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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장은 흔히 비유장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한 장 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어려울 것 같지만 오히려 더 쉬울 수 있다. 적어도 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는 외식하는 자와 같은 가치관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이 말씀이 비유라고 하시고 또 그것을 풀어주셨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비유장을 보면서 이 비유장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누가 봐도 비유인 말씀을 하신 것만을 비유로 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 13:34-35)


즉 모든 예수님의 말씀이 그 말씀을 액면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의도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볼 줄 아는 가치관과 안목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온전한 십일조를 내라고 했다고 자신의 한 달 간의 수익을 앉아서 계산하고 있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시는지를 아는 안목이 먼저라는 것이다.(그렇다고 십일조를 하는 이유를 또 액면 그대로 보물을 쌓을 곳이 없게 하겠다는 것이 재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 어리석은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에 처음 나오는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이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밭에, 더러는 가시떨기에, 그리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진다는 비유이다. 그렇게 되면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예수님의 설명에 있어 핵심은 있는 자는 받아서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가진 것도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천국의 비밀에 대하여.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의 목적과 본질을 아는 자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천국의 비밀조차 다 빼앗길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풀어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씨 뿌리는 비유가, 비유의 내용 안에 있는 길가에 떨어진 씨나 돌밭에 떨어진 씨가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그렇게 보면 또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는 것이 되는 것이다. 물론 떨어진 각각의 씨의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씨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정말로 핵심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씨>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다른 것을 뿌리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도 사람이고, 예수님도 사람과 같은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사람에 대한 것 외에 다른 이야기를 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렇게 사람의 본질에 대하여, 사람이 존재 목적과,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만드신 목적과 정체성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씨의 정체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것이 비유이든 아니든 다 사람에 관한 하나님의 의와 뜻인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그 말씀이 육신이 된 본체이신 것이다. 그것이 또 창세부터 감추인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는 비유장에 나오는 것과 같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과 같은 예수님의 화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 전체가 바로 비유라는 것이다. 비로 이것을 알면 어떤 말씀이든지 들으면 들을수록 더 풍성해지고, 그 안목이 없으면 그나마 가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도 다 빼앗기듯 없어질 것이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 대하여 설명하시는 내용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신 것을 안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모든 삶과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바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비밀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과 삶 전체가 천국의 비밀에 대한 비유였다는 것이다.


비유라는 것이 직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솝우화처럼 그냥 동화 같은 이야기인데 그 안에 의미하는 바가 있는 것도 비유다. 누가 홍길동전을 읽고 반정부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유가 표현된 표현과 비유로 전하고자 하는 본질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차이인 것이다. 그것을 구분하는 안목이 없으면 홍길동전을 읽고서 알고 있는 내용마저 다 헛것이 되지만, 홍길동전이든 표현된 것 이면에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안목이 있으면 더 풍성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어떤 말씀은 정말로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행동으로 지켜내려 하고, 어떤 것은 의미만 새기려 한다. 십일조는 1원짜리 하나 틀리지 않으려 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의미만 새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을 지키는 것을 다르게 구분하는 기준은 모호하다. 정해진 것이 없다. 시대 반영과 같은 엉뚱한 설교를 듣기도 했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구분의 기준은 없다. 다만 자기의 생각과 자신의 이익 그 뿐이다. 십일조 하는 것은 재물적인 축복을 기대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것은 손해를 보는 것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그렇게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기 안에 선과 악을 구분하듯 스스로 기준을 만들어 내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은 분명한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다 예수님의 삶이 의미하는 본질을 몰라서 그렇다. 그러니까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과 말씀이 의미하는 것을 온전히 안다면 성경 구절에 따라 다른 기준을 제시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언제나 일관된 것이기 때문이다. 안다면 모든 것을 아는 것이고, 어느 하나 모른다면 다 모르는 것이다. 고양이가 바다에 빠졌다고 고래가 되겠는가? 생명의 말씀을 안다면, 어느 구절, 어떤 말씀도 그 의미하는 바를 다 아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다르다고? 그런 말을 하는 목사는 정말로 성경을 모르는 것이다. 어디 영원하신 말씀을 가지고 그런 망발을.


예수님의 모든 삶과 말씀은 그 표현된 것이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라는 본질이 내용으로 있기에 다 비유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삶과 말씀은 어떤 것이 표현된 것이고 그 어떤 것, 곧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씨다. 또 비유다. 씨는 작지만 큰 나무의 모든 생명이 들어있고, 비유는 씨 안에 생명이 들어있듯 그 표현된 것 안에 본질이 들어 있어 비유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만 말씀하신다고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삶과 말씀으로 표현하신 본질적인 내용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인데, 히브리말로 <메시아>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문제, 스스로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하여 빚진 죄의 상태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말씀하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이신 모든 것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삶과 말씀의 본질이고, 그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며, 사람에게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모든 사람에게 회복되어야 할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대로 그 성품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고 삶의 의미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모든 삶과 말씀의 본질이고 내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본질을 아는 사람이 바로 더 풍성해질 수 있는 가진 자의 가진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보이고자 하신 것이 그것을 보고 듣는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뜻하신 목적이 이루어진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으로 회복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씨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풍성해지기에 가진 자는 더 풍성해진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 반대로 예수님의 말씀이 비유와 같이 그 표현 안에 들어 있는 진정한 본질을 알지 못하면 그나마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것 마저 다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목수의 아들이 죄인과 놀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형식만 보고서 예수님을 죽였다. 즉 비유의 표현만 보고 무엇을 이야기하시는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혈통적인 자부심과 재산을 끝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본질을 깨달은 이들에게 다 빼앗긴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대인이 예수님을 못 박은 그 유대인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본질은 잊고, 그 표현 자체에 매몰되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처럼 형식만 보고 신앙생활 하는 이들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들이 아는 하나님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절대적 지위를 상실하듯 그 마저 다 잃어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대화나 수사법에 대한 묘미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또 유대인들을 비꼬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님은 삶 자체가 비유다. 예수님의 삶과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자는 더 풍성하게 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는 그나마 가진 신앙마저 아무 소용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이고.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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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찾아온 모친과 동생들에게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하시고는 제자들을 보고서 "나의 모친과 동생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사실 알고 보면 무리한 말씀이 아닌데, 어떻게 이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신앙적 마찰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로 내세우기도 하여 무리한 말씀이 되기도 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고 하시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다투게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두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면서 아무렇게나 사용하다 보니 오히려 가끔은 예수님이 이상한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다 성경을 문자대로 보는 외식하는 것과 같은 신앙적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것을 볼 때 참 안타깝다. 신문에 날 정도의 물의를 일으키는 것도 문제지만, 우리의 이웃이라 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의 사회 속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문제들은 의외로 많다. 교회 다닌다고 매일 밤늦게 들어오는 딸과 가족이 가진 갈등, 교회에 가야하기 때문에 일요일에 회사를 무조건 나오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과 같은 일들이 그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그런 모든 행동들은 다 십자가를 팽개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고 하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성경에 말씀하는 것을 보고서 교회에 다니는 일로 가족에게 또한 옆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고서 나타나는 반응을 핍박이라 여기고, 그런 불편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두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다고 설교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이 가진 가치관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교회에 가고 싶어 하는 나의 삶을 마음대로 주관하는 것에 끌려갈 때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그런 요구가 핍박이지, 신앙을 가진 사람이 먼저 능동적으로 문제의 주인공이 되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반응을 핍박이라 여기면 안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즉 어떤 능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일으킨 문제는 신앙적 가치가 거의 없다. 그건 그냥 벌이고 반응이며, 이미 값을 다 치른 것일 뿐이다. 능동적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 한번쯤은 이미 자신이 주권을 가진 존재로서 살았다는 것이기에 그 값을 다 받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신앙은 수동적인 것이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이고, 믿음도 수동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되었을 때 믿음이지 의지를 가진 능동적인 믿음은 신념일 수는 있어도 믿음은 아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찾아 온 모친과 동생들의 목적은 <예수님께 말을 하려고> 왔다고 했다. 말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뭔가 능동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혈육으로 어떤 관계이든 간에 주관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은 예수님과 형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사람으로 나서겠다면 모친도 형제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친이요 형제라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피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생물학적인 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찬을 생각해보면 쉬운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피는 그 생명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피는 생명이기에 피가 같다는 것은 생명의 본성이, 요즘 말로 하면 DNA가 같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 바로 예수님과 생명이 같고, 본성이 같고, 생명의 정체성이 같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를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들어라 이스라엘>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그 정체성이 같은 사람은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과 같은 피를 가진 혈육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혈육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짚고 갈 것은 예수님께서 모친 마리아를 외면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마리아를 보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셨는데, 그것은 '여자인 당신이 하나님이 보실 때 아들을 낳은 사람입니다.'라고 하신 뜻이 들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 여자로서 마리아의 삶의 목적이 온전했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이다.


이야기가 잠깐 다른 데로 갈 수 있지만 그래도 연관이 있어 언급한다면, 신앙의 가치관이 다른 가족과의 관계는 어렵다.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이기 때문에 잘 물리지 않고 더 첨예하게 맞서기도 한다. 신앙은 영적인 문제고 삶의 본질과 사후세계까지 연결된 문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인간 그 너머 신의 영역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신앙에 대한 다툼에 있어서 신앙인들은 그 뜻을 잘 굽히지 않고, 그런 이유가 가족이라고 예외를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생각의 전환, 아니 예수님을 통하여 정확한 안목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자신들만의 생각을 가진 유대인들과의 마찰에 있어 그것을 제압하거나, 그들의 핍박을 하나님께 고자질 하듯 하여 그들을 벌주거나 생채기를 내는 법으로 이기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누구보다 온전한 하나님의 의와 뜻을 알고 계시고, 자신에게 도전하는 어떤 존재라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이들의 손에 끌려가서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신앙인들이 신앙적인 마찰에 있어 보여주는 태도와는 전혀 다른, 아니 아주 반대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하나님을 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신앙적인 문제와 갈등에 있어 이기는 자가 되려하고, 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한참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를 지신 것은 능력이 있음에도 참고, 마음을 억눌러서 견뎌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군사를 이기거나 십자가에서 기적적으로 내려오시지 않은 것은 그런 능력을 참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정체성이 가진 본성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과 다르게 신앙적인 갈등에 대처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본성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의 형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적 갈등에 있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한이 있어도 싸워 이기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십자가에 예수님을 자신들의 뜻대로 못 박아서 이긴 것 같은데, 알고 보니 예수님께서 이기시는 그런 법인 것이다. 즉, 사람이 신앙적 갈등에 있어 정말로 예수님과 형제가 되는 같은 혈통과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 본성으로 인하여 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지는 그 생명이 하나님이 보실 때 온전히 살아있는 생명이기에 죽음에서 또한 패배에서 살리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신앙과 믿음은 그렇게 정말로 수동적인 세계이다. 들어라 이스라엘이라는 것도 그렇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듣는 것이 아니라 말하려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혈통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심도 그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것이 설사 하나님에 대한 것이고, 또 신앙에 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주장하듯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자 하는 이에게 선포되는 것이다. 들으려 하지 않는데 말을 하면 그것은 시비일 뿐이다. 아니 시비 이상으로 그것은 자신이 가진 의를 주장하고 그것으로 인정받고 의로워 지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잠 27:14)


신앙과 믿음은 정말로 듣는 것이고, 수동적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형제가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의 본성을 가진 혈육이 누구인가 할 때, 그것은 듣는 이요, 순종하는 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형제요 모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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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이 요나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귀신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내용은 귀신이 사람에게 나갔다가 물 없는 곳을 찾지 못해서 다시 돌아와서 보니 원래 있던 사람의 속이 깨끗하게 소제되어 있어 자신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한 세대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재밌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우선은 귀신이 사람에게 나가서 찾은 것이 물이 없는 메마른 땅을 찾았다는 것이다. 어떤 생물이라도 나그네와 같이 되었고 방황할 때에 가장 먼저 찾아야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인데, 역시 신분이 귀신이라 그런지 물이 없는 곳을 찾으러 다녔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큰 의문은 아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늘 자신을 채우려 한다. 어떤 사람은 돈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를 추구한다. 하지만 모든 인생이 추구하는 것이 있다면 자신의 삶에 대한 존재의 이유와 의미다. 그러니까 삶의 목적과 정체성에 대한 갈증이 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잊거나 일부러 잊으려 하면서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돈이나 명예와 같은 것으로 그것을 채우려 한다. 즉 사람의 존재 목적이 돈이나 명예에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추구 욕구와 물은 관련이 있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듯, 사람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그 갈증에 대하여 채우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이 가진 그 갈증을 해갈하는 것이라고 성경을 통하여 늘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물은 사람의 정체성을 해갈하는 것이다. 다만 물은 상수와 하수도와 같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먹어야 하는 것이 있고, 반면에 먹지 못할 것이 있다. 바다는 물이 넘쳐나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그래서 바다는 늘 세상을 의미한다. 물이라는 것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사람이 가진 정체성의 갈증을 채울 수 있어 보이지만, 세상의 돈과 명예는 마치 바닷물을 마신 것과 같이 해갈되는 것은커녕 더 목마르고 결국은 죽게 만드는 것이다. 또 바다는 세상의 모든 하수들이 함께 모인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다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물이 넘쳐나는 세상에 비유된다.


어쨌든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즉 귀신은 그것이 없는 곳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한 세대 또한 그런 것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악한 세대가 찾는 표적을 보여주어서 금방은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만, 결국은 물을 멀리하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을 꺼리는 귀신같은 마음이 그 안에 가득찰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귀신은 devil이 아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귀신은 unclean sprit이라고 킹제임스 버전에 나온다. 깨끗하다는 것은 상태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깨끗한 행주라고 하는 것이 사용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주로서의 목적에 사용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여기서 말씀하시는 귀신 들린 자는 사람의 존재 목적이 정신을 주관하는 사람이 아니라, 귀신에게 정신을 빼앗기듯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보고 악한 세대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사람과 하나님을 정의 내리는 세대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연약한 육신을 만드시고 그 상태를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너무 좋은 존재라고 여겼지만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이 육신의 연약함이 아니라 표적을 일으키듯 육신의 연약함은 감추고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악하다고 하신 것이다.


바로 그런 상태가 깨끗하지 못한 심령, 곧 귀신 들린 자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외식하는 것과 귀신 들린 것과 깨끗하지 못한 것과, 사람 이상의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며 그것을 구하는 악한 세대나 다 같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오늘날로 본다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의 연약함을 잘 다스리고 감출 수 있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시는 생각도 같은 것이다.


그렇게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는 것이나, 귀신이 물 없는 곳을 찾는 것은 같은 본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물은 사람에게 육신을 가진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이 바로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말씀이 사람이 가진 정체성을 해갈하는 물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귀신은 그런 물을 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물은 악한 세대가 구하는 표적과는 반대의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면 이 귀신 들렸던 사람과 같이 점점 더 심해질 뿐이다. 이는 마치 바닷물을 마신 것과 같아서 더 갈하여지고 더 목말라서 마시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더 악화되듯 한다는 것을 일곱 귀신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악한 세대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서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것을 두고 성령의 일로 보지 않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일로 보았던 가치관을 가진 세대가 아닌가? 그 세대가 바라는 것은 사람이 가진 연약함을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가 부끄러워 몸을 가렸던 아담과 같이 감추고 그것을 이기고 극복한 표적을 구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세대인 것이다.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성령을 훼방하는 세대이고, 그런 세대는 우선 기적을 본다 해도 바닷물을 마신 것과 같이 더 그런 것만 요구할 뿐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것 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을 회복시키는 역사로 인한 성령의 감동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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