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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14-17 금식과 혼인잔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28. 16:0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금식에 대하여 질문한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혼인잔치를 들어 답을 하신다. 혼인잔치에 신랑이 있는 동안에 금식할 이유가 없다고 하시고, 신랑이 빼앗길 날이 오면 그때 금식하라고 하시고 있다. 어떻게 보면 연결점을 찾기 어려운 답변이 아닌가 싶다. 금식과 혼인잔치 그리고 신랑이라.


결혼이라는 것을 건조하게 표현한다면 그것은 종족의 보존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알고 보면 그것이 결혼의 본질이다. 그런 결혼을 사람들이 기뻐한다는 것은 사람이 또 다시 사람을 낳아서 기르고 가정을 만드는 본능이 문화가 된 것을 기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사자인 신랑과 신부 역시 일생일대의 기쁜 일이고, 또한 모두의 축복을 받는 것은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생명을 얻는 것과 관련된 것을 기뻐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듯 결혼이라는 것이 새로운 생명, 곧 아버지의 씨를 받아서 어머니가 된 여인에게서 그 부모의 본성이 다시 부모와 같이 육신을 가진 생명 존재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에게 아버지의 정체성, 가족이름을 부여하는데, 이것은 곧 아버지의 생명이 아들이라는 육신을 가진 존재로 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 것 역시 바로 이런 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가진 예수님으로 나타났기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듯 혼인잔치의 궁극의 목적은 이제 결혼을 통하여 아버지가 될 신랑의 의를 표현할 아들을 얻게 되는 세계가 열리는 것을 축하하는 것이다. 혼인잔치는 아들, 곧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을 축하하는 것이고 새 생명의 본질과 의를 가진 신랑이 있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있는 것이므로, 더 이상 금식과 같이 어떤 것을 채우기 위하여 자신을 비울 필요가 없는 상태가 혼인잔치 자리이다.


성경에서 혼인잔치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 결혼이라는 것을 통하여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두 결혼을 하려하고 또 하는 것은 결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법을 체휼하게 하시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그런 하나님의 의를 아는 자는 바울 사도와 같이 굳이 결혼할 이유가 없고, 반면에 그런 하나님의 의도 모르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저항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금식이라는 것은 앞에서 포스트한 것과 같이 단순히 굶는 것이 금식이 아니라, 뭔가를 채우기 위하여 자신을 비우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채워야 할 것이 채워져 있다면 금식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이다. 혼인잔치가 는 혼인잔치가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서는 신랑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는 것이다. 즉 신랑이 있는 혼인잔치는 금식할 것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그리고 신앙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이 그 사람의 삶 안에 있다면 그 사람은 금식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금식해야 한다.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놓고 보면 하나의 개체이다. 하지만 그 한 사람 안에는 모든 우주를 넣을 수도 있고, 풍랑 이는 바다 위의 배에 평안히 주무시는 예수님과 믿음 없이 떨고 있는 제자들이 함께 있듯 사람 마음 안에 그런 두 마음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혼인을 통하여 새 생명이 탄생하듯, 그 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탄생하게 되고 그 생명이 삶을 주관하는 전혀 다른 생명,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으로 살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그 사람의 인생과 그 사람의 세계 안에 탄생하신 것이고,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게 된다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혼인 잔치로 비유하신 예수님의 의도인 것이다. 그러니까 혼인잔치에 신랑이 있으면 곧 생명을 얻을 수 있듯, 한 사람 안에 신랑 되신 그리스도가 계신다면 그 사람은 있을 것이 있으므로 금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란 그렇게 그 심령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아들이 그 심령 안에 잉태되고 거듭나서 그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자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혼인 잔치의 신랑과 같은 예수님이 자기 심령 안에 있으면 금식할 것이 없고, 반대로 신랑 되신 예수님이 없으면 삶의 목적, 존재의 목적이 없으므로 금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금식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혼인 잔치의 신랑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의 목적은 없이 율법의 형식만 신랑 없는 요란한 혼인 잔치처럼 금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외식한다는 책망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자기 안에 생명이 되기를 바라면서 사람들의 욕하는 것을 알면서도 모여서 함께 먹고 있는 죄인이라 칭함을 받는 사람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는 이유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금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심령 안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이 있는 사람은 금식할 이유가 없다. 물론 때로는 그 하나님의 목적을 더 깊이 알기 위하여 금식할 수 있다. 그러니까 금식이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왜 금식하는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는 모른 체 바리새인처럼 금식을 하면 좋은 신앙이 될 것 같아서 하는 것이나, 신앙의 이방인처럼 육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필요한 것을 달라고 떼쓰기 위하여 금식하는 것은 하지 않음만 못한 것이다. 그것은 신랑 없는 혼인 잔치 같기 때문이다. 그건 시끄럽기 밖에 더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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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지 않는지에 대하여 물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에 신랑이 있을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여기서 금식에 대하여 알아보기 전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을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을 행위로 지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행위가 아니라 본질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들으면 과연 그래도 되는가 생각하고 또 의문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블로그를 보고 있는 분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보통은 예수님께 병자와 같이 회복이 필요한 사람이 찾아와서 그것을 회복시키시면서 말씀과 의를 품은 기적을 보이시고, 이것에 대하여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이 시비를 걸고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는 구조가 많은데, 여기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리새인과 같이 하지 않느냐며 질문을 하고 있다.


앞에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포스팅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여정을 세례 요한을 통하여 설명한 적이 있다. 우리는 다 애굽의 피라미드가 상징하는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인생을 바라보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출애굽 시절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맞추어 가고 서고 살듯이 광야를 하나님의 말씀을 규범처럼 행위로 지켜내려는 신앙 과정을 거치게 되고, 이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일렬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 자유롭게 살게 되는 신앙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 신앙의 여정에서 두 가지 큰물을 건넌다. 하나는 홍해라는 바다, 곧 세상을 거쳐내고, 다음은 요단강을 건너게 된다. 바다는 늘 말하듯 세상을 의미한다. 특히 홍해를 건널 때는 바닷물이 갈라져서 바다의 밑바닥을 걸어서 건넜다. 그것은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다. 들어갔는데 그 안에 있지 않고 나왔다는 것은, 그곳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피라미드로 대변되는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가득한 바다 같은 세상에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물세례를 의미한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은 광야의 삶과 같이 어떤 소리(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맞추어 행동 하듯, 하나님의 말씀이 음식 먹는 것, 가고 쉬는 것에 이르기 까지 다 신호와 같이 명확한 행동 규범으로 지키면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또 하나의 세례 곧 성령 세례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행위로 지키는 것에 대한 반항이나 반대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그렇게 살도록 지어지지 않았다는 것과 여기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런 삶을 사는 것을 위하여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살게 하시려 한 것과 같이.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의문을 가진다는 것이다. 자신은 다르다며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고 그것을 증명해 보이려 할지 모르지만 거의 예외 없이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도 홍해 앞에서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의심한 것과, 세례 요한도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물어보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은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의 신앙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그렇듯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야말로 생수가 자기 안에서 넘치듯 성경 말씀에 대한 의문이 없고, 생명이 심령 안에 있어 의지로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지 않아도 생명의 본성이 삶을 주관하므로 성경 말씀이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까지는 많은 의문과 불신의 여정을 거치게 된다. 이것은 지나서 보면 누구나 그렇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 이것을 안다고 그런 과정을 건너 뛰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모세가 홍해 앞에 섰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죽을 땅이 없어서 여기까지 와서 죽어야 하느냐고 의심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3)

이라 말씀하셨다. 신앙이 얼마나 수동적이고 순종적이어야 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하나,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았다.


지금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바리새인과 같이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 역시 의심이고 반문이다. 이것을 요즈음의 말로 바꾼다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성경의 모든 말씀을 자연스럽게 지키면서 살 수 있겠느냐?

라고 반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그것과 같은지는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에 대하여 답변하시면서 혼인잔치에 신랑이 있으면 금식할 이유가 없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는 것은 신랑이 없는 것이 금식의 상태라는 것이고, 하나님께 금식을 하는 이유도 신랑을 달라고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이는 신랑이 혼인의 목적이고, 혼인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다 신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그 심령 안에 혼인잔치의 신랑과 같이 예수님의 생명이 있으면 굶을 이유가 없는 상태이고, 또한 배부른 상태라는 의미이다.


이런 모든 말씀은 다 한결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형상이 없으시기에 하나님 스스로를 표현하셔서 그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시는 목적과 의를 달성하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성품을 표현하기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목적이다.


그 하나님의 목적이 온전하게 이루어진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은 기적을 일으켜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은 2,000년 전에 유대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우리 같은 삶을 사는 한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있고, 그 삶이 그 목적, 그 생명을 표현하는 삶을 사셨기에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는 어느 시대, 어떤 나라나 문화에 살더라도 예수님과 같이 인간이라는 육신을 가진 인생이라면 누구라도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는 본성으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과,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그 존재가 육신을 가진 인생이라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듯 삶을 주관하는 의와 본성으로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삶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또 금식하듯 애쓰지 않아도, 또 세상에서 성공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감화가 있어 보는 이들도 그렇게 살고 싶어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말씀만 온전히 깨달으면 성경의 말씀을 다 행하며 살 수 있느냐?>라는 의문이나,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는 그런 형식을 지키지 않고, 그런 종교적 노력을 하지 않느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 자신의 삶이 그 생명으로 주관되고 있다는 경험이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그런 의문이 있다면 바다는 절대 잔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삶이 평안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이 없듯 신랑이 없는 것이므로 금식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심령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들은 것이 있다면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은 사람이 사람이라는 삶을 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고, 그런 삶을 사는 자리까지 가서 그 삶을 누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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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 자신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에게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하여 가서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 뜻을 배우라고 말씀을 하셨다. 이는 호세아에 나오는 말씀으로 원문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이 말씀에 대하여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경건하고, 행실로 본다면 세리나 창녀 그리고 죄인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도덕적이고 경건한 삶을 신앙으로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다. 지금 시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했다고 모든 것이 엉망인 사람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 그들에게 성경을 인용해서 성경을 다시 배워오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빈민촌에 사는 사람이 억만장자에게 경제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건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성경의 조문은 알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목적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보고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인데 그것보다 긍휼(인애)을 원한다고 하신 것이다. 제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위한 것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을 바꾸어낸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 그 자체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 하는 세리와 죄인은 하나님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 죄인이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제사를 드리는 가치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이 있는데 그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고, 죄를 시인한다는 것은 그런 가치관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제사를 드리는 가치관, 세리와 죄인들을 죄인이라 규정하는 가치관은 율법을 행위로 지켜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이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 그 자체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므로 사람의 행위를 규제하고 더 나아가서 본능조차 억제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제사의 규례가 정결하게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결함 역시 율법과 마찬가지로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정결함이라는 의가 있다. 그리고 그 정결함이라는 것이 바로 인애라는 것이다. 즉 제사가 본질이 아니라, 제사를 통하여 보이고자 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책을 읽는 것으로 보면 문자가 아니라 행간을 읽어야 하듯이 제사라는 것도 행간과 같이 주신 목적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긍휼과 인애라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긍휼함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할 때 예수님께서 지금 보여주고 계시는 것과 같이 죄인들과 함께 먹는 것이다. 이 죄인들은 사람들이 죄인이라 여기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자리에 온 사람들이다. 즉 세상의 가치기준, 바리새인의 가치기준으로 볼 때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고 공론화되는 것을 감추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것은 범죄하고 숨은 아담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긍휼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신앙을 지키려고 사람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지금도 어떤 교회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사람을 못살게 굴고 버리기도 하는데, 그건 이단 중에 이단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을 보자. 이건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보내신 그 예수님을 지금 죽이려고 한다. 아직 예수님 외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알게 하려 하시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상황인데,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므로 그때 예수님은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베드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칼을 뽑아서 항거했다. 그리고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있노라니 도무지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도 모르겠고, 또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그런 상황이 오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 교회도 그렇게 노력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위하여 죽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살리려고 사람을 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애와 긍휼을 모르는 것이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서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있는가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 많다. 교회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교인들을 비난하고, 사회적 요구에 불응하며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핍박이라면 저항한다.


그것은 마태의 집에 온 죄인들과 반대되는 모습이다. 즉 사회가 자신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의 교회를, 또 예수님을 사회적 기준으로 판단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며 항거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시의 사회와 유대인들의 법에 의하여 죽으신 것을 잊은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태의 집에 죄인과 함께한 예수님을 비난한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바리새인이 달리 바리새인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 지금이라고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교묘한 모습으로 믿는 사람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이 가진 기준으로 심판 받는 것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심판 앞에서 자신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육신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죄인이 되는 것에서 시작한다. 


마태의 집에 모인 죄인들은 그렇게 모이면 죄인이라 흉보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그날이 아니어도 늘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인데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죄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무릅쓰고 지금 모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기준 앞에, 바리새인들의 기준과 법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시인하고 무릅쓰고서 모인 자들이다.


그런 그들을 제사를 긍휼함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 보다 번제를 그리고 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중요한 이들이 볼 때 어처구니없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일침을 놓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대립은 예수님이 죽으실 때까지 계속된 것이고, 지금도 늘 우리 곁에 있는 대립과 갈등이다.


반대로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제사의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받아 들여서 그 삶이 하나님의 의와 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음을 무릅쓰고 모인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제사의 의미가 완성되고, 바리새인들이 목숨 걸고 지키는 율법이 완성된 온전한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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