 자기 곳간에 있는 것을 맘대로 내어주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옛것이든 새것이든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천국의 비밀을 전하는 사람도 집주인이 자기의 것을 옛것, 새것 구분 없이 내어줌과 같이 틀에 메이지 않고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으로만 본다면 구약은 성경책에서 구약전서라고 나누어져 있다고 구약이라는 틀에 가두고, 신약은 또 같은 관점에서 신약이라는 틀에 가두면 옛것과 새것을 구분하여 맘대로 나누어주지 못하는 주인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옛것이든 새것이든 주인이 자신의 곳간의 것을 내어 준다는 것은 그렇게 모은 이유가 어떤 것을 위하여 내어주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곡식이라면 그것은 햅쌀이든 묵은쌀이든 다 목적이 먹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즉 주인이 먹기 위하여 모아둔 곳간의 쌀을 먹는 일을 위하여 어느 것을 내어주든 상관이 없고, 그야말로 주인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대로라는 것은 법이나 룰도 없이 무조건 자기 맘대로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곳간 내용물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천국이라는 곳도 그와 같다, 천국이란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있고, 또 나라의 의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가 된 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러니까 천국을 위하여 사람과 세상을 만드시고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의로 다스려지는 나라를 계획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천국이나 하나님의 의, 그리고 인생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께서 주신 존재의 목적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시는 모든 것은 집 주인이 자기 곳간에 있는 것을 마음대로 내어주듯이 이 세상의 것도 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모든 것을 말씀하시듯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모양이니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는 생명이 그 안에 있어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천국의 제자, 곧 천국의 의가 자신의 의가 된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것은 결국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으면 어떤 모습으로 그 의가 나타나는지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이 그 안에 있어 본성이 나타나듯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의 의가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의 삶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정말로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성경말씀을 보면서 이렇게 행동해야 천국에 간다고 하지 않기를 늘 바란다. 천국에 가는 사람,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삶이 예수님의 비유와 같은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이 천국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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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노라면 필수적으로 누가 천국의 선택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고, 반대로 누가 심판을 받아 들어가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생이 가진 가장 큰 문제인 불확실성과 맞물려서 다양한 형태를 낳는다. 그러니까 어떤 이들은 이런 불확실성이 믿음을 낳고, 어떤 이는 포기하는 방종의 모습을 보이고, 더 나쁘기는 이런 현상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종교성을 띈 집단이나 사람들도 있다. 종말론이 바로 그런 부류이다.


천국에 누가 들어갈 것인지는 사실 분명하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므로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께서 옳다고 여기는 것을 자신도 옳다고 여기고,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여기는 것을 또한 자신도 악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들어가고 속한 나라이다. 한국은 민주주의와 자유경제를 의로 삼고 있고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속한 나라이듯이 말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반대인 사람, 곧 하나님께서 옳다고 여기는 것과는 다른 것을 옳다고 여기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악함과 다른 것을 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쟁점은 오직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논제이다. 동물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모른다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동물이 내세나 다음을 위하여 자신의 본능을 제어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보면 이 천국이라는 것에 대하여는 오직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이 같은 것을 의롭게 또한 옳다 혹은 악하다고 하는지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관점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사람이 사람의 모습과 행동과 삶에 대하여 무엇을 선하게 여기고 무엇을 악하게 여기는지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과 같은가 다른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즉 사람이 사람을 보고 선하고 악하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과 기준이 하나님과 같은지 아닌지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의가 되었는지를 구분하는 것이고, 이 땅에서 그런 의를 가지고 살던 사람이어야 죽어서 하나님의 의로움 안으로 들어가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마치 그물에 가득한 물고기 중에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그렇지 않은 것을 버린다고 하셨는데, 무엇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기준이 분명히 그 어부에게는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볼 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지를 분명하게 하는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 합당하면 천국에 그렇지 않으면 버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천국은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것을 언급하는가 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는 다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것이 설사 교회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천국은 사람이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를 가지고 계신 나라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에 뜻에 대하여 사람과 하나님이 다르게 생각하는 것에 기인한 것이다. 아담도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에 반해 하나님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생각하신 차이에서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을 믿는 것이 행위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또 지금에 이르러서는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여 교회를 크게 짓고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고 하시는 것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하나님과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사람에게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이 무엇이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게 사람에게 보이시고자 하신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이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시고,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기를 바라시는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다 사람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의이고, 또한 천국에 가는 기준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그 기준에서 아무리 주여! 주여! 해 봐도 결국 하나님은 그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을 부족하게 여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을 계속 갈고 닦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훌륭하게 할수록 훌륭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을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그가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었는가 물을 때에 하나님을 믿어서 그렇다고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가 하는 기준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치명적이 문제가 있다. 사람의 원래 모습을 부인하고 그것에서 멀리 갈수록 더 훌륭한 사람이고 하나님 나라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자신의 모습, 곧 사람 본래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긴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고, 또 사람을 단련시킬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날 평지에 모인 사람들이 흙(사람을 흙으로 만들었다.)을 단단하게 해서 하늘에 이르려고 한 생각과 같은 것이며, 죄라는 것이 자기 자리를 떠난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땅에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아담은 벗은 몸이 부끄러워 가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벌거벗겨져서 달리셨고, 바벨탑은 쌓은 사람들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하늘에 닿으려 했지만 예수님은 손과 발에 못 박히셔서 사람의 행위로 하늘에 오르거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시면서 그 부끄럽고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그 모습이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그 모습, 곧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아 죄가 아닌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두 가지 사람에 대한 생각 중에서 어느 것이 하나님의 생각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생각하시는 생각과 같은 선택일 때 그 사람이 바로 진주장수가 바꾼 진주이고, 밭에 감춰진 보화이며, 그 생각이 바로 큰 나무가 되는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그물에서 그릇에 담기는 고기와 같은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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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예수님은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사람이 극히 좋은 진주를 발견하면 자신이 가진 모든 진주를 다 팔아서 그것을 사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천국은 천국이 가진 의가 있다면 모든 것을 다 투자하여 천국이 가진 의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면 하나님께서 가지신 모든 것을 다 투자해서 그것을 얻는다는 말씀이다.


이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가지신 사람의 존재 목적이 있는 사람을 얻기 위하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이 이 말씀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분이시라면 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의 가치관 역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런 가치관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아마 그것은 <목적론>이 될 것이다. 즉 목적하는 바가 있으면 모든 것은 다 그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고, 수렴한다는 것이다. 목적이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정리가 된다는 것이다. 즉 진주 장사가 전 재산을 구하여 극히 좋은 진주를 얻는 것은 진주를 구하는 것이 진주 장사의 목적이고 자신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좋은 진주를 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정리되고, 또 그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또 극히 좋은 진주를 얻기 위하여 그날까지 살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사람들은 왜 사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때로 주변에서 살아가는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을 본다. 많은 경우 그 목적이 자식이거나 돈이나 명예와 같은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아들의 사법시험 합격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는데, 아들의 속옷까지 늘 다려서 정리해둔다. 또 국회의원이 한번 되겠다고 마음먹으면 재산을 탕진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런 것은 인생이 가져야할 올바른 목적인지는 둘째 치고 목적을 가진 삶이 어떤 모양인지를 설명하는 것에는 부족함이 없다.


성경은 사람들이 목적 없이 사는 것을 <흑암이 혼돈하고>라 말씀하신다. 즉 인생들이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어둡고 혼돈스러운 맹인과 같은 삶이라는 것이다. 컴퓨터를 사용할 줄 모르면 컴맹이듯, 인생이 인생의 목적을 모르면 그게 맹인이고 그게 흑암 중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진주 장사가 진주 장사이기에 좋은 진주를 구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전 재산도 다 투자하듯, 인생은 하나님께서 지은 목적을 알면 그것에 인생을 올인 한다는 것이다.


진주 장사에게는 진주를 구하는 것, 좋은 진주를 구하는 것이 목적이듯,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바로 아는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하나님의 의를 아는 사람은 삶에 있어 하나님의 의가 진주 장사에게 있어 좋은 진주와 같은 것이기에, 그 삶도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투자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곧 하나님의 의가 삶의 목적인 사람들이 모인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인 것이다.


사실 인생은 어떤 목적 아래 서면 삶이 가지런히 정돈되고 분명해진다. 성경에서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하여>, 라는 말씀이나 <먹든지 마시든지>와 같은 말씀들이 그것이다. 이는 먹을 때도 주를 위하여 먹는 것이 되도록 가려 먹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냥 먹고 마실 뿐인데 그 삶이 주를 위한 것이라서 그것이 다 주를 위한 것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즉 그 인생이 주를 위한 삶을 살고 있다면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를 위하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가려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려 하면 그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먹는 순간 마시는 순간 다 그것을 생각하면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신약도 율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의 법을 알면 하나님의 의를 위한 생명은 마시는 것도 먹는 것도 다 주를 위한 것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이란, 또 그 천국에 합당한 사람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목적이 분명하여 좋은 진주를 만나면 그것을 얻기 위해 전 재산을 주고 그것을 구하는 진주 장사와 같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그런 목적을 가진 사람이 속하고 백성이 되는 나라인 것이다. 진주 장사가 진주를 구하듯,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가진 삶을 사는 사람을 구하고, 또 그 목적이 진주 장사에게 있어 좋은 진주처럼 삶의 모든 목적이 하나님의 의, 또한 더 나은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천국을 얻고, 그 백성이 되는 것이다.


또한 좋은 진주를 구하는 진주 장사에게는 좋은 진주가 그의 천국이기에 그의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얻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더 온전한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이라면 자신이 그날까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그것과 바꾸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것 같지만 많은 사람들은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자기가 가진 것에 더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가치가 자신의 것을 다 팔아야 하는 것을 자신의 것을 다 팔지 않고서 하나 더 가지는 것으로 하려면 당연히 그것은 불법이 된다. 어떻게 100만원 가진 사람이 백만원짜리를 사는데 자신이 가진 백만원은 그냥 두고 그것을 얻겠는가? 그렇게 하려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빚이 곧 죄다.)


이러한 죄는 신앙인들에게 많이 볼 수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변화산상의 베드로다. 예수님을 만났다면 예수님이면 족한 것이므로 그가 가진 그때까지의 모든 신앙, 곧 엘리야와 모세도 다 예수님을 얻는 것에 사용해야 하는데, 모세도, 엘리야도 다 함께 얻으려고 한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저의 말을 들으라.>하신 것이 바로 진정한 좋은 진주 구하는 사람의 마음인 것이다.


신앙인, 아니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다. 온전한 하나님의 의가 있는 사람을 또한 하나님께서 좋은 진주 구하는 사람과 같이 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진주를 구하는 사람이 좋은 진주를 만나면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팔아 그것을 사듯, 더 온전한 하나님의 의를 만나면 이때까지의 모든 신앙을 다 그것을 얻는 것에 사용해야 한다. 진주 장수의 재산에 의당 진주가 있지 않겠는가?


바울사도도 이에 관하여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가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했는데, 신앙이라는 것이 더 온전한 의, "정말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발견하면 그 때까지의 모든 신앙을 그것을 얻는 것에 다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더 좋은 것을 발견하면 이때까지 하던 것에 자꾸 새것을 더하려고만 하는데, 그런 것은 천국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구약의 모든 율법이, 또한 성경의 말씀을 율법과 같이 행위로 지켜내는 신앙이 그 모든 행위의 근원인 하나님의 생명, 곧 그런 모든 행위를 표현하는 근본인 하나님의 의를 가진 생명을 발견하면 그것을 다 버리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더 나은 신앙을 발견하고서 이때까지의 관습을 유지하려 하면 결국 롯의 아내와 같이 돌기둥이 되고 아간과 같이 되는 것이다.


천국은 온전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면 그때까지 자신이 귀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그것과 바꾸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온전한 의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진주 장사에게 있어서 좋은 진주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비유의 말씀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라도 더 온전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면 그 때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좋은 신앙과 또 삶의 모든 것을 그것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바로 천국 백성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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