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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23-28 바다를 잔잔케 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22. 22:50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흔히 세상을 바다에 비유한다. 그리고 인생을 항해한다고 말을 한다. 성경도 세상을 바다에 비유한다. 성경이 말하는 바다는 늘 세상이다. 땅에서 온갖 물들이 모여들어서 모든 것이 혼합되어서 바다이기도 하고, 또 넘치는 물이지만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바다는, 세상의 모든 것이 모여서 큰물이 모였지만, 정작 사람이 인생의 정체성과 의미와 삶의 목적에 대한 갈증은 그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또한 인생을 그리고 세상을 바다와 같다고 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시는데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 위험하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그러니까 세상은 요란한데 예수님은 평안하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정말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아무리 요란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사람은 평안하다는 말씀이시다. 바다를 꾸짖으셨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주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다를 꾸짖어 풍랑을 잠잠케 한 예수님의 기사를 보고 예수님께서 바다를 다스리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주목할지 모르지만, 이 말씀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어떤 풍파에서도 평안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평안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 이유의 상당 부분이 상실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 역시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세상이 바다의 풍랑과 같이 험악하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은 결국 자기 마음 안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람 눈에 세상이 어떻게 보이든 이 세상은 분명히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것이다. 그런 세상을 보고 정상이니 아니니 하는 것은 하나님을 나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처럼 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 위에 서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세상을 탓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 대하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한다는 것은 결국은 그 사람을 만든 하나님을 나무라는 것이다. 그것이 설사 신앙에 대한 교훈을 주는 것이라고 해도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예수님은 나무라고 책망하고 심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고 책망하여 돌이키는 본을 십자가에서 보이신 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화를 내는 모든 일의 이유를 하나로 정리하면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서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두 사람이 약속을 했는데 한 사람은 시간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 사람은 시간관념이 좀 모자라는 사람이라면 보통 시간관념이 부족한 사람이 시간 약속을 어긴다. 그러면 시간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화가 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시간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시간관념이 부족한 사람은 상대가 화를 내는 것이 또 못 마땅하다. 사람이 살다보면 늦을 수 있는 거지 그것까지고 뭐 그러냐? 는 식이다. 그것 역시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이다. 그러나 시간관념이 철저한 사람이 어쩌다 시간에 늦으면 정말로 진심어린 사과를 한다. 적어도 변명이라도 한다. 그것은 자신도 시간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내 생각을 제외한 모든 상황은 다 세상의 풍파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괴롭히는 모든 것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어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뜻대로 된다면 그것은 절대로 세상의 풍파가 아니라 은혜고 행운이고 축복이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과 다르게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망망대해 같은 세상에 떠 있는 조각배 같은 나의 인생에게는 다 풍파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배 안에서 평안히 주무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의 어떤 풍파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 그것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능력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문자로 성경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의 생각이 어떠해도 그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알려고 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 성품과 의와 뜻으로 세상을 펼치고 창조하시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모든 것을 다 말씀하셨는데 다시 하나님의 뜻을 알려달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부족한 신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뜻은 나의 생각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고, 그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다면,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의 말까지도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쁜 것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냐?' 할 수 있는 오해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창조의 목적, 그리고 사람에게 두신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두신 통치의 일환이라고 봐야지 나를 괴롭게 하는 그 단편을 분리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것도 만드셨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과 자신이 생각할 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고 생각하다 보니 그 모든 것이 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고, 세상이 잘못된 것이고, 그 모든 것을 세상의 풍파로 여기는 것이지, 하나님은 실수나 오류나 악함이 있으신 분이 아니다.


마귀에 대한 생각이 대표적이다. 하나님이 마귀와 싸운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속된 말로 마귀와 싸울 군번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마귀 아니라 그 어떤 것이라도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모든 것,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에 사용되는 것을 위하여 예비 되고 사용되는 것이라는 관점을 가져야지, 하나님이 이 세상과 싸우고, 마귀와 싸우고 하는 그런 계급 낮은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이 옳다고 동의하는 것과는 다르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고,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의 경륜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다.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살리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죽임당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세상이 요구하는 그 어떤 것도 다 순종할 수 있는 분이셨다.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고 입증하기 위하여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가져가려 하는데 그것을 내어주는 사람보다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순종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예수님은 그런 분이시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신 예수님은 세상의 풍파가 잠자는 것을 깨울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을 바꾸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자신이 만든 세상도 경영 못하는 신으로 규정하는 것이며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정말로 성난 바다와 같은 곳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희망처럼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다. 만약 그들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들이 세상을 바꾸려는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서 내려오거나, 천군천사들이 로마를 무찔렀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난 바다에서도 주무실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풍파를 이길 힘은 자기 안에 있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내 생각과 다른 것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은 평안하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삶이다. 즉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세상이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고, 그런 믿음이 있으면 풍랑 이는 바다 같은 세상에서 평안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배는 거친 풍파 속에 살아가는 사람 자신이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도 있고, 또 한편에는 제자들처럼 세상이 자신의 생각처럼 되지 않아 무서워 떠는 마음이 사람 안에 늘 함께 있다. 그것이 신앙을 가진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세상을 볼 때는 평안하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없을 때는 불안하다. 그때는 예수님을 깨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을 다스릴 수 있고, 세상의 풍파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법으로.


사람들은 사람이 이 세상에 순종하고, 또한 이 바다 같은 세상에서 평안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다를 잔잔하게 했을 때 기이하게 여겼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예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그 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평안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긴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자기가 해 보지 않은 것은 언제나 생소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면, 세상을 이기고, 풍랑 이는 바다 같은 세상을 살지만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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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많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와서 에워쌀 지경이 되자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실 정도가 되었을 때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과 대화하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한명은 서기관이고 또 한명은 제자. 예전에는 이렇듯 누가 예수님께 묻는지는 주목하지 않고, 거저 예수님의 대답만 가지고 누구에게는 따라 오라하고, 누구에게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는지 몰라 의문스럽기만 했다.


지금 예수님께 한 서기관이 나와서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말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

이라고 말씀하셨다. 뒤에 상세한 설명은 없지만 문맥으로 볼 때 '오지마라'는 말씀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라 오겠다는데 왜 따라오지 말라고 하셨으며, 거처가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머리'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일까?


먼저는 이 질문을 한 사람이 서기관이라는 것이다. 서기관이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늘 외식하는 자의 대명사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말에 부정적인 대답을 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외식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나서겠다고 머무를 곳이 없다고 답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형식에 관하여 답변을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신분이 서기관이라는 것 그것 하나로 이 사람을 판단하셨는가 싶지만 그것은 아니다. 이 서기관이 예수님을 부를 때 "선생님이여"라고 불렀다. 호칭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상의 정체성이다. 뒤에 나오는 제자는 "주여"라고 예수님을 부른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정말로 예수님을 따라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이시는 것, 예수님의 생명의 본질보다는 그 표현된 형식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서기관에게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대답하시는 것이다. 머리 둘 곳이라는 것은, 머리는 몸이 있어야 한다. 즉 머리의 생각이 표현될 몸이 바로 머리 둘 곳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풍을 고치신 예수님의 이적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몸은 머리의 생각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인데, 그것이 잘 되지 않으면 중풍이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고치시는 분,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인생으로 표현되기 하시는 본을 보이시는 분이심을 보이셨다.


그런 예수님께서 인자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은, 서기관의 마음, 서기관의 안목과 같은 삶에는 예수님의 생각이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그 날의 서기관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도 신앙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생명이 그 중심에 있어서 그것이 육신을 가진 삶으로 표현되는 사람이 아닌 사람은 아무리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죽겠노라 외쳐도, 그곳에는 예수님께서는 머리를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그런 신앙에는 머리의 생각과 같은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예수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각오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능동적이고 필사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연의 순리와 같이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그 심령 안에 있으면 DNA가 그 생명을 표현하듯 자연스러운 것이다. 머리의 생각이 몸으로 표현되는 것과 같이.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가룟유다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한 번도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 적이 없다. 그러니까 가룟유다에게 예수님은 선생이기는 했지만 주님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을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몸의 머리 같이, 생명의 유전자와 같이 나의 삶을 주관하는 것임을 인정할 때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가룟유다에게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서기관도.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오겠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2)

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은 오히려 부정적인 답을 하고, 다른 일도 아니고 자신의 아버지가 죽어서 장사 지내고 나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은 또 아버지의 장례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시는 의아한 말씀을 하신다.


특히나 이것이 우리에게 의문스러운 것은 부친의 장례 치르는 것 보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반인들에게 아주 걸리는 말씀일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는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는 육신이 죽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자를 말한다.


물론 제자의 아버지는 죽었을 것이다. 다만 죽은 자들로 하여금 그 장례를 치르게 두라고 하신 것은 그 장례를 지를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는 죽은 자가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제자는 죽은 자가 아니므로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따르라는 것이다.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생명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아니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그렇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보고 그것을 깨달으라는 말씀이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를 장사지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죽고 다시 나라는 말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은 죽고, 예수님을 따르는 생명이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듯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장사지내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제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오해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교회에 가는 것과 같은 것을 좋은 신앙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좋은 신앙이 아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사회나 또한 자신이 속한 환경이 어떤 것을 요구해도 그것에 맞추어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지, 안 되는 것이 있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을 때도 그냥 끌려 가셨는데,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이 누구 길래, 이보다 더한 일이 있단 말인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세상이나 삶이 요구하는 것을 뿌리치거나 거부하면서 예수를 믿으려 하는 이유는 결국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신앙은 자신이 지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지킬 수 없을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요구하는 것을 이기는 것을 신앙이라 생각하지만, 그건 아니다. 내가 세상의 것을 좇아가려는 내 마음을 이기는 것이 신앙이다. 세상이 나를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할 때 '사탄아 물러가라!'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잡혀가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오겠다는 제자에게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우리 마음에 죽어야할 것, 곧 내 마음에 옳다고 생각하는 의를 가지고 있어 하나님이 보시기에 죽은 생명 같은 것은 죽은 자를 장사지내듯 장사지내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오라는 말씀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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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전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기 전에 마지막 말씀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성경의 문맥을 가지고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전혀 무관한 사항은 아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시고자 한 하나님의 의가 결국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씀을 전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신 다음에 먼저 문둥병을, 그리고 중풍병자를 고치셨다. 이 두 병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인생의 회복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야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여 삶이 일그러진 인생을 표현한 문둥병과 또 하나님의 의가 삶을 지배하지 못하는 중풍을 고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중풍과 문둥병을 고치신 것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여 주신 것은 병을 고치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병든 것을 고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육신의 병을 고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 바로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가 병든 것을 고치셨다. 병명은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그냥 열병이라고 나온다. 사람이 아파서 열이 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몸이 어떤 병에 저항하는 경우에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몸 스스로가 열을 올려서 병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이 났다는 것은 어떤 것을 그 안에서 없애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장모라는 것은 아내의 어머니다. 즉 딸을 낳은 여인이라는 것이다. 물론 베드로의 장모가 또 다른 자녀로 아들을 두었을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베드로에게는 여자를 낳은 여인이다. 그것이 바로 열병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여자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 이건 육신의 여자와 아들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은 여자이고 예수님의 신부라는 것에 관한 말씀이다. 즉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와 무관하게 인간이라면 다 하나님 앞에서 여자라는 것이다.


이는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여 여자가 남자의 성을 따르는 아이를 낳는 것에 비유된 것이다. 즉 남편의 생명을 낳는 것이다. 즉 남편의 유전자를 말씀이 육신이 되듯 육신으로 낳아야 하는 존재가 바로 아내이고, 여기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것은 남편의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 생명을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다시 그 생명을 낳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 곧 아들과 같은 생명을 낳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이 여자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역할인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장모는 딸을 낳은 여인이다. 그리고 그녀가 열병이 들었다는 것은 그것을 이제 벗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낳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 형식과 같은 여자를 낳는 자리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열병이 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비약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의 신앙 여정이 사실 이와 같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어떤 형식을 더 잘 지키면 신앙이 나아질까 고민하느라 열나고, 교회는 어떤 형식의 행사를 추진해야 더 나은 결과를 낳을까 열병처럼 고민하는 것이다. 신앙의 형식이나 행사와 같은 것은 다 형식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다 여자를 낳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런 신앙을 벗어 버리려 하면 이만저만 열병을 앓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건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은 신앙의 규례와 형식을 좇고, 교회는 더 새로운 행사를 기획하려 하면 얼마나 힘 드는지 모른다. 그러다 그런 것들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다른 것을 찾으려 하면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 열병을 앓는 것과 같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다 간증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듯 딸을 낳은 신앙을 벗어버리려 열병이 난 베드로의 장모, 그러니까 이제 사위가 예수님을 만났듯 자신도 열병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앙의 본질을 회복해야 할 자리에 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그녀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더 이상 딸이 아닌 아들, 곧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이 자기 안에 잉태되기를 원하는 신앙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손을 만지시니 낫더라는 것이다.


이에 그 여인, 곧 베드로의 장모는 바로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병이 결국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위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여 열병이 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늘 딸과 여자와 같은 형식만 추구하고 그런 것만 생각하다, 그것을 떠나 온전한 신앙을 회복하고 싶어 열병이 난 사람이 온전한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듯 병자들이 회복되는 것은 다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고,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관계를 회복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병을 고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은 그런 기적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든 기적을 뒤로 하고 자신을 구하는 기적은 보여주지 않으신 체 십자가게 달려 돌아가셨다. 그것은 기적을 행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원래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이신 기적의 목적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한 번의 제사로 회복하는 십자가에서는 그런 기적들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낮에 태양이 뜨면 모든 전구를 다 소등하듯이.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사와 기적은 바로 이런 것이다. 문둥병에 걸린 것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못하여 자신의 형상이 일그러지고 있는 상태의 모든 인간, 그리고 중풍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주관하지 못하는 삶, 그리고 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그 안에 낳지 못하여 괴로운 삶, 이런 모든 것이 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회복하게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병든 자들을 고치심으로 보이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이라는 것도 더불어서.


(알립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치유에 관해서는 본 블로그 카테고리 <치유>를 참조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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